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비 조씨
1. 개요
덕비 조씨는 고려 우왕의 후궁이다. 본래 이인임의 여종의 딸로, 이름은 봉가이이며, 1384년 우왕과의 관계를 통해 궁에 들어가 숙녕옹주, 헌비, 덕비에 차례로 책봉되었다. 숙비 최씨를 폐출시키고, 우왕에게 무고한 사람을 죽이지 말 것을 간언하기도 했다. 우왕이 폐위된 후 사가로 내쫓긴 이후의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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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노비 -
만적
고려 신종 때 최충헌의 노비 만적은 1198년 신분 해방을 주장하며 봉기를 모의했으나 실패했고, 이는 고려 사회의 신분 질서에 대한 저항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자 한국 역사상 최초의 신분 해방 운동으로 평가받는다. -
고려의 왕비 -
희비 윤씨
희비 윤씨는 고려 충혜왕의 후궁이자 충정왕의 생모로, 아들 충정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외척인 민씨 가문이 권력을 얻었으며, 조선 시대에는 조선 왕실에 영향을 미친 파평 윤씨 가문 출신이다. -
고려의 왕비 -
순화원비
고려 충선왕의 비인 순화원비는 남양 홍씨로 남양부원군 홍규의 딸이자 공원왕후의 언니이며 자녀는 없었고, 그녀의 생애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고려사》에 남아있지 않다. -
14세기 한국 사람 -
태조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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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한국 사람 -
충선왕
충선왕은 고려 제26대 왕으로 즉위 후 원나라 간섭 속에서 심양왕에 봉해졌으며, 고려와 심양을 동시에 통치하는 동군연합을 이루었으나 개혁 정치는 실패하고 티베트로 유배되었다.
2. 생애
덕비 조씨는 고려 말 우왕의 총애를 받은 구비삼옹주 중 한 명이다. 본명은 봉가이(鳳加伊)이며, 조영길의 딸이다. 조영길은 본래 당대 권신 이인임의 여종의 남편이었는데, 1384년(우왕 10년) 음력 6월 우왕이 이인임의 집에 갔다가 봉가이를 알게 되어 관계를 맺었다. 이때 조영길은 말을 하사받고 전농부정에 제수되었다. 이후 우왕과 봉가이는 매일같이 교외로 놀러 다녔다.
고려에는 천자수모법이라는 제도가 있어 어머니가 노비일 경우 그 자식도 노비 신분이었다. 따라서 봉가이 역시 이인임의 노비 신분이었다. 그러나 우왕은 덕비를 맞이한 후 이인임을 부모의 예로 대하고, 이인임도 우왕을 사위의 예로 대했다고 한다.
1386년(우왕 12년) 음력 1월, 우왕은 봉가이에게 줄 주옥 장식이 없다는 이유로 크게 화를 내며 보원고의 관리들을 하옥시켰고, 같은 달 전공판서 권주의 집을 수리하여 봉가이에게 주었는데, 숙녕옹주가 새 거처로 이사할 때에는 우왕이 직접 나서서 이사를 도와주었다.
1386년 음력 2월, 봉가이는 2년 전 자신을 무고했던 용덕(숙비 최씨)을 무고하였다. 봉가이는 “용덕이 그 어미와 함께 미도를 끼고 현혹시키는 짓을 한다”라고 하였는데, 당시 용덕에게 애정이 식었던 우왕은 크게 화내며 곧바로 용덕을 숙비의 자리에서 폐출시켰다. 뿐만 아니라 그 아버지 최천검의 집을 적몰하고 용덕의 궁인들을 모두 가두었다. 결국 다음 달인 음력 3월 용덕과 최천검은 전주로 귀양을 가고, 그 어미와 시종들은 사형당하였다. 당시 임견미, 이성림, 염흥방 등이 용덕과 그 가족을 애석하게 여기고 도우려 했지만 실패하였다.
1386년 음력 6월, 봉가이는 우왕에게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말 것을 간언하기도 하였다.
1388년 (우왕 14년) 음력 6월 우왕이 폐위되면서, 창왕의 모후 근비 이씨를 제외한 나머지 우왕의 후비들은 모두 사가로 내쫓겼다. 이후 덕비 조씨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없다. 따라서 언제 사망했는지, 어디에 묻혔는지도 알 수 없다. 우왕과의 사이에서 자녀는 없었으며, 호는 덕비(德妃)이다.
다만 덕비 조씨의 아버지 조영길이 1388년 음력 11월 개경에 몰래 들어왔다가 들켜 장형에 처해지고 순천으로 유배되었다는 기록만 남아있다.
한편 우왕은 신돈의 자식으로 취급되어 《고려사》의 〈세가〉에 오르지 못하고 〈열전〉반역 편에 수록되었고, 우왕의 왕비들 역시 《고려사》〈열전〉에 아예 수록되지 않았다.
2.1. 가계와 왕비 책봉
덕비 조씨는 고려 말 우왕의 총애를 받은 구비삼옹주 중 한 명이다. 본명은 봉가이(鳳加伊)이며, 조영길의 딸이다. 조영길은 본래 당대 권신 이인임의 여종의 남편이었는데, 1384년(우왕 10년) 음력 6월 우왕이 이인임의 집에 갔다가 봉가이를 알게 되어 관계를 맺었다. 이때 조영길은 말을 하사받고 전농부정에 제수되었다. 이후 우왕과 봉가이는 매일같이 교외로 놀러 다녔다.
고려에는 천자수모법이라는 제도가 있어 어머니가 노비일 경우 그 자식도 노비 신분이었다. 따라서 봉가이 역시 이인임의 노비 신분이었다. 그러나 우왕은 덕비를 맞이한 후 이인임을 부모의 예로 대하고, 이인임도 우왕을 사위의 예로 대했다고 한다.
2.2. 왕비 시절
1385년(우왕 11년) 음력 12월 숙녕옹주(肅寧翁主)에 책봉되었다. 이날 봉가이 외에 기생 출신의 칠점선(영선옹주)도 왕비에 책봉되었는데, 개인의 노비나 기생이 왕비에 책봉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1386년(우왕 12년) 음력 8월에는 헌비(憲妃)에 책봉되었고, 그녀를 위해 숙녕부(肅寧府)가 설치되었다. 이후 1387년(우왕 13년) 음력 9월 헌비에서 덕비(德妃)로 개봉되었다.
1386년 음력 1월, 우왕은 봉가이에게 줄 주옥 장식이 없다는 이유로 크게 화를 내며 보원고의 관리들을 하옥시켰고, 같은 달 전공판서 권주의 집을 수리하여 봉가이에게 주었는데, 숙녕옹주가 새 거처로 이사할 때에는 우왕이 직접 나서서 이사를 도와주었다.
1386년 음력 2월, 봉가이는 2년 전 자신을 무고했던 용덕(숙비 최씨)을 무고하였다. 봉가이는 “용덕이 그 어미와 함께 미도를 끼고 현혹시키는 짓을 한다”라고 하였는데, 당시 용덕에게 애정이 식었던 우왕은 크게 화내며 곧바로 용덕을 숙비의 자리에서 폐출시켰다. 뿐만 아니라 그 아버지 최천검의 집을 적몰하고 용덕의 궁인들을 모두 가두었다. 결국 다음 달인 음력 3월 용덕과 최천검은 전주로 귀양을 가고, 그 어미와 시종들은 사형당하였다. 당시 임견미, 이성림, 염흥방 등이 용덕과 그 가족을 애석하게 여기고 도우려 했지만 실패하였다.
1386년 음력 6월, 봉가이는 우왕에게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말 것을 간언하기도 하였다.
2.3. 우왕 폐위 후
1388년 (우왕 14년) 음력 6월 우왕이 폐위되면서, 창왕의 모후 근비 이씨를 제외한 나머지 우왕의 후비들은 모두 사가로 내쫓겼다. 이후 덕비 조씨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없다. 따라서 언제 사망했는지, 어디에 묻혔는지도 알 수 없다. 우왕과의 사이에서 자녀는 없었으며, 호는 덕비(德妃)이다.
다만 덕비 조씨의 아버지 조영길이 1388년 음력 11월 개경에 몰래 들어왔다가 들켜 장형에 처해지고 순천으로 유배되었다는 기록만 남아있다.
한편 우왕은 신돈의 자식으로 취급되어 《고려사》의 〈세가〉에 오르지 못하고 〈열전〉반역 편에 수록되었고, 우왕의 왕비들 역시 《고려사》〈열전〉에 아예 수록되지 않았다.
3. 가족 관계
* 아버지 : 조영길 (생몰년 미상)
* 어머니 : 이인임의 여종
* 남편 : 제32대 우왕 (1365~1389, 재위: 1374~13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