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흐리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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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니흐리야 전투는 고대 아시리아와 히타이트 간의 분쟁으로, 아시리아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는 히타이트 왕 투드할리야 4세의 통치에 반대하는 내부 반란을 촉발시켰으며, 이후 약 5년 동안의 적대 행위 끝에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다. 니흐리야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다양한 학설이 존재하며, 샨리우르파 인근, 유프라테스강 근처, 또는 그 외 지역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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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흐리야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개요 | |
분쟁 | 니흐리야 전투 |
날짜 | 기원전 13세기 |
장소 | 니흐리야 |
결과 | 아시리아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히타이트 |
교전국 2 | 아시리아 |
지휘관 | |
지휘관 1 | 투드할리야 4세 |
지휘관 2 | 샬만에세르 1세 또는 투쿨티-니누르타 1세 |
병력 규모 | |
사상자 규모 |
2. 위치
니흐리야의 정확한 위치는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다. 니흐리야가 상 티그리스 지역의 나이리와 동일하다는 오랜 믿음은 자레드 밀러에 의해 오류로 밝혀졌다.[7][8]
마리와 두르-카트림무 서신에 따르면, 니흐리야는 상 발리흐 지역에 위치했다.[9] 여러 학자들이 제시한 위치가 있지만, 샨리우르파 인근이라는 것이 다수설이다.
2. 1. 샨리우르파 인근 설
니흐리야가 상 티그리스 지역의 나이리와 동일하다는 오랫동안 지속된 생각[7]은 자레드 밀러에 의해 오류임이 밝혀졌다.[8] 마리와 두르-카트림무 서신에 담긴 정보에 따르면, 니흐리야는 상 발리흐 지역에 있었다. 밀러는 니흐리야가 샨리우르파 (에데사) 또는 하란에서 약 50km 이내의 지역에서 찾아야 한다고 제안했다.[9] 마시모 포를라니니는 니흐리야를 유프라테스강 근처의 리다르 회위크에 위치시켜 사모사타로 건너가는 곳의 약간 동쪽에 있도록 제안했다.[10] 밀러는 이것이 북쪽과 동쪽으로 너무 멀고 유프라테스강에 너무 가깝다고 생각했지만, 샨리우르파가 하란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에 어딘가에 있어야 한다는 데는 동의했다.[11] 밀러가 원래 제안한 매력적인 후보지인 현대 샨리우르파 영토에 있는 중요한 유적지인 카자네 회위크[12]는 고이코 바르자모비치와 밀러에 의해 부적합하다고 여겨졌는데, 그들은 초기 및 중기 청동기 시대의 중요한 점유 증거가 있었지만 후기 청동기 시대에 버려진 것으로 보인다고 언급했다.[13] 바르자모비치가 제안한 니흐리야의 대안적인 위치는 샨리우르파에서 동북동쪽으로 약 66km~77km 떨어진 턴나 (구 카루크)와 텔고란 (텔괴렌, 현재 욜라르바쉬)의 큰 언덕이다.[14]2. 2. 기타 학설
니흐리야가 상 티그리스 지역의 나이리와 동일하다는 오랫동안 지속된 생각[7]은 자레드 밀러에 의해 오류임이 밝혀졌다.[8] 마리와 두르-카트림무 서신에 담긴 정보에 따르면, 니흐리야는 상 발리흐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더 구체적으로, 밀러는 니흐리야가 샨리우르파 (에데사) 또는 하란에서 약 50km 이내의 지역에서 찾아야 한다고 제안했다.[9] 마시모 포를라니니는 니흐리야를 유프라테스강 근처의 리다르 회위크에 위치시켜 사모사타로 건너가는 곳의 약간 동쪽에 위치하도록 제안했다.[10] 밀러는 이것이 북쪽과 동쪽으로 너무 멀고 유프라테스강에 너무 가깝다고 생각했지만, 샨리우르파가 하란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에 어딘가에 있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11] 밀러가 원래 제안한 매력적인 후보지인 현대 샨리우르파 영토에 있는 중요한 유적지인 카자네 회위크[12]는 고이코 바르자모비치와 밀러에 의해 부적합하다고 여겨졌는데, 그들은 초기 및 중기 청동기 시대의 중요한 점유 증거가 있었지만 후기 청동기 시대에 버려진 것으로 보인다고 언급했다.[13] 바르자모비치가 제안한 니흐리야의 대안적인 위치는 샨리우르파에서 동북동쪽으로 약 66km~77km 떨어진 턴나 (구 카루크)와 텔고란 (텔괴렌, 현재 욜라르바쉬)의 큰 언덕이다.[14]3. 전투의 경과 및 결과
아시리아가 니흐리야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로 히타이트는 투드할리야 4세의 통치에 반대하는 여러 내부 반란에 직면하며 혼란에 빠졌다. 투드할리야 4세는 이러한 반란을 모두 극복하고 왕위를 지켰다. 아시리아와 히타이트 간의 적대 행위는 평화 협상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약 5년 동안 지속되었다.
3. 1. 아시리아의 승리
아시리아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두 강대국 간의 분쟁은 니흐리야 인근에서 벌어졌다. 이 아시리아의 승리는 히타이트 왕 투드할리야 4세가 그의 통치에 반대하는 여러 내부 반란에 직면하면서 히타이트 국가를 뒤흔들었다. 투드할리야 4세는 결국 이러한 모든 권위에 대한 도전을 극복하고 하티의 왕위를 유지했다. 아시리아와 하티 간의 적대 행위는 평화 협상이 이루어지고 유지되기 전 약 5년 동안 지속되었다.3. 2. 평화 협정
아시리아의 결정적인 승리로, 두 강대국 간의 분쟁은 니흐리야 인근에서 벌어졌다. 이 승리는 히타이트 왕 투드할리야 4세가 통치에 반대하는 여러 내부 반란에 직면하면서 히타이트 국가를 뒤흔들었다.[1] 투드할리야 4세는 결국 이러한 권위에 대한 도전을 모두 극복하고 하티의 왕위를 유지했다.[1] 아시리아와 하티 간의 적대 행위는 평화 협상이 이루어지고 유지되기 전까지 약 5년 동안 지속되었다.[1]4. 역사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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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간행물
The "Eternal Treaty" from the Hittite perspective
https://www.britishm[...]
2005
[2]
서적
2005
[3]
서적
1987
[4]
서적
2003
[5]
서적
2003
[6]
서적
1985
[7]
서적
1985
[8]
서적
2012
[9]
서적
2012
[10]
서적
2004
[11]
서적
2012
[12]
서적
2012
[13]
서적
2011
[14]
서적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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