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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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강경애는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여성 소설가로, 1906년 황해도 송화에서 태어나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31년 단편 '파금'으로 문단에 데뷔하여, 장편 '어머니와 딸'을 발표하며 작가로 인정받았다. 그녀는 식민지 시대의 빈곤, 여성의 억압, 계급 갈등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들을 주로 썼으며, '인간문제'는 대표작으로 꼽힌다. 1944년 사망했으며, 김좌진 암살 연루설 등 논란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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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애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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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한글 이름 | 강경애 |
한자 이름 | 강경애 (姜敬愛) |
로마자 표기 | Gang Gyeong-ae |
출생일 | 1906년 4월 20일 |
사망일 | 1944년 4월 26일 |
출생지 | 송화군, 황해도, 대한제국 |
사망지 | 고카이도, 조선 |
직업 | 소설가 |
2. 생애
강경애는 1906년 4월 20일 황해도 송화군에서 태어나[2]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장연군으로 이주하는 등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했다.[3] 일찍부터 문학에 재능을 보였으며,[3] 장연 소학교와 평양의 숭의여학교 등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학업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3]
1924년 학업을 중단하고 잠시 중국 룽징으로 건너가기도 했으며,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문학 수련에 힘썼다. 1931년 단편소설 「파금」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다.[4] 같은 해 장하일과 결혼하여 만주 간도로 이주했으며, 이후 간도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대표작으로는 일제강점기 하층민의 삶과 여성 문제를 다룬 장편소설 『인간문제』(1934)가 있다.[5]
1939년 무렵부터 건강이 악화되어[3] 1940년에는 경성제대병원에서 치료를 받기도 했으나, 결국 청력과 시력을 잃는 등 병세가 깊어졌다. 1944년 4월 26일 황해도 자택에서 3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6] 사후 1949년 북한의 문학가들에 의해 황해도 장연에 묘가 세워졌다.
2. 1. 젊은 시절
대한제국 황해도 송화군에서 태어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2]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장연군으로 이주했으며, 어려운 가정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3]어린 시절부터 문학에 재능을 보여, 여성 교육이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던 시절임에도 8세 때 계부의 《춘향전》을 통해 스스로 한글을 깨우쳤다. 10세 무렵에는 동네 어른들에게 옛 이야기를 들려주어 '작은 도토리 이야기꾼'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3]
1915년 장연 소학교에 입학했고, 이후 형부의 도움으로 1921년 평양에 있는 숭의여학교에 진학했다. 이 시기 양주동을 만나 교제하며 사회 의식에 눈을 떴고, 학교의 엄격한 규율에 반대하는 동맹 휴학을 주도하다 1923년 퇴학당했다.[3] 이후 서울의 동덕여자고등학교에 잠시 편입했으나 1924년 중퇴하고 중국 지린성 룽징으로 건너가 안수길, 박영준 등과 동인지 '북향'을 발행하며 문학 활동을 모색했다. 약 1년 반 후 고향 장연으로 돌아와 문학 수련에 힘썼다.

2. 1. 1. 생애 초반
강경애는 1906년 4월 20일 황해도 송화군에서 가난한 농민의 딸로 태어났다. 다만 출생 연도에 대해서는 1907년생, 1905년생, 1902년생, 1908년생 등 여러 설이 존재한다. 위로는 언니 몇 명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1911년,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장연으로 이주하여 살게 되었다.[2] 어머니는 세 자녀를 둔 남성과 재혼했으며, 이러한 가정 환경은 강경애에게 불행한 유년기를 안겨주었다.[3]어린 시절부터 문학적 재능을 보였는데, 여성의 교육 기회가 제한적이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8세 때 계부의 《춘향전》을 통해 스스로 한글을 깨우쳤다. 10세 무렵에는 동네 어른들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어 '작은 도토리 이야기꾼'[3]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3] 학교에서도 작문 실력을 인정받아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읽어주곤 했다.[3]
1915년 장연 소학교에 입학했으며, 1921년에는 형부의 도움으로 평양에 있는 숭의여학교에 진학했다. 이 시기 양주동을 만나 교제하며 그의 연설을 통해 반봉건 사상에 눈을 떴다. 그러나 1923년 10월, 숭의여학교 3학년 재학 중 학교의 엄격한 규율과 기숙사 사감의 처사에 반발하여 동맹 휴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했다.[3] 이후 양주동의 도움으로 서울의 동덕여자고등학교에 편입했으나[3], 1924년 자퇴하고 중국 지린성 룽징으로 건너갔다. 룽징에서는 안수길, 박영준 등과 함께 동인지 '북향'을 발행하는 등 문학 활동을 모색했다. 약 1년 반 동안 룽징에서 생활한 후 다시 장연으로 돌아와 문학 수련에 힘썼다.
강경애의 생애는 일찍 아버지를 여읜 불우한 환경, 기성 문단의 배척, 그리고 한때 내연 관계였던 김봉환이 김좌진 암살 의혹에 연루된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오랫동안 문학사에서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2. 1. 2. 학창 시절
황해도 송화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장연으로 이사했다.[2][3]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7세 무렵부터 계부의 《춘향전》을 읽으며 8세에 스스로 한글을 깨쳤고, 10세 무렵에는 동네 어른들에게 옛 이야기를 읽어주어 '작은 도토리 이야기꾼'이라는 별명을 얻었다.[3]1915년 9세에 장연소학교에 입학했으며, 학교에서 작문 실력을 인정받았다.[3] 1921년 형부의 도움으로 평양의 숭의여학교에 입학했다.[2][3] 재학 중 평양의 학생운동 조직인 <친목회>, <독서조> 등에 참여하며 사회 문제에 눈을 떴다.[2] 또한 학교의 엄격한 규율과 기숙사 운영 방식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3]
1922년 숭의여학교 3학년 재학 중 동맹휴학에 적극 가담하였고, 이로 인해 1923년 10월 퇴학 처분을 받았다.[2] 퇴학 후 1923년 한 문학강연회에서 양주동을 만나 그의 반봉건 사상에 영향을 받았으며, 이후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2][3] 양주동의 도움으로 같은 해 서울의 동덕여학교 4학년에 편입하여 약 1년간 학업을 이어갔다.[2][3]
1924년 양주동 등이 참여한 잡지 금성에 '강가마'라는 필명으로 첫 작품인 단편 시 '책 한 권'을 발표했다.[2] 그러나 같은 해 동덕여학교를 중퇴하였다.[2] 이후 1925년 형부의 도움으로 다시 숭의여학교에 복학했으나, 오래지 않아 다시 중퇴하였다.[2]
2. 2. 문학 활동
강경애는 문학 평론가들로부터 일제강점기의 가장 뛰어난 여성 작가 중 한 명으로 자주 언급된다.[4] 나혜석이나 허정숙과 같은 당대의 다른 저명한 여성 작가들과 달리, 강경애는 그림 등 다른 예술 활동을 병행하지 않고 오직 소설과 에세이 집필이라는 문학 창작에만 집중했다.[4]그녀의 문학은 주로 만주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며, 그곳에서 목격한 극도로 가난한 한국 하층민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러한 특징은 그녀의 여러 작품에서 잘 나타난다.[4] 또한, "어머니와 딸"과 같은 작품을 통해 여성의 억압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며 초기 페미니즘적 시각을 보여주기도 했다.[2] 그녀의 작품 세계는 종종 실패한 관계나 가족과의 단절을 통해 여성이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내용을 담아, 기존의 낭만적 사랑이나 가족 관계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내는 반(反)사랑, 반(反)가족적인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4]
많은 이들이 그녀의 최고 작품으로 꼽는 『인간문제』는 그녀가 남긴 유일한 장편 소설로, 식민지 조선의 다양한 계급 문제와 젠더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었다는 평가를 받는다.[5] 이 작품은 프롤레타리아 문학으로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2. 2. 1. 문학 데뷔와 초기 작품
1929년 말부터 1931년 초까지 조선일보에 독자 투고 형식으로 4편의 글을 발표하며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1931년 조선일보에 단편소설 「파금」을 발표하고, 같은 해 장편소설 「어머니와 딸」을 잡지 『혜성』(1931)과 『제일선』(1932)에 연재하면서 공식적으로 문단에 데뷔하였다.[7] 「파금」으로 데뷔하고 「어머니와 딸」로 작가로서 인정을 받았지만, 서울 중심의 중앙 문단과는 거리를 두고 주로 가정에서 집필 활동을 이어갔다.강경애는 불우한 가정 환경과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았으며, 이는 당시 대부분의 여성들이 자기 정체성을 성찰하거나 글을 쓸 시간과 공간을 갖기 어려웠던 현실을 극복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낸 중요한 성취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배경은 나혜석이나 허정숙 등 다른 동시대 저명한 여성 작가들과는 차별화되는 지점이다.[4] 그녀는 일제강점기의 가장 뛰어난 여성 작가 중 한 명으로 자주 언급되며[4], 그림 등 다른 예술 분야로 활동을 확장하지 않고 오직 소설과 에세이 집필에만 집중했다.
특히 만주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극도로 빈곤한 한국 하층민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냈으며, 「파금」, 「채전」, 「축구전」, 「모자」 등 다수의 초기 작품이 만주 지역을 배경으로 한다.[4] 또한 「어머니와 딸」[2]과 같이 여성의 억압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초기 페미니즘적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녀의 작품 상당수는 실패한 관계나 가족과의 단절을 통해 여성이 비로소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내용을 담아 반(反)사랑, 반(反)가족적인 경향을 뚜렷하게 보인다.[4]
2. 2. 2. 간도 이주와 작품 활동
1931년 6월 장하일(張河一)과 결혼해 간도로 이주하였으며, 이후 경성으로 돌아가지 않았다.[8] 간도 이주 후 강경애는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쳤다. 1931년 8월부터 조선일보에 단편소설 '파금 (破琴)'을 연재하였고, 같은 해 혜성지에 장편소설 '어머니와 딸'을 발표하여 1932년 12월까지 연재하였다. 1932년에는 소설 제일선을 출간하였다. 또한 안수길, 박영준 등과 함께 잡지 《북향 (北鄕)》의 동인으로 참여했다.강경애는 간도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당시 만주에 거주하던 극도로 가난한 한국인들의 삶과 일제강점기 하층민의 비참한 현실, 그리고 국내외 항일 투쟁의 실상을 독자에게 그대로 전달하는 것을 작가적 소명으로 여겼다.[4] 그녀의 작품 다수는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며 간도 지역을 배경으로 하는데, 대표적으로 "파금", "채전", "축구전", "모자" 등이 있다.[4] 또한 초기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여성의 억압 문제를 다룬 작품도 발표했는데, '어머니와 딸'이 대표적이다.[2] 그녀의 작품은 종종 실패한 관계와 단절을 통해 여성이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반(反)연애적, 반(反)가족적 서사를 담고 있기도 하다.[4]
1934년 8월부터 12월까지 동아일보에 연재한 장편소설 ''인간문제''는 많은 이들이 그녀의 대표작으로 꼽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식민지 조선의 다양한 계급 및 젠더 문제를 다루며 프롤레타리아 문학계로부터 사실주의적 묘사로 호평을 받았다.[5]
강경애는 문학 평론가들로부터 일제강점기의 가장 뛰어난 여성 작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4] 나혜석이나 허정숙과 같은 다른 저명한 여성 작가들과 달리, 그녀는 소설과 에세이 집필에만 집중했으며 다른 예술 분야로 활동을 확장하지는 않았다.
주요 작품 (간도 이주 이후)
연도 | 작품명 | 비고 |
---|---|---|
1931 | 파금 | |
1931 | 어머니와 딸 | 장편소설 |
1931 | 혜성 | |
1932 | 제일선 | |
1933 | 채전 | |
1933 | 축구전 | |
1933 | 유무 (有無) | |
1934 | 부자 | 단편소설 |
1934 | 소금 | |
1934 | 인간문제 | 장편소설 |
1935 | 마약 / 마법의 약 | |
1935 | 모자 | |
1935 | 원고료 200원 | |
1935 | 해고 | |
1936 | 지하촌 | |
1936 | 산남 | |
1937 | 어둠 |
2. 2. 3. 일본어 작품 활동
1936년에는 일본어로 소설 장산곶을 집필하여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에 연재하였다. 이 작품은 일본인 노동자와 식민지 조선 노동자 간의 연대 문제를 다루었다. 이듬해인 1937년에는 역자 미상으로 『장산곶』이 「문학안내」(문학안내사)를 통해 소개되기도 하였다.2. 3. 생애 후반
1931년 장연 군청 직원이던 장하일과 결혼하였고, 남편이 전처와의 관계 문제로 인천광역시에서 일용직 노동을 하기도 했다. 이 경험은 이후 소설 인간문제에 반영되었다. 같은 해 6월, 남편과 함께 만주 룽징으로 이주하였다.[3] 이 시기 '어머니와 딸'을 '혜성'에 발표했다.1932년부터 본격적으로 룽징에 정착한 후, 일제강점기 지주, 기업인들에게 착취당하는 민중의 삶을 묘사하는 사회성 강한 작품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933년 3월 단편소설 부자(父子)를 발표하였고, 9월에는 소설 채전(菜田)을 발표하였다. 1934년 2월에는 일본군의 잔혹한 토벌을 묘사한 소설 유무(有無)를 발표했다가 잠시 피신하기도 했으며, 같은 해 5월에는 장편소설 소금, 10월에는 소설 동정(同情) 등을 발표했다. 특히 1934년 8월부터 동아일보에 연재한 장편소설 인간문제는 최하층 여성의 삶을 통해 식민 현실과 계급 차별의 모순을 고발한 역작으로 평가받으며, 프롤레타리아 문학계에서 호평을 받았다.
한편, 이 시기 만주의 사회주의자인 김봉환과 내연 관계를 맺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김봉환은 박상길, 박성실 등과 함께 김좌진 암살 용의자로 지목된 인물이다. 그러나 실제 김봉환의 애인은 고려공산당 여자선전부원 김경애이며, 이름이 비슷하여 강경애로 오인되었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1936년에는 일본인 노동자와 식민지 조선 노동자의 연대 문제를 다룬 소설 '장산곶'을 일본어로 써서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에 연재하였다. 그 외에도 칼럼과 시론을 통해 하층민의 비참한 현실, 악덕 지주의 착취, 부당하게 해고당하는 노동자의 고통 등을 생생하게 고발했다.
1937년 2월 '어둠', 같은 해 11월 소설 '마약', 1938년 5월 소설 '검둥이'를 발표하는 등 꾸준히 활동했으나, 1939년 조선일보 간도지국장을 맡은 이후로는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2][3] 1940년에는 경성제대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이후 청력과 시력을 잃는 등 병세가 깊어졌다. 결국 1944년 4월 26일, 어머니가 사망한 지 한 달 만에 황해도 자택에서 3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6] 1949년 북한의 문학가들에 의해 황해도 장연에 묘가 세워졌다.
3. 작품 세계
강경애는 어린 시절의 빈곤 체험을 바탕으로 일제강점기 한국 하층민과 여성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작가이다. 그의 작품은 미화나 과장 없이 당대 현실을 반영하며, 특히 만주에서의 경험은 여러 작품의 배경이 되었다.[4] 대표작으로는 사회 최하층민의 비극을 다룬 유일한 장편 소설 ''인간문제''[5]와 극한의 가난 속 인간상을 그린 '지하촌'이 꼽힌다.
문학 평론가들은 강경애를 당대 가장 뛰어난 여성 작가 중 한 명으로 평가하며,[4] 나혜석, 허정숙 등 다른 예술가들과 달리 오직 문학에만 전념했다는 점을 특징으로 본다. 또한 '어머니와 딸' 등 초기 페미니즘적 시각을 보여주는 작품과[2], 여성 해방을 위해 기존 관계나 가족에서 벗어나는 서사를 담은 반(反)사랑, 반(反)가족적 경향의 작품도 남겼다.[4]
3. 1. 주요 작품
강경애 작품 세계의 주요 특징은 어린 시절 겪었던 극심한 빈곤 체험을 바탕으로 일제강점기 한국 빈민층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데 있다. 그의 작품은 당시 민중들의 고단한 삶을 미화하거나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만주에서 극도로 가난한 한국인들과 함께했던 경험은 그의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파금", "채전", "축구전", "모자(母子)" 등 많은 작품이 만주 지역을 배경으로 한국 하층 계급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4]일련의 작품 가운데서도 대표작으로 꼽히는 것은 장편 소설 '인간문제'와 단편 소설 '지하촌'이다. '인간문제'는 사회 최하층민들의 비극적인 삶을 통해 다양한 계급 및 젠더 문제를 다루었으며, 많은 이들이 강경애의 최고 작품으로 평가한다.[5] '지하촌'은 극한적인 가난과 궁핍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악해지고 비참해질 수 있는지를 상세히 묘사하여 발표 당시에도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또한 강경애는 '어머니와 딸'과 같이 여성의 억압 문제에 주목한 초기 페미니즘 작품을 쓰기도 했다.[2] 그의 작품 다수는 실패한 관계와 가족으로부터 벗어난 여성만이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내용을 담아 반(反)사랑, 반(反)가족적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4]
문학 평론가들은 강경애를 일제강점기의 가장 뛰어난 여성 작가 중 한 명으로 평가한다.[4] 동시대의 저명한 여성 예술가였던 나혜석이나 허정숙 등이 그림과 같은 다양한 예술 활동을 펼친 것과 달리, 강경애는 오롯이 소설과 에세이 집필에만 집중하며 자신만의 문학 세계를 구축했다.
다음은 강경애의 주요 작품 목록이다.
연도 | 제목 | 비고 |
---|---|---|
1929 | 염상섭씨의 논설 명일의 길을 읽고 | 평론 |
1931 | 파금 | 단편 |
1931 | 어머니와 딸 | 장편 |
1931 | 혜성 | |
1932 | 제일선 | |
1933 | 채전 (菜田) | 단편 |
1933 | 축구전 | 단편 |
1934 | 부자 | 단편 |
1934 | 유무 (有無) | |
1934 | 소금 | |
1934 | 인간문제 | 장편 |
1935 | 모자 (母子) | |
1935 | 원고료 이백원 (原稿料 二百圓) | 단편 |
1935 | 해고 | |
1936 | 지하촌 | |
1936 | 산남 (山男) | |
1937 | 어둠 | |
1937 | 마약 |
'''영역 출판'''
4. 논란과 의혹
강경애는 김좌진 장군 암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4. 1. 김좌진 암살 연루설
정부가 강경애를 2005년 3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한 뒤, 그가 김좌진 암살의 공범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선우 전 국가보훈처 보훈선양국장은 김좌진 장례식 당시 대변인을 맡았던 이강훈 전 광복회장의 생전 증언을 근거로, "강경애는 김좌진 암살을 교사한 김봉환과 내연 관계였으며, 일본 경찰에 공산주의 운동 혐의로 체포된 후 변절하여 김좌진 암살을 공모했다"고 주장했다.[9]하지만 신용하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의 연구 등을 근거로 김좌진 암살의 배후는 일제가 아니며, 따라서 김봉환이 일제의 회유로 암살을 교사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는 반론도 있다. 또한 여러 정황상 김봉환과 함께 암살에 연루된 인물은 강경애가 아니라 고려공산당 소속의 '김경애'라는 다른 인물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https://www.khan.co.kr/article/201201131928145 관련 기사]
5. 평가
강경애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 조직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지는 않았지만, 식민지 현실의 갈등과 모순 속에서 계급 문제를 예리하게 포착하고 이를 사실적으로 그려낸 독자적인 작가로 평가받는다.
6. 기타
강경애는 박화성과 더불어 당대에 “프로문학 진영의 두 수준 있는 문학작가”라는 평을 받은 전업 소설가였다. 나혜석, 허정숙 등 시, 그림, 소설 등을 겸하던 다른 여성 문인들과 달리 소설 창작에만 전념하였다.
일제강점기 후반의 흉년과 세계적 경제 공황, 물자 강제 징집 등 극한적인 빈궁상이라는 사회상을 자신의 작품에 사실적 기법으로 상세히 반영하고 묘사하였다. 이러한 특징으로 1930년대, 1940년대 초 문학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평가되며, 그의 작품을 통해 당시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Kang Kyung Aae Datasheet
http://www.klti.or.k[...]
2014-07-14
[2]
웹사이트
한국문학번역원
http://sso.klti.or.k[...]
2011-05-03
[3]
웹사이트
Kang Kyong-ae | the Feminist Press
http://www.feministp[...]
2011-05-03
[4]
서적
A History of Korean Literatur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5]
웹사이트
From Wonso Pond | the Feminist Press
http://www.feministp[...]
2014-12-02
[6]
문서
李相瓊の説。北朝鮮の記録では1943年とある。
[7]
웹사이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
[8]
뉴스
'[이영아의 여론 女論] 강경애가 경성 문단을 떠난 이유'
http://article.joins[...]
2012-06-04
[9]
뉴스
3월의 문화인물 강경애 전력 논란
http://www.donga.com[...]
동아일보
2005-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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