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단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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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단덕은 699년 평양에서 태어나 요동에서 성장한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당나라 무관으로 활동하다가 안사의 난에 참여했으나 투항하여 756년 장안에서 사망했다. 그의 묘지명은 2010년 시안시에서 발견되었으며, 설인귀의 자손인 설궤가 작성했다. 남단덕은 고구려 유민 중 드물게 당나라로부터 군왕의 칭호를 받았으며, 그의 가족은 고구려 멸망 후 안동도호부 관할 성방에서 당나라의 동북 변경을 방어하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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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단덕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인물 정보 | |
| 씨명 | 남단덕 |
| 한글 표기 | 남단덕 |
| 한자 표기 | 南 単徳 |
| 히라가나 표기 | 난 탄토쿠 |
| 로마자 표기 | Nam Dan-deok |
| 기본 정보 | |
| 출생일 | 699년 |
| 사망일 | 776년 |
| 직업 | 관료 장군 |
| 가족 | 아버지: 남우 |
| 군인 정보 | |
| 출생지 | 당나라 안동도호부 평양 |
| 사망지 | 당나라 장안 |
| 국적 | 당나라 |
| 경력 |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좌금오위대장군(左金吾衛大將軍) 요양군왕(饒陽郡王) |
2. 생애
남단덕은 699년 평양에서 태어나 요동 지역에서 성장한 고구려 유민 출신 인물이다.[6] 그의 아버지는 당나라에서 지방관으로 활동했으며, 남단덕 또한 당나라의 무관으로 경력을 쌓았다.[6][3]
755년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처음에는 반란군에 가담하였으나, 곧 당나라 정부군에 투항하였다.[6][3] 그는 다음 해인 756년 장안에서 생을 마감했다.[6]
2010년 중국 시안시에서 그의 묘지명이 발견되면서 그의 생애와 활동 일부가 구체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3] 그는 고구려 출신 인물 중 남씨 성을 사용한 것이 확인된 최초의 사례이며, 이정기와 함께 고구려 유민으로서는 드물게 당나라로부터 군왕(郡王)의 칭호를 받은 두 명 중 한 명이기도 하다.[6]
2. 1. 출생과 가계
699년 평양에서 태어나 요동에서 성장했다.[6] 그의 가족은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에 의해 안동도호부 관할 하의 성방(城坊)에 안치된 고구려 유민 출신이다. 성방은 귀순한 고구려 병사를 안치하고 당나라의 동북 변경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던 행정 조직이었다.[3] 남단덕의 할아버지 남적(南狄)과 아버지 남우(南祐)는 처음에는 안동도호부 관할 성방에서 직무를 수행했고, 이후 아버지는 마미주(馬米州), 귀주(歸州)의 지방관으로 임명되어 당나라의 동북쪽 국경 지역을 지키는 데 공을 세웠다.[3][6]남단덕은 당나라에서 무관으로 활동했으며, 755년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처음에는 반란군에 가담했으나 곧 당나라 정부군에 투항했다. 그는 다음 해인 756년 장안에서 생을 마감했다.[6] 묘지명에 따르면 그는 장안에서 "내공봉사생(內供奉寫生)"이 되었고, 이후 설궤의 숙부인 설모의 휘하에서 관직을 얻어 중랑장(中郎將)에 이르렀다. 안사의 난 발발 후 강제로 반란에 가담했지만, "공은 휘하 관리에 있으면서 항상 본조(당나라)를 생각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결국 무리를 이끌고 투항(귀항, 歸降)한 것으로 보인다.[3]
그는 현재까지 알려진 인물 중 고구려에서 남씨 성을 사용한 것이 확인된 최초의 인물이다.[6] 또한 이정기와 함께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는 드물게 당나라로부터 군왕(郡王)의 칭호를 받은 단 두 명의 인물 중 한 명이기도 하다.[6]
2010년 중국 시안시 둥바차오 구 훙치 향에서 그의 묘지명이 발견되었으며, 현재 시안 비림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 묘지명은 당나라의 유명한 장군 설인귀의 후손인 설궤가 작성한 것이다. 남단덕이 설궤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두 사람은 일찍부터 알고 지냈으며, 설궤는 남씨 가문이 당나라로 이주한 후 관직에 임명된 상황도 잘 알고 있었다. 설궤는 당시 비서성 저작국 좌랑(秘書省著作局佐郎)으로 있었으며, 정3품 관직에 있던 남단덕의 묘지명을 쓰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3]
2. 2. 당나라에서의 활동
당나라의 무관으로 활동했다.[6] 그의 묘지명에 따르면, 그는 먼저 장안에서 "내공봉사생"이 되었고, 이후 설인귀의 자손인 설궤의 숙부 설모 휘하에서 관직을 얻어 중랑장에 이르렀다.[3]755년 안사의 난이 발발하자, 남단덕은 강제로 반란군에 가담하게 되었다. 그러나 설궤가 작성한 그의 묘지명에는 "공은 휘하 관리에 있으면서 항상 본조(당나라)를 생각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결국 그는 "무리들을 이끌고 귀항"하여 당나라 정부군에 투항했다.[3][6]
다음 해인 756년 당나라 장안에서 생을 마감했다.[6]
3. 묘지명
2010년 중국 시안시에서 남단덕의 묘지명이 발견되었다[3]。 이 묘지명은 고구려 유민 남단덕의 생애와 활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며, 그 구체적인 내용과 역사적 의미는 아래 하위 문단에서 자세히 다룬다.
3. 1. 묘지명 내용
2010년 시안시 둥바차오 구 훙치 향에서 남단덕의 묘지명이 출토되었으며, 현재 시안 비림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묘지명의 저자는 당나라의 유명한 장군 설인귀의 후손인 설궤이다. 남단덕이 설궤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두 사람은 일찍부터 알고 지냈으며, 설궤는 남씨 가문이 당나라로 온 이후 관직 생활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설궤는 당시 비서성 저작국 좌랑으로 근무하고 있었기에, 정3품 관직에 있던 남단덕의 묘지명을 쓰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3]。묘지명에 따르면, 남단덕은 먼저 장안에서 "내공봉사생"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설궤의 숙부인 설모의 휘하에서 관직을 얻어 중랑장까지 올랐다.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남단덕은 강요당해 반란에 참여했지만, "공은 휘하 관리에 있으면서 항상 본조(당나라)를 생각했다"고 기록된 것처럼, 결국 "무리들을 이끌고 귀항"했다[3]。
3. 2. 역사적 의미
그의 묘지명은 고구려 유민의 묘지명 중 24번째로 발견된 것이다. 또한, 고구려 출신 인물 중 남씨 성을 사용한 것이 확인된 최초의 사례이다. 현재까지 확인된 고구려 유민 중에서는 이정기와 더불어 당나라로부터 군왕의 칭호를 받은 단 두 명 중 한 명이기도 하다.4. 가계와 고구려 유민 사회
남단덕의 묘지명은 2010년 중국 시안시 둥바차오 구 훙치 향에서 발견되어 현재 시안 비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묘지명은 당나라의 저명한 장군 설인귀의 후손인 설궤(薛瓌)가 작성했다. 설궤는 남단덕보다 나이는 어렸지만 일찍부터 교류하며 남씨 가문이 당나라로 이주한 후 관직에 임명된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비서성 저작랑(著作郎)으로 재직하며 정3품 관직에 있던 남단덕의 묘지명을 쓰는 임무를 맡았다.[3]
묘지명에 따르면, 고구려 유민 출신인 남단덕은 먼저 장안에서 내공봉사생(內供奉寫生)이 되었고, 이후 설궤의 숙부인 설모(薛某)의 휘하에서 관직을 시작하여 중랑장(中郎將)에 이르렀다. 안사의 난이 발발하자 남단덕은 반란군에 가담하도록 강요받았으나, 묘지명에는 "공은 휘하 관리에 있으면서 항상 본조(당나라)를 생각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결국 "무리들을 이끌고 귀항"했다고 전해진다.[3] 남단덕의 가족 배경과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에 안치된 과정, 그리고 그의 조부 남적과 아버지 남우의 활동은 하위 섹션에서 더 자세히 다룬다.
4. 1. 고구려 멸망과 당나라 안치
고구려 멸망 후, 남단덕의 가족은 당나라에 의해 안동도호부 관할 아래 성방(城坊)의 자제 신분으로 안치되었다.[3] 고구려 멸망 당시 어린 나이였던 남단덕은 아버지 남우와 함께 이곳에 안치되었으며, 이후 성방 자제의 수령이 되었다.[3] 요동 지역 옛 고구려 영토에 설치된 성방은 당나라에 귀순한 고구려 병사들을 관리하는 행정 조직이자 당나라의 동북쪽 국경 방어 역할을 수행했다.[3] 남단덕의 할아버지 남적과 아버지 남우 역시 성방에 안치되어 직무를 수행하다가, 이후 안동도호부 관할의 마미주(馬米州)와 귀주(歸州)에 임관하여 당나라의 동북 변경 수호에 공을 세웠다.[3]4. 2. 성방과 고구려 유민
남단덕의 가족은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에 의해 안동도호부 관할 아래의 성방 자제로서 안치되었고, 이후 남단덕은 성방 자제의 수령이 되었다. 고구려가 멸망할 당시 남단덕은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아버지 남우와 함께 안동도호부 관할 아래의 성방에 안치되었다.[3]요동의 옛 고구려 땅에 설치된 성방은 당나라에 귀순한 고구려 병사들을 안치하기 위한 행정 조직이었으며, 동시에 당나라의 동북쪽 국경을 보호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남단덕의 할아버지인 남적과 아버지인 남우는 먼저 안동도호부 관할 아래의 성방에 안치되어 특정 직무를 수행했으며, 이후에는 안동도호부 관할의 마미주와 귀주에서 관직을 맡아 당나라의 동북쪽 국경을 지키는 데 공을 세웠다.[3]
4. 3. 남단덕 가문의 역할
남단덕의 가족은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에 의해 안동도호부 관할 하의 성방 자제로 안치되었으며, 남단덕은 후에 이 성방 자제의 수령이 되었다[3]. 요동 지역의 성방은 귀순한 고구려 병사를 안치하는 행정 조직으로, 당나라의 동북쪽 국경을 보호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남단덕의 할아버지 남적과 아버지 남우는 먼저 성방에 안치되어 직무를 수행했으며, 이후 안동도호부 관할 하의 마미주, 귀주 등지에서 활동하며 당나라의 동북 변경을 보호하는 데 공적을 세웠다[3].참조
[1]
뉴스
새로 소개된 고구려 유민 ‘南單德’ 묘지에 대한 검토
https://www.kci.g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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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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檀国大学校 東洋學硏究院
2017-07
[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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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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