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롤루스 마르텔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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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롤루스 마르텔루스는 프랑크 왕국의 궁재로, "마르텔"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며, 헤르스탈의 피핀의 아들이자 메츠의 아르눌프의 증손자이다. 그는 사생아로 묘사되기도 했지만, 권력 투쟁을 거쳐 프랑크 왕국을 통치하며 네우스트리아를 복속시키고 여러 게르만 부족을 정복했다. 카롤루스 마르텔루스는 732년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이슬람 군대를 격퇴하여 서유럽을 보호했으며, 이후 교회 재산을 몰수하여 군사비를 충당했다. 그는 아들들에게 왕국을 분할 상속했으며, 그의 아들 피핀 3세가 카롤링거 왕조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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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롤루스 마르텔루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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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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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카를 마르텔 |
로마자 표기 | Carolus Martellus |
독일어 표기 | Karl Martell |
프랑스어 표기 | Charles Martel |
영어 표기 | Charles Martel |
스페인어 표기 | Carlos Martel |
작위 | |
프랑크인의 공작 및 왕자 | 프랑크인의 공작 궁정 장관 |
아우스트라시아 궁재 | 715년 – 741년 10월 22일 |
네우스트리아 궁재 | 718년 – 741년 10월 22일 |
통치 정보 | |
통치 기간 | 718년 – 741년 10월 22일 |
이전 통치자 | 피핀 2세 |
후임 통치자 | 카를만 피핀 3세 |
아우스트라시아 궁재 이전 통치자 | 테우도알두스 |
아우스트라시아 궁재 후임 통치자 | 카를만 |
네우스트리아 궁재 이전 통치자 | 라겐프리두스 |
네우스트리아 궁재 후임 통치자 | 피핀 3세 (소 피핀) |
개인 정보 | |
출생일 | 688년경 |
출생지 | 에르스탈, 아우스트라시아 |
사망일 | 741년 10월 22일 (51–53세) |
사망지 | 키에르지, 프랑크 제국 |
매장지 | 생드니 대성당 |
배우자 | 트리어의 로트루트 스와나힐트 |
자녀 | 카를만 피핀 3세 (소 피핀) 그리포 베른하르트 히에로니무스 루앙의 레미기우스 힐트루트 아우다 |
가문 | |
가문 | 아르눌핑거 가문 카롤링거 가문 (창시자) |
아버지 | 피핀 2세 |
어머니 | 알파이다 |
군사 정보 | |
전투 | 쾰른 암블레브 빈치 수아송 투르 보른 아비뇽 공성전 나르본 공성전 베르 강 님 |
2. 생애
카롤루스 마르텔은 헤르스탈의 피핀과 그의 첩 알파이다 사이에서 태어났다.[11][12] 그의 이름 마르텔은 "망치"를 뜻한다.[54] 8세기 프랑크 왕국에서는 정실 부인과 첩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았기에, 카롤루스는 초기에 "사생아"로 묘사되기도 했지만, 이는 플렉트루데가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세우려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14][15]
메로빙거 왕조 시대에 왕권은 약화되었고, 실질적인 권력은 궁재에게 있었다. 궁재는 왕실 재정을 관리하고, 후원 활동을 했으며, 왕의 이름으로 토지와 특권을 부여했다. 카롤루스의 아버지 피핀은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고뉴를 통합하여 프랑크 왕국을 통일하고 스스로 프랑크 공작 및 공(Prince)이라 칭했으며, 이 칭호는 카롤루스에게 이어졌다.
714년 아버지 피핀 2세가 사망하자, 카롤루스는 플렉트루데에 의해 유폐되었으나,[46] 716년 탈출했다.[47][48] 이후 네우스트리아 궁재 라간프리드를 격파하고,[47][48][49] 플렉트루데로부터 권력을 빼앗아,[50] 718년 프랑크 왕국 전체의 궁재가 되었다.[51]
카롤루스는 군사력을 강화하여 작센족을 격파하고, 719년 프리슬란트의 지도자 라드보드가 사망한 후 프리지아인들의 저항을 물리치고 서프리지아를 점령했다.[16][48] 734년 보언 전투에서 프리지아 공작 부보를 살해하고 프리기아를 완전히 복속시켰다.[48] 720년부터 723년까지 바이에른에서 아길롤핑 공작들이 독립적인 통치자로 발전하는 것을 견제하고, 알레만니와 바이에른의 후베르트 공작에게 프랑크족의 종주권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했으며, 725년에는 아길롤핑 공주 스와나힐드를 두 번째 아내로 맞이했다.[72]
731년 아키텐의 에우도 공작과의 조약을 파기하고 루아르 강을 건너 아키텐을 공격, 부르주를 점령하는 등 승리했지만, 에우도는 알-안달루스 토후국에 지원을 요청했다.[22] 732년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이슬람 군대를 격파하여 서유럽을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보호하고 '그리스도교 사회의 수호자'로 칭송받았다.[53][54] 735년 에우도 공작이 사망하자, 카롤루스는 아키텐을 직접 통치하려 했으나, 귀족들은 에우도의 아들 후날드 1세를 공작으로 선포했고, 결국 카롤루스와 후날드는 서로의 지위를 인정했다.
737년 메로빙거 왕조의 테우데리크 4세가 사망한 후, 카롤루스는 스스로를 "마요르 도무스(maior domus)"와 "프랑크인의 프린켑스 에트 둑스(princeps et dux Francorum)"라고 칭하며 새로운 왕을 임명하지 않았다. 739년 교황 그레고리오 3세가 롬바르드 왕국의 리우트프란트에 대항하기 위해 도움을 요청했지만, 카롤루스는 한때 동맹이었던 그와 싸우기를 꺼려하며 요청을 무시했다.
741년 10월 22일 퀘르지에서 사망하여 생 드니 대성당에 안치되었다.[26]
2. 1. 생애 초반
카롤루스 마르텔은 헤르스탈의 피핀과 그의 첩 알파이다의 아들이었다.[11][12] 그는 형제 킬데브란트를 두었는데, 킬데브란트는 나중에 프랑크 왕국의 부르고뉴 공작(dux)이 되었다.[13]8세기 프랑크 왕국에서는 아내와 첩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초기 역사 기록에서 카롤루스를 "사생아"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는 플렉트루데가 자신의 자식들을 피핀의 왕위 계승자로 만들고 싶어했기 때문에 비롯된 비난으로 보인다.[14][15]
카롤루스 시대에 메로빙거 왕조는 궁재에게 권력을 넘겨주었고, 궁재들은 왕실 재정을 관리하고, 후원을 베풀었으며, 허수아비 왕의 이름으로 토지와 특권을 부여했다. 카롤루스의 아버지 피핀은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고뉴를 정복하여 프랑크 왕국을 통일하고 스스로를 프랑크 공작이자 공(Prince)이라고 칭한 최초의 인물이었으며, 이 칭호는 나중에 카롤루스에게 계승되었다.
714년 아버지 피핀 2세가 사망하자, 정실 부인인 플렉트루데에 의해 유폐되었으나,[46] 716년 탈출했다.[47][48] 그 후, 네우스트리아 궁재 취임을 선언한 라간프리드를 격파하고,[47][48][49] 플렉트루데로부터 지배권을 빼앗아,[50] 718년 프랑크 왕국 전체의 궁재가 되었다.[51]
2. 1. 1. 출생과 가계
카를 마르텔은 680년 8월 23일 프랑크 왕국 아우스트라시아의 헤르스탈(벨기에 리에주에 소재)에서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의 궁재 피핀 2세의 서자로 태어났다. 출생 년도는 684년생, 686년생, 688년생, 690년생 설 등이 있다. 어머니 알파이스는 노예 출신으로 알려져있으나 모계에 대한 것은 알려진 바가 없다. 일설에는 알파이스가 아우스트라시아의 알베리쿠스와 포이터의 아델라 사이에서 태어난 딸 혹은 사생아라고도 한다. 피핀 2세의 서자이자 동복 형제로는 부르군트 공작 힐데브란트가 있었다. 카를과 힐데브란트 형제는 피핀 2세의 서자이자 사생아였고, 피피니드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했다.카를의 집안은 메츠의 주교 아르눌프 폰 메츠와 브라반트 백작 카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르눌프의 어머니는 오다라는 이름의 여성이었지만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불확실하다. 브라반트의 카를이나 그의 아들인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정 행정관 카를로만은 이름만 전해질 뿐 행적은 알려진 바 없다. 카를로만의 아들 란덴의 피핀으로 알려진 피핀 1세 대에 이르러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로서 명성을 얻었고, 브라반트를 공략한 이교도 부족을 격퇴하여 명성을 얻었다. 아르눌프 폰 메츠와 란덴의 피핀 1세는 다고베르트 1세 시대에 궁재 또는 다른 궁재들의 추천인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했고, 629년 은퇴한 아르눌프는 메츠 성당의 수도자가 되었으며, 아르눌프의 차남 클로둘프 역시 수도자가 되었다. 피핀 1세의 아내 이타 이둘베르가와 딸 게르투르데는 수녀가 되었다. 후에 아르눌프, 클로둘프, 이타, 게르투르데는 모두 성인으로, 피핀 1세는 복자로 시복되었다.
지게베르트 3세의 양자로 지목된 힐데베르트 3세 아돕티부스와 그의 생부이자 피핀 2세의 외삼촌인 그리모알트 1세가 정변으로 축출된 뒤 사형당하면서 그의 집안의 영향력은 급감했지만, 아르눌프 폰 메츠의 아들 안세기셀과 피핀 1세의 차녀 베가 폰 란덴의 아들 헤르스탈의 피핀 2세가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가 되면서 실권을 잡았다.
카를 마르텔의 아버지 피핀 2세는 아우스트라시아의 유력한 지주 가문 출신 플렉트루데와 결혼하였다. 플렉트루데는 지참금으로 모셀 중부 지역에서 하부 레인(Rhine)의 토지를 가져왔고, 피핀의 영향력과 재력이 확장될 수 있었다.[62] 피핀 2세는 메로빙거 왕조 군주들의 즉위와 폐위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강력한 인물이 되었고, 687년부터는 프랑크 왕국의 실질적 통치자였으며, 프랑크 공작 칭호를 받았다.
697년, 아버지 피핀 2세는 아들 드로고 1세를 부르군트 공작과 캄파네 백작직에 앉혔고, 다른 아들 그리모알트 2세는 네우스트리아의 궁재로 앉혔다. 그러나 카를 마르텔은 첩의 아들이었고, 어떠한 몫도 분배되지 못했다.
카를 마르텔의 어린 시절은 알려져 있지 않다. 아버지 피핀 2세와 적모 플렉트루데, 이복 형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알려진 것이 없다. 카를은 바이에른의 부족장 출신 공작 가문의 여성인 바이에른 출신 로트루드와 결혼하여 카를로만, 피핀 3세, 알다 등의 자녀들과 첩에게서 베른하르트, 그리포 등의 서자들을 두었다.
카롤루스 마르텔은 헤르스탈의 피핀과 그의 첩이자 두 번째 부인인 알파이다의 아들이었다.[11][12] 그는 형제 킬데브란트를 두었는데, 킬데브란트는 나중에 프랑크 왕국의 부르고뉴 공작(dux)이 되었다.[13] 또한 메츠의 아르눌프의 증손자이다.
초기 역사 기록에서는 카롤루스를 "사생아"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지만, 8세기 프랑크 왕국에서는 아내와 첩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았다. "사생아"라는 비난은 피핀의 첫 번째 부인 플렉트루데가 자신의 자식들을 피핀의 왕위 계승자로 만들고 싶어했기 때문에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14][15]
카롤루스 시대에 이르러 메로빙거 왕조는 권력을 궁재에게 넘겨주었고, 궁재들은 왕실 재정을 관리하고 후원을 베풀었으며, 허수아비 왕의 이름으로 토지와 특권을 부여했다. 카롤루스의 아버지 헤르스탈의 피핀은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고뉴를 정복하여 프랑크 왕국을 통일했다. 피핀은 스스로를 프랑크 공작이자 공(Prince)이라고 칭한 최초의 인물이었으며, 이 칭호는 나중에 카롤루스에 의해 계승되었다.
2. 1. 2. 젊은 시절

카를 마르텔은 680년 8월 23일 프랑크 왕국 아우스트라시아의 헤르스탈(벨기에 리에주에 소재)에서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의 궁재 피핀 2세의 서자로 태어났다. 출생 년도는 688년생 설, 684년생 설, 686년생 설, 690년생 설까지 있다. 어머니 알파이스는 노예 출신 여성이었다는 것만 알려졌을 뿐 모계에 대한 것은 알려진 바가 없다. 일설에는 그의 어머니 알파이스는 아우스트라시아의 알베리쿠스와 포이터의 아델라 사이에서 태어난 딸 또는 사생아라 한다. 피핀 2세의 서자로는 동복 형제이자 부르군트의 공작을 지낸 힐데브란트 등이 있었다. 카를과 힐데브란트 형제는 피핀 2세의 서자이자 사생아였고, 피피니드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받지도 못했다. 이후로도 카를 마르텔은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했으므로, 학자들과 문인들은 카를 마르텔을 피피니드의 정당한 계승자로는 인정하지 않았다.
카를의 집안은 메츠의 주교 아르눌프 폰 메츠와 브라반트 백작 카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르눌프의 어머니는 오다라는 이름의 여성이었지만 아버지가 누군가는 다소 불확실하다. 브라반트의 카를이나 카를의 아들인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정 행정관 카를로만은 이름만이 전할 뿐 행적은 알려진 바 없고, 카를로만의 아들로 란덴의 피핀으로 알려진 피핀 1세의 대에 이르러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로서 명성을 얻었고, 브라반트를 공략한 이교도 부족을 격퇴한 일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아르눌프 폰 메츠와 란덴의 피핀 1세는 다고베르트 1세 시대에 궁재 또는 다른 궁재들의 추천인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했고, 629년 은퇴한 아르눌프는 메츠 성당의 수도자가 되었으며, 아르눌프의 차남 클로둘프 역시 수도자가 되었다. 피핀 1세의 아내 이타 이둘베르가와 이타 이둘베르가의 딸 게르투르데는 수녀가 되었다. 후에 아르눌프, 클로둘프, 이타, 게르트루데는 모두 성인으로, 피핀 1세는 복자로 시복되었다. 아르눌프와 클로둘프, 이타, 게르투르데의 종교인으로서의 삶 역시 집안에 일종의 후광이 되었다.
한때 지게베르트 3세의 양자로 지목된 힐데베르트 3세 아돕티부스와 그의 생부이자 피핀 2세의 외삼촌인 그리모알트 1세가 정변으로 축출된 뒤 사형당하면서 그의 집안의 영향력은 급감했지만, 아르눌프 폰 메츠의 아들 안세기셀과 피핀 1세의 차녀 베가 폰 란덴의 아들 헤르스탈의 피핀 2세가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가 되면서 실권을 잡았다.
카를 마르텔의 아버지 피핀 2세는 아우스트라시아의 영향력있는 지주가문의 딸이었던 플렉트루데와 결혼하였다. 플렉트루데는 지참금으로 모셀 중부 지역에서 하부 레인(Rhine)의 토지를 지참금으로 가져왔고, 피핀의 영향력과 재력이 확장될 수 있었다.[62] 정적 에브로인 등을 제거한 후 카를의 아버지 피핀 2세는 메로빙거 왕조의 군주들의 즉위와 폐위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강력한 인물이 되었고, 687년부터는 프랑크 왕국의 실질적 통치자였으며, 프랑크 공작의 칭호를 받았다.
697년에 이르러 아버지 피핀 2세는 아들 드로고 1세를 부르군트 공작과 캄파네 백작직에 앉혔고, 다른 아들 그리모알트 2세는 네우스트리아의 궁재로 앉혔다. 그러나 카를 마르텔은 첩의 아들이었고, 어떠한 몫도 분배되지 못했다. 출생 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랭스 주교 리고베르트 드 랭스에게 유아세례를 받았다 한다.
카를 마르텔의 어린 시절은 알려져 있지 않다. 또한 아버지 피핀 2세와 적모 플렉트루데, 이복 형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카를은 바이에른의 부족장 출신 공작가문의 여성인 바이에른 출신 로트루드와 결혼하여 카를로만, 피핀 3세, 알다 등의 자녀들과 첩에게서 베른하르트, 그리포 등의 서자들을 두었다. 알다는 메로빙거 왕조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오툉의 테오도리히 4세와 결혼하여 기욤 드 툴루즈를 두었다.
2. 2. 권력 투쟁과 집권
714년 아버지 피핀 2세가 사망하면서 권력 투쟁이 시작되었다. 피핀 2세는 죽기 전, 아내 플렉트루데의 조언에 따라 자신의 유일한 상속자로 손자 테우도알드를 지명했다. 그러나 테우도알드는 8세의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플렉트루데는 카를 마르텔이 이 상황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쾰른에 가두었으나, 715년 말 혼란을 틈타 탈출했다.[16]탈옥 후 카를 마르텔은 피핀의 아들임을 주장하며 플렉트루데와 권력 다툼을 벌였다. 네우스트리아 귀족들은 라감프리드를 궁재로 임명하고, 다고베르트 3세가 사망하자 힐데리히 2세의 아들 힐페리히 2세를 왕으로 추대했다. 힐페리히 2세와 라감프리드는 프리지아의 라트보트와 연합하여 카를을 제거하려 했다.
716년 초, 카를 마르텔은 쾰른으로 가서 왕실의 보물들을 획득했다. 같은 해, 힐페리히 2세와 라감프리드는 프리기아 군대와 연합하여 아우스트라시아를 공격했고, 쾰른 근처에서 카를과 전투를 벌였다. 병력과 준비가 부족했던 카를은 패배하고 아르덴산맥의 에펠로 피신했다. (→ 쾰른 전투)
이후 카를은 암블레브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병력을 많이 잃어 더 많은 병력을 모으느라 시간을 소모하였다. 그는 어머니 친족들과 빌리브로르두 등의 지지를 얻었다.[20] 717년 봄, 카를은 군사를 이끌고 네우스트리아를 기습 공격했고, 뱅시 전투에서 네우스트리아 군대를 궤멸시켰다.
718년, 힐페리히 2세는 아키텐 공작 오도 대왕과 동맹을 맺었지만, 수아송 전투에서 다시 카를에게 패배했다.[21] 카를은 클로타르 4세를 아우스트라시아의 왕으로 선포하고, 리고베르트를 랭스 대교구 대주교에서 폐위시켰다. 곧 클로타르 4세가 사망했고, 오도는 카를이 자신의 공작 지위를 인정하는 대가로 힐페리히 왕을 넘겨주었다. 카를은 힐페리히 2세를 프랑크 왕국의 왕으로 인정하고, 719년까지 모든 반대파를 제거하며 프랑크 왕국의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
2. 2. 1. 정변 기도와 쾰른 전투

714년 아버지 피핀 2세가 사망하자, 그의 정실 부인인 플렉트루데에 의해 유폐되었으나[46], 716년에 탈출했다.[47][48]
714년 12월 16일 아버지 피핀 드 헤르스탈이 사망하기 이전에 피핀의 적자들은 대부분 사망했고, 마지막 남은 적자 그리모알트 2세는 알프스산맥 근처에서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자객에 의해 살해되었다. 결국 714년 12월 16일 피핀은 죽으면서 본처인 플렉트루디스에게 어린 손자들의 후견인을 맡을 것을 유언하고 사망했다. 피핀 2세의 살아남은 아들들 중 연장자였던 카를은 아버지 피핀의 유언에 반발했고, 적모 플렉트루데는 그를 투옥시켰다.

714년 헤르스탈의 페팽이 사망했다.[16] 그는 죽기 몇 달 전, 아내 플렉트루데의 조언에 따라 사망한 아들 그리모알드의 손자인 테우도알드를 자신의 유일한 상속자로 지명했다. 이는 테우도알드가 불과 8세의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즉시 오스트라시아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샤를이 이러한 불안을 자신의 이점으로 이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플렉트루데는 그를 쾰른에 가두었다.
힐페리히 2세와 라감프리드가 이끄는 네우스트리아 군대 및 라트보트의 프리기아 군대는 쾰른에서 카를을 만났지만 크게 패배했다. 후퇴한 카를은 다시 장정들을 모집하였다. 힐페리히 2세와 라감프리드가 이끄는 네우스트리아 군대 및 라트보트의 프리기아 군대는 쾰른 성을 포위하였다. 플렉트루데는 피핀의 보물들로 이들을 매수하여 되돌려보냈다.
716년, 킬페리크와 라간프리드는 함께 군대를 이끌고 아우스트라시아로 진격하여 쾰른에 있는 피피니드 가문의 재산을 빼앗으려 했다. 네우스트리아인들은 프리슬란트의 왕 레드바드 휘하의 또 다른 침략군과 동맹을 맺고, 쾰른 인근에서 카롤루스와 전투를 벌였다. 카롤루스는 병력을 모으거나 준비할 시간이 거의 없었고, 그 결과는 피할 수 없었다. 프리슬란트인들은 카롤루스를 저지했고, 왕과 그의 궁재는 쾰른에서 플렉트루드를 포위했으며, 플렉트루드는 페팽의 보물 상당 부분을 그들에게 뇌물로 주었다. 그 후 그들은 물러났다.[17] 쾰른 전투는 카롤루스의 생애에서 유일한 패배이다.
카를은 아르덴산맥의 에펠(독일과 벨기에의 국경 지대)로 피신하여 살아남은 병력들과 추가로 모집한 병사들을 단기간에 훈련시켰다. 716년 초, 카를은 프리기아의 군대의 기습공격을 받고 크게 패배, 후퇴해야 했다. 이때 카를은 네우스트리아-프리기아 연합군이 퇴로를 공격하는 한편, 자신의 군사 일부는 요새에 매복시키고, 일부만으로 퇴각하는 척 연극하다가 네우스트리아-프리기아 군이 저녁에 쉬고 있을 때 기습 공격하였다.
2. 2. 2. 암블레베 전투와 빈시 전투
714년 아버지 피핀 2세가 사망하자, 그의 정실 부인인 플레크트루데에 의해 유폐되었으나[46], 716년에 탈출했다.[47][48] 힐페리히 2세와 라감프리드가 이끄는 네우스트리아 군대 및 라트보트의 프리기아 군대는 쾰른에서 카를을 만났으나, 카를은 병력이 부족하여 크게 패배하였다. 후퇴한 카를은 다시 병력을 모집하였다. 힐페리히 2세와 라감프리드가 이끄는 네우스트리아 군대 및 라트보트의 프리기아 군대는 쾰른 성을 포위하였다. 플렉트루데는 피핀의 보물로 이들을 매수하여 되돌려보냈다. 카를은 아르덴산맥의 에펠(독일과 벨기에의 국경 지대)로 피신하여 살아남은 병력과 추가로 모집한 병사들을 단기간에 훈련시켰다.716년 초, 카를은 프리기아 군대의 기습공격을 받고 크게 패배하여 후퇴해야 했다. 이때 카를은 네우스트리아-프리기아 연합군이 퇴로를 공격하는 한편, 자신의 군사 일부는 요새에 매복시키고, 일부만으로 퇴각하는 척 연극하다가 네우스트리아-프리기아 군이 저녁에 쉬고 있을 때 기습 공격하였다. 암블레브 전투에서 승리하였지만 병력을 많이 잃었던 카를은 더 많은 병력을 모으느라 시간을 소모하였다.
리처드 게버딩은 이 시점까지 카를의 지지세력의 상당수가 그의 어머니의 친족들, 즉 리에주 주변 지역 출신이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앙블레브 이후 그는 영향력 있는 빌리브로르두의 지지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빌리브로르두는 이후 카를의 아들 피핀에게 세례를 주었다. 게버딩은 716년 부활절로 추정한다.[20] 카를은 또한 베르됭의 주교 페포의 지원을 받았다.
717년 봄, 카를은 자신의 전군사를 이끌고 네우스트리아로 기습 공격했다. 힐페리히 2세와 라감프리드는 갑작스러운 공격에 파리로 도주했고, 717년 3월 21일 캉브레 근처 빈시(Vinchy)에서 벌인 빈시 전투(Battle of Vincy)에서 네우스트리아 군대를 궤멸시켰다.
2. 2. 3. 네우스트리아 복속
그는 네우스트리아 국왕 힐페리히 2세를 받들고 카롤링거 가로부터 왕권을 확립하려던 네우스트리아의 귀족들과 싸웠으며, 718년 봄 혹은 718년 10월 수아송 전투에서 이들을 모두 격파하였다.[21] 그는 힐페리히 2세를 퇴위시키고 클로타르 4세를 네우스트리아의 왕으로 앉혔으며, 라감프리드를 축출하고 랭스 대주교 리고베르트를 네우스트리아 궁재로 앉혔다. 카를은 리고베르트의 평생 후견인을 자처하였다. 718년에는 스스로 프랑크 공작이라 칭하였고, 719년 이후 프랑크 왕국 3개 분국의 궁재를 모두 차지하여 왕국의 주도권을 잡았다.714년 아버지 피핀 2세가 사망하자, 그의 정실 부인인 플레크트루데에 의해 유폐되었으나[46], 716년에 탈출했다.[47][48] 그 후, 네우스트리아(현재 프랑스의 대부분) 궁재 취임을 선언한 라간프리드(? - 731년)를 격파하고,[47][48][49] 그에 따라 플레크트루데로부터 지배권을 빼앗아[50], 718년 프랑크 왕국 전체의 궁재가 되었다.[51]
715년, 다고베르트 3세는 라겐프리드를 궁재로 임명했다. 715년 9월 26일, 라겐프리드의 네우스트리아군은 콩피에뉴 전투에서 어린 테우도알드의 군대와 맞붙었다. 테우도알드는 패배하여 쾰른으로 도망쳤다. 그해 말, 샤를은 감옥에서 탈출하여 오스트라시아 귀족들로부터 궁재로 추대되었다.[16] 같은 해, 다고베르트 3세가 죽고 네우스트리아인들은 힐페리크 2세, 힐데리크 2세의 수도원 생활을 하던 아들을 왕으로 선포했다.
샤를은 더 많은 병사를 모으고 준비할 시간을 가졌다. 이듬해 봄까지 그는 뉴스트리아를 침공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지원을 확보했다. 샤를은 킬페리크가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로서 그의 권리를 인정한다면 적대 행위를 중단하자는 제안을 담은 사절을 보냈다. 거절은 예상되었지만 뉴스트리아인들에게 샤를의 군대의 불합리성을 각인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들은 717년 3월 21일 뱅시 전투에서 캉브레 근처에서 만났다. 승리한 샤를은 도망치는 왕과 궁재를 파리까지 추격했지만, 아직 도시를 점령할 준비가 되지 않아 쿨트루드와 쾰른을 처리하기 위해 돌아서서 도시를 점령하고 그녀의 지지자들을 흩어지게 했다. 플렉트루드는 수녀원으로 은퇴하도록 허락되었다.
이러한 성공을 바탕으로 카롤루스 마르텔루스는 킬페리크에 대항하여 클로타르 4세를 아우스트라시아의 왕으로 선포하고, 평생 지지자였던 밀로를 임명하기 위해 랭스 대교구의 리고베르트 대주교를 폐위시켰다.
718년, 킬페리크는 카롤루스의 새로운 지위 상승에 대응하여 715년 내전 동안 독립했던 아키텐 공작 오도 대왕(또는 유데스라고도 함)과 동맹을 맺었지만, 수아송 전투에서 카롤루스에게 다시 패배했다.[21] 킬페리크는 그의 공작 동맹과 함께 루아르 강 남쪽으로 도망쳤고, 라간프리드는 앙제로 도망쳤다. 곧 클로타르 4세가 사망했고 오도는 카롤루스가 자신의 공작 지위를 인정하는 대가로 킬페리크 왕을 넘겨주었다. 카롤루스는 모든 왕국에 대한 자신의 궁재직에 대한 정당한 왕실의 확증을 조건으로 킬페리크를 프랑크 왕국의 왕으로 인정했다.
719년까지 카를은 프랑크 왕국 내의 반대파들을 모두 제거하고, 세 분국의 궁재로서 프랑크 왕국을 단독 통치했다.
2. 3. 정복 전쟁
카롤루스 마르텔루스는 717년 뱅시 전투에서 승리한 후, 쾰른을 점령하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다. 이후 프랑크족을 통일하고 작센족을 격파하여 프랑크 왕국의 국경을 안정시켰다.[16] 719년 프리슬란트의 지도자 라드보드가 사망한 후, 프리지아인들의 저항을 물리치고 서프리지아를 장악했다.[48]720년부터 723년까지 카롤루스는 바이에른에서 아길롤핑 공작들이 독립적인 통치자로 발전하는 것을 견제하고, 알레만니와 바이에른의 후베르트 공작에게 프랑크족의 종주권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다. 725년에는 아길롤핑 공주 스와나힐드를 두 번째 아내로 맞이했다.[72]
731년, 카롤루스는 아키텐의 에우도 공작과의 조약을 파기하고 루아르 강을 건너 아키텐을 공격했다. 부르주를 점령하는 등 승리를 거두었지만, 에우도는 알-안달루스 토후국에 지원을 요청했다.[22] 732년, 압드 알-라흐만 이븐 압드 알라 알-가피키가 이끄는 이슬람 군대가 투르를 향해 진군하자, 카롤루스는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이들을 격파했다.[53] 이 승리로 서유럽은 이슬람 세력의 침공으로부터 보호되었고, 카롤루스는 '그리스도교 사회의 수호자'로 칭송받았다.[54]
이후 카롤루스는 734년 보언 전투에서 프리지아 공작 부보를 살해하고 프리기아를 완전히 복속시켰다.[48] 735년 에우도 공작이 사망하자, 카롤루스는 아키텐을 직접 통치하려 했으나 귀족들은 에우도의 아들 후날드 1세를 공작으로 선포했고, 결국 카롤루스와 후날드는 서로의 지위를 인정했다.
2. 3. 1. 작센, 알레만니아, 바이에른 정벌
718년 카를은 작센족을 응징하기 위해 베저 강, 리페, 루르 강까지 진출했다.[16] 719년 프리슬란트의 지도자 라드보드가 사망하자, 카를은 서프리지아를 장악했다.[48] 720년에서 723년 사이 카를은 바이에른에서 아길롤핑 공작들이 롬바르드 족의 리우트프란드 왕과 동맹을 맺고 독립적인 통치자로 발전하는 것을 견제했다. 그는 알레만니에게 프랑크족의 종주권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했고, 바이에른의 후베르트 공작도 이를 수용했다. 725년 카를은 아길롤핑 공주 스와나힐드를 두 번째 아내로 맞이했다.[72]722년부터 723년까지 카를은 알레만니 남쪽 지방을 공략하여 테오데발트를 몰아냈다. 란트프리드는 북부 알레만니아의 영토를 유지하며 카를에게 항복하고 종주권을 약속했다. 724년 카를은 란트프리드의 도움을 받아 프륌에 라이케나우 수도원을 건립했다.[72]
725년 카를은 바이에른을 프랑크 왕국의 식민지로 규정하고, 국왕 테오도리히 4세의 이름으로 프랑크 왕국의 법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후고베르트와 바이에른 귀족들은 독립을 시도했고, 728년과 730년 카를은 다시 바이에른을 공격했다. 736년 후고베르트가 사망하고, 알레만 출신 오딜로가 바이에른 공작위를 계승했으나, 얼마 뒤 프랑크 왕국으로 망명하여 카를 마르텔의 딸 힐트루드와 결혼했다.
730년 카를은 알레만을 공격하여 테오데발트를 몰아내고, 란트프리트의 영토를 접수하게 했다. 732년 프리미누스의 후계자 헤도는 테오데발트의 박해를 피해 프랑크로 도피했고, 카를은 군사를 이끌고 알레만으로 가 라이케나우 수도원과 프륌 수도원을 복구하고 테오데발트를 몰아냈다.[76] 734년 카를은 헤도를 스트라스부르크 교구의 주교로 임명했다.[76]
738년 카를은 다시 작센 족을 공략하여 황폐화시키고, 다량의 공물과 인질을 강요했다.
2. 3. 2. 프리기아 정벌
715년~716년 쾰른에서 카를 마르텔을 기습공격했던 프리기아인들에 대한 적개심을 품고 있던 카를 마르텔은 719년 프리기아의 부족장 라트보트가 죽자 프리기아를 공략했다.[16] 프리기아 정벌 후 귀국길에 카를 마르텔은 위트레흐트에 있는 윌리 브로드 수도원에 막대한 재산과 보물을 넘겨주었다.[16]734년에는 보언 전투에서 프리지아 공작 부보를 살해하고, 프리기아 이교 신전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려 20년 동안 이 지역의 평화를 가져올 정도로 주민들을 완전히 복속시켰다.[48]
2. 3. 3. 성당, 수녀원 토지와 재산 압수
718년부터 723년까지 카를은 바이에른과 알레만니아를 공격하여 승리하였으며, 이때 얻은 전리품들을 대부분 몇몇 중요한 도시의 교회에 기부하여, 교회의 재정에 기여함으로써 주교와 수도원장들의 환심을 샀다. 특히 에히터나흐의 수도원은 카를에게서 막대한 토지를 선물로 받았다.[65][66][67] 그러나 막강한 군사 비용과 측근 가신들에 대한 봉토가 필요하게 되자 교회, 수녀원, 수도원의 재산을 압수하여 이를 분배하였다.카를 마르텔은 교회를 세속화하였고 프랑크 왕국 교회를 쇠퇴케 하였다.[74] 계속된 정복 전쟁과 군사 동원 비용, 그리고 측근 가신들에 대한 봉토 수여에 대한 고민으로 교회와 수녀원 재산으로 군사 비용을 벌충하였다.
그는 교회의 고위 성직록을 자신의 이익 추구와 권력 확장을 위한 수단으로 보았다. 그래서 교회 재산을 약탈하고 주교좌나 수도원을 팔아버리거나 그의 친척과 정신(廷臣)들에게 하사하였다. 예를 들어 그의 조카인 위그는 파리, 루앵, 베이외(Bayeux) 등 세 개의 수도를 소유하고 각각 주교좌를 두어 혼자 관장하였으며, 카를의 동료인 밀롱(Milon) 장군은 트레브와 랭스의 주교가 되었다.[74] 카를 마르텔은 당시 각 주교관구에서 거둬들이는 헌금의 양을 파악하여, 헌금한 돈에 대해서도 노동하지 않고 얻는 수익이라며 세금을 부과하였다. 당시의 성직자들은 생계 유지를 위해 상업에 종사해야 했다.[74]
2. 3. 4. 이슬람과의 전쟁: 투르-푸아티에 전투
719년 아키텐 공작 에우도는 네우스트리아의 힐페리히 2세와 연합하여 카를 마르텔에 대항했으나, 수아송 등지에서 카를 마르텔 군에게 크게 패하였다. 에우도는 아키텐 군사 일부를 데리고 루아르강을 넘어 패주하였다. 721년부터 에우도는 이베리아반도로 진출한 코르도바 이슬람 군과 교전하였다. 우마미야 왕조는 모로코와 예맨, 시리아를 정복하고 남서 갈리아로 쳐들어와 에우도를 포위했고, 에우도는 카를 마르텔에게 도움을 청했다. 721년 6월 9일 카를은 군사를 이끌고 툴루즈로 가서 우마미야 왕조의 군대를 상대했다.(툴루즈의 전투) 카를은 에우도를 탈출시키고, 연합하여 우마미야 군사를 기습 공격하여 물리쳤다.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게르만 족을 야만인으로 보던 아랍의 칼리프들은 툴루즈에서 무슬림 군대가 패배하고, 게르만 족이 조직적으로 훈련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724년부터 732년 카를은 교회와 수도원, 수녀원에 투자했던 땅과 재산을 다시 압수하고, 이를 군사비용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이슬람 군의 침략으로 가톨릭 교회의 반발은 잠시 사그라든다.
731년 카를은 루아르강을 건너 아키텐을 공략, 에우도는 사라센인에게 도움을 청했다. 카를은 우스만 이븐 나이사와 에우도의 제휴를 비난하고, 루아르를 넘어 아키텐을 침공했다. 카를 마르텔의 군대는 부르쥬를 쑥밭으로 만들었고, 에우도는 카를 마르텔의 군대와 싸웠으나 참패하였다. 그리고 카를은 곧 프랑크로 되돌아갔다.

아프리카에서 건너와 스페인을 정복한 사라센 왕국은 732년 지중해 북서부 연안을 점령하고 갈리아 지방으로 진출을 준비하고 있었다. 에우도는 사라센의 무슬림과 손잡고, 분리독립을 기도한다. 732년 에우도의 요청을 받은 총독 압드 알 라흐만 알 가피키의 군대는 바스코니아(Vasconia)를 넘어 보르도를 향해 전진하고 도시를 점령, 교회를 불태우고 약탈을 감행했다. 에우도는 즉시 이들을 지원하였다. 압드 알 라만이 이끄는 군대는 보르도에서 아키텐을 가로질러 투르-푸아티에로 왔으나 푸아티에 시 외곽에서 카를에게 격퇴당했다.

732년 사라센 제국 군과 교전, 피레네산맥과 알프스산맥에서 이슬람 군대를 격퇴하고, 투르 푸아티에 전투에서 이슬람 군대를 궤멸시켰다. 732년 에스파냐에서 피레네산맥을 넘어 골 남부지방인 보르도를 정복하고 투르 지방으로 전진해갈 때 카를은 푸아티에 전투에서 이들을 격퇴시키고 승리자가 되었다. 이로써 카를 마르텔은 아랍인들의 침략에서 서구를 구하여 무관의 왕이 되었다.[77] 그는 그리스도교 사회의 수호자로 여겨졌고, 교황청에서는 그에게 지원, 교황청의 보호자 역할을 요청이 왔다.
아키텐의 에우도와 동맹한 사라센의 군대 중 일부는 파리 시에도 쳐들어와 약탈과 방화를 감행하였다. 사라센 군대는 보르도 지역에서 도시 약탈과 살해, 교회 등을 파괴, 방화하였다. 그러나 카를은 피레네산맥을 넘어 오는 이슬람 군대 역시 계곡에서 격파함으로써 프랑크 왕국을 이슬람 군의 점령 위기로부터 구하였다. 이는 서유럽의 기독교 세계를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보호한 것으로 높이 평가된다. 한편 투르-푸아티에 전투 이후 그는 아키텐인들을 무자비하게 죽였는데, 9세기의 연대기에 의하면 이때 "망치"를 의미하는 "마르텔루스", "마르텔"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사라센과의 교전 과정에서 기마병이 강한 아라비아군과 대항하기 위하여 보병 중심의 프랑크 군제를 개혁, 기사의 병역을 부담하는 가신에게 교회령(敎會領)을 몰수하여 봉토로 주었다. 이것이 봉건제도의 기원이라는 견해에 최근 비판적인 평가가 있다. 투르-푸아티에 전투를 계기로 카를은 동부의 바이에른, 알레만니아 등 부족 공작령 외에도 아키텐과 프로방스 등 남부 공작령과도 지속적으로 충돌했다.
731년, 작센족을 격파한 후 카롤루스(Charles)는 경쟁 관계에 있던 남부 아키텐 왕국으로 눈을 돌려 루아르 강을 건너 오도 공작과의 조약을 파기했다. 프랑크족은 아키텐을 두 번 약탈하고 부르주를 점령했지만, 오도는 이를 다시 탈환했다. ''프레데가르 연대기(Continuations of Fredegar)''는 오도가 새로 건립된 알-안달루스 토후국에 지원을 요청했다고 주장하지만, 720년대부터 아랍의 아키텐 침략이 있었다. 실제로, 익명의 754년 연대기는 721년 툴루즈 전투에서 오도의 승리를 기록하고 있으며, ''교황청 연대기''(Liber Pontificalis)는 오도가 375,000명의 사라센인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22]
압드 알-라흐만 알-가피키가 이끄는 군대가 북쪽으로 향했고, 몇 차례의 작은 교전을 거친 후 부유한 도시 투르를 향해 진군했다. 영국의 중세 역사가 폴 포르에이커에 따르면, "그들의 원정은 전쟁의 시작이라기보다는 장거리 약탈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23] 그러나 그들은 투르 전투(프랑스에서는 푸아티에 전투로 알려짐)에서 카롤루스 군대에 의해 격파되었으며, 이 전투는 프랑스 도시 투르와 푸아티에 사이에서 벌어졌다. 역사가 버나드 바크라흐에 따르면, 대부분 기병으로 구성된 아랍군은 프랑크 보병을 돌파하는 데 실패했다.[24] 그러나 당시 아랍 출처에서는 두드러지게 언급되지 않는다.[25]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카롤루스는 아키텐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고, 오도는 735년까지 공작으로 남아 있었다. 그 후 외정을 시작하여 왕국 북쪽의 프리슬란트(프리지아)와 베스트팔리아의 색슨족 원정을 실시하고, 라간프리드 지휘하의 네우스트리아 반란도 진압했다.[48] 732년에 우마이야 왕조가 다시 침공하여 이베리아 지사인 압드 알 라흐만 알 가피키의 군세가 보르도를 약탈하고 루아르 강 유역의 중요 도시 투르로 접근하자, 마르텔은 이를 요격했다. 양군은 푸아티에 근교에서 격돌하고, 알 가피키가 전사한 우마이야군은 퇴각했다(투르 푸아티에 전투)[53] . 이 결과, 이슬람 세력에 의한 서유럽 침공은 저지되었고,[54] 이후의 레콩키스타의 기반이 만들어졌다.
2. 4. 생애 후반
723년 카를 마르텔은 은신해 있던 이복형 드로고 2세의 두 아들을 체포했다.[71] 720년부터 723년 사이 바이에른 공작 가문인 아길롤핑 가문은 카를과 제휴했지만, 카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통치자가 되려 했다. 725년에 바이에른을 다시 공략, 처가 쪽 친척이자 증조모쪽 친척인 아길롤핑 가문의 그리모알트를 죽이고, 바이에른 공작가의 딸인 아길롤핑 가문 출신 스완힐드[70]와 바이에른 부족공 그리모알드의 처 빌트루트를 사로잡아왔다.724년 카를 마르텔은 바이에른에 가톨릭을 포교하기 위해 성 코르비니아누스 주교를 파견했다. 그런데 성 코르비니아누스 주교는 바이에른에서 전교하던 중, 바이에른 공작 그리모알트가 자신의 동생의 미망인 빌트루드와 결혼하는 것을 목격했고, 근친 상간이라고 비난했다. 카를의 압력으로 그리스도교로 개종 중이던 그리모알트는 분노했고, 성 코르비니아누스는 프랑크 왕국으로 도피하였다. 725년 카를은 그리모알트의 근친 상간을 명분삼아 군사를 일으켜 바이에른을 공격하여 그리모알트를 죽이고 빌트루드와 스완힐드를 끌고 와 첩으로 삼았다. 725년과 728년 카를은 바이에른을 두번 공략하여 가톨릭 교리에 어긋나는 바이에른 족의 제도인 근친 결혼과 게르만 전통 신앙을 금지시켰다. 랑고바르드의 국왕 리우트란트와 바이에른 공작 후고베르트는 알레만니 족을 강제로 동행하여 프랑크 왕국을 방문, 프랑크 왕국의 종주권은 인정하되, 카를의 첩이 된 스완힐드를 데리고 갔다.
737년, 메로빙거 왕조의 테우데리크 4세가 사망했다. 카롤루스는 스스로를 "마요르 도무스(maior domus)"와 "프랑크인의 프린켑스 에트 둑스(princeps et dux Francorum)"라고 칭하며 새로운 왕을 임명하지 않았고, 아무도 왕으로 추대하지 않았다. 왕위는 카롤루스가 죽을 때까지 공석으로 남아 있었다. 카롤루스 생애의 마지막 4년 동안의 공위 시대는 비교적 평화로웠지만, 738년에는 베스트팔렌의 작센족을 복종시켜 조공을 바치게 했고, 739년에는 마론투스의 지도 아래 반란군이 결집한 프로방스에서 봉기를 진압했다.
카롤루스는 상대적인 평화를 이용하여 제국의 변방 영토를 프랑크 교회에 통합하려고 했다. 그는 바이에른에 잘츠부르크, 레겐스부르크, 프라이징, 파사우 4개의 교구를 세우고 성 보니파시오를 대주교이자 라인강 동쪽 전체 독일의 수도 대주교로 임명했으며, 그의 거점은 마인츠에 두었다. 보니파시오는 723년부터 카롤루스의 보호를 받아왔다.
739년, 교황 그레고리오 3세는 롬바르드 왕국의 리우트프란트에 대항하기 위해 카롤루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카롤루스는 한때 동맹이었던 그와 싸우기를 꺼려하며 요청을 무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의 프랑크족 보호 요청은 카롤루스가 파문 위기에 놓였던 때로부터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보여주었고, 그의 아들과 손자가 이탈리아 반도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741년 10월 22일, 카롤루스는 프랑스 피카르디 지역 에인 데파르트망에 위치한 퀘르지에서 사망했다. 그는 파리의 생 드니 대성당에 묻혔다.[26] 그의 영토는 1년 전에 그의 성인 아들들에게 분할되었다. 카를로만에게는 오스트라시아, 알레마니아, 튀링겐을, 피핀 3세에게는 네우스트리아, 부르군디, 프로방스, 그리고 "모젤 공작령"에 있는 메츠와 트리어을 주었다. 그리포는 왕국 전역의 여러 토지를 받았지만, 이는 카롤루스 사망 직전에 이루어졌다.[27]

2. 4. 1. 부르군트와 아키텐 문제
732년부터 735년 사이 카를은 부르군드를 공략했는데, 733년 부르군드에 항복을 강요했고, 결국 부르군트의 공작과 지지자들을 축출하고 자신의 사람으로 부르군트 공작에 앉혔다. 또한 프로방스를 정복했다.[78] 734년에는 프리기아를 정벌하는데 성공한다. 프리기아는 공작 라트보트의 아들이자 719년부터 프리기아의 부족공작이던 포포(Poppo) 또는 부포(Buppo)를 중심으로 프랑크 왕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 했고, 빌리브란트와 보니파시오를 추방하려 했다. 카를은 군대를 이끌고 프리기아로 가서 보아른의 전투(Battle of the Boarn)에서 프리기아 군을 대패시키고 보아드 또는 포포를 죽였다. 이때 빌레(Vlie)와 라우어스(Lauwers) 일대의 프리기아의 영역을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동시에 프리기아의 주민들과 그들의 성소와 전통 신앙 제단을 모조리 파괴하였다.[78]734년 다시 아키텐을 공략했다가 회군하였고, 735년 에우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군대를 이끌고 다시 루아르강을 건너가 아키텐, 보르도와 그 주변지역을 자신의 세력권 아래 두고 고트족, 사라센인 등을 축출했다. 하지만 에우도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후놀드는 계속 아키텐의 분리독립을 기도했다. 735년, 아키텐 공작 오도가 사망하자 카롤루스는 공작령을 직접 통치하고 아키텐인들의 복종을 얻기 위해 그곳으로 갔지만, 귀족들은 오도의 아들인 아키텐의 후날드 1세를 공작으로 선포했고, 카롤루스와 후날드는 결국 서로의 지위를 인정했다. 프로방스의 일부 귀족들은 우마미야 왕조의 베르베르족과 동맹을 맺었다. 736년 카를은 다시 군사를 이끌고 부르군드로 쳐들어가 부르군드 귀족들의 항복을 얻어냈고, 730년대에는 사라센인과 여러 차례 교전을 벌였다.
736년 다시 우마미야 군대가 프로방스로 올라와 프로방스 요새를 점령하였다. 카를은 일단 아키텐의 후놀드와의 분쟁을 중단하고, 신속하게 이동하여 브레 강에서 우마미야 왕조의 군사와 싸웠지만 창과 화살로 공격하는 우마미야 군대에 의해 초반 프랑크 족 군사들이 많이 희생되면서 실패했다. 정면 공격을 시도했으나 되지 않자, 긴급히 다른 프랑크 족 귀족들의 도움을 얻어 우마미야 군대와 교전했다. 737년 카를은 나르 강 근처 비르에에서 우마이야 군대를 완전히 격파하였다. 이때 카를은 무거운 갑옷으로 중무장한 기갑부대를 처음 창설하여 보병과 함께 번갈아가며 운용하며 우마미야 군사와 교전했다.
736년부터 737년 카를 마르텔은 랑고바르드의 왕 리우르프란드(Liutprand)에게 지원을 요청, 엑상프로방스와 아를(Arles)에 주둔하던 무어인들 추방을 돕게 하였다. 리우르프란트는 바로 알프스로 군사를 보내주었다. 737년 여름, 카를 마르텔은 랑고바르드의 왕 리우르프란드에게 사절로 자신의 아들 피핀 3세를 보냈다. 이때 후계자가 없었던 리우르프란트는 갑자기 병에 걸리게 되면서, 피핀의 방문을 계기로 자신의 조카인 힐데프란트(Hildeprand)를 후계자 겸 공동통치자로 선언한다.
2. 4. 2. 교황청의 원조 요청 거절
739년 롬바르드의 왕 리우트프란트가 이탈리아 전역을 정복하기 위해 다시 로마를 침공했을 때, 로마 교황청은 프랑크 왕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3세는 마르텔에게 사신을 파견하여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마르텔은 교황 사절에게 호의는 보였으나 군사 지원 요청은 거절하였다.[79] 카를은 교황청의 군사 원조 요청에 대해 교회를 보호할 수는 있되 교회의 신하는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거절했다.당시 마르텔은 롬바르드 족과 불가침 동맹을 맺고 있었고, 732년의 투르 전투에서 롬바르디아의 후원을 받은 사정도 있어서 이에 응하지 않았다.[80] 또한 사라센인 및 우마이야 왕조 군대와 계속 전투를 치뤄야 했기 때문에 동로마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한편 롬바르드 족과 동맹을 체결한 상태였다. 결국 교황은 리우트프란트와 평화 협정을 맺게 되었다.[81]
739년, 교황 그레고리오 3세는 롬바르드 왕국의 리우트프란트에 대항하기 위해 다시 한번 카롤루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카롤루스는 한때 동맹이었던 그와 싸우기를 꺼려하며 요청을 무시했다.
2. 4. 3. 만년과 죽음
737년 테오도리히 4세가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은 채 사망하자 왕위는 공석이 되었으나, 이미 왕국의 실권은 완전히 마르텔의 수중에 있었다. 성 윌리브로르드의 에흐터나흐 수도원은 마르텔이 제후들을 억누르기 위한 권위를 부여했다. 그러나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양하여 왕에 취임하지 않고 국왕을 대리하여 정무를 주관하였다.[82]카를은 만년에 병에 시달렸고, 잦은 격무로 쓰러지기도 했다. 739년 롬바르드족의 공격에 시달리고 있던 교황 그레고리우스 3세의 구명, 군사원조 요청을 국력이 안됨을 이유로 거절했고, 교황의 호소를 무시했다. 교황에게서 값진 선물들, 심지어 성 베드로 무덤의 열쇠 등을 선물로 받았으나 카를은 형식적인 답례만을 했을 뿐 원조를 약속해주지 않았다.
741년 카를 마르텔은 열병에 걸렸고, 병세가 심해졌다. 741년 3월 카를이 병석에 누운 것을 기회로, 바이에른 부족공작이자 사위인 오딜로는 독립을 기도한다. 또한 아키텐의 후놀드 1세 역시 독립을 시도한다. 741년 9월 17일 카를 마르텔은 메로빙거 왕조의 지역 별궁이 있던 클리시의 땅을 생 드니 수도원에 봉헌했다. 이때 스완힐드와 그리포는 카를의 문서에 서명했지만, 카를로만과 피핀 3세는 서명을 거부했다.
741년 10월에 쿠아즈 궁전(Quierzy)에서 열병으로 사망했을 때 그는 이슬람의 침입을 격퇴한 공로로 특별히 왕족들이 묻히던 파리 생드니 대성당 지하의 테오도리히 3세 묘소 옆의 석관에 안치되었다. 그의 사망 일자는 10월 15일설과 또는 10월 22일설이 있다. 좀 더 정확하게는 741년 10월 22일, 현재 프랑스 피카르디 지역 에인 ''데파르트망''에 위치한 퀘르지에서 사망했고 파리의 생 드니 대성당에 묻혔다.[26]
그의 영토는 1년 전에 그의 성인 아들들에게 분할되었다. 카를로만에게는 오스트라시아, 알레마니아, 튀링겐을, 피핀 3세에게는 네우스트리아, 부르군디, 프로방스, 그리고 "모젤 공작령"에 있는 메츠와 트리어을 주었다. 그리포는 왕국 전역의 여러 토지를 받았지만, 이는 카롤루스 사망 직전에 이루어졌다.[27]

3. 유산과 평가
카롤루스 마르텔은 메로빙거 왕조가 쇠퇴하고 궁재가 실권을 장악하던 시기에 프랑크 왕국을 통치했다. 카롤루스는 헤르스탈의 피핀과 그의 첩 알파이다의 아들이었다.[11][12] 피핀은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고뉴를 정복하여 프랑크 왕국을 통일했으며, 스스로 '프랑크 공작이자 공'이라고 칭한 최초의 인물이었고, 이 칭호는 카롤루스에게 계승되었다.[13]
카롤루스는 초기에는 많은 내부 반대에 직면하여 클로타르 4세를 왕위에 앉히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프랑크 왕국의 통치 역학이 변화하면서 메로빙거 왕조의 왕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카롤루스는 자신의 왕국을 아들들에게 분할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카롤루스가 아들 피핀의 왕위 등극(751년)과 손자 샤를마뉴의 황제 즉위(800년)에 대한 기반을 마련했다고 평가한다. 폴 포에이커는 카롤루스를 "프랑크 왕국에서 가장 효과적인 군사 지도자"로 평가하면서도, 그의 경력은 "미완의 과제를 남긴 채 마무리되었다"고 보았다.[28]
카롤루스 사후, 그의 직책은 프랑크족의 관습에 따라 아들들에게 분할 상속되었다. 작은 피핀이 형 카를로만과 이복 동생 그리포를 제압하고 프랑크 왕국 전체를 통솔했으며, 751년 왕위에 올라 카롤링거 왕조를 열었다.
3. 1. 군사적 업적
카롤루스 마르텔루스는 중세 초기 작가들에게 군사적 승리로 유명했다. 파울루스 디아코누스는 아키텐의 오도가 사라센과의 전투에서 거둔 승리를 카롤루스의 공으로 돌렸다.[29] 18세기에는 에드워드 기번과 같은 역사가들이 카롤루스를 이슬람의 침략으로부터 기독교 유럽을 구원한 인물로 묘사하기 시작했다.[32]19세기 독일 역사가 하인리히 브루너는 카롤루스가 군사 개혁 자금 마련을 위해 교회의 토지를 몰수했다고 주장했다.[33] 20세기에도 많은 역사가들이 기번의 관점을 이어갔다. 1911년 프랑스 중세학자 크리스티앙 프피스테르는 카롤루스가 갈리아의 통일성을 확립하고, 732년 10월 압드 알 라흐만 알 가피키에게 승리하여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갈리아를 구원했다고 평가했다.[3] 1993년 윌리엄 E. 왓슨은 카롤루스가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했다면 서방의 역사가 매우 다르게 흘러갔을 것이라고 주장했다.[34] 같은 해 새뮤얼 P. 헌팅턴은 투르 전투를 "아랍과 무어인의 서쪽 및 북쪽으로의 급증"의 종말로 보았다.[35]
그러나 최근 역사가들은 투르 전투의 중요성이 과장되었다고 주장한다. 2004년 알레산드로 바르베로는 카롤루스에게 패배한 아랍군의 목적이 프랑크 왕국 정복이 아니라 투르의 생 마르탱 수도원 약탈이었다고 지적했다.[36] 2002년 토마즈 마스트나크는 프레데가르 연대기 계속자가 투르 전투를 기독교인과 사라센 간의 여러 군사적 만남 중 하나이자, 카롤링거 왕조가 아키텐을 통치하려는 과정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묘사했다고 썼다.[37]
최근 카롤루스에 대한 기억은 극우 정치와 백인 민족주의 단체에 의해 전유되기도 한다. 프랑스의 '카롤루스 마르텔루스 그룹'과 2019년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모스크 총기 난사 사건의 범인이 그 예시이다.[38] 카롤루스에 대한 기억은 현재 프랑스 정치의 우파와 좌파 모두에서 논쟁의 대상이다.[39]
4. 가계
카롤루스 마르텔루스는 헤르스탈의 피핀과 그의 첩 알파이다의 아들이었다.[11][12] 그는 메츠의 아르눌프의 증손자이며, 형제로는 킬데브란트가 있었는데, 킬데브란트는 나중에 프랑크 왕국의 부르고뉴 공작이 되었다.[13]
초기 역사 기록에서는 카롤루스를 "사생아"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지만, 8세기 프랑크 왕국에서는 아내와 첩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았다. "사생아"라는 비난은 피핀의 첫 번째 부인인 플렉트루데가 자신의 자식들을 피핀의 왕위 계승자로 만들고 싶어했기 때문에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14][15]
카롤루스는 트레브의 로트루드와 스반힐트와 결혼하였다.
카롤루스 마르텔루스는 3명의 여성에게서 6명의 아들을 두었다고 한다.[57]
부인 | 자녀 |
---|---|
로트루드 드 트레베(690년경 - 724년/725년) | |
스반힐트 | |
루오다히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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佐藤、p.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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柴田 他、p.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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ネウストリア貴族がラガンフリドを宮宰に選んだという(柴田 他、p.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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