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환 (18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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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봉환은 1897년 출생하여 북경에서 공산주의 사상을 접하고, 김좌진 측 민족 진영이 활동하던 북만주 해림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한족총연합회를 장악하려다 실패하고,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글을 발표했다. 1929년 하얼빈에서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후 김좌진 피살 사건 직후 고강산과 이붕해에게 살해되었다. 김좌진 암살 사건과 관련하여 김봉환이 배후라는 설과 김일성의 단독 범행설 등 여러 주장이 제기되었다.

김봉환 (1897년)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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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환
출생1897년 5월 28일
사망불명
출생지황해도 서흥군
직업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활동
주요 활동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자금 모집
서훈애족장 (19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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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김봉환은 북경에서 활동하며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접했고, 이후 북만주로 이동하여 공산주의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승려이자 무정부주의자인 운암 김성숙과도 교류했으나 이후 각자의 길을 갔다. 1929년 무렵 북간도 해림현에서 김좌진이 이끌던 민족 진영의 한족총연합회 장악을 시도했으나 실패했으며,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여성 문인 강경애와 동거했으며, 1929년 겨울 하얼빈에서 일본 영사관에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후 주변의 의심을 받았다.

그는 공산주의 운동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한 김좌진의 암살을 계획하고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았다. 김좌진 피살 사건 직후, 김봉환은 고강산과 이붕해(李鵬海, 1899~1950)에게 살해당했다. 김봉환의 김좌진 암살 연루 여부 및 배후에 대해서는 만주 공산주의 단체 기관지 「적기(赤旗)」의 기록(서대숙의 연구 포함)과 당시 신문 보도 등 여러 기록과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2.1. 초기 활동

김봉환은 북경에서 활동하며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접촉하여 공산주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승려이자 무정부주의자인 운암 김성숙과도 친분이 있었으나, 이후 운암 김성숙은 남쪽으로 이동했고 김봉환은 북만주로 향했다. 1929년 무렵, 김봉환은 북간도 해림현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김좌진 측 민족진영에 접근했다. 그는 해림에 근거지를 둔 김좌진의 동지들을 포섭하고 일부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한족총연합회를 장악하려 시도했으나, 김종진과 이응규 등의 존재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김봉환은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글을 여러 차례 발표했으며, 여성 문인 강경애와 동거 생활을 했다. 1929년 겨울, 그는 북만주 하얼빈에서 일본 영사관원에게 체포되었다. 당시 만주국에 파견된 일본 영사관 경찰서 경부 송도(松島)는 북간도 해림에 있던 강경애를 하얼빈으로 유인하여 감옥에 갇힌 김봉환과 만나게 했다. 김봉환은 일부 자료를 넘겨준 후 석방되어 강경애와 함께 북간도 해림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6~7년형이 예상되던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일본 경찰의 도움으로 풀려난 사실 때문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의심을 받게 되었다. 또한, 한족총연합회 장악 시도가 실패한 전력 때문에 그에 대한 시선은 곱지 않았다.

이후 김봉환은 북간도 중동선 해림현 산시역에서 활동하던 김좌진을 공산주의 운동의 방해물로 여기고 제거할 계획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이 경계하는 무정부주의자들을 이용해 김좌진을 암살하려 했으며, 이를 위해 박상실, 박성길 등 아나키스트들에게 김좌진에 대한 거짓 정보를 퍼뜨렸다. 그러나 구체적인 무고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김봉환은 김좌진 피살 사건 직후 고강산과 이붕해(李鵬海, 1899~1950)에게 살해당했다.

박기봉(朴奇峰)의 기록에 따르면, 만주 공산주의 단체의 기관지 「적기(赤旗)」 1930년 3월호에 김좌진 암살 교사범으로 지목된 김일성(金一星, 김봉환의 다른 이름)의 죽음을 추도하는 기사가 실렸다고 한다. (서대숙의 1967년 저서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연구』에도 유사한 내용이 언급된다.)

한편, 중외일보 1930년 2월 24일자 기사 「배후(背後)에서 권총(拳銃)으로 김좌진(金佐鎭)에 하수(下手)한 김일성(金一星)」에 등장하는 김일성은 단순 불량배로 묘사되며, 김봉환과는 다른 인물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 기사에서는 해당 김일성이 단독으로 암살을 실행한 것으로 나타난다.

2.2. 항일 운동과 언론 활동

김봉환은 일본 제국주의를 공박하는 글을 종종 발표하였다. 그는 여성 문인 강경애와 동거 생활을 하고 있었다.

1929년 겨울, 북만주 하얼빈으로 갔다가 일본 영사관원에게 체포되었다. 당시 만주국에 파견된 일본 영사관 경찰서 경부 송도(松島)는 북간도 해림에 있는 동거인 강경애를 이용하여 하얼빈 영사관 감옥에 감금된 김봉환과 만나게 했다. 김봉환은 일부 자료를 넘겨준 뒤 석방되어 강경애와 함께 북간도 해림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중형이 예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일본 경찰의 도움으로 풀려난 정황 때문에 김봉환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의심을 받게 되었다. 또한, 그가 한족총연합회를 장악하려다 실패한 전력 때문에 곱지 않은 시선을 받기도 했다.

2.3. 김좌진 암살 사건

김봉환은 북경에서 활동하며 마르크스주의를 접하고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그는 승려이자 무정부주의자인 운암 김성숙과도 교류했으며, 이후 김성숙은 남쪽으로, 김봉환은 북만주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1929년 무렵, 북간도 해림현은 김좌진이 이끄는 민족 진영의 주요 활동지였다. 김봉환은 이곳에서 김좌진의 동지들을 포섭하고 다른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한족총연합회를 장악하려 했으나, 김종진과 이응규 등의 존재로 인해 실패했다.

김봉환은 글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활동을 하기도 했다. 또한 여성 문인 강경애와 동거 생활을 했다. 1929년 겨울, 하얼빈으로 갔다가 일본 영사관에 체포되었는데, 당시 만주국 일본 영사관 경찰서의 송도(松島) 경부는 해림에 있던 강경애를 하얼빈으로 불러 김봉환과 만나게 했다. 김봉환은 일본 측에 일부 정보를 넘겨주고 석방되어 강경애와 함께 해림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6~7년 형을 선고받을 것으로 예상되던 그가 갑자기 풀려나자 주변의 의심을 사게 되었고, 과거 한족총연합회 장악 시도 실패 전력과 맞물려 입지가 더욱 좁아졌다.

이후 김봉환은 김좌진 암살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사건 직후 고강산과 이붕해(李鵬海, 1899~1950)에게 살해당했다. 김봉환의 구체적인 역할과 암살 배후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2.3.1. 암살 배후 논란

김봉환은 북간도 중동선 해림현 산시역에서 공산주의 선동의 방해물인 김좌진을 살해하기로 마음먹고, 공산주의자들이 경계하는 무정부주의자를 이용해 김좌진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김봉환은 박상실, 박성길 등 아나키스트들을 찾아가 김좌진을 무고했으나, 구체적인 무고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김좌진 피살 사건 직후, 김봉환은 고강산과 이붕해(李鵬海, 1899~1950)에게 살해당했다.

김봉환이 암살의 배후라는 주장의 근거 중 하나는 만주 공산주의 단체의 기관지 「적기(赤旗)」 1930년 3월호에 실린 기사이다. 박기봉(朴奇峰)에 따르면, 이 잡지에 암살 교사범으로 지목된 김일성(金一星, 김봉환)의 죽음을 추도하는 내용이 실렸다고 한다. 서대숙의 1967년 저서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연구』에도 동일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한편, 다른 주장도 존재한다. 중외일보 1930년 2월 24일자 기사 「배후(背後)에서 권총(拳銃)으로 김좌진(金佐鎭)에 하수(下手)한 김일성(金一星)」에 등장하는 김일성은 단순한 성행 불량자로 묘사되며, 김봉환과는 다른 인물로 보인다. 이 기사에 따르면 김일성(金一星)이 단독으로 암살을 실행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김좌진 암살의 배후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