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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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1924년 10월 27일 소비에트 중앙아시아의 민족 경계 재조정으로 설립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다. 1925년 소련의 구성 공화국이 되었으며, 1991년 독립 선언 전까지 소련의 일부로 존재했다. 수도는 사마르칸트에서 타슈켄트로 이전되었고, 1936년 카라칼파크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편입하여 영토를 확장했다. 공산당 일당제 하에, 우즈베키스탄 공산당이 집권했으며, 독립 이전까지 이슬람 카리모프가 공산당 제1서기를 역임했다. 경제적으로는 산업, 에너지, 광물 자원, 면화 재배 등을 통해 발전했으며, 행정 구역은 여러 차례 변경을 거쳐 최종적으로 12개의 주로 구성되었다. 1983년 인구는 약 1,704만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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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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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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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
현지 명칭 | |
다른 표기 | 1924–1936: 우즈베크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 "" |
일반 명칭 | 우즈베키스탄 |
지위 |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
국가 표어 | (우즈베크어) |
국가 표어 (로마자 표기) | (로마자 표기) |
국가 표어 (번역) |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
국가 | Ўзбекистон Совет Социалистик Республикаси мадҳияси |
국가 (로마자 표기) | Oʻzbekiston Sovet Sotsialist Respublikasining davlat madhiyasi |
국가 (번역) |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 |
공용어 | 공식 언어: 우즈베크어 러시아어 소수 언어: 타지크어 카라칼파크어 카자흐어 타타르어 고려말 부호리어 둥간어 중앙아시아 아랍어 파르야어 |
민족 | 우즈베크 소비에트 |
수도 | 부하라 (1925년) 사마르칸트 (1925년–1930년) 타슈켄트 (1930년–1991년) |
정치 | |
정치 체제 | 단일 마르크스-레닌주의 일당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1924년–1990년) 단일 대통령제 공화국 (1990년–1991년) |
종교 | 국가 무신론 |
최고 지도자 | 제1서기/대통령 |
최초 지도자 | 블라디미르 이바노프 |
최초 지도자 임기 | 1925년–1927년 |
마지막 지도자 | 이슬람 카리모프 |
마지막 지도자 임기 | 1989년–1991년 |
정부 수반 | 정부 수반 |
초대 정부 수반 | 파이줄라 호자예프 |
초대 정부 수반 임기 | 1924년–1937년 |
마지막 정부 수반 | 슈크룰로 미르사이도프 |
마지막 정부 수반 임기 | 1990년 |
입법부 | 최고 소비에트 |
역사 | |
이전 국가 | 투르키스탄 ASSR |
설립일 | 1924년 10월 27일 |
공화국 선포일 | 1924년 12월 5일 |
종말일 | 1991년 12월 25일 |
종말 이벤트 | 독립 승인 |
카라칼파크스탄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편입 | 1936년 12월 5일 |
국가 주권 선언 | 1990년 6월 20일 |
국명 변경/독립 | 1991년 8월 31일 |
현재 국가 |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
지리 | |
면적 | 447,400 km² |
인구 | |
인구 조사 | 32,749,528 명 |
경제 | |
통화 | 소비에트 루블 (Rbl) (SUR) |
기타 정보 | |
전화 코드 | +7 36/37/436 |
2. 명칭
우즈베키스탄(Uzbekistan)이라는 이름은 어원적으로 "자유의 고향"을 뜻한다. 이는 uz|우즈trk("자기 자신"), bek|베크trk("지배자"), 그리고 -stan|스탄fas("~의 땅")의 혼합어에서 유래되었다. 1937년과 1978년 헌법에 따라 공화국의 공식 명칭은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Oʻzbekiston Sovet Sotsialistik Respublikasi|오즈베키스톤 소베트 소치알리스티크 레스푸블리카시uzb, Узбекская Советская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ая Республика|우즈벡스카야 소베츠카야 소치알리스티체스카야 레스푸블리카rus)이었다.
1924년, 중앙아시아 지역의 민족별 경계 재획정 과정에서 투르키스탄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부하라 인민 소비에트 공화국, 호라즘 인민 소비에트 공화국 등이 해체되고 그 영토를 기반으로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10월 27일 수립되었다. 이듬해인 1925년, 우즈베크 SSR은 소비에트 연방을 구성하는 공화국 중 하나가 되었다.
3. 역사
소비에트 시대 동안 우즈베키스탄은 급격한 사회 변화를 겪었다. 1920년대 후반부터 농업 집단화가 추진되었고, 1930년대에는 대숙청의 광풍 속에서 많은 정치 지도자들이 희생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소련 서부 지역의 산업 시설과 인구가 대거 이전해 왔으며,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고려인을 비롯한 여러 소수 민족이 이주해 오면서 인구 구성에 큰 변화가 생겼다.
전후에는 샤로프 라시도프가 장기간(1959~1983) 공화국을 통치했으며, 이 시기 중앙 정부의 주도로 추진된 대규모 면화 생산 증대 정책은 아랄해의 생태계를 파괴하는 심각한 환경 문제를 야기했다. 1980년대 후반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의 영향 속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활발해졌고, 1990년 이슬람 카리모프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91년 8월 모스크바 쿠데타 실패 이후 독립을 선언했으며, 같은 해 12월 소련 해체와 함께 완전한 독립 국가가 되었다.
3. 1. 건국
러시아 혁명 이후 1917년 11월부터 1918년 3월 사이에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되었고, 우즈베키스탄 영토의 대부분은 투르키스탄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일부가 되었다. 이후 부하라 인민 소비에트 공화국과 호라즘 인민 소비에트 공화국이 세워졌다.
1924년, 중앙아시아의 정치 단위 경계는 블라디미르 레닌 정부의 국적성 인민위원이었던 요셉 스탈린이 결정한 민족적 기준에 따라 재편되었다. 투르키스탄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부하라 인민 소비에트 공화국, 호라즘 인민 소비에트 공화국은 해체되었고, 그 영토는 민족별로 5개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나뉘었다. 이 과정에서 1924년 10월 27일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Oʻzbekiston Sovet Sotsialistik Respublikasiuz)이 탄생하였다. 이듬해인 1925년, 우즈베키스탄은 소비에트 연방을 구성하는 공화국 중 하나가 되었다.
초기 우즈베크 SSR에는 타지크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1929년 타지크는 동등한 지위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승격되어 분리되었다. 1930년에는 우즈베크 SSR의 수도가 사마르칸트에서 타슈켄트로 이전되었고, 타슈켄트는 그 이후로 계속 수도로 남아 있다.
1928년부터는 농업 집단화 정책이 시작되어 콜호즈(집단 농장)와 소프호즈(국영 농장)가 설립되었으며, 이는 1930년대 후반까지 지속되었다.
1936년, 소비에트 연방의 국가 구획 마지막 단계에서 카자흐 SSR로부터 카라칼파크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편입하면서 우즈베키스탄의 영토가 확장되었다. 같은 해 12월, 공화국의 공식 명칭은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Oʻzbekiston Sovet Sotsialistik Respublikasiuz)으로 확정되었다.
1937년부터 1938년까지 이어진 대숙청 기간 동안에는 우즈베크 SSR의 초대 총리였던 파이줄라 호자예프를 포함한 많은 인물들이 반혁명 혐의 등으로 기소되어 처형되었다.
3. 2. 스탈린 시대
1924년, 중앙아시아의 정치 단위 경계는 블라디미르 레닌 정부 하에서 국적성 인민위원이었던 요셉 스탈린이 결정한 민족적 기준에 따라 변경되었다. 이에 따라 투르키스탄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부하라 인민 소비에트 공화국, 호라즘 인민 소비에트 공화국은 폐지되었고, 그 영토는 5개의 별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나뉘었다. 그중 하나가 1924년 10월 27일에 건립된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었다. 이듬해인 1925년, 우즈베키스탄은 소비에트 연방(소련)의 구성 공화국 중 하나가 되었다.
초기 우즈베크 SSR에는 타지크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1929년 타지크는 동등한 지위의 공화국으로 승격되어 분리되었다. 1930년에는 우즈베크 SSR의 수도가 사마르칸트에서 타슈켄트로 이전되었고, 타슈켄트는 이후 계속 수도로 남게 되었다. 1936년, 소비에트 연방의 국가 구획 마지막 단계에서 카자흐 SSR로부터 카라칼파크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편입하여 영토가 확장되었다. 같은 해 12월, 공화국의 공식 명칭은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변경되었다.
스탈린 시대 동안 우즈베키스탄 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1928년부터 집단화 정책이 시작되어, 국영 농장 체제가 1930년대 후반까지 강압적으로 추진되었다. 1937년에서 1938년 사이에는 대숙청이 진행되어, 공화국 초대 총리였던 파이줄라 호자예프를 포함한 많은 우즈베크 지도자들이 반혁명 혐의 등으로 처형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당시 소련 당국은 인사 정책을 통해 우즈베키스탄 내 부족 집단 간의 균형을 유지하려 시도했는데, 부하라 출신 파이즐라 호자예프가 인민위원장으로 임명된 후, 타슈켄트 출신 아크말리 이크라모프가 중앙위원회 제1서기로, 페르가나 출신 우스만 유수포프가 중앙위원회 서기로 임명된 것이 그 예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소련 서부의 많은 공장과 산업 시설이 독일군의 위협을 피해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전되었다. 이 과정에서 다수의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및 기타 민족들이 함께 이주해 와 공화국의 인구 구성에 변화를 가져왔다. 또한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나치 독일 등 추축국에 협력했다는 의심을 받은 고려인, 크림 타타르인, 체첸인 등 소수 민족들이 중앙아시아, 특히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로 이주당했다.
소비에트 시대, 특히 스탈린 시대에는 이슬람교에 대한 탄압이 이뤄졌다. 공산당 당국의 반종교 정책에 따라 대부분의 모스크가 폐쇄되었고, 종교 학교는 반종교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반면, 교육 분야에서는 문맹 퇴치 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어, 농촌 지역까지 포함하여 거의 모든 인구가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되는 성과를 거뒀다.[2][3] 1917년 혁명 이전에는 인구의 극소수만이 문해 능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과 비교하면 큰 변화였다.
3. 3.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시대
우즈베키스탄 공산당 제1서기 샤로프 라시도프는 1959년부터 1983년까지 장기간 집권하며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시대의 우즈베키스탄을 이끌었다. 그는 타슈켄트와 사마르칸트 지역 세력의 지지를 기반으로 권력을 유지했으며, 소련 중앙 정부는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우즈베키스탄 내 여러 부족 집단 간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는 정책을 펼쳤다.
이 시기의 주요한 정책 중 하나는 1960년대 초부터 강력하게 추진된 면화 생산 증대 정책이었다. 중앙 정부의 계획에 따라 우즈베키스탄은 대규모 목화밭을 조성하고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아무다리야 강물을 대량으로 끌어다 관개용수로 사용했다. 이 무리한 정책은 결국 중앙아시아 최대의 호수였던 아랄해로 흘러 들어가는 강물의 양을 급격히 감소시켜, 호수 면적이 줄어들고 염분 농도가 높아지는 등 심각한 환경 재앙을 초래했다. 이는 미래 세대에 큰 부담을 안겨준 비극적인 결정으로 평가된다.
라시도프가 사망한 후, 우즈베키스탄의 지도권은 페르가나 출신의 이남존 우스만호자예프와 라피크 니샤노프에게 차례로 넘어갔다. 이들은 권력 기반을 다지는 과정에서 라시도프 시절 임명된 인사들을 부패 혐의 등으로 숙청했으나, 이는 또 다른 정치적 갈등을 야기하기도 했다.
3. 4. 독립
공산당은 1990년까지 우즈베크 SSR의 유일한 합법 정당이었으나, 같은 해 다른 정당의 활동이 허용되었다. 1989년부터 우즈베키스탄 공산당 지도자였던 이슬람 카리모프는 이후 당의 후신인 '''인민민주당'''(PDP)의 수장이 되었으며, 1990년 최고회의에 의해 신설된 대통령직에 선출되었다.
1990년 6월 20일, 최고 소비에트는 러시아 SFSR의 주권 선언 며칠 후, 소비에트 연방 법률보다 우즈베크 SSR의 법률이 우위에 있음을 선언하는 국가 주권 선언을 채택했다.
우즈베키스탄 SSR은 1991년 3월, 새로운 연방 조약 체결을 위한 소련 국민투표에 참여하여 연방 유지에 찬성했다. 그러나 1991년 8월 모스크바에서 발생한 쿠데타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쿠데타 실패 직후인 1991년 8월 31일(공식 선포는 9월 1일), 우즈베키스탄 SSR은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으로 국명을 변경하고 독립을 선언했다. 소련은 1991년 12월 26일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독립 선언 이후에도 1978년 제정된 우즈베크 SSR 헌법이 한동안 유지되었으며, 독립의 정당성은 1991년 12월 29일 실시된 국민투표를 통해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
4. 정치
소비에트 연방의 다른 공화국들과 마찬가지로,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SSR)은 일당제 사회주의 공화국 체제를 따랐다. 소련 공산당(CPSU)의 공화국 지부인 우즈베키스탄 공산당이 1990년까지 유일한 합법 정당으로서 국가 운영을 주도했다.
우즈베키스탄 공산당의 중앙위원회 제1서기가 당의 수장이자 실질적인 최고 지도자였으며, 최고 소비에트 주석단 의장이 명목상의 국가 원수를, 장관회의 의장이 정부 수반 역할을 수행했다. 행정권은 정부(장관회의)가 행사했고, 입법권은 타슈켄트에서 소집되는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 소비에트에 있었다.
샤로프 라시도프는 1959년부터 1983년까지 장기간 제1서기를 역임하며 공화국을 이끌었다. 1989년부터는 이슬람 카리모프가 우즈베키스탄 공산당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그는 이후 공산당의 후신 격인 인민민주당(PDP)의 수장이 되어 1990년 우즈베크 SSR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90년 6월 20일, 우즈베크 SSR 최고 소비에트는 소비에트 연방의 법률보다 공화국 법률의 우위를 선언하는 국가 주권 선언을 채택했다. 이는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이 유사한 선언을 채택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이루어진 조치였다.
4. 1. 역대 지도자 (공산당 제1서기)
1924년 10월, 우즈베키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직국이 설립되었고, 1925년 2월 제1차 창당회의를 통해 중앙위원회가 정식으로 출범했다. 초기에는 부하라 출신 파이줄라 호자예프가 인민위원회 의장을 맡았으나, 부족 간 세력 균형을 위해 1929년 타슈켄트 출신 아크말 이크라모프가 중앙위원회 제1서기로, 페르가나 출신 우스만 유수포프가 중앙위원회 서기로 임명되었다.소련 시대 동안 중앙 정부는 인사 정책을 통해 우즈베키스탄 내 여러 부족 집단 간의 균형을 유지하려 했다. 공화국 지도부 교체는 특정 부족에게 유리한 인사 이동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았다. 타슈켄트와 사마르칸트 세력의 지지를 받던 샤로프 라시도프 제1서기가 사망한 후, 페르가나 출신의 이남존 우스만호자예프와 이후 라피크 니쇼노프가 지도자 자리를 계승했다. 이 시기에는 라시도프 시절 임명된 인사들에 대한 숙청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1989년 6월, 니샤노프가 실각하고 사마르칸트 출신의 이슬람 카리모프가 새로운 제1서기로 선출되었다.
아래는 역대 우즈베키스탄 공산당 제1서기 목록이다.
이름 | 재임 기간 | 출신 / 비고 |
---|---|---|
블라디미르 이바노프 | 1925년 ~ 1927년 | 러시아인, 총살됨 |
쿠프리얀 키르키시 | 1927년 ~ 1929년 | 벨라루스인, 사고사 |
니콜라이 기칼로 | 1929년 | 러시아인, 총살됨 |
이사크 젤렌스키 | 1929년 | 유대인, 총살됨 |
아크말 이크라모프 | 1929년 ~ 1937년 | 타슈켄트 출신, 총살됨 |
우스만 유수포프 | 1937년 ~ 1950년 | 페르가나 출신 |
아민 니야조프 | 1950년 ~ 1955년 | 페르가나 출신 |
누리딘 무히디노프 | 1955년 ~ 1957년 | 타슈켄트 출신 |
소비르 카말로프 | 1957년 ~ 1959년 | 타슈켄트 출신 |
샤로프 라시도프 | 1959년 ~ 1983년 | 지자흐 출신 |
이남존 우스만호자예프 | 1983년 ~ 1988년 | 페르가나 출신 |
라피크 니쇼노프 | 1988년 ~ 1989년 | 타슈켄트 출신 |
이슬람 카리모프 | 1989년 ~ 1991년 | 사마르칸트 출신, 이후 우즈베키스탄 초대 대통령 |
5. 군사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끝날 무렵인 1989년 2월 15일,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철군의 일환으로 여러 소련군 부대가 아프가니스탄에서 우즈베키스탄 국경을 넘어왔다. 전쟁 중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파키스탄 군사 정보국(ISI)의 후원을 받는 아프간 무자헤딘 또한 파괴 행위를 목적으로 국경을 넘기도 했다.[4]
우즈베키스탄은 다른 중앙아시아 공화국들보다 소련군의 주둔 규모가 가장 컸다. 군인 대부분은 타슈켄트에 주둔했던 투르키스탄 군관구(TurkVO) 소속이었다. 1992년 6월 투르키스탄 군관구가 해체되면서 그 소속 인원들은 우즈베키스탄을 비롯한 다른 네 개의 중앙아시아 공화국 군대에 배치되었다. 독립 당시, 신생 우즈베키스탄 군대의 계급에는 러시아계가 많았으며, 장교단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소련 내무부의 공화국 소속 기관이었지만, 소련 내무부와는 별도로 자체적인 내무부를 운영했다.
6. 경제
소비에트 연방 전체의 6.28% 차지
자세한 내용은 우즈베키스탄의 인구 통계 등 참조.
소비에트 연방 전체의 2.00%.
1인당 1028RUB
(농산물 49.19억러시아 루블, 축산 20.36억러시아 루블)
(그중 58200km는 포장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