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낙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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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낙중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한국전쟁을 겪으며 평화 통일을 추구한 인물이다. 그는 전쟁 중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후 평화 통일을 위한 활동을 펼쳤다. 월북 후 간첩죄로 기소되었으나 상고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으며, 자서전과 면담에서 김일성을 만나 평화통일 방안을 제시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안기부는 그를 간첩으로 발표했지만, 2006년 국가정보원 발전위원회의 조사 결과, 안기부 발표 내용과 사실이 다르다는 것이 밝혀졌다. 김낙중은 2020년에 사망했다.
일제강점기 만주사변 당시, 임진강과 한강이 합쳐지는 조강을 마주하고 있는 현재의 통일동산이 있는 경기도 파주시에서 태어났다. 일제 말기 근로동원에서 면제되어 학교 실습지에서 기숙할 수 있는 경성농업중학교(이후 서울농업대학으로 개칭)에 입학했으나, 폐병으로 귀향하여 서울중학교 2학년으로 다시 입학했다. 이때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사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의문에 빠져, 매주 일요일마다 서울에 있는 새문안 교회와 조계사를 찾아 종교적 가르침을 받고, YMCA에서 함석헌의 강의를 들으며 성장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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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김낙중 소개 글
http://www.pressian.[...]
프레시안
2. 생애
한국전쟁 발발 후, 인민군 치하에서 의용군으로, 9.28 수복 후에는 국군으로 징집되어 서로에게 총을 겨누는 상황에 놓였다. "왜 우리가 서로를 죽여야 하는가?"라는 고민 끝에 "생각과 체제가 다르다고 해서 죽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2] 다른 자료에 의하면 6.25 중에 싸운 것이 아니라 미군 열차에서 장교의 하우스보이를 하여 전쟁에서 직접 싸운 적은 없다고 한다.[2]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 다니다가 중퇴했고, 훗날 출옥 후 고려대학교 경제학과에 편입하여 노동운동을 하였다.[2]
대학교 재학 중 통일 운동 조직을 만들려 했으나 실패하고, 1955년 부산에서 단독으로 평화 통일 시위를 벌이다 부산경찰서에 검거되었다. '통일독립청년공동체 수립안'을 만들어 이승만 대통령에게 청원했으나, 빨갱이로 몰려 청량리 정신병원에 보내졌다.[2]
정신병원에서 "김일성이 전쟁 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 북한의 실상을 확인하고 자신의 통일 방안을 제안하기 위해 월북을 결심했다. 고향인 조강을 따라 북으로 가던 중 인민군에게 체포되었으나, '통일독립청년공동체 수립안'을 제시하며 평양에 전달하려 했다고 주장하여 풀려나는 듯했다. 그러나 북한 당국은 의심을 거두지 않았고, 결국 평양의 예심처에 수감되었다. "치안국 중앙분실장이 보내서 왔다"는 거짓 자술서를 쓰고 풀려났다.[2]
1957년 월북하여 간첩죄 등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으나, 상고심에서 간첩죄 부분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 자서전과 국정원발전위 면담에서 "직접 만든 평화통일방안을 가지고 김일성을 만나러 갔다"고 주장했다.[3]
안기부는 김낙중 사건에 대해 "김낙중이 간첩으로 남파되어 1961년 안행협을 월북시키고, 1973년 정부 전복을 음모하는 등 북한의 지령을 수행했다"고 발표했다.[3] 그러나 2006년 국가정보원 발전위원회는 김낙중의 주장을 일부 인정했다. 1990년 공작원을 접선하고 공작금 210만달러(20억원)와 장비를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36년간 고정간첩으로 활동했다는 안기부 발표는 사실과 다르다고 밝혔다.[3]
김낙중의 딸 김선주는 <탐루(探淚) : 눈물을 찾다>라는 책을 출판하면서 "이제야 아버지를 존경하게 되었다"고 말했다.[4] 2020년 7월 29일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2. 1. 유년 시절과 전쟁 경험
김낙중은 일제강점기 말기인 1934년 만주사변이 발발했을 때, 임진강과 한강이 합쳐지는 조강을 마주하고 있는 경기도 파주시에서 태어났다. 경성농업중학교(이후 서울농업대학으로 개칭)에 입학하여 학교 실습지에서 기숙하였으나, 폐병에 걸려 귀향하여 서울중학교 2학년으로 다시 입학하였다. 이때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사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의문에 빠져, 매주 일요일마다 서울에 있는 새문안 교회와 조계사를 찾아 종교적 가르침을 받고, YMCA에서 함석헌의 강의를 들으며 성장했다.[2]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김낙중은 인민군 치하에서 의용군으로, 9.28 수복 후에는 국군으로 징집되어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눠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그는 "왜 우리가 서로를 죽여야 하는가?"라는 깊은 고민에 빠졌고, "생각이 다르고 체제가 다르다고 해서 죽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2] 다른 자료에 의하면 6.25 중에 싸운 것이 아니라 미군 열차에서 장교의 하우스보이를 하여 전쟁에서 직접 싸운 적은 없다고 한다.[2]
2. 2. 평화 통일을 위한 노력과 월북
한국전쟁 발발 후 인민군 의용군과 국군으로 징집되어 서로에게 총을 겨누는 상황에 놓이자 "우리가 왜 서로를 죽여야 하는가?"라는 깊은 고민을 했다. 그는 "생각과 체제가 다르다고 해서 죽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2]
대학교 재학 중 통일 운동 조직을 만들려 했으나 실패하고, 1955년 부산에서 단독으로 평화 통일 시위를 벌이다 부산경찰서에 검거되었다. 이때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평화적 공존과 젊은이들의 공동체 형성을 위한 '통일독립청년공동체 수립안'을 만들어 이승만 대통령에게 청원했으나, 치안국에 의해 청량리 정신병원에 보내졌다.[2]
정신병원에서 "김일성이 전쟁 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 북한의 실상을 직접 확인하고 자신의 통일 방안을 제안하기 위해 월북을 결심했다. 고향인 경기도 파주시 조강을 따라 북으로 가던 중 인민군에게 체포되었으나, '통일독립청년공동체 수립안'을 제시하며 평양에 전달하러 왔다고 주장하여 풀려나는 듯했다. 그러나 북한 당국은 의심을 거두지 않았고, 결국 평양의 예심처라는 감옥에 수감되었다. 김낙중은 "치안국 중앙분실장이 보내서 왔다"는 거짓 자술서를 쓰고 풀려났다.[2]
1957년 월북하여 간첩죄 등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으나, 상고심에서 간첩죄 부분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 김낙중은 자신의 자서전과 국정원발전위 면담에서 "직접 만든 평화통일방안을 가지고 김일성을 만나러 갔다"고 주장했다.[3]
2006년 국가정보원 발전위원회의 조사 결과, 1957년과 1963년 사건 당시 김낙중이 간첩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사실이 없고, 1973년 김낙중 사건 당시의 수사 결과와 판결 내용을 그대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1990년 공작원을 접선하고 공작금 2100000USD와 공작 장비를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36년간 고정간첩으로 활동했다는 안기부 발표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고 말했다.[3]
2. 3. 김낙중 사건과 진실 규명
한국전쟁 발발 후, 김낙중은 인민군 치하에서 의용군으로 전투에 참가하여 국군을 향해 총을 겨누도록 강요받았다. 9.28 수복 이후에는 국군에 들어가 인민군에게 총을 겨누도록 강요받는 상황에 처했다.[2] 이러한 경험은 김낙중에게 "우리가 왜 서로를 죽여야 하는가?"라는 깊은 질문을 던졌고, "생각과 체제가 다르다고 해서 죽이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했다.[2]
대학교 재학 중, 김낙중은 친구들과 통일 관련 조직을 결성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부산에서 단독으로 평화 통일 시위를 벌이다 부산경찰서에 검거되었다.[2] 그는 '통일독립청년공동체 수립안'을 작성하여 1955년 이승만 대통령에게 청원서를 제출했지만, 빨갱이로 몰려 청량리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되었다.[2] 정신병원에서 김낙중은 자신의 통일 방안을 북한에 직접 제안하기로 결심하고, 조강을 건너 월북을 시도하다 인민군에게 체포되었다.[2] 그는 '통일독립청년공동체 수립안'을 제시하며 평양에 전달하려 했다고 주장했지만, 북한 당국은 그를 의심하여 평양의 예심처에 구금했다.[2]
1957년, 김낙중은 월북하여 간첩죄 등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으나, 상고심에서 간첩죄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3] 그는 자서전과 국정원발전위원회 면담에서 "평화통일방안을 가지고 김일성을 만나러 갔다"고 진술했다.[3]
안기부는 김낙중 사건에 대해 "김낙중이 간첩으로 남파되어 1961년 안행협을 월북시키고, 1973년 정부 전복을 음모하는 등 북한의 지령을 수행했다"고 발표했다.[3] 그러나 2006년 국가정보원 발전위원회는 "1957년과 1963년 사건 당시 김낙중이 '북한 간첩으로 남파되었다'는 내용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사실이 없고, 1973년 사건의 수사 결과와 판결 내용을 그대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3] 김낙중이 1990년 공작원을 접선하고 공작금 210만달러 (20억원)와 장비를 받은 것은 사실이나, 36년간 고정간첩으로 활동했다는 안기부 발표는 사실과 다르다고 판단했다.[3]
김낙중의 딸 김선주는 저서 <탐루(探淚) : 눈물을 찾다>에서 "이제야 아버지를 존경하게 되었다"고 밝혔다.[4]
3. 가족 관계
관계 이름 배우자 김남기 아들 김선혁 며느리 최혜원 장녀 김선주 첫째 사위 박성운 차녀 김선결 둘째 사위 나호천
4. 역대 선거 결과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순위 당락 비고 1992년 총선 민중당 319,041표 (1.5%) 전국구 1번 낙선
참조
[2]
웹사이트
http://www.pressian.[...]
[3]
웹사이트
http://www.tongilnew[...]
[4]
ISB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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