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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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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는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 제국이 한반도를 식민 통치한 시기를 일컫는다. 이 시기에는 "일제시대", "왜정시대" 등의 명칭으로 불리었으며, 대한민국에서는 "일제강점기"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일제는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고,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며 합병을 가시화했다. 1905년 을사늑약, 1907년 한일신협약, 1909년 기유각서 체결을 통해 대한제국의 외교권과 내정을 장악했으며,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을 통해 강제 병합을 단행했다.

일제는 무단 통치, 문화 통치, 민족 말살 통치를 거치며 식민 통치를 강화했다. 조선총독부를 통해 행정, 사법, 입법을 장악하고, 헌병 경찰 제도를 통해 언론, 집회, 출판, 결사의 자유를 제한했다.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토지를 수탈하고, 회사령을 통해 민족 자본의 성장을 억제했으며, 산미 증식 계획을 통해 식량을 수탈했다. 또한, 교육과 문화를 통제하고, 징용과 징병을 통해 노동력과 자원을 착취했다.

이에 맞서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은 국내외에서 다양한 형태로 저항했다. 3·1 운동을 비롯한 항일 운동, 임시정부 수립, 무장 독립 투쟁, 문화 운동 등이 전개되었으며, 1945년 일본의 패전으로 한반도는 광복을 맞이했다. 일제강점기는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현재까지도 역사 인식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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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1945년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한국 지도
1945년 내셔널 지오그래픽 한국 지도, 일본 지명과 지방 경계 표시
기본 정보
공식 명칭조선
현지 이름조선
지위일본 제국의 식민지
존속 기간 시작1910년 8월 29일
존속 기간 끝1945년 8월 15일
이전 국가대한제국
이전 국가 국기Flag_of_Korea_(1899).svg
다음 국가대한민국 임시정부
다음 국가 국기Flag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svg
다음 국가 2조선인민공화국
다음 국가 2 국기Flag of the People's Committee of Korea.svg
다음 국가 3소비에트 민정청
다음 국가 3 국기Flag of the Soviet Union.svg
다음 국가 4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
다음 국가 4 국기US flag 48 stars.svg
일본 상선기
국기
국기 링크국기
오동나무 문양
총독부 인장
국장 링크총독부 인장
국가기미가요
수도[[파일:Emblem of Gyeongseong-bu.svg|25px]] 경성부 (게이조)
최대 도시수도
공식 언어일본어
한국어
한자
종교법률상: 없음
사실상:
국가신토
유교
불교
샤머니즘
도교
기독교
천도교
원불교
데모님한국인, 일본인
정치
정치 체제입헌군주제
시대일본 제국
천황 1메이지 천황
천황 1 재위 기간1910년 - 1912년
천황 2다이쇼 천황
천황 2 재위 기간1912년 - 1926년
천황 3쇼와 천황
천황 3 재위 기간1926년 - 1945년
총독 1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 1 재임 기간1910년 - 1916년 (첫 번째)
총독 2아베 노부유키
총독 2 재임 기간1944년 - 1945년 (마지막)
역사
이전 사건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전 사건 날짜1910년 8월 22일
시작 사건병합 조약 발효
시작 사건 날짜1910년 8월 29일
사건 1일본에 의한 병합
사건 1 날짜1910년 8월 29일
사건 23·1 운동
사건 2 날짜1919년 3월 1일
사건 3창씨개명 명령
사건 3 날짜1939년 11월 10일
종료 사건일본의 항복
종료 사건 날짜1945년 9월 2일
이후 사건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으로 일본의 권리 포기
이후 사건 날짜1952년 4월 28일
변천 1일한 병합 조약 체결
변천 1 날짜1910년 8월 22일
변천 2일한 병합 조약 발효
변천 2 날짜1910년 8월 29일
변천 3일본이 포츠담 선언 수락 (옥음방송)
변천 3 날짜1945년 8월 15일
변천 4일본이 항복 문서 조인
변천 4 날짜1945년 9월 2일
변천 5미국 육군이 군정 실시를 포고
변천 5 날짜1945년 9월 7일
변천 6조선총독부 항복
변천 6 날짜1945년 9월 9일
변천 7미국 군정청 설치
변천 7 날짜1945년 9월 11일
변천 8소비에트 민정청 설치
변천 8 날짜1945년 10월 3일
인구
1920년17,264,119명
1930년21,058,305명
1933년 추정20,160,000명
1940년24,326,327명
1944년 추정25,120,000명
경제
통화조선 엔
기타
시간대UTC+9
시간대 (추가 정보)(1910년 - 1911년은 UTC+8:30)
현재 국가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2. 명칭

표준국어대사전은 '''일제강점기'''(日帝強占期)라는 말을 쓰고 있다[449]. 흔히 '''일제시대'''(日帝時代) 등으로 줄여 부르기도 한다. 그 밖에도 일본의 옛 이름이자 멸칭인 "왜"를 사용하여 왜정시대(倭政時代), 왜정(倭政), 왜치시대(倭治時代), 왜치(倭治) 등으로도 부른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일제강점시기(日帝強占時期일본어)라고 말한다. 일본에서는 일본통치시대의 조선(日本統治時代の朝鮮일본어) 또는 조선 일치기(朝鮮日治期일본어)라고 부른다.

대한민국에서는 이 시기를 일반적으로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Ilje Gangjeomgi)"라고 부른다[25]. "일제시대(日帝時代, Ilje Sidae)"[26], "일제암흑기(日帝暗黑期, Ilje Amheukgi)"[28], "왜정시대(倭政時代, Wae-jeong Sidae)"[28] 와 같은 용어도 사용되었으나, 현재는 대부분 쓰이지 않는다.

명칭
국가 및 단체명칭
대한민국일제강점기 (표준국어대사전[258], 교과서), 대일항쟁기 (대한민국 국회[257])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일제강점시기 (日帝強占時期일본어)
일본일본통치시대의 조선 (日本統治時代の朝鮮일본어), 조선 일치기 (朝鮮日治期일본어)
민간일제 시대, 일제통치 시대, 일본 통치 시대, 일정 시대 등



조선일보는 “일제강점기”에 대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이 남조선(한국)을 가리켜 사용하는 “미제강점기”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259]

3. 배경

19세기 후반, 일본 제국탈아입구를 외치며 조선에 대한 야욕을 드러냈다. 사이고 다카모리정한론을 주장했고, 제정 러시아는 남하 정책으로 한반도 침략을 꾀하고 있었다.

명성황후흥선대원군과의 권력 다툼 때문에 초기에는 친일 개화파를 지원했지만, 김옥균 등이 갑신정변을 일으키자 청나라 병력을 사용하여 정변을 진압하고 일본을 견제하였다.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이번에는 러시아를 끌어 들여 일본 세력을 견제하였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은 조선을 합병하기 위한 장기적 계획을 수립하였고, 1894년 청일 전쟁1905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며 한반도에 대한 합병을 가시화했다. 이후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영일 동맹 및 태프트-가쓰라 밀약 등의 조약을 체결하며, 한국 진출을 본격화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고, 한일신협약(1907)과 기유각서(1909) 등으로 대한제국의 배타적 권리를 점점 흡수하였다. 국내에서는 일진회이완용이 한일 합방에 협력했다.

1909년 7월, 일본 내각은 한국 흡수를 결정했고, 같은 해 10월 26일 안중근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한국 합병의 명분을 제공했고, 합병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윤치호는 "안중근이토 히로부미 암살이 한일 합방 가속화의 빌미로 사용되었다."[450]고 기록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은 멸망하고 한반도일본 제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당시 일본은 대한제국을 '조선'으로, 대한제국의 황제를 '이왕'으로 바꾸어 불렀다. 결국 한반도 지역 전체가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되어, 통치 기구인 조선총독부에 의해 1945년까지 35년간 통치를 받게 되었다.

조르쥬 페르디난드 비고의 풍자화(1887년). 일본중국, 러시아물고기(조선)를 노리고 있다.


러일전쟁 당시의 정치풍자 그림엽서

3. 1. 정치적 혼란과 열강의 각축

19세기 후반, 일본 제국은 제국주의 식민지 쟁탈전의 일환으로 탈아입구를 외치며 조선에 대한 야욕을 드러냈다. 사이고 다카모리정한론을 주장하며 조선 정벌을 주장했고, 제정 러시아는 남하 정책으로 한반도 침략을 꾀하고 있었다.

명성황후흥선대원군과의 권력 다툼 때문에 초기에는 친일 개화파를 지원했지만, 김옥균 등이 갑신정변을 일으키자 청나라 병력을 사용하여 정변을 진압하고 일본을 견제하였다.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이번에는 러시아를 끌어 들여 일본 세력을 견제하였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은 조선을 합병하기 위한 장기적 계획을 수립하였고, 1894년 청일 전쟁1905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며 한반도에 대한 합병을 가시화했다. 이후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영일 동맹 및 태프트-가쓰라 밀약 등의 조약을 체결하며, 한국 진출을 본격화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고, 한일신협약(1907)과 기유각서(1909) 등으로 대한제국의 배타적 권리를 점점 흡수하였다. 국내에서는 일진회이완용이 한일 합방에 협력했다.

1909년 7월, 일본 내각은 한국 흡수를 결정했고, 같은 해 10월 26일 안중근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한국 합병의 명분을 제공했고, 합병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윤치호는 "안중근이토 히로부미 암살이 한일 합방 가속화의 빌미로 사용되었다."[450]고 기록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은 멸망하고 한반도일본 제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당시 일본은 대한제국을 '조선'으로, 대한제국의 황제를 '이왕'으로 바꾸어 불렀다. 결국 한반도 지역 전체가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되어, 통치 기구인 조선총독부에 의해 1945년까지 35년간 통치를 받게 되었다.

3. 1. 1. 강화도 조약과 불평등 조약 체제

1876년 2월 27일,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일본이 조선과의 통상을 열기 위한 것이었으며, 조선은 이 조약을 통해 청나라의 보호국 지위를 벗어나게 되었다.[29] 또한, 3개의 항구를 일본에 개방하고 일본인에게 치외법권을 부여하는 등 불평등 조약이었다.[29] 이는 1875년 강화도 사건 당시 일본의 강압적인 총포 외교 하에 체결되었다.

운요호(雲揚號)에서 상륙한 일본 해병대가 강화도 근처의 영종도를 공격하는 모습 (목판화, 1876년)

3. 1. 2.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명성황후흥선대원군과의 권력 다툼 때문에 초기에는 친일 개화파를 지원했지만, 김옥균 등이 갑신정변을 일으키자 청나라 병력을 사용하여 정변을 진압하고 일본을 견제하였다.[30]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 이번에는 러시아를 끌어 들여 일본 세력을 견제하였다.

섭정 흥선대원군은 일본이나 서구에 어떠한 양보에도 반대하여 1882년 임오군란을 조직하는 데 일조했다.[30] 새롭게 훈련받은 군대에 대한 특혜 대우에 대한 불만으로 인해, 흥선대원군의 세력 혹은 "구군"은 일본 훈련대를 살해하고 일본 공사관을 공격했다.[30] 이 사건 중에 일본 외교관,[31] 경찰,[32] 학생,[33] 그리고 일부 민씨 일족도 살해당했다. 흥선대원군은 잠시 권력을 되찾았지만, 추가적인 혼란을 막기 위해 서울에 파병된 청나라 군대에 의해 강제로 중국으로 압송되었다.[30]

1882년 8월, 1882년 조일수호조규는 일본 희생자 가족들에게 배상금을 지급하고, 일본 정부에 500000JPY의 배상금을 지불하며, 서울의 일본 공사관에 일본 경비대를 주둔시키는 것을 허용했다.[30]

흥선대원군의 추종자들과 명성황후의 세력 간의 갈등은 개화당이라 알려진 한국 독립파, 그리고 보수파의 경쟁으로 더욱 복잡해졌다. 개화당은 일본의 지원을 구하는 반면, 보수파는 청나라의 지원을 구했다.[30]

1884년 12월 4일, 개화당은 일본의 지원을 받아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들은 고종을 유지하면서 친일 정부로 교체하려 했다. 또한, 그들은 한국을 청나라의 종주권에서 해방시키고자 했다.[30] 그러나 이는 단명했는데, 보수적인 한국 관리들이 한국에 주둔한 청나라 군대의 지원을 요청했기 때문이다.[30] 쿠데타는 청나라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고, 한국 폭도들은 보복으로 일본 장교와 일본 거주자들을 살해했다.[30] 김옥균을 포함한 개화당의 일부 지도자들은 일본으로 망명했고, 다른 이들은 처형당했다.[30]

3. 1. 3.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

제1차 청일 전쟁 당시 주요 전투와 병력 이동


1894년 동학농민혁명은 일본이 조선 내정에 직접 군사 개입할 명분을 제공했다.[439] 같은 해 4월, 조선은 농민혁명 진압을 위해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했고, 일본 지도부는 톈진 조약 위반을 구실로 청나라에 맞서 군사 개입을 결정했다. 5월 3일, 1,500명의 청나라 군대가 인천에 상륙했다. 7월 23일, 일본은 조선 정부의 철군 요구를 무시하고 서울을 공격, 점령하여 제1차 청일 전쟁을 시작했다. 일본은 이 전쟁에서 승리했고, 청나라는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에 서명했다. 이 조약에는 "한국(朝鮮)의 완전하고도 완벽한 독립과 자주성을 인정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조선의 청나라에 대한 조공국 관계가 종식되었고, 1895년 조선의 완전한 독립 선포로 이어졌다. 동시에 일본은 조선 정부군과 함께 농민 봉기를 진압했다.

3. 1. 4. 을미사변과 대한제국 선포

1895년 10월 8일 일본 첩자들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었다.[34] 러시아 외교부 기록 보관소에서 발견된 러시아 보고서에는 고종의 증언과 암살 목격자들의 증언, 칼 이바노비치 베버의 보고서가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베버는 서울 주재 러시아 공사관의 대리공사였다.[34] 러시아 목격자 세레딘사바틴(Середин-Сабатинru)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 첩자들이 경복궁에 침입하여[35]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시신을 훼손했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은 같은 날 왕궁으로 돌아왔다.[34] 1896년 2월 11일, 고종과 왕세자는 보호를 위해 서울 주재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여 약 1년간 그곳에서 통치하였다.[36]

3. 1. 5. 러일전쟁과 일본의 보호국화

19세기 후반, 일본 제국은 제국주의 식민지 쟁탈전의 일환으로 탈아입구를 외치며 조선에 대한 야욕을 드러냈다. 사이고 다카모리정한론을 주장하며 조선 정벌을 주장했고, 제정 러시아는 남하 정책으로 한반도 침략을 꾀하고 있었다. 명성황후는 초기에는 친일 개화파를 지원했지만, 갑신정변 이후에는 청나라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했고,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이번에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 세력을 견제했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은 조선을 합병하기 위한 장기적 계획을 수립했다. 1894년 청일 전쟁1905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며 한반도에 대한 합병을 가시화했다. 이후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영일 동맹 및 태프트-가쓰라 밀약 등의 조약을 체결하며 한국 진출을 본격화하였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일본은, 한일신협약(1907)과 기유각서(1909) 등으로 대한제국의 권리를 점점 잠식해 들어갔다. 국내에서는 일진회이완용 등이 한일 합방에 적극 협력했다.

1909년 7월, 일본 내각은 한국 흡수를 결정했고, 같은 해 10월 26일 안중근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한국 합병의 명분을 제공했고, 합병 추진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윤치호는 "안중근이토 히로부미 암살이 한일 합방 가속화의 빌미로 사용되었다."[450]고 기록했다.

3. 1. 6. 헤이그 특사 사건과 한일병합조약

1907년 6월, 제2차 헤이그 평화 회의가 헤이그에서 열렸다. 고종 황제는 한국의 문제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세 명의 대표를 비밀리에 파견했다. 국제 대표들에 의해 공개 토론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당한 세 명의 사절은 보호 조약의 합법성에 의문을 제기했다.[45] 이 대표들 중 한 명은 선교사이자 역사가인 호머 헐버트였다. 절망한 나머지 한국 대표 중 한 명인 이준은 헤이그에서 자결했다.[45]

이에 대한 응답으로 일본 정부는 더욱 강력한 조치를 취했다. 1907년 7월 19일, 고종 황제는 황제의 권위를 포기하고 왕세자를 섭정으로 임명하도록 강요당했다. 일본 관리들은 이러한 양보를 이용하여 고종의 동의를 얻지 않고 새로운 황제 순종의 즉위를 강요했다. 고종과 순종 모두 '즉위'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순종은 1392년에 건국된 조선 왕조의 마지막 통치자가 되었다.[46]

1907년 7월 24일, 이완용이토 히로부미의 주도하에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를 일본에 이양하는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는 한국인들 사이에서 대규모 의병 운동을 야기했고, 해산된 군인들이 저항군에 합류했다. 이에 대한 일본의 대응은 사단급 병력을 동원한 초토화 작전이었고, 이는 한국의 무장 저항 조직의 만주 이동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1909년 10월 26일, 전 의용군인인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했다.[47]

1909년 7월, 일본 내각에서 한국 흡수가 결정되었고, 이후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을 명분삼아 일본 내 제국주의자들은 한국 합병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며 병합 추진을 가속화하였다. 윤치호는 당시 이를 두고 "안중근이토 히로부미 암살이 한일 합방 가속화의 빌미로 사용되었다."[450]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은 멸망하고 한반도일본 제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당시 일본은 대한제국을 '조선'으로, 대한제국의 황제를 '이왕'으로 바꾸어 불렀다. 결국 한반도 지역 전체가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되어, 통치 기구인 조선총독부에 의해 1945년까지 35년간 통치를 받게 되었다.

4. 일제의 식민 통치

조선총독부는 1910년 10월 2일부터 한국 13도의 관찰사를 도장관으로, 1912년에는 도지사로 명칭을 변경했다. 도지사 아래 부지사를 두어 업무를 보좌하게 했고, 각 방을 근대식 국과 과로 나누었다. 큰 부에는 국장급을, 작은 부에는 과장급을 두어 행정 체계를 구성했다. 도시 지역은 면리제와 동제, 오가작통법에 의한 통반제 대신 일본식 행정구역 명칭인 정(町)을 사용했고, 큰 부는 몇 개의 동을 묶어 구(區)로 나누었다.

향리 세습제를 폐지하고 공개채용 시험, 고등관 시험, 판임관 시험 등으로 관료를 채용했다. 관료 직위는 군속, 면속으로 칭하고, 기수(서기), 기사, 주사, 사무관, 서기관 등의 직위를 적용하고 차등 월급을 지급했다. 헌병과 경찰의 편의를 위해 한국인 출신 순사보조원과 헌병보조원 등 사무보조원을 채용했다. 1920년대부터는 한국인이 순사, 헌병, 훈도 공개채용 시험에 응시하기도 했다.

3·1 운동의 불씨가 남아있던 1922년 순사직 경쟁률은 약 2.1대 1이었으나, 문화 통치가 본격화된 1920년대 중반 이후 10대 1을 웃돌았다. 1926년에는 10.7대 1, 1932년에는 19대 1로 경쟁률이 상승했다.[460] 1935년 19.6대 1로 정점을 찍은 후 1936년 14.1대 1, 1937년 10.9대 1로 하락했으나, 1920년대 중반부터 태평양 전쟁 이전까지 10∼20대 1의 높은 인기를 누렸다.[460] 연세대학교 장신은 "순사는 조선인 사회에서 좋지 못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법률로 보장된 권한 탓에 해마다 높은 지원율을 보였다"고 지적하며, "관리의 최말단인 까닭에 지원자의 학력 수준은 보통학교 졸업자가 80% 정도를 차지했다"고 분석했다.[460]

총독부는 식민지 조선인 칙선 의원들이 일본제국의회 귀족원에 참여할 수 있게 하였다.[492] 총독에 사실상의 자문기관의 성격을 띤 매우 한정적인 권한을 갖고 있었던 조선에 지방의회도 설치한다.[492]

경상남도청


평안북도청


1914년 조선의 행정구역.


1945년 조선의 행정구역.


출생 신고나 사망 신고는 읍, 면사무소 호적계에서 받았으나, 문맹률이 높아 이장, 통장, 정장(町長)이 대신 신고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과정에서 생년월일 오류, 양력/음력 혼동, 사망 날짜 부정확, 이름 오기 등의 문제가 발생했다.

대한제국 멸망 당시 호적과 성씨가 없던 한국인들은 일제의 강요로 양반 가문이나 주인집 성씨와 이름을 부여받아 호적에 등재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호적 서류는 태평양 전쟁, 해방 직후 약탈과 파괴, 6.25 전쟁 직후 화재 등으로 대부분 소실되었다.

호적 서류는 암기, 필기, 수기로 기록되었고, 종이는 찢어지기 쉬웠으며, 먹물이나 저질 잉크는 쉽게 번져 행정 서류에 오류가 많았다. 이러한 혼선은 해방 후 1950년 한국 전쟁 직후까지도 계속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910년 6월 29일 공포한 「통감부경찰관서관제」를 계승하여 조선에 헌병경찰제를 시행하였다.[493] 병합 당시 효력이 인정된 「대한제국 법령 및 일본국 법령」과 「조선태형령」 등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법령을 조선인과 조선 거주 일본인에게 동일하게 적용하였다.[493] 이로 인한 불만으로 일본 기자들은 1910년대 총독통치를 '무단통치'라고 칭하였다.[493]

한글한문이 혼용되어 쓰인 1940년대 매일신보 기사


당시 한국의 신문, 잡지, 광고 발행에는 제한이 없었으나 엄격한 검열이 있었다. 한글 전용, 국한문 혼용체, 일본어한자를 섞은 일한자 병용체 등의 광고, 보도가 나갔다.

1940년 태평양 전쟁 이후에도 한글 보도를 금지하지 않았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 등에는 한국인 독립운동, 자치 운동, 망명 독립운동가 소식 등이 보도되었다. 그러나 조선일보동아일보는 검열, 정간, 폐간, 휴간, 복간을 반복하다 1940년 최종 폐간되었다. 이후 매일신보 등 소수 친일 언론이 활동하였다.

1924년부터 조선방송공사(한국방송공사 KBS의 전신)가 경성에서 개통되어 방송되었다. 라디오는 1930년대 이후 읍면 단위 일반 가정까지 보급되었지만, 텔레비전은 군 단위 이하에는 거의 보급되지 않아 시청률이 매우 낮았다.

공립보통학교


조선에서는 1895년 갑오개혁으로 근대 교육 제도가 시작되었지만, 1906년 시점에서도 초등학교가 전국 40개교 미만이었고, 양반 자제는 서당에서 사교육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서당은 삼천 정도 있었지만, 한문 교육이 중심이었고 수학이나 한글 교육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선총독부대한제국한국인 저술 교과서를 몰수하고 일본인 저작 교과서로 대체했다. '조선교육령'과 '사립학교규칙' 등으로 학교 설치와 교육 내용을 통제했고, 대한제국 시기 설립된 고등교육 기관과 서당들의 등록이 취소되었다.

일본은 전국에 보통 학교 (지금의 초등학교)를 설치했다. 초등학교는 합병 직전 40개 정도에서 1943년 4271개까지 증가했다. 고등 교육에서는 1924년에 경성 제국 대학이 설치되었으나, 조선인 학생은 30~40% 정도였다.

조선총독부는 1930년대 일본어 보급 정책을 추진했다. 교육당국은 사립학교 한국어 교육과 사용을 통제했고, 관청에서는 한국 농민 민원도 일본어를 사용할 경우에만 접수했다. 1935년부터 한글을 가르치는 학생들의 계몽운동을 제재했고, 1938년 '국어상용화' 정책으로 조선어 교육을 폐지하고 일본어를 강요했다. 1938년 전국에 3,660여개 일본어 강습소를 만들어 일본어를 가르치고 사용을 강요했다.

일반관리나 교원에게 제복을 입히고 칼을 차고 수업에 임하도록 했고, 전시하 일제는 중학생, 국민학생까지 '근로보국'이라는 명목으로 군사시설공사에 강제 동원했다.

일제는 일본어 전용 정책에 방해가 된다는 판단 아래 1942년 조선어학회 회원과 학자들을 체포, 투옥했다. 함흥 여학생이 한국어로 대화하다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취조를 받던 중, 사전 편찬을 담당하던 조선어학회 회원이 관련되어 조선어학회를 독립운동 단체로 몰아 관련자들을 구속했다.

1944년 일본 인구조사에 따르면 남한 1700만 인구 중 773만 3000명이 글을 읽고 쓰지 못했다. 이는 일본 지배 하 한국어 교육이 이뤄지지 않았고, 한국인 교육 차별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 직전 1944년 한국 거주 인구 중 3%만이 일본인이었으나 종합대학 졸업자 50%, 단과대, 사범대, 기술전문대 졸업자 47%, 중등학교 졸업자 44%, 2년제 중학교 졸업자 73%가 일본인이었다.[494]



역대이름사진취임이임이력
제1대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1910년 10월 1일1916년 10월 14일육군대장, 원수, 수상
제2대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1916년 10월 14일1919년 8월 12일육군대장, 원수
제3대사이토 마코토(齋藤實)
1919년 8월 12일1927년 12월 10일해군대장, 수상
제4대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1927년 4월 15일1927년 10월 1일육군대장
제5대야마나시 한조(山梨半造)
1927년 10월 1일1929년 8월 17일육군대장
제6대사이토 마코토(齋藤實)--1929년 8월 17일1931년 6월 17일해군대장, 수상
제7대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1931년 6월 17일1936년 8월 5일육군대장
제8대미나미 지로(南次郎)--1936년 8월 5일1942년 5월 29일육군대장
제9대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
1942년 5월 29일1944년 7월 24일육군대장, 수상
제10대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1944년 7월 24일1945년 8월 15일육군대장, 수상





합병 초기, 조선의 초등·중등 교육 제도는 일본 내지인과 조선인을 위한 학교가 별도로 존재했다. 내지인 대상 보통학교, 중학교, 고등여학교와 조선인 대상 보통학교, 고등보통학교(고보), 여자고등보통학교(여고보)였다. 일본어 능력이 높으면 예외적으로 내지인 학교 진학이 허용되었으며, 1938년 조선교육령 개정으로 보통학교, 고보, 여고보는 폐지되고, 내지인과 조선인 모두 동일 학제를 적용받았다.

일본 통치하 초등 교육이 확충되어, 초등 교육 취학률은 일제강점기 말기 남학생 6할, 여학생 4할 정도였다. 초등 교육 기관 교원은 조선 사범학교 양성 교원과 일본 내지 파견 교원이 혼재했다.[296] 1946년도부터 일본 내지와 마찬가지로 8년제 의무교육 제도(국민학교 초등과 및 고등과)를 도입할 계획이었다.[297]

고등교육은 관공립 전문학교(旧制専門学校)가 다수 설립되었고, 1924년 경성제국대학(京城帝国大学)이 조선 유일 제국대학(旧制大学)이자 일본 여섯 번째 제국대학(帝国大学)로 설립되었다. 민족 정신 재생산 및 식민 통치 방해 우려로 조선인 민립대학 설립 운동은 억압되었고, 경성제국대학은 일본 통치하 조선 유일 구제대학이 되었다.[298] 경성제국대학 예과가 유일 대학예과(大学予科)로 설치되었다. 일본 통치 시대 말기, 경성제국대학 내지인 학생 비율은 6할, 조선인 학생 비율은 4할 정도였다.

이씨조선은 청나라 속국이었고 한자가 중시, 한글은 경시되어 공문서에 채택되지 않았다. 이조 말기(1886년) 개화파와 일본인 고문 井上角五郎(いのうえ かくごろう) 협력으로 조선 최초 한글 사용 신문이자 공문서(관보)인 『한성주보』(1886년 창간)가 발행되었다.[299]

이씨조선은 일반인(특히 여성) 교육기관이 전무했고, 의무교육 제도도 없어 대다수 조선인은 읽고 쓰지 못했다.[300][301] 일본 통치하 조선총독부에 의해 학교 교육에서 한글과 한자를 혼용한 조선어가 과목으로 도입되어 조선어 식자율이 상승했다.[302]

1911년 조선총독부는 제1차 교육령을 공포, 조선어를 필수 과목으로 하고 한글을 가르치게 되었다.[303] 조선어 시간 이외 교수 언어는 일본어가 사용되었다. 총독부는 1912년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을 만들었고, 1930년 언문철자법을 만들어 사용했다. 식자율 상승에 따라 한글 탁본1920년대부터 1930년대에 걸쳐 유행했다.[304]

일중전쟁 이후, 총독부는 일본군 병사로 조선인 동원을 고려하여 조선인 "황민화"를 추진했다.[391] 1938년 제3차 교육령에서도 조선어 교육은 폐지되지 않았다. 1938년 "국어를 이해하는 조선인" 비율이 전년도 8% 미만에서 13% 이상으로 증가했고(1943년 말 22%), 1945년 8월 이후 미군 점령 시작 당시, "남조선 12세 이상 총인구의 78%가 한글 문맹이었다"는 미군 조사도 있다.[305] 초등교육 취학률은 1910년 1.0%, 1923년 11.2%, 1935년 21.7%, 1943년 49.0%였다.[308]

태평양 전쟁 중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주요 회원들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었다(조선어학회 사건).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락하던 회원들이 조선어학회를 위장 단체로 이용했던 것으로 체포된 것이며(16명 예심 신청(예심 신청 중 2명 사망), 14명 기소유예, 3명 불기소), 조선어 연구나 보급 활동에 대해 체포된 것은 아니다.[309] 조선어학회 사건은 학술 단체를 가장한 독립 운동 단체로 간주되어 치안유지법 1조 위반 적용으로 33명이 체포, 16명이 기소되었다. 판결은 "민족 운동의 일 형태로서 소위 어문 운동은 민족 고유의 어문을 포함한 민족 독립 운동의 점진적 형태" [310]로 5명이 6년에서 2년 실형 판결을 받았다.[311] 함흥 감옥 수감 최현배, 이희승, 이극로, 정인승 등은 1945년 해방까지 3년 옥중 생활을 했고, 이윤재, 한정은 옥사했다. 당시 조선 치안유지법 적용은 신사 참배 강요 항의 기독교도에 대해 불경죄, 보안법, 치안유지법 적용, 소수 인원 독서회나 연구회 활동도 중형 대상이었다.[312]

일본 통치 말기 학교 내 조선어 사용 처벌도 있었지만 일본 내지 사투리 사용 금지 연장선이며 조선어 탄압 기도는 아니다 조선총독부 1921년부터 1945년 일본 통치 종결까지 조선어 능력 검정 합격 직원 승진·급여 유리 처우.[317] 조선어 신문 매일신보 일본 통치 종결까지 발행.

1943년 시점 일본어 이해 조선인 1,000명당 221.5명(「조선사정」1940-1944년판), 8할 조선인 일본어 불가.[318]

1934년 조선총독부 이씨조선 주요 문화재 보호 총독부령 공포.[319] 국보 지정 남대문 등 포함.[319]

일본인 학자와 조선인 제자 역사, 언어, 문학 등 한국학 연구 기초 마련.[320]

중일전쟁 장기화 물자 부족 대책, 정보 통제 필요성 일본 내지 1938년 4월 국가총동원법 제정, 8월부터 신문용지제한령 용지 제한, 신문 정리 통합 739개 신문 54개 감축, 신문지법, 출판법 엄격 적용 신문·출판·언론 통제 강화. 조선 1940년 “조선일보”, “동아일보” 총독부 명령 폐간, 조선어 신문 총독부 발행 매일신보만, 이오지마 전투 일본군 전멸 조선어 보도. 총독부 발행 조선총독부관보 1930년 4월 1일부터 조선어 번역문 게재 폐지, 일본어만 사용.[321]

창씨는 조선 종족 관리 시스템(본관, )에 가족명 “씨” 추가, 일본, 서구 일반 가족 단위 관리 시스템 편입. 중국식 부부별성 사용 아내 남편 동일 가족명 아래 관리. 개명 성명 신고 시 이름 일본식 변경 제도. 이전 일본 내지 성명 허용, 엄격 제한. 1940년 조치 창씨개명.

제도상 필수, 모든 조선인 적용. 임의적, 남지로 총독 언명. 수노나오키 1940년 2월 11일 신고 시작 이후 전 가구 수 성명 신고 비율 4% 정도, 조선총독부 방침 전환, 하부 기관 중심 조선인 일본식 성 사용 권장 캠페인, 결과 80% 이상 조선인 일본식 씨 신고.[322] 나머지 2할(일본 내지 약 85%) 법정 창씨 조선식 성 씨 설정. 박춘금, 홍사익 등 법적 창씨 조선식 성명 씨명 사용. 조선 거주 조선인 중 개명자 비율 9.6%.

창씨개명 첫 번째 목표 조선인 성 일본식 변경, 조선 일본식 가족 제도 도입 주안점.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 고유 지명 일본식 강제 변경 사례 중앙일보 2009년 10월 기사 지적.[324] 경북 청송군 영덕군(경북 청송군 영덕군) 주왕산(주왕산) 용추(용추) 폭포, 중용추, 용연(용연) 폭포(혹은 상용추) 세 폭포 중 첫 번째 폭포 이름 선녀탕 변경. 이름 ‘용’ 식민지 백성 기세 강해짐 우려 개명.[324] 경상북도 경산군 용성면(경상북도 경산군 용성면: 현재 경상북도 경산시) 쟁광리(쟁광리) “일광리”(일광리) 변경, “경치 일본 ‘닛코’ 똑같다” 이유 이름 변경.[324] 대전 계족산(계족산) 지명 원래 봉황산(봉황산), 봉황 닭 ‘격하’ 계족산 변경(위 중앙일보 보도 북한산 원래 “삼각산” 이름, 일제강점기 개명 주장, “북한산” 이름 조선 시대 존재, 숙종 1711년 축성. 위 “선녀탕” 두 번째 “절구폭포” 아래 포트홀 명칭, 폭포 이름 변경 결과 아님 [http://100mountain.tistory.com/310]).

1905년 대한제국 제2차 한일협약 일본 보호국. 이후 일본(한국통감부, 조선총독부) 조사. 1910년 대한제국 병합. 1920년 인구조사 17,264,119명. 이씨조선 시대 부역 근거 "호적"보다 가문 표창 "족보" 선호, 가족, 혈연 사상 도입[389] "일본식 호적" 수용 토대 가능성.

1910년 대한제국 병합 대한제국 통치권 일본 천황 이양, 대한제국 편찬 호적 일본 정부 관리. 대한제국 통치권 천황 이양 통치 경위, “병합”(병합조약 2조), 선거법 등 통치 관련 법률 일본 내지 법률 직접 적용 불가. 병합조약 체결 직후 1910년 8월 29일 한국노국호오개메조선토칭스르노견(메이지 43년 칙령 제318호) 발표, 즉시 시행.

조선인 “일본 제국 신민” 편입, 일본인 조선 이주 활발, 1910년 12월 말 시점 조선 거주 일본인 50,992호(171,543명). 병합 후 조선 통치 조선총독부 직접 담당, “협력적 조선인”, 조선 거주 일본인 조선반도 정치 참정권 없음. 1913년 일본인 사회 거류민단 해체, 사실상 자치권 박탈. 1920년대 이후 협력적 조선인 포함 식민지 조선 참정권 문제 정치적 과제, 일본 국내 연고지 중의원 의원 선출 “식민지 정책 결정 과정” 개입 목표.[390] 조선반도 1931년 제한 선거 지방 의회 개설, 1933년 5월 11일 조선 아사히(아사히 신문 외지판) 13개 도(일본 내지 부현 상당) 의회 당선 의원 중 약 80% 조선인.[391]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불황기 재정 규모 축소, 증세 정책 일반 농민 불만 증대 조선인 저항 활발, 자치 확대 움직임 축소.[392]

조선인 일본 제국 신민 지위 부여, 일본 내지 거주 국정선거 참정권, 피선거권 인정(→1925년 보통선거법), 중의원 선거 참여 가능. 유일 조선인 박춘금 중의원 의원 선출. 이전 일본 내지 선거구 출마, 1945년(쇼와 20년) 4월 1일 개정 중의원 의원 선거법 타이완, 조선 제국 의회 의석, 선거 외지 중의원 의원. 유권자 1년 이상 직접 국세 15엔 이상 납세 제한 부과, 보통선거 아님. 의석 수 중의원 정수 466 타이완 5명, 조선 22명. 1943년(쇼와 18년) 일본 내지 편입 사할린 동시 3명 의석 인정. 패전 실시 불가. 귀족원 타이완, 조선 칙선 의원 선출 결정, 양 지역 합쳐 10명 의원 선출.[393] 로비스트 "조선통" 조선 통치 관련 법안, 의안 제안.[394]

이조시대(李氏朝鮮時代) 가난 남한(南朝鮮) 많은 조선인 일자리 일본 이주.[264][265] 일본 입국 입국 증명서 필요,[395] 많은 조선인 일본 내지 밀항.[396] 밀항업자 밀항 알선 거액 부 축적.[395][397] 2,000명 밀항 밀항업자 1만 수천 엔 첩 10명.[397] 밀항 1930년대 급증, 매일 적발.[396] 1934년 오카다 내각(岡田内閣) 조선인 밀항 단속 강화 「조선인 이주 대책 건(朝鮮人移住対策ノ件)」 각의 결정, 이후 밀항 증가.[264][265][396][398] 밀항 일본 정부 입국 제한 완화,[399][400] 입국 조건 미충족자 밀항.[400] 제2차 세계 대전 중 밀항, 밀항 조선인 체포.[401]

오사카 아사히 신문(大阪朝日新聞) 취재, 온가 공업소(遠賀工業所) 고용 조선인 광부 고액 임금 고용.[402][403] 여비 부담, 고임금 등 감언이설 저임금 속 숙소비, 식비 등 명목 공제 실제 자유 사용 금액.[404][405]

1944년 9월부터 1945년 3월 국민징용령(国民徴用令) 징용(徴用) 조선인 입국.[406]

1951년 강화 조약 체결, 연합군 점령 종료 일본 체류 조선인 조선 국적(朝鮮籍), 1948년 건국 대한민국(韓国) 국적 취득. 조선 입국자 대부분 규슈, 중국, 킨키 지방 체류, 전후 한국 밀항 조선인 지방 거주. 조선인 재일 한국·조선인(在日韓国・朝鮮人).

재일 1세, 2세 중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토지조사사업(土地調査事業), 일본군 등 식량 수탈(징용·공출)(徴用・供出) 등 생활 곤궁 일본 주장.[407]

총독부 조선반도 행정·사법·입법 총괄, 조선반도 주둔 일본군 지휘·방위 권한 부여(조선총독부관제 제3조). 총독부 철도, 통신 사업 경영, 조선은행 감독권(1924년까지). 임야 사업(영림창), 전매 사업(담배·소금·인삼) 경영. 조선 13도 도장관(1919년부터 지사) 임명, 각 지서 행정 업무 수행. 총독부령 1년 이하 징역 또는 금고, 구류, 200엔 이하 벌금 또는 과료 처벌(제4조). 그 이상 죄과 또는 총독부령 의하지 않는 법령 일본 내지 제정법. 정무 전부 내각총리대신 경유 천황 직접 상주(제3조), 실제 업무 척무성, 내무성 등 내지 행정기관 요명통첩要名通牒일본어 따름.

이씨조선 시대 조선팔도 고종 32년(1895년) 23부, 고종 33년(1896년) 제정 13도제 행정구역.

4. 1. 무단 통치기 (1910~1919)

무단 통치를 실시한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한일 합병 직후 조선총독부는 1910년 9월에 헌병 경찰을 창설하고 무단 통치에 돌입하였다. 헌병은 일반 경찰의 행정까지 담당하면서 언론·집회·출판·결사의 권리를 제한하고, 즉결 처분권 등을 갖게 되었다. 조선총독은 일본군 현역 혹은 일본 예비역 장성 중에서 임명되었고, 일본 천황에 직속되어 입법권·사법권·행정권 및 군대 통솔권까지 장악하였다. 또한 천황 직속이라 내각이나 의회의 간섭을 받지 않았다. 총독 아래에는 행정과 교육, 문화를 담당하는 정무총감과 치안을 담당하는 경무총감이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2만여 명의 헌병 경찰을 한반도 전역에 배치하고 한국인 중 헌병 보조원을 채용하여 헌병들의 업무를 보조하게 하여 헌병 중심의 억압 통치를 실시하였다.[451]

헌병 경찰은 치안업무와 함께 독립운동가 색출 등 민생 전반에 관여하였는데, 당시 통치의 억압성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제도가 조선 태형령이다.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던 태형을 부활시켜 한국인에게만 차별적으로 적용하였다. 이 시기에는 한국인의 각종 단체가 해산당하였다. 1911년 신민회를 해산시킨 105인 사건이 대표적이다. 일제는 신문지법, 출판법, 보안법을 통해 한국인의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제한하였다.

일본은 제1차 조선 교육령에서 한문 교육 중심의 서당을 폐지하고 초등학교를 설립해 갔다. 기존의 학교는 구제전문학교으로 재편되었다.

4. 2. 문화 통치기 (1920~1930)

3·1 운동 이후,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는 통치 방식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부임을 계기로, 기존의 강압적인 통치 방식에서 벗어나 회유적인 통치 방식으로 전환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단체 활동과 언론 활동의 허용, 초등 교육과 농업 교육의 확대로 이어졌다.[452]

그러나 이러한 '문화 통치'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민립대학 설립 운동을 탄압하는 등 민간의 고등 교육을 부정하는 모습이 나타났으며, 일본인과 조선인을 차별하는 각종 법규들이 여전히 존재했다.[452]

또한, 헌병 경찰 제도를 보통 경찰 제도로 바꾸었지만, 실제로는 경찰의 수와 장비를 더욱 강화했다. '고등 경찰제'와 치안 유지법을 도입하여 독립 운동을 억압했으며, 신문에 대한 검열, 삭제, 폐간 등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민족주의에 대한 억압은 민족주의 세력 내에서 비타협적 민족주의와 민족 개량주의로 분화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는 자치 운동(참정권 운동)으로 발전해 나갔다.

1920년대에는 많은 한국인들이 헌병보조원이나 일본 관료직에 응시했다. 1922년 순사직 경쟁률은 약 2.1대 1이었으나, 문화 통치가 본격화된 1920년대 중반 이후에는 10대 1을 넘어섰다. 1935년에는 19.6대 1로 최고점을 기록한 후, 1936년 14.1대 1, 1937년 10.9대 1로 하락했지만, 1920년대 중반부터 태평양 전쟁 이전까지 10~20대 1의 높은 경쟁률을 보였다.[460]

4. 2. 1. 산미증식계획과 경제 수탈

3·1 운동 이후, 사이토 마코토 총독은 이른바 '문화 통치'를 표방하며 강압적인 통치 방식에서 유화적인 통치 방식으로 전환했다. 이는 단체 활동 및 언론 활동 허가, 초등 교육 및 농업 교육 확대로 이어졌지만, 민립대학 설립 운동 탄압과 일본인과 조선인 간 차별 대우는 여전했다.[452]

이 시기 일본은 산미증식계획을 통해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토지 개량과 수리 조합 역할 증대로 미곡 생산량을 늘리려 했으나, 증산량보다 일본으로 유출되는 양이 더 많아 조선의 식량난은 심화되었다. 증산 비용은 소작 농민에게 전가되었고, 총독부는 식민지 지주를 옹호하여 식민지 지주제가 심화되었다. 이 계획은 1930년대 초 일본 내 쌀 공급 과잉으로 잠시 중단되었다가, 대륙 침략 가속화와 함께 재개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 공업 자본의 성장으로 잉여 자본을 통한 식민지 공업화 필요성이 커졌다. 제사, 면방직 등 경공업 중소 자본 투자가 증가했고, 일부 일본 대자본 투자도 있었다. 한국인 자본의 회사와 공장도 성장하여 한국인 노동자 수가 증가했으나, 임금 차별과 열악한 노동 환경으로 노동 쟁의가 활성화되었다.

4. 3. 민족 말살 통치기 (1931~1945)

1931년 일제는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화민국을 비롯한 대륙 침략을 본격화했고, 한반도를 중국 대륙 진출의 전진기지로 삼았다. 이에 따라 경제 정책도 병참 기지화로 바뀌었다. 이 시기 조선 사상범 보호 관찰령 등을 공포하여 사상 통제를 강화했고, 일선동조론을 통해 한국 민족주의를 부정했다.

일제는 대공황 이후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보호 무역 강화로 면방직 원료 공급이 부족해지자, 한국에 남면북양 정책을 수립하여 공업 원료 증산을 위해 남부에는 면화 재배를, 북부에는 면양 사육을 독려했다. 병참 기지화 정책에 따라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에 발전소를 건립하고 광업 분야를 성장시켜 한반도 북부(현재 북한)에 군수산업을 대거 건립했다.

1937년 중일 전쟁을 기점으로 침략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국가총동원령 하에 산미증식계획이 재개되고 미곡공출제가 시행되어 한국인들은 식량을 배급받는 상황에 놓였다. 전쟁 초기에는 지원병제와 징용제를 실시했는데, 1940년대 태평양 전쟁 발발로 이러한 폐해는 더욱 심화되었다.

조선총독부만주사변과 중일전쟁에 동원할 인력, 군자금, 군수품을 한국에서 조달했으며, 징용, 징발, 지식인들을 통한 자발적 징용, 징발 독려, 성금 모금 등 다양한 방식으로 노동력과 자본을 빼앗아갔다. 1941년까지 약 160만 명의 한국인이 일본 내 공장, 건설 현장, 탄광, 농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식민지 국민은 전쟁에 동원할 수 없다는 국제규약이 있었지만, 조선총독부는 징병 제도를 실시하여 한국인을 전쟁에 동원했다. 또한 10대 초반에서 40대에 이르는 여성들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하거나 군수 공장 등지에 보냈으며, 그 중 대부분을 중국과 남양지방의 최전선에 투입하여 일본군 위안부로 삼았다.[454]

1943년 조선인 육군특별지원병 병사


내선일체일선동조론에 기반한 황국 신민화 정책으로 민족 말살 통치가 진행되었다. 황국신민의 서사 암기, 신사 참배, 일본어 사용이 강요되었다. 애국반을 통해 국민 생활 전반을 통제했고, 학교의 한글 교육과 한국의 역사 교육은 중단되었으며, 창씨개명이 강압적으로 시행되었다. 민족성이 강한 전문학교는 폐교되거나 강제 개명당했다.

일본인 언어학자들은 "한국어는 일본어 방언이며, 궁극적으로 소멸시켜야 한다"는 한국어 방언론을 주장하며 한국어 폐기와 일본어 모국어화를 강요했다. 1938년 제3차 교육령에서 한국어가 수의(隨意)과목이 된 것을 시작으로, '국어(일본어)상용'운동이 본격화되면서 공교육에서 한국어가 추방되기 시작했다[455].

1942년 조선어학회의 주요 구성원이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는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났다.

4. 3. 1. 전시 동원 체제

1931년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중화민국을 비롯한 대륙 침략을 본격화하면서 한반도는 일본의 중국 대륙 진출 전진기지가 되었고, 경제 정책도 병참 기지화로 바뀌었다. 조선 사상범 보호 관찰령 등으로 사상 통제가 강화되었고, 일선동조론을 통해 한국 민족주의를 부정했다.

일제는 대공황 이후 면방직 원료 공급 부족으로 한국에 남면북양 정책을 수립, 남부에는 면화 재배, 북부에는 면양 사육을 독려했다. 병참 기지화 정책에 따라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에 발전소를 건립하고 광업을 육성하여 한반도 북부에 군수산업을 대거 건립했다.

1937년 중일 전쟁을 기점으로 침략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국가총동원령 하에 산미증식계획이 재개되고 미곡공출제가 시행되어 한국인들은 식량을 배급받게 되었다. 전쟁 초기에는 지원병제와 징용제를 실시했고, 1940년대 태평양 전쟁 발발로 이러한 폐해는 심화되었다.

조선총독부만주사변과 중일전쟁에 동원할 인력, 군자금, 군수품을 한국에서 조달했으며, 징용, 징발, 지식인들을 통한 자발적 징용, 징발 독려, 성금 모금 등으로 노동력과 자본을 차출했다. 1941년까지 약 160만 명의 한국인이 일본 내 공장, 건설 현장, 탄광, 농장에서 일했다. 조선총독부는 징병 제도를 실시하여 한국인을 전쟁에 동원하고, 10대 초반에서 40대에 이르는 여성들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하거나 군수 공장 등지에 보냈으며, 그 중 대부분을 일본군 위안부로 보냈다.[454]

창씨개명과 일본어 사용을 강요한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


민족 말살 통치가 진행되어 내선일체일선동조론에 의거한 황국 신민화 정책이 실시되었다. 황국신민의 서사 암기, 신사 참배, 일본어 사용이 강요되었다. 애국반을 통해 국민 생활 전반을 통제했고, 학교의 한글 교육은 중단되었으며, 한국의 역사를 배울 수 없게 되었고, 창씨개명이 강압적으로 행해졌다. 민족성이 강한 전문학교는 폐교되거나 강제 개명당했다.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의 주요 구성원이 체포되는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났다.

'''조선인 지원병'''[453]
년차지원자합격자지원 배율
19382,9464067.3
193912,34861320.1
194084,4433,06027.6
1941144,7433,20845.1
1942254,2734,07762.4
1943303,3946,30048.2
합계799,20117,66445.2



1936년 한규복 등은 참정권 획득을 계획했으나, 일제 당국의 반대로 무산되었다.[470] 지원병제는 1930년대 중반부터 일부 친일 유지층 사이에서 자발적으로 제기되었다. 박춘금이 일본국회에서 이 문제를 제기했고, 이후 친일인사들이 여러 번 건의했다. 1936년 11월 24일 조병상, 한규복 등이 중심이 되어 1937년 발회식을 가질 예정이었으나,[470] 일본 당국은 이 문제가 참정권과 관계있다 하여 중지시켰다.[470]

한규복박춘금 등은 일본의 전쟁에 조선인들도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본 본국 정부는 이들의 한국인 학병 참여 주장이 한국인 참정권 획득이 목적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사전에 쐐기를 박았다. 그러나 중일 전쟁 이후 병력이 부족해지자 일본은 한국인들의 자발적 학병 참여 운동을 막지 않게 되었다.

1940년부터 조선총독부일본 본국에 한국인의 참정권을 허락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1941년윤덕영박중양[487] 선정되었는데 박중양은 이때 귀족원 의원직을 사양했다. 그러나 박중양1945년 4월 3일 두 번째로 귀족원 의원직에 임명되자 이때는 수용한다.

1936년 한규복, 박춘금 등의 한국인 참정권 운동을 경계하였지만 1940년 태평양 전쟁 이후 병력, 물자의 부족으로 한국에서 병력, 물자를 공출해가면서 한국인에게도 그에 대한 급부를 주어야 한다는 여론이 나타났다. 1940년부터 조선총독부는 일본 본국 정부에 한국인들에게도 참정권을 줄 것을 요구하여 1945년에 비로소 해당 법안이 일본 의회를 통과하였다.

한국인에 대한 참정권의 부여가 법률로써 실현된 것은 1945년 1월일본 의회를 통과한 법률 제34호 '중의원 선거법 중 개정법 율안'과 칙령 제193호 '귀족원령 중 개정안'에 의해서였고, 참정권 부여는 한반도타이완에서 동시에 이루어졌다.[488]

1939년부터 제2차 세계 대전의 군사적 노력을 위한 일본 남성의 징병으로 인한 노동력 부족으로 인해, 한국인을 일본 본토로 일하도록 공식적으로 조직적인 모집이 이루어졌다. 노동력 부족이 심화됨에 따라 1942년 일본 당국은 국가 총동원법의 규정을 한국의 공장과 광산에서 한국인 노동자의 징용과 필요에 따라 일본으로의 강제 이주를 포함하도록 확대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이민자와 강제 노동자의 결합으로 전쟁이 끝날 무렵 일본에 있는 한국인의 총수는 200만 명이 넘었다.[87]

징용된 540만 명의 한국인 중 약 67만 명이 민간 노동을 위해 일본 본토(오늘날 러시아령인 사할린의 가라후토 포함)로 이송되었다. 일본으로 이송된 사람들은 끔찍하고 위험한 조건하에서 일하도록 강요받았다.[88] 일본에서는 67만 명의 동원된 노동자 중 6만 명이 사망했다. 한국과 만주에서는 사망자 수가 27만 명에서 81만 명으로 추산된다.[89]

일본군에서 복무했던 한국인 장교들은 해방 후 대한민국에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대한민국 대통령이 된 박정희, 국무총리를 역임한 정일권, 대한민국 최연소 장군 백선엽, 일본 제국 육군 대령 출신으로 이후 대한민국 육군 장군이 된 김석원 등이 있다.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10명 중 처음 10명은 일본 제국 육군사관학교 출신이며, 한국광복군 출신은 없었다.[104][105]

1944년부터 일본은 한국인을 강제로 징집하기 시작했다. 1944년 이전에 1만 8천 명의 한국인이 육군 입대 시험을 통과했다. 1944년부터 약 20만 명의 한국인 남성이 육군에 징집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많은 한국인 여성들(대부분 12~17세)이 일본군 위안부가 되었다.[115][116][117][118][119]

아시아여성기금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군이 점령 지역에서 수만 명에서 수십만 명에 이르는 여성들을 성노예로 사용하기 위해 강제로 모집했다고 주장했다.[123] 요시미 요시아키는 수십만 명의 소녀와 여성들이 위안부로 강제 동원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124]

90년대 초부터 한국인 위안부 생존자들은 일본군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일본 정부의 명백한 역사 부정에 대해 계속 항의해 왔으며, 전쟁 중 겪은 고통에 대한 보상을 요구해 왔다.[126][127][128] 유럽 연합[129], 네덜란드, 캐나다, 필리핀 등 국제적인 보상 지원도 있었다.[130] 미국은 2007년 7월 30일 하원 결의안 121을 통과시켜 일본 정부에 상황을 시정하고 위안부를 학교 교육 과정에 포함시킬 것을 요청했다.[131]

5. 한국의 독립운동

조선총독부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신민회를 해산시켰다.[457] 국권이 빼앗긴 이후 무단 통치가 강화되면서 항일 의병운동과 애국 계몽 운동은 점차 쇠퇴하였고, 대부분의 의병들은 만주(간도)나 연해주 일대로 이동하였다.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인해 한국인들의 항일 운동은 비밀 결사 형태로 변화하였는데, 대한 광복회, 독립 의군부, 송죽회, 조선 국권 회복단 등이 대표적이다. 이 시기에는 개량 서당과 기독교 계열 학교들이 확산되었고, 사립학교를 통한 민족교육운동도 존재하였다.

일제의 헌병 통치에 의해 많은 의병 부대와 지식인들이 해외로 이주하였다. 만주 서간도 삼원보에서는 경학사, 한족회, 부민단 등이 결성되었고, 독립군 장교 양성을 위한 신흥 무관 학교가 세워졌다. 북간도에서는 민족 학교인 서전서숙명동학교가 설립되었고, 대종교 인사들이 주도하여 중광단, 정의단, 북로군정서 등이 결성되어 무장투쟁을 위한 군사조직이 꾸려졌다.

연해주에서는 블라디보스토크신한촌이 형성되어 민족 운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이에 13도 의군이상설, 이동휘가 주도하는 대한 광복군 정부가 1914년에 수립되었고, 후에 전로 한족회 중앙 총회와 대한 국민 의회 등이 수립되었다. 니콜라옙스크 사건으로 독립군과 붉은 군대는 일본군을 전멸시켰다.

중국 관내의 상하이에서는 1918년 김규식, 여운형, 신채호, 김구 등이 주축이 되어 신한 청년당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파리 강화 회의김규식을 파견하였다. 이 단체는 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반을 조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미주 지역에서는 안창호가 주도한 대한인 국민회와 흥사단이 결성되어 독립 운동 자금을 지원하였고, 이승만은 대한인 국민회에서 활동하다가 따로 대한인 동지회를 조직하고 기독교 학교를 설립하였으며, 박용만은 대조선 국민 군단을 조직하여 국권 회복을 위한 군인을 양성하였다.

5. 1.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918년 미국의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감화된 한국의 지식인들과 청년층은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전개된 세계적인 민족 해방 운동의 흐름에 편승하여 대규모 해방 운동을 전개했다.[136] 그러나 윤치호 등 일부 인사들은 이 만세 운동이 실패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1919년 3월 1일 낮 12시 서울의 탑골 공원에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을 선언한 학생과 청년들은 수십만 명의 군중과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온 거리를 휩쓸었고, 이것이 3·1 운동의 시작이었다.[137] 만세 시위는 일제의 헌병 경찰의 무자비한 탄압 속에서도 삽시간에 전국 방방곡곡 퍼져나갔고, 간도, 시베리아, 연해주, 미주지역까지 퍼져 나갔다.

200만 명이 넘는 민중이 참여하여 약 2개월에 걸쳐 투쟁하는 동안에 232개의 부·군 가운데 229개의 부·군에서 시위와 폭동이 일어났고, 1,491건의 시위를 벌였으며 160개가 넘는 일제 통치 기관을 파괴했다. 그러나 4월말에 접어들면서 일제의 집단 학살, 고문, 심문, 방화 등 무력 탄압으로 3·1운동은 차츰 사그라졌다.[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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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록에 따르면 1년 이상의 시위 기간 동안 46,948명이 체포되고 7,509명이 사망하고 15,961명이 부상을 입었다.[139] 일본측 기록에 따르면 8,437명이 체포되고 553명이 사망하고 1,409명이 부상을 입었다.[139]

이 운동으로 정부 수립 운동이 활성화되었고, 항일 무장 투쟁을 촉진하였다. 또 독립 운동의 이념과 방법론에 변화가 일어나 복벽주의가 청산되고 사회주의 사상이 수용되어 다양한 독립운동 노선이 등장하였다. 이로 인해 또 운동의 주도 세력으로 학생들이 민족 운동의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농민, 노동자, 여성 운동이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윤치호 등은 한국인 민중의 희생자를 냈음에도 지도자들이 적극 앞장서지 않은 것을 비관적으로 보기도 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기 구성원들 (1919)


3·1 운동의 탄압 이후, 한국인들은 한반도를 떠났다. 그중 상당수는 3·1 운동 한 달 후 상하이에 모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망명 정부를 수립하였다. 임시정부는 좌우 성향의 인물들이 혼재하는 다양한 구성원들로 이루어졌으며, 한국의 독립을 옹호하는 다양한 정치적,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140]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도하의 독립 운동은 1920년대 중반 대체로 침체되었으나, 김구의 주도하에 다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김구는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을 시켜 일본 국왕을 암살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해외의 동포들이 격려 편지와 자금을 보내왔다. 김구는 윤봉길을 시켜 상하이 사변 승전 기념 천장절에 폭탄을 던져 적잖은 일본인 사상자들을 발생시킴으로 성공하였다. 이후 두 일왕 암살의 주모자로 수배된 김구는 숨어 다녀야 했으나 난징으로 거처를 옮긴 국민당 정부는 이러한 사건들로 임시 정부를 협력 대상으로 생각하였고, 김구를 지원하였다.

1931년, 임시정부 구성원인 김구는 임시정부의 무장 조직인 한인애국단을 창설하였다. 한인애국단은 1932년 히로히토 천황 암살 시도와 상하이 군사 집회 폭파 등 일본 정부와 식민 관리들을 대상으로 여러 차례 공격을 계획하였다.[141] 상하이 폭파 사건 이후, 그들은 상하이를 떠나게 되었고, 결국 충칭에 정착하였다.[142][141] 충칭에서 국민당과 미국의 도움을 얻어 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이 태평양 전선에서 확대된 1941년 12월 9일에는 연합군에 가담해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발표하지만, 본국 탈환 작전의 준비 중에 일본의 항복을 맞이하게 된다.

5. 2. 무장 독립 투쟁

상해 천장절 폭탄 사건의 실행범 윤봉길


조선총독부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신민회를 해산시켰다. 국권이 빼앗긴 이후 무단 통치가 강화되면서 항일 의병운동과 애국 계몽 운동은 점차 쇠퇴하였고, 대부분의 의병들은 간도나 연해주 일대로 이동하였다.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인해 한국인들의 항일 운동은 비밀 결사 형태로 변화하였는데, 대한 광복회, 독립 의군부, 송죽회, 조선 국권 회복단 등이 대표적이다. 이 시기에는 개량 서당과 기독교 계열 학교들이 확산되었고, 사립학교를 통한 민족교육운동도 존재하였다.

일제의 헌병 통치에 의해 많은 의병 부대와 지식인들이 해외로 이주하였다. 만주 서간도 삼원보에서는 경학사, 한족회, 부민단 등이 결성되었고, 신흥 무관학교가 세워졌다. 북간도에서는 서전서숙과 명동학교가 설립되었고, 대종교 인사들이 주도하여 중광단, 정의단, 북로군정서 등이 결성되었다.

연해주에서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신한촌이 형성되어 13도 의군이상설, 이동휘가 주도하는 대한 광복군 정부(1914년) 등이 수립되었다. 니콜라옙스크 사건으로 독립군과 붉은 군대는 일본군을 전멸시켰다.

중국 관내 상하이에서는 1918년 김규식, 여운형, 신채호, 김구 등이 신한 청년당을 결성하고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였다. 이 단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반 조성에 기여했다.

미주 지역에서는 안창호가 대한인 국민회와 흥사단을 결성하여 독립 운동 자금을 지원하였고, 이승만은 대한인 국민회에서 활동하다 대한인 동지회를 조직하고 기독교 학교를 설립하였으며, 박용만은 대조선 국민 군단을 조직하여 군인을 양성하였다.

3·1 운동 이후 각 지역의 정부 통합 운동이 전개되어 연해주의 대한 국민 의회와 상하이 임시 정부가 해산된 뒤, 13도 국민 대표 회의로 수립된 한성 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족되었다.

한편, 간도와 만주, 연해주 등지의 항일 무장 단체들은 3·1운동을 계기로 국경 지방에서 무장 투쟁을 벌였다. 일제는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독립군 토벌에 나섰으나, 홍범도 부대는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을 전멸시켰고(1920년 6월), 김좌진과 홍범도 등이 지휘하던 독립군 연합 부대는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 1,500여 명을 살상했다. 그러나 일제의 토벌에 밀려 소련으로 들어간 독립군은 자유시 참변(1921년 6월)으로 흩어졌다.

이후 무장 독립운동 세력들은 3부(정의부, 참의부, 신민부)를 조직해 재정비하고자 하였지만, 미쓰야 협정(1925년)으로 만주에서의 활동이 위축되었다. 1920년대 말 남만주 지역에는 국민부가 결성되어 조선혁명군으로, 북만주에는 신민부가 혁신의회로 통합되어 한국독립부로 계승되어 대전자령 전투, 영릉가 전투 등에서 승리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도하의 독립 운동은 1920년대 중반 침체되었으나, 김구의 주도로 다시 활발해졌다. 김구이봉창 의거(1932년 1월 8일)와 윤봉길 의거를 통해 일본에 타격을 주었다.

조선의용대


1931년 9월 만주 침략 이후, 만주에 있던 한국인들은 무장하고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양세봉, 이청천 등의 민족주의자들은 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군을 이끌고 중국인들과 연합작전을 전개했으나, 일제의 공격으로 만리장성 이남으로 후퇴했다. 사회주의자들은 1932년 봄 동만주를 중심으로 유격대를 결성하고 반일 투쟁을 전개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김원봉 등은 중국 국민당의 도움을 받아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조선의용대는 일본군 포로 심문, 첩보 활동 등에 종사했고, 주력 부대는 1941년 봄 화베이 지방으로 이동하여 팔로군과 협력, 호가장 전투 등에 참가했다.

자싱, 항저우, 창사 등지로 이동하며 시련을 겪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0년 충칭에 안착, 한국 광복군을 창설했다. 1942년 조선의용대 잔류 부대를 흡수하고, 1943년 8월 미얀마 전선에 광복군 8명을 파견해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전으로 광복이 찾아오면서 한국의 모든 독립 운동도 막을 내렸으나, 일본과 단교했다. 한편, 같은 날 청진시에서는 소련일본 제국과 전쟁을 계속하여 8월 16일에 청진시를 해방시켰다. 1900년대 초부터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에 거주하던 한국인들은 일본 점령에 맞서 게릴라전을 벌였다. 1932년 일본의 만주 침략으로 이들은 작전 기지와 보급품을 잃고 중국 다른 지역으로 피신하거나 러시아 동부의 적군 지원 세력에 합류해야 했다.[135]

5. 3. 문화, 교육, 종교 운동

105인 사건으로 신민회가 해산된 후, 독립운동은 비밀결사 형태로 변화했다. 대한 광복회는 군자금을 모집하고 친일파를 처단하며 독립군 기지 건설을 위해 노력했다.[457] 독립 의군부는 고종의 밀명을 받아 국권 반환을 요구하고 의병 전쟁을 계획했으며, 고종 황제 복위를 주장하는 복벽주의를 내세웠다.[457] 송죽회는 숭의 여학교 교사와 학생을 중심으로 독립 운동 자금을 모금하고, 교회를 통해 민족 의식을 고취하며 여성 계몽운동에 힘썼다.[457]

이 시기에는 개신교와 천주교 계열 학교들이 확산되어 영어, 라틴어, 서양식 기계기술, 수학, 물리학, 세계사, 성서 등을 가르쳤다.

김성수민족산업 육성을 위해 1919년 경성방직을 설립했다.[457] 그는 최준 등 지방 유력 인사들을 참여시키고,[457] 일본 방직회사와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한국인 주주를 공모했다.

일본에서 도입한 도요타 방직기


1921년 이상재, 이승훈, 김성수 등은 조선민립대학설립기성준비회를 발족하고 전국적으로 발기인을 모집했으나,[465] 조선총독부의 간섭과 경제 불황, 자연재해 등으로 인해 실패했다.[465]

민립대학설립운동 홍보 광고(1923년 3월 20일동아일보)


1920년대 초, 김성수, 조만식 등은 국산품 애용을 호소하며 물산장려운동을 추진했다.[466]

1931년 김성수, 송진우 등은 농촌 계몽운동인 브나로드 운동을 주도했다.[469] 대학생들은 여름방학을 이용해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했고, 동아일보의 후원을 받아 농촌 계몽에 나섰다.[469] 이 운동은 1938년 일제 당국의 탄압으로 중단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신채호는 민중 중심의 사학을 내세웠다.

개신교는 일제강점기에 기독교를 민족주의의 표현으로 받아들여 성장했다.[133] 개신교는 유교식 제사 의례를 대체하는 방식을 개발하여 전통과의 조화를 이루었다.[134]

경성제국대학


일제는 경성제국대학을 정점으로 하는 교육 체제를 도입하고, '황민화' 교육을 실시했다.[187] 초등학교는 '국민학교'로 불렸으며,[187] 정치적으로 부적절한 용어가 되었기 때문에 현재는 ''초등학교''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일제 강점기 공립 보통학교 수와 학생 수


일제 강점기 공립 보통학교 취학률


일제는 공식적으로 평등한 교육 제도를 수립했지만, 실제로는 차별이 존재했다.[191] 한국사와 국어 교육은 점차 축소되었고,[192] 1943년에는 모든 한국어 강좌가 폐지되었다.[203]

1944년 일제 강점기 학력별 현황[193][194]
학력인구%
대학7,3740.03%
전문학교22,0640.1%
중등 및 고등학교199,6420.9%
초등학교1,941,7898.5%
사립학교 및 서당980,1224.3%
무학19,642,77586.2%
합계22,793,766100%



일제 강점기 한국의 인적 자본 향상에 공교육 도입이 기여했다는 긍정적 평가와,[195]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에야 진정한 민주적 공교육 발전이 이루어졌다는 부정적 평가가 공존한다.[196]

일제 초기에는 한국어로 수업이 이루어졌고, 한자와 한국 문자의 혼용체가 사용되었다.[199] 1928년 조선어학회는 한글날을 제정했다.[202] 1933년에는 현대 남북한 표기 체계의 기초가 완성되었다. 1938년 이후 한국어 사용과 교육이 금지되었다.[203]

일본은 국가 신토 참여를 의무화하고 조선신궁과 평양신궁을 포함한 신사를 건립했다.[5][214] 이 신사들은 1945년 해방 직후 파괴되었다.[216]

조선에서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불교가 억압받았고, 동학과 같은 신흥 종교가 등장했다.[325] 기독교는 삼일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336] 제암리교회사건과 같은 탄압을 받았다.[336] 신도 보급은 조선신궁 건립 논쟁을 겪으며 더디게 진행되었고,[337] 1937년 이후 황민화 교육의 일환으로 신사 참배가 강요되었다.[337]

5. 4. 사회주의 운동의 성장

1920년대에는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의 영향으로 공산주의 사상이 국내에 널리 퍼졌다. 이에 따라 서울청년회, 신사상연구회, 북풍회 등 사회주의 사상 단체가 많이 조직되었다. 사회주의자들은 노동 운동, 농민 운동 등 대중 운동을 이끌었고, 공산당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1924년에는 조선노농총동맹조선청년총동맹을 만들었고, 같은 해 4월에는 조선공산당을 비밀리에 결성하여 공산주의 운동을 더욱 활발하게 펼쳐나갔다.[467]

이들은 일제의 탄압으로 공개적인 활동이 어려워지자, 해외의 민족유일당 운동과 국내 6·10 만세 운동을 계기로 좌우합작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사회주의 세력은 정우회 선언을 통해 우경화되었고, 민족주의 세력은 조선 민흥회를 결성하여 좌파 세력과 연대할 가능성을 보였다.

1919년3·1 운동 당시 집단 시위의 효과를 본 노동자·농민들은 노동 운동, 농민 운동을 급격하게 발전시켰다. 대표적인 투쟁 사례는 다음과 같다.

  • 1921년 9월: 부산 부두 노동자 5,000여 명의 총파업
  • 1923년 8월: 평양 양말 공장 노동자 2,000여 명의 파업
  • 1923년 9월~1924년: 전라남도 무안군 암태도 소작쟁의
  • 1929년 1월~3월: 원산 총파업
  • 1930년 1월: 부산 조선 방직 여성 노동자 3,000여 명의 파업 (1개월)


이러한 경제적 생존권 투쟁은 점차 항일 민족 운동으로 변화했다. 1930년 5월 함경남도 신흥의 장풍 탄광 노동자 300여 명은 노동 조합 설립을 방해하는 일본인 자본가와 경찰에 맞서 탄광 시설과 사택을 부수고, 총을 쏘는 경찰에게 도끼, 망치, 곤봉으로 맞섰다. 1930년 7월 함경남도 단천의 2,000여 명 농민들은 일제의 산림 정책에 반대하여 군청을 포위, 습격했고, 이 과정에서 여러 명이 일경의 총탄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이러한 노동자, 농민들의 투쟁은 생존권 확보를 위한 싸움이었지만, 일제의 식민지 착취와 지배 구조를 반대하는 항일 민족 해방 운동의 일환이었다.

1924년 김성수, 송진우 등은 '연정회(硏政會)' 설립을 추진하였는데, 이는 '민족개량주의' 혹은 '실력양성론'이라는 이름 아래 일제 조선총독부의 '문화정치'에 맞춰 일제와 타협하려던 시도였다. 그러나 이는 비타협 민족세력의 반발로 중단되었다.[467]

이후 사회주의자들은 민족주의자들이 타협적인 민족개량주의자와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으로 나뉘자,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1927년 2월 신간회를 결성했다. 신간회 결성 후 각 지방에 지회가 잇달아 만들어졌고, 1928년 말에는 143개의 지회가 조직되었으며, 회원 수는 2만 명에 달했다. 신간회 본부와 각 지회는 당시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던 여러 대중 운동을 이끌거나 지원했다.

1927년 2월 14일자 조선일보에서 신간회 창립을 보도하는 기사.


특히 1929년 11월 광주에서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들 사이의 충돌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진상 조사단을 보내고 서울에서 대규모 민중 대회를 열어 전국적인 항일 운동으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일제는 민중 대회 사건을 빌미로 신간회 중앙 핵심 간부 40여 명을 체포했다. 이로 인해 신간회 활동은 위축되었고, 1931년 5월 사회주의자들의 주도로 해소되었다.

1930년대에는 혁명적 노동 조합, 농민 조합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노동 조합 활동가들은 지하에서 비합법적인 준비 조직을 만들고, 표면적으로는 합법적인 노동 조합, 파업 본부, 노동자 친목회 등을 만들어 운동을 이끌었다. 또한 공장 신문, 팜플렛, 전단 등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8시간 노동제, 최저 임금제, 동일 노동·동일 임금을 알리고, 민족 해방 운동을 선동했다. 혁명적 노동 조합 운동은 공업 시설이 집중된 흥남, 함흥, 원산 일대에서 가장 활발하게 일어났다. 1931~35년까지 혁명적 노동 조합 운동을 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된 사람은 전국에 걸쳐 1,759명이었다.

농민 조합 운동가들은 농촌 내의 기존 청년 동맹, 여성 동맹, 소년 동맹을 혁명적 농민 조합에 편입해 각각 농민 조합의 청년부, 부녀부, 소년부로 만들어 힘을 키우고, 농민의 이익을 위해 투쟁했다. 혁명적 농민 조합의 지도 아래 농민들은 격렬한 반일 민족 해방 운동을 전개했는데, 특히 함경북도 명천의 농민들은 동과 면마다 계엄대, 동지 탈환대, 규찰대, 연락대 등을 조직하고 일제의 폭력에 맞서 싸우는 등 투쟁을 대중적 폭동으로 발전시켰다. 혁명적 농민 조합은 전국 70여 개 군에 조직되었고, 1931~35년에 경찰에 적발된 혁명적 농민 조합 사건은 43건, 검거된 사람은 4,121명이었다. 중일 전쟁 이후 더욱 엄혹해진 상황에서도 혁명적 농민 조합 운동은 비밀리에 계속되었다.

6. 일본의 패전과 한국의 광복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만주 침공, 그리고 미국과 소련군에 의한 한반도 점령이 임박함에 따라,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연합군에 항복했다. 이로써 35년간 지속된 일본의 식민 지배가 종식되었지만, 일본군은 9월 중순까지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한국 남부에 몇 주 더 남아 있었다.[147][148]

존 R. 호지 장군(General John R. Hodge) 지휘하의 미군은 1945년 9월 8일 한반도 남부에 상륙한 반면, 소련군과 일부 한국 공산주의자들은 한반도 북부에 주둔하고 있었다. 미군의 딘 러스크 대령(Colonel Dean Rusk)은 북한의 소련군 사령관 치샤코프에게 한반도를 북위 38도선에서 분할할 것을 제안했다. 이 제안은 전후 세력권을 결정하기 위한 긴급 회의에서 이루어졌으며, 이는 한국 분단으로 이어졌다.

일본 지배에서 해방된 후, 1946년 10월 23일 북위 38도선 이남의 미군정(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에 의해 "성명 복구 명령"이 발령되어 한국인들은 원하는 경우 자신의 이름을 복구할 수 있게 되었다. 많은 재일 한국인들은 차별을 피하거나, 나중에는 일본 시민으로 귀화하기 위한 요건을 충족하기 위해 일본식 이름을 유지하기로 선택했다.[149]

7. 평가와 쟁점

일제 강점기로 인해 여러 한국계 이산 집단이 형성되었다. 재일 한국인은 약 60만 명의 일본 거주 한국인 후손들로,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221] 사할린 한국인은 일본에서 소련으로 사할린이 이관된 후, 일본이나 한국으로 귀환하지 못하고 사할린에 남겨진 4만 3천 명의 한국인들이다.[222]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의 행위 때문에 러시아와 소련으로 탈출했고, 1937년에는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했다.[223] 이들은 옛 소련 전역의 고려인 인구를 이루게 되었다.[224]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약 45만 명의 한국인 남성 노동자가 일본으로 강제 동원되었다.[225] 일본군 위안부들은 일본 제국 전역에서 왔으며, 역사적 추정치는 1만 명에서 20만 명에 이른다. 현대 역사가들은 최대 50만 명의 위안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며, 이 중 한국인의 수는 정확히 알 수 없다.[226][227] 한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이 여성들은 하루 평균 29명, 최대 40명의 남성을 상대해야 했다.[228] 그러나 2018년 기준으로 생존자는 50명 미만이다. 위안부들은 종종 공장 일자리를 약속하며 시골 지역에서 모집되었는데, 일본 회사의 한국 하청업체의 기록에는 간호사나 사무직으로 허위 분류되어 있었다.[229] 일본 정부가 위안부 관련 공식 기록을 고의적으로 파기했다는 증거도 있다.[230][231]

많은 한국인들이 731 부대에서 비밀 군사 의학 실험 대상이 되었다. 수용소에서 사망한 희생자 중에는 구 소련과 한국 출신 희생자 최소 25명이 포함되어 있다.[232] 일부 역사가들은 최대 25만 명이 인체 실험의 대상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233] 731 부대 출신의 한 증언에 따르면 실험 대상의 대부분은 중국인, 한국인, 몽골인이었다.[234]

도쿄 재판은 1946년 4월 29일 개최되어 일본군 관계자들을 A급, B급, C급 혐의(평화에 대한 범죄, 일반적인 전쟁 범죄, 반인륜 범죄)로 기소하였다. C급 혐의는 주로 일본이 평화 시 또는 전시에 자국민이나 연합국 시민에 대해 저지른 잔학 행위를 다루기 위해 만들어졌다.[235] 그러나 주요 연합국들은 자신들도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국의 식민지 잔혹 행위가 기소될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아 C급 혐의를 강력히 추진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일본 식민지 시대의 한국과 타이완 희생자들은 국제 법 체계에서 어떠한 구제 수단도 얻지 못했다.[236][237]

2002년 대한민국은 일본 협력자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2006년에 완료된 이 조사의 일부에서는 동족을 착취하여 이익을 얻은 개인들의 명단이 공개되었다.[238] 협력자들은 동족 착취로 이익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녀들은 착취로 축적된 돈으로 고등 교육을 받는 등 추가적인 이익을 얻었다.[239]

“일제하 강제동원 진상규명위원회”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군 교도소 간수로 일하면서 B급 및 C급 전범으로 기소된 148명의 한국인 중 86명으로부터 제출된 피해 보고서를 조사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구성한 이 위원회는 그들 중 83명을 피해자로 인정한다고 발표했다. 위원회는 이들이 징집을 피하기 위해 마지못해 간수로 일했지만, 일본군의 전쟁 포로 학대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밝혔다. 조사 책임자 이세일은 영국 국가 기록원에서 입수한 15명의 한국인 간수에 대한 군사 기소 보고서 조사 결과, 명확한 증거 없이 유죄 판결을 받았음이 확인되었다고 말했다.[240]

1940년 한국인의 80%가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했다. 공식적으로는 자발적인 것이었고 초기에는 일제 강점기 정부의 저항도 있었지만, 많은 지역 지도자들은 자녀들이 사회에서 성공하고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일본식 이름을 채택하도록 권장했다.[241] 미국 국립 의회 도서관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 문화는 억압되었고, 한국인들은 일본어를 사용하고 일본식 이름을 사용해야 했습니다"라고 명시하고 있다.[242][243][244] 창씨개명(창씨개명한국어; 創氏改名일본어)이라고 불리는 이 개명 정책은 일본의 동화 정책의 일환이었다.[245][246] 한국인들은 이에 강력히 저항했으며, 한국 이름을 유지한 한국인들은 학교 입학, 관공서 서비스, 식량 배급 등에서 차별을 받았다. 많은 한국인들이 결국 강압에 굴복하여 개명 명령을 따랐다. 이러한 정책은 전쟁 노력에서 상징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어 한국의 운명을 제국의 운명과 묶었다.[247]

일제강점기 조선은 일본 본토와 마찬가지로 1907년과 1931년의 「한센병 예방법」을 적용받았다. 이 법들은 환자들을 구치소에 격리하는 것을 허용했으며, 강제 낙태와 불임 수술이 흔했다. 또한 이 법은 "치안을 어지럽힌" 환자에 대한 처벌을 허용했는데, 당시 많은 일본 한센병 전문가들은 한센병에 대한 취약성이 유전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248] 조선에서는 많은 한센병 환자들이 강제 노역에도 시달렸다.[249] 일본 정부는 입원 환자들에게 보상을 지급했다.[250]

많은 한국인들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당시 군수 공장에서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95] 평화 프로젝트 네트워크라는 단체의 사무총장에 따르면, 두 도시에서 모두 7만 명의 한국인 희생자가 있었다.[96] 일본은 한국에 40억을 지불하고 인도적 지원이라는 명목으로 희생자에 대한 보상이 아닌 복지센터를 건립했다.[96]

일제강점기 친일파들은 전후 친일파로 기소되었다.[251] 2006년, 노무현 대통령은 1890년대부터 1945년 일본 패망까지 친일파 후손을 찾는 조사위원회를 설치했다. 2010년, 위원회는 5권으로 된 보고서를 완료했다. 그 결과, 친일파 후손인 168명의 대한민국 국민의 토지 재산이 정부에 의해 몰수되었다.[252]

일부 보수적인 일본 민족주의자들은 일본의 식민지배와 의도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려는 시도를 해왔다. "일본은 한국을 병합하려는 의도가 없었다" 또는 "한국인들이 일본에 와서 병합을 요청했다" 와 같은 주장이 제기되었고, 이 기간 동안 한국의 경제 발전을 강조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마크 카프리오(Mark Caprio) 학자는 이러한 관점에 대해 회의적이다.[253]

한서 지리지, 속한서 군국지, 진서 지리지의 기록에 따르면, 기원후 2년 조선반도의 인구는 약 180만 명으로 추계된다.[369]

한(漢)나라 시대 호구 기록[369][370]
시대기원호수인구사료
낙랑군(현재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
원시(元始) 2년2년62,812406,748한서 지리지
영화(永和) 5년140년61,492257,050속한서 군국지
태렴(太廉) 초년280년8,600-진서 지리지
현도군(현재 함경도)
원시(元始) 2년2년45,006221,845한서 지리지
영화(永和) 5년140년1,59443,163속한서 군국지
태렴(太廉) 초년280년3,200-진서 지리지
합계
원시(元始) 2년2년107,818628,593한서 지리지
영화(永和) 5년140년63,086300,213속한서 군국지
태렴(太廉) 초년280년11,800-진서 지리지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일본의 역할에 대해서는 일본과 한국, 북한 사이에서 역사 인식 논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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