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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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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선지는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당나라의 장군이었으며, 서역에서 활약했다. 20세에 유격장군이 되어 토번 제국을 정복하려다 실패하고, 안서도호부 부도호, 안서사진절도사를 역임하며 중앙아시아에서 세력을 확장했다.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패배하여 당나라의 서진을 종식시켰고, 안사의 난 진압 중 감군 변영성의 모함으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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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선지
기본 정보
이름고선지
현지어 표기高仙芝
로마자 표기Go Seon-ji
출생일미상
출생지미상
사망일755년
사망지당나라 장안
매장지미상
부친고사계(高斯界)
모친미상
가문고씨
군사 정보
소속당나라
주요 참전 전투/전쟁탈라스 전투
안사의 난

2. 생애

고선지는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당나라 장군이었던 고사계의 아들이다. 아버지 고사계는 서역 정벌에서 공을 세워 당나라에서 벼슬을 하였다. 고선지는 20대에 장군의 지위를 얻었고,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 소속으로 카슈가르(喀什)에서 복무하였다. 그는 절도사(節度使) 천인완(田仁琬)과 개가운(蓋嘉運) 휘하에서 복무했지만, 더 이상 승진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개가운의 후임인 부몽령차(夫蒙靈詧)는 그에게 감명을 받아 상관들에게 여러 차례 천거하였다.

747년 안서도호부의 부도호가 되었고, 749년에는 호탄 국왕과 토번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750년에는 당나라가 현 신강 지역에 토번 제국과 소발률, 돌궐 등을 식민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안서도호부에서 군 복무를 하면서, 안서도호부에 편입되어 지배를 당하고 있는 이민족 국가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관리, 감독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751년 고선지는 압바스 왕조, 우마이야 왕조를 정복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72개의 국가들을 정복하며 탈라스강까지 진군했으나, 긴 원정 행렬에 피로가 극에 달했고, 동맹군이었던 카를루크군이 배신하여 패배하였다. 하지만 이슬람군의 피해가 훨씬 더 컸던 것을 보면 고선지 군대의 군사력이 이슬람군을 압도했음을 알 수 있다.

755년 안녹산이 뤄양을 점령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 명령을 받았으나 안녹산의 군대가 서쪽으로 진군하는 것을 저지하던 중 감군 변영성의 배신으로 참수형을 당한다.

탈라스 전투를 통해 당나라의 제지술이 서방에 전해졌다. 고선지의 업적은 오렐 스타인의 중앙아시아 답사로 발굴되어 서양 세계에까지 널리 재인식되었다.

그의 부하 장군으로는 봉상청, 이사예가 있었고, 봉상청은 안사의 난 때 죽었지만, 이사예는 북정절도사로서 안사의 난 진압에 공을 세웠다.

2. 1. 초기 생애와 서역에서의 활약

고선지는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당나라 장군이었던 고사계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용모가 수려하고, 말 타기와 활쏘기에 능했으며, 용맹하고 결단력이 있었다. 아버지 고사계는 서역 정벌에서 공을 세워 당나라에서 벼슬을 하였다. 고선지는 20세에 유격장군이 되었고, 721년에는 토번(吐蕃, 티베트)을 정벌하여 공을 세웠다.[4][5]

747년, 고선지는 안서도호부의 부도호가 되었고, 토번과 연합하여 당나라에 반기를 든 소발률국을 정벌하였다. 이 공로로 안서사진절도사(安西四鎭節度使)로 임명되었다.[6] 그는 군대를 이끌고 파미르 고원을 넘어 소발률국의 수도를 함락시키고, 국왕과 왕비를 사로잡았다. 이 승리로 서역의 72개국이 당나라에 항복하였고, 그의 명성은 서아시아까지 널리 퍼졌다.

749년에는 호탄 국왕과 토번의 군대를 격파하였고, 750년에는 당나라가 안서도호부를 통하여 지배하던 이민족 국가들의 반란을 막는 임무를 맡았다.[7]

750년 봄, 고선지는 타슈켄트의 현대 도시인 석국(石國)과 평화 조약을 맺었으나, 석국이 방심한 틈을 타 기습 공격하여 국왕을 사로잡았다. 이로 인해 주변 국가들이 분노하였고, 압바스 왕조와 연합하게 되었다.[7]

2. 2. 탈라스 전투

751년 당나라가 현 신장 위구르 자치구 지역에 토번, 소발률, 돌궐 등을 식민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식민지 기구인 안서도호부에서 군 복무를 하던 고선지는 압바스 왕조와 우마이야 왕조를 정복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72개 국가를 정복하며 탈라스강까지 진군했다. 그러나 긴 원정 행렬에 피로가 극에 달했고, 동맹군이었던 카를루크군이 배신하여 패배했다. 하지만 이슬람군의 피해가 훨씬 더 컸던 것을 보면 고선지 군대의 군사력이 이슬람군을 압도했음을 알 수 있다.[8]

탈라스 전투


타슈켄트 왕자가 도망쳐 각지의 왕들에게 당나라의 횡포를 알렸고, 당시 막 부흥한 이슬람 제국 압바스 왕조의 세력이 서투르키스탄에 미치기 시작했다. 여러 나라의 호소를 들은 호라산 총독 아부 무슬림은 이슬람 군대 총 10만 명을 파병했다. 고선지는 이사예, 단수실(段秀實) 등 3만 명을 이끌고 곧장 탈라스 성에 도착하여 이슬람 군대와 대치했지만, 카를루크 부족이 반란을 일으켜 포위 공격을 받고 대패했다. 고선지는 이사업의 의견에 따라 후퇴했다.[7]

탈라스 전투는 당나라의 서진을 종식시켰고,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압바스 왕조 군대의 큰 손실은 압바스 왕조의 동방 진출 계획을 끝맺은 것으로 보인다.[3]

2. 3. 안사의 난과 죽음

755년 안녹산이 뤄양을 점령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당나라 현종은 아들 옹왕(雍王) 이완(李琬)을 명목상 지휘관으로, 고선지를 부관으로 임명했다. 고선지는 장안(長安) 지역에서 5만 명의 병사를 모아 상군(陝郡, 현재 허난성 삼문협 부근)에 주둔했고, 변영성이 감찰관으로 임명되었다.[9]

안사의 난과 고선지 군대의 작전 지도


봉상청은 낙양(洛陽) 방어를 맡았으나 안녹산 군에 패배하고, 산으로 후퇴하여 고선지에게 통관으로 후퇴할 것을 제안했다. 고선지가 동의하여 통관에 주둔했고,[9] 안녹산 군의 공격을 막아냈다.[4]

그러나 변영성은 고선지가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앙심을 품고, 현종에게 봉상청이 안녹산의 세력을 과장했고 고선지가 군량과 황실의 포상을 횡령했다고 모함했다. 현종은 이를 믿고 봉상청과 고선지의 처형을 명했다. 변영성은 먼저 봉상청을 참수하고, 이어 고선지를 처형하려 했다. 고선지는 자신이 후퇴한 것은 죄가 맞지만, 군량과 황실 포상을 훔친 것은 억울하다고 외쳤다.[9] 병사들도 고선지를 위해 소리쳤지만, 변영성은 고선지를 참수했다.[9] 고선지는 죽기 전 봉상청의 시체를 보며 "그대는 내가 발탁하여 절도사가 되었다. 이제 그대와 같은 곳에서 죽는구나. 천명이로구나!"라고 말했다.[4]

안사의 난 발발 후, 고선지는 토벌군 부원수로 임명되어 함곡관 서쪽의 돈관까지 후퇴했다. 안녹산 군의 공격에 많은 병사들이 죽거나 도망쳤지만 돈관 후퇴는 성공했다. 그러나 변영성의 간섭을 무시하여 봉상청과 함께 현종에게 모함을 받았고, 결국 처형되었다. 고선지는 죽기 전 억울함을 호소하며 부하들에게 "왕(枉)"(억울하다)라고 외쳐달라고 했고, 군중에서 큰 함성이 울려 퍼졌다.

3. 평가

고선지의 패배는 당나라의 서쪽으로의 확장을 종식시켰다. 현대 중국 역사가 보양(柏楊)은 단편 소설 「타슈켄트 학살—중국인들은 여기서 저주받았다!」에서 이를 부분적으로 허구화했다. 보양은 이 소설에서 시(史)의 왕비가 고선지의 배신에 대해 당나라와 중국인들을 영원히 저주하는 허구적인 저주를 묘사했다.[10]

3. 1. 긍정적 평가

고선지의 패배는 당나라의 서쪽으로의 확장을 종식시켰다. 현대 중국 역사가 보양(柏楊)은 단편 소설 「타슈켄트 학살—중국인들은 여기서 저주받았다!」에서 이를 부분적으로 허구화했다. 보양은 이 소설에서 시(史)의 왕비가 고선지의 배신에 대해 당나라와 중국인들을 영원히 저주하는 허구적인 저주를 묘사했다.[10]

3. 2. 부정적 평가

고선지는 탈라스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당나라의 서쪽 확장에 종말을 가져왔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현대 중국 역사가 보양(柏楊)은 단편 소설 「타슈켄트 학살—중국인들은 여기서 저주받았다!」에서 고선지의 배신에 대해 당나라와 중국인들을 영원히 저주하는 내용을 묘사하기도 했다.[10]

750년, 고선지는 우즈베키스탄타슈켄트와 평화 조약을 맺었으나, 방비를 소홀히 한 틈을 타 기습 공격하여 석국 왕 차비시(車鼻施)를 사로잡아 처형했다. 이로 인해 주변 국가들은 분노했으며, 특히 고선지가 노약자 포로들을 학살한 것에 분노했다.[7]

751년, 석국의 한 왕자가 주변 국가들로 도망쳐 고선지의 배신 행위를 알렸고, 이들은 압바스 왕조와 연합하게 되었다. 고선지는 3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압바스 왕조에 선제 공격을 가했으나, 탈라스 전투에서 카를루크족이 등을 돌리면서 당군은 궤멸되었다. 이 전투의 패배로 당나라의 서진이 종식되었고, 압바스 왕조 역시 큰 손실을 입어 동방 진출 계획을 포기하게 되었다.[8]

4. 가계


  • 아버지 : 고사계
  • 어머니 : 미상
  • 부인 : 미상

5. 고선지가 등장한 작품

高仙芝중국어가 등장한 작품은 다음과 같다.


  • 2006년부터 2007년까지 KBS에서 방영한 드라마 《대조영
  • 진순신의 단편 소설 《파미르를 넘어서》
  • 원다 고케이의 《고선지》 (《중국영걸전 1》 수록, 고단샤 만화문고, 1997년)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Volume 217 0756-01-24
[2] 서적 The Oxford History of Historical Writing. Vol. 2. 400-1400 Oxford University Press
[3] 서적 Outlines of the History of the Chinese (中國人史綱)
[4] 웹사이트 Old Book of Tang, vol. 104 http://www.sidneyluo[...] 2008-04-19
[5] 웹사이트 New Book of Tang, vol. 135 http://www.sidneyluo[...] 2007-12-26
[6] 웹사이트 Zizhi Tongjian, vol. 215 :zh:s:資治通鑑/卷215
[7] 웹사이트 Zizhi Tongjian, vol. 216 :zh:s:資治通鑑/卷216
[8] 서적 Etnicheskiye situatsii v tyurkskikh regionakh Tsentral’noy Azii domongol’skogo vremeni: Po musul’manskim istochnikam IX-XIII vv. Soros-Kyrgyzstan
[9] 웹사이트 Zizhi Tongjian, vol. 217 :zh:s:資治通鑑/卷217
[10] 웹사이트 塔什干屠城──就在這裹,中國人受到詛咒﹗~~柏楊 https://www.angelf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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