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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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문예는 발해 고왕 시기 당나라에서 숙위로 활동했으며, 발해 무왕 때 흑수말갈 정벌을 반대하다가 당나라로 망명한 인물이다. 그는 흑수말갈 공격을 둘러싸고 발해 무왕과 갈등을 겪었고, 당나라에서 좌효기장군 직을 받았다. 발해는 대문예의 송환을 요구했지만 당나라가 거부했고, 이후 대문예는 당나라에서 사망하여 시신이 발해로 돌아왔다. 일각에서는 대문예의 망명을 왕권 대립의 관점에서 해석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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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예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이름 | 대문예 |
원래 이름 | 大門藝 |
본명 | 대문예(大門藝) |
다른 이름 | 해당 사항 없음 |
출생일 | 미상 |
출생지 | 미상 |
사망일 | 미상 |
사망지 | 미상 |
매장지 | 미상 |
배우자 | 미상 |
자녀 | 미상 |
가계 | |
부왕 | 고왕 |
모후 | 미상 |
왕위 계승 | |
전임자 | 무왕 |
후임자 | 대창발가 |
기타 정보 | |
능릉 | 미상 |
묘호 | 미상 |
시호 | 미상 |
종교 | 미상 |
성별 | 남성 |
왕조 | 발해 |
목록 | 발해의 태자 |
근무 | 당나라 숙위군 |
가문 | 대씨 |
2. 생애
대문예는 발해 고왕 시기 당에서 숙위로 지냈다. 발해 무왕 때인 726년 흑수말갈 정벌 문제로 발해와 당나라 간에 갈등이 있었고, 730년대 후반에 대문예는 당나라로 망명했다.[2] 이 사건은 발해와 당나라 간의 외교 분쟁으로 이어졌고, 732년 발해의 등주 공격 당시 대문예는 당나라 장수로 참전하기도 했다. 발해 무왕은 대문예를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대문예는 당나라에서 생을 마감했고, 시신은 발해로 돌아왔다.
2. 1. 흑수말갈 정벌 문제와 당나라 망명
726년, 흑수말갈이 당나라와 외교 관계를 긴밀하게 맺으면서 발해가 고립될 위기에 처하자, 발해 무왕은 대문예에게 임아와 함께 흑수말갈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1] 그러나 대문예는 당나라와의 전쟁으로 확대될 것을 우려하며, 발해의 국력이 고구려보다 약하고 고구려도 결국 당나라에 멸망했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해 무왕의 명령에 따라 군대를 이끌고 출정했지만, 계속해서 흑수말갈과의 전쟁을 망설였다. 발해 무왕이 원정군 사령관을 대일하로 교체하려 하자, 대문예는 당나라로 망명하여 좌효기장군 직을 받았다.[2]이에 발해 무왕은 마문궤 등을 사신으로 당나라에 보내 대문예의 송환 및 처벌을 요구했으나, 당나라는 이를 거절하고 대문예를 유배 보냈다고 발해에 통보했다. 그러나 이는 거짓으로 밝혀졌고, 발해 무왕은 이진언을 사신으로 보내 당나라를 질타했다.
728년 당나라는 흑수말갈 추장에게 '이헌성'이라는 당나라식 이름을 하사하고 운휘장군 겸 흑수경략사에 임명하여 유주도독의 관할 아래에 두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발해 무왕은 732년 겨울 등주를 공격했다. 이때 대문예는 당나라 군을 이끌고 출격했으나, 이미 발해군이 철수한 뒤여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발해 무왕은 대문예가 당나라 장수로 출정했다는 사실에 격분하여 자객을 보내 낙양의 천진교에서 암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대문예는 당나라에서 계속 지내다가 사망했고, 시신은 발해로 돌아왔다.
2. 2. 발해와 당나라 간의 외교 분쟁
726년, 흑수말갈이 당나라와 외교 관계를 강화하면서 발해가 고립될 위기에 처하자, 무왕은 대문예에게 임아와 함께 흑수말갈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대문예는 당나라와의 전쟁으로 확전될 것을 우려하여 반대했다. 그는 발해의 국력이 고구려보다 약하고, 고구려도 결국 당나라에 멸망했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1] 하지만 무왕의 명령에 따라 출정했고, 이후에도 흑수말갈과의 전쟁을 망설였다. 무왕이 원정군 사령관을 대일하로 교체하려 하자, 대문예는 당나라로 망명하여 좌효기장군 직을 받았다.[2]이에 무왕은 마문궤 등을 사신으로 당나라에 보내 대문예의 송환 및 처벌을 요구했으나, 당나라는 이를 거절하고 대문예를 유배 보냈다고 발해에 거짓 통보했다. 이것이 거짓으로 밝혀지자 무왕은 이진언을 사신으로 보내 항의했다.
728년, 당나라는 흑수말갈 추장에게 '이헌성'이라는 당나라식 이름을 주고 운휘장군 겸 흑수경략사에 임명하여 유주도독의 관할 아래에 두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무왕은 732년 겨울 발해의 등주 공격을 감행했다. 이때 대문예는 당나라 군을 이끌고 출격했으나, 이미 발해군이 철수한 뒤였다. 무왕은 대문예가 당나라 장수로 출정한 것에 격분하여 자객을 보내 낙양 천진교에서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대문예는 당나라에서 지내다 사망했고, 시신은 발해로 돌아왔다.
2. 3. 망명 이후의 삶과 죽음
726년, 흑수말갈이 당나라와 긴밀한 외교 관계를 맺으면서 발해가 고립될 위기에 처하자, 발해 무왕은 대문예에게 임아와 함께 흑수말갈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대문예는 당나라와의 전쟁으로 확전될 것을 우려하여 반대했다. 발해의 국력이 고구려보다 약하고, 고구려도 결국 당나라에 멸망했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1] 하지만 무왕의 명령에 따라 출정했고, 이후에도 흑수말갈과의 전쟁을 망설였다. 무왕이 원정군 사령관을 대일하로 교체하려 하자, 대문예는 당나라로 망명하여 좌효기장군 직을 받았다. 730년대 후반의 일이다.[2]이에 무왕은 마문궤 등을 사신으로 당나라에 보내 대문예의 송환 및 처벌을 요구했으나, 당나라는 이를 거절하고 대문예를 유배 보냈다고 발해에 통보했다. 그러나 이는 거짓으로 밝혀졌고, 무왕은 이진언을 사신으로 보내 항의했다.
728년, 당나라는 흑수말갈 추장에게 '이헌성'이라는 당나라식 이름을 하사하고 운휘장군 겸 흑수경략사에 임명하여 유주도독의 관할 아래에 두었다. 이에 다시 위기감을 느낀 무왕은 732년 겨울 발해의 등주 공격을 감행했다. 이때 대문예는 당나라 군을 이끌고 출격했으나, 이미 발해군이 철수한 뒤여서 전과는 없었다. 무왕은 대문예가 당나라 장수로 출정했다는 사실에 격분하여 자객을 보내 낙양의 천진교에서 대문예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대문예는 당나라에서 계속 지내다가 사망했고, 시신은 발해로 돌아왔다.
3. 왕권 대립
대문예의 당나라 망명을 왕권 대립으로 보는 해석이 있다. 이를 주장하는 측에서는 발해의 왕위 계승자였던 대도리행이 728년 사망하자 당나라에서 비교적 친당파였던 대문예를 발해 왕에 즉위시키려고 했다고 주장한다. 732년 7월 당에서 발해로 보낸 국서에 있는, 형제로서 우의를 다질 것, 송환 및 처벌 요구를 중단할 것, 이를 무시할 시 무력 대응도 불사하겠다는 내용을 정황상 근거로 삼는다.
4. 가계
5.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참조
[1]
서적
渤海と古代の日本
校倉書房
2001-03
[2]
서적
日本と渤海の古代史
山川出版社
2003
[3]
문서
725년에 당에 사신으로 갔다.
[4]
문서
729년과 730년에 당에 사신으로 갔다.
[5]
문서
729년에 당에 사신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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