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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버레이터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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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더 리버레이터는 국제 뉴스에 초점을 맞춘 잡지로, 1918년 창간되어 공산 노동당 창립자인 존 리드 등이 기고했다. 정치 미술을 적극 활용하고 칼 샌드버그, 어니스트 헤밍웨이 등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을 게재했으나, 재정 문제로 인해 1922년 미국 공산당에 인수되었다. 이후 미국 공산당의 기관지 역할을 했으며, 1924년 노동 헤럴드 등과 통합되어 노동자 월간으로 변경되었다. 1927년 공산주의자로, 1945년 정치 문제로 제호가 변경되었고, 2008년 온라인으로 전환되었다가 2016년 폐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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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버레이터 (잡지)
기본 정보
1918년 3월 데뷔호, 휴고 겔러트의 표지 미술
1918년 3월 데뷔호, 휴고 겔러트의 표지 미술
범주정치
창간일1918년 3월
폐간일1924년 10월
발행 빈도월간
발행 주체
1918-1922년Liberator Publishing Co.
1922-1924년미국 노동자당
편집진
편집자맥스 이스트먼 (1918-22)
플로이드 델 (1922)
로버트 마이너 (1922-24)
직원 작가코넬리아 반스
하워드 브루베이커
도로시 데이
휴고 겔러트
아르투로 지오반니티
찰스 T. 홀리난
엘렌 라 모트
로버트 마이너
존 리드
보드먼 로빈슨
루이스 운터마이어
찰스 W. 우드
아트 영

2. 역사

''더 리버레이터''는 창간 초기 국제 뉴스, 특히 존 리드의 소비에트 러시아 보도와 로버트 마이너, 프레드릭 쿠, 크리스탈 이스트먼 등의 유럽 관련 보고에 중점을 두었다. 전신인 ''더 매시스''처럼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미술 작품을 중요하게 다루었으며, E.E. 커밍스, 어니스트 헤밍웨이, 헬렌 켈러 등 다양한 작가와 예술가들이 참여했다. 또한 칼 샌드버그, 클로드 맥케이 등의 문학 작품도 게재되었다.

잡지는 저렴한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얇은 신문 용지를 사용했는데, 이는 산성 성분이 높아 장기 보존에 어려움을 야기했다. 월간 발행 부수가 최대 60,000부에 달했음에도 불구하고[1] 현존하는 판본은 비교적 적다.

1922년, 편집자 맥스 이스트먼의 관심이 책 집필로 옮겨가면서 재정 및 동기 부여 문제에 직면했고, 편집권은 플로이드 델에게 넘어갔다. 델의 편집 하에 잡지는 예술과 문화 관련 내용의 비중이 커졌으나 재정난은 심화되었다. 결국 같은 해 10월, 미국 공산당(CPA)과 그 자매 조직인 미국 노동자당(Workers Party of America)에 우호적으로 인수되었다.

인수 이후 ''더 리버레이터''는 사실상 미국 공산당의 공식 기관지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로버트 마이너가 편집을 맡고 조셉 프리먼이 문학 담당 부편집장으로 활동했으며, 기존의 그래픽 스타일과 문학 지향성은 유지되었으나 정치적 내용은 공산당 노선에 따라 이념적 범위가 좁아졌다. C. E. 루텐버그, 윌리엄 Z. 포스터 등 주요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기고하기 시작했다.

1924년, ''더 리버레이터''는 노동자당의 다른 간행물인 ''노동 헤럴드''(The Labor Herald) 및 ''소비에트 러시아 픽토리얼''(Soviet Russia Pictorial)과 통합되어 ''노동자 월간''(The Workers Monthly)으로 재창간되었다. 이 잡지는 이후 ''공산주의자''(The Communist, 1927년), 그리고 ''정치 문제(Political Affairs, 1945년)''로 제호를 변경하며 명맥을 이었다. ''정치 문제''는 2008년 온라인판으로 전환되었으나 2016년 최종 폐간되었다.

2. 1. 창간 배경

''더 리버레이터''는 국제 뉴스 보도에 중점을 두었으며, 특히 공산 노동당 창립자 중 한 명인 존 리드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상황을 상세히 전달했다. 또한 로버트 마이너, 프레드릭 쿠, 크리스탈 이스트먼 등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 각지의 소식을 보고했다.

이전의 잡지 ''더 매시스''(The Masses)와 마찬가지로, ''더 리버레이터''는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은 미술 작품을 중요하게 다루었다. 모리스 베커, E. E. 커밍스, 존 도스 파소스, 프레드 엘리스, 리디아 깁슨, 윌리엄 그로퍼, 어니스트 헤밍웨이, 헬렌 켈러, J.J. 랭크스, 보드먼 로빈슨, 에드먼드 윌슨, 완다 개그, 아트 영 등 다양한 분야의 작가와 예술가들이 기고자로 참여했다. 잡지의 독특한 특징 중 하나는 매호 다른 색상의 카드 용지로 표지를 제작한 점이었다. 또한 칼 샌드버그, 클로드 맥케이, 아르투로 조반니티 등의 시와 소설 작품도 지면에 실렸다.

2. 2. 주요 편집자와 필진

''더 리버레이터''는 창간 초기부터 국제 뉴스에 큰 비중을 두었다. 특히 전쟁 특파원이자 공산 노동당 창립에 기여한 존 리드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상황을 생생하게 보도하여 주목받았다.[1] 그의 기사는 당시 미국 사회에 러시아 혁명의 실상을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외에도 로버트 마이너, 프레드릭 쿠(Frederick Kuh), 크리스탈 이스트먼 등이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 각지에서 보고서를 보내왔다.

초대 편집장인 맥스 이스트먼의 주도 아래, 잡지는 ''더 매시스''의 전통을 이어받아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은 미술 작품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모리스 베커, E.E. 커밍스, 존 도스 파소스, 프레드 엘리스(Fred Ellis), 리디아 깁슨(Lydia Gibson), 윌리엄 그로퍼, 어니스트 헤밍웨이, 헬렌 켈러, J.J. 랭크스(J.J. Lankes), 보드먼 로빈슨(Boardman Robinson), 에드먼드 윌슨, 완다 개그(Wanda Gág), 아트 영(Art Young) 등 당대의 저명한 작가와 예술가들이 삽화와 만평을 기고했다. 또한 칼 샌드버그, 클로드 맥케이, 아르투로 조반니티(Arturo Giovannitti) 등의 시와 소설도 지면을 장식하며 문학적인 깊이를 더했다.

1922년, 편집장 맥스 이스트먼이 책 집필에 집중하기 위해 편집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플로이드 델에게 편집권을 넘겼다. 델이 편집을 맡은 시기에는 정치적인 논평보다는 예술과 문화 관련 내용의 비중이 커졌으며, 클로드 맥케이의 첫 시집과 마이클 골드의 소설 등이 출판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잡지는 재정난에 부딪혔고, 결국 미국의 지하 미국 공산당(CPA) 및 그 자매 조직인 미국 노동자당(Workers Party of America)과 협력하여 10월에 공산당 측으로 소유권이 넘어갔다.

공산당 인수 이후, ''더 리버레이터''는 사실상 당의 공식 기관지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 시기 편집은 전직 무정부주의자에서 공산주의자로 전향한 로버트 마이너가 주도했으며, 조셉 프리먼이 문학 담당 부편집장으로 그를 도왔다. 잡지의 그래픽 스타일과 문학 작품 게재 경향은 유지되었으나, 정치적인 내용은 공산당의 노선을 따르면서 이념적 범위가 눈에 띄게 좁아졌다. C. E. 루텐버그, 존 페퍼(John Pepper), 윌리엄 Z. 포스터, 제이 러브스톤, 맥스 베다흐트(Max Bedacht) 등 주요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적극적으로 글을 기고하기 시작했다.

2. 3. 예술과 문학

''더 리버레이터''는 더 매시스(The Masses)와 마찬가지로 정치 미술에 큰 비중을 두었다. 잡지에는 모리스 베커(Maurice Becker), E.E. 커밍스(E.E. Cummings), 존 도스 파소스(John Dos Passos), 프레드 엘리스(Fred Ellis), 리디아 깁슨(Lydia Gibson), 윌리엄 그로퍼(William Gropper),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헬렌 켈러(Helen Keller), J.J. 랭크스(J.J. Lankes), 보드먼 로빈슨(Boardman Robinson), 에드먼드 윌슨(Edmund Wilson), 완다 개그(Wanda Gág), 아트 영(Art Young) 등 당대의 여러 예술가와 작가들이 기고했다. 또한, 칼 샌드버그(Carl Sandburg), 클로드 맥케이(Claude McKay), 아르투로 조반니티(Arturo Giovannitti) 등의 시와 소설도 지면을 채웠다.

매호 다채로운 색상의 카드 용지로 제작된 표지는 ''더 리버레이터''의 시각적 특징 중 하나였다. 그러나 비용 절감을 위해 본문에는 얇고 산성 성분이 높은 신문 용지를 사용해야 했고, 이로 인해 잡지의 보존성은 떨어졌다. 월간 발행 부수가 최대 60,000부에 달했음에도 불구하고[1] 현재 남아있는 ''더 리버레이터''는 비교적 적다.

1922년, 편집자 맥스 이스트먼(Max Eastman)이 책 집필에 집중하면서 플로이드 델(Floyd Dell)에게 편집 작업을 넘겼다. 델이 편집을 맡은 이후, 잡지는 정치적인 문제보다는 예술과 문화에 대한 관심을 더 많이 반영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클로드 맥케이의 첫 시집과 마이클 골드(Michael Gold)의 소설이 출판되기도 했다.

같은 해 가을, 재정난에 직면한 ''더 리버레이터''는 미국 공산당(Communist Party of America, CPA) 및 그 자매 조직인 미국 노동자당(Workers Party of America)에 의해 인수되었다. 인수 이후에도 잡지는 기존의 그래픽 스타일과 문학 작품에 대한 지향성을 유지했지만, 정치적 내용의 이념적 범위는 공산주의 노선에 맞춰 좁아졌다. 이 시기에는 전직 무정부주의자에서 공산주의자로 전향한 로버트 마이너(Robert Minor)가 편집자로 활동했으며, 조셉 프리먼(Joseph Freeman)이 문학 담당 부편집장으로 그를 보좌했다.

2. 4. 재정 문제와 폐간

정교한 간행물을 저렴한 가격으로 유지하는 데에는 대가가 따랐다. 비용 절감을 위해 잡지 페이지에 얇은 신문 용지를 사용했는데, 이는 저렴했지만 산성 성분이 높아 보존성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었다. 그 결과 잡지는 쉽게 손상되는 간행물이 되었고, 월간 발행 부수가 최대 60,000부에 달했음에도 불구하고[1], 현재까지 남아 있는 ''더 리버레이터''의 표본은 비교적 적다.

1922년, ''더 리버레이터''는 재정적 어려움과 함께 운영상의 문제에 직면했다. 편집자였던 맥스 이스트먼(Max Eastman)의 관심이 잡지 편집이라는 일상적인 업무에서 책 집필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이스트먼은 1922년 1월 1일경 편집 작업을 플로이드 델(Floyd Dell)에게 넘겼다. 델이 편집을 맡은 1922년 동안에는 정치적인 내용보다는 예술과 문화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커졌으며, 클로드 맥케이(Claude McKay)의 첫 시집과 마이클 골드(Michael Gold)의 소설이 출판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해 재정 상황이 더욱 어려워지자, 당시 불법 상태였던 미국 공산당(Communist Party USA)이 이스트먼, 델, 그리고 잡지에 참여하던 작가들과 협력하여 1922년 10월, 잡지를 우호적으로 인수했다.

1922년 가을 이후, ''더 리버레이터''는 미국 공산당(CPA)과 그 합법 정당 조직인 미국 노동자당(Workers Party of America)의 사실상 공식 기관지가 되었다. 기존의 그래픽 스타일과 소설 중심의 경향은 유지되었지만, 정치적인 내용의 이념적 범위는 눈에 띄게 좁아졌다. 전직 무정부주의자에서 공산주의 지지자로 변신한 로버트 마이너(Robert Minor)가 이 시기 편집자로 활동했으며, 조셉 프리먼(Joseph Freeman)이 문학 담당 부편집장으로 그를 도왔다.

1924년, ''더 리버레이터''는 노동자당의 노동조합 교육 연맹(Trade Union Educational League) 잡지인 ''노동 헤럴드''(The Labor Herald)와 "소비에트 러시아의 친구들(Friends of Soviet Russia)"의 월간지인 ''소비에트 러시아 픽토리얼''(Soviet Russia Pictorial)과 통합되어 ''노동자 월간''(The Workers Monthly)이라는 새로운 간행물로 재탄생하며 사실상 폐간되었다.

2. 5. 미국 공산당 기관지로의 변화

1922년, ''더 리버레이터''는 재정적 어려움과 함께 편집장 맥스 이스트먼의 관심이 잡지 편집의 일상적인 업무에서 책 집필로 옮겨가면서 동기 부여의 문제에 직면했다. 이스트먼은 1922년 1월 1일경 편집 업무를 플로이드 델에게 넘겼다. 델이 편집을 맡은 1922년 동안, 잡지의 내용은 정치적 문제보다는 예술과 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다소 기울었으며, 클로드 맥케이의 첫 시집과 마이클 골드의 소설 등이 출판되었다.

그 해 재정 상황이 더욱 어려워지자, 당시 지하 조직이었던 미국 공산당(CPA)이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 나섰다. 공산당은 이스트먼, 델, 그리고 잡지를 함께 만들어 온 작가들과 협력하여 1922년 10월, 우호적인 방식으로 잡지를 인수했다.

1922년 가을 이후, ''더 리버레이터''는 미국 공산당과 그 합법 정당 조직인 미국 노동자당(Workers Party of America)의 사실상의 공식 기관지가 되었다. 잡지는 기존의 그래픽 스타일과 소설에 대한 지향성을 유지했지만, 정치적 내용의 이념적 범위는 눈에 띄게 좁아졌다. C. E. 루텐버그, 존 페퍼, 윌리엄 Z. 포스터, 제이 러브스톤, 맥스 베다흐트 등 저명한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장문의 기사를 기고하기 시작했다. 과거 무정부주의자였으나 공산주의 지지자로 변모한 로버트 마이너가 이 시기 편집자로 활동했으며, 조셉 프리먼이 문학 담당 부편집장으로 그를 도왔다.

1924년, ''더 리버레이터''는 노동자당 산하 노동조합 교육 연맹(Trade Union Educational League)의 기관지인 ''노동 헤럴드''(The Labor Herald) 및 소비에트 러시아의 친구들(Friends of Soviet Russia)의 월간지 ''소비에트 러시아 픽토리얼''(Soviet Russia Pictorial)과 통합되어 새로운 간행물인 ''노동자 월간''(The Workers Monthly)으로 재창간되었다. 이 새로운 잡지는 1923-24년 판 ''더 리버레이터''와 근본적으로 유사했으며, 1927년까지 노동자당의 사실상 이론 저널 역할을 수행했다.

1927년, ''노동자 월간''은 새로운 형태와 함께 제호를 ''공산주의자''(The Communist)로 변경했다. 이후 1945년 1월에는 다시 ''정치 문제(Political Affairs)''로 이름을 바꾸었다. 2008년 1월, ''정치 문제''는 인쇄본 발행을 중단하고 완전히 웹 기반 온라인 잡지로 전환했으나, 2016년에 최종적으로 폐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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