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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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사》는 고려 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 시대의 관찬 사서이다.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고 고려의 멸망을 교훈 삼기 위해 편찬되었으며, 기전체 형식으로 구성되어 세가, 지, 표, 열전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도전이 편찬한 《고려국사》를 세종이 수정하여 1451년 문종 때 완성되었다. 편찬 과정에서 조선 왕조에 유리하도록 고려 말 왕들의 기록이 왜곡되었고, 주자학적 가치관에 따라 고려 시대의 문화가 부정적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그러나 세종의 노력으로 사실에 충실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며, 고려 시대 연구의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현재 다양한 판본이 존재하며, 현대 한국어 번역 작업도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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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지리지는 조선 세종 때 편찬된 《세종실록》의 부록으로, 국가 통치에 필요한 전국 각 지역의 지리 정보를 담아 당시 사회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며, 특히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기록은 조선의 영토 의식을 보여준다. - 부산광역시의 유형문화재 - 부산 충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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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편찬 과정
《고려사》는 1392년부터 1451년까지 60여 년에 걸쳐 작성과 수정을 반복하며 편찬되었으며, 고려 34대 국왕이 다스린 474년 동안의 사건과 인물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고려 왕의 기록은 세가(世家)에 작성하여 격하하였다.[6] 체제는 사마천의 《사기》를 본떠 세가(世家) · 지(志) · 표(表) · 열전(列傳)의 항목으로 나누어 기전체로 서술하였다.
조선 건국 직후, 태조의 명으로 1392년 10월 13일, 정도전, 정총, 박의중, 윤소종에게 편찬을 명하여, 1395년 고려 태조부터 공양왕까지 총 37권의 《고려국사》가 완성되었으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1414년(태종 14년), 《고려국사》에 공민왕 이후 고려 말기의 일이 잘못 기록된 것을 개수하기 위해 하윤, 남재, 변계량에게 명하였으나, 1416년 하윤의 사망으로 중단되었다.
1419년(세종 1년), 세종은 유관과 변계량에게 개수 작업을 명하였고, 1423년(세종 5년) 다시 개수하게 하면서 《고려실록》의 묘호와 시호를 사용하고, 정도전의 편향된 시각을 수정하는 등 전면적인 개수를 지시했다.
1424년(세종 6년), 윤회가 교정한 《고려사》를 올렸다. 이후 신개, 권제 등이 편찬에 참여했고, 이계전, 어효첨에게 교정을 명했다. 1449년(세종 31년) 춘추관에 다시 편찬을 명하고, 김종서, 정인지, 이선제에게 감독을, 신숙주, 최항, 박팽년 등 당대 최고 문관들이 실제 작업에 참여했다.
1451년(문종 1년) 《고려사》 편찬이 완료되어 세가 46권, 지 39권, 연표 2권, 열전 50권, 목록 2권으로 구성되었다. 1452년(문종 2년) 김종서가 《고려사》를 요약한 《고려사절요》 35권을 만들었고, 1454년(단종 2년) 《고려사》 간행이 시작되었다.
일본에서는 에도 시대에 일부만 수입되어 마에다 쓰나노리와 도쿠가와 미쓰쿠니가 경쟁한 결과 가가번이 입수했으나, 컬렉션으로써 사장되었다. 일본에서 조선반도사·일조 관계사의 근거가 된 것은 미쓰쿠니가 간행한 『동국통감』이며, 메이지 초기까지 이어졌다. 『고려사』를 참고한 연구서는 1891년 야마다 야스이에의 『복적편』이 처음으로 여겨진다.
2. 1. 편찬 목적
《고려사》는 고려 시대 국왕과 신하들의 행적, 자취를 참고하여 새로운 조선의 통치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편찬되었다. 관찬사서인 《고려사》는 이후 조선 역사서 편찬의 모범이 되었으며,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고 무신정권기부터 우왕, 창왕 시대의 폐정을 경계하여 교훈을 얻고자 하였다.[6]조선 건국 직후인 1396년, 정도전 주도로 고려 역사를 기술한 최초의 시도인 『고려국사』(高麗國史)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정도전이 왕자의 난으로 사망한 후, 『고려국사』는 고려 역사를 왜곡했다는 비판과 논란에 직면했다. 세종은 정도전이 정적 정몽주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여 개인적인 편견을 반영했다고 비판하며, 보존 가치가 없다고 여겼다.[6][8]
세종은 역사적 사실에 충실할 것을 강조하며 사관들에게 고려 시대 어휘 변경을 금지했고(이실직서(以實直書)),[8] 조선 왕조 건국 정당화를 위해 고려를 불공정하게 묘사했다고 믿었다. 세종은 『고려사』 완성 1년 전에 사망했다.[12]
『고려사』의 전신은 오늘날 남아 있지 않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서문만 전해진다.[13] 고려사는 조선 건국 군주 이성계가 우왕과 창왕을 폐위, 암살한 사건을 배경으로 조선 학자들이 편찬했기에, 조선 건국 정당화를 위한 서술을 담았다. 우왕과 창왕은 왕의 연대기(세가)에서 제외, 열전에 편입되어 신돈의 후손으로 기록되었다. 고려사 서문은 초기 고려를 선정, 말기 고려를 혼란의 시대로 묘사하여 사회 안정을 위한 고려 멸망의 정당성을 보여준다.
고려 말기 사회에 대한 자기합리적인 서술에도 불구하고, 고려사는 조선 초기의 고려에 대한 공식 입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조선 문인 사회를 지배한 주자학 또한 편향의 원인이었다. 15세기 중반까지 불교가 조선 사회에 영향을 줬지만, 가족 관계에 대한 견해는 고려와 달랐다. 고려 왕실은 근친혼이 흔했고 선호되었으나, 비왕족과의 결혼은 혈통 손상으로 여겨졌다. 고려와 조선 모두 일부다처제를 실시했지만, 고려는 여러 아내가 동등한 지위를 가진 반면, 조선은 정실부인과 여러 첩으로 구성되었다. 이는 조선 문인들의 주자학적 가치관에 맞지 않아 일부 고려 왕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편견에도 불구하고, 고려사는 원사료에 충실하고 과장 없는 사실적 어조를 유지한다. 세종은 정치적 편견을 경계하며 유교적 이상 강조나 새 왕조에 대한 아첨을 위한 역사 왜곡을 금지했다. 정몽주와 김진양은 고려에 충성하며 이성계에 반대했지만, 고려사에 충직하고 존경받는 신하로 기록되었다.[20][4]
2. 2. 편찬 및 개수 과정
1392년(태조 1년) 10월 13일, 태조의 명으로 정도전, 정총, 박의중, 윤소종 등이 《고려국사》 편찬을 시작했다.[6] 1395년(태조 4년) 고려 태조부터 공양왕까지 총 37권의 《고려국사》가 편찬되었으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1414년(태종 14년) 《고려국사》에서 공민왕 이후 고려 말기 기록의 오류를 수정하기 위해 하윤, 남재, 변계량에게 개수를 명했다.[7] 그러나 1416년(태종 16년) 하윤의 사망으로 중단되었다.
1419년(세종 1년) 세종은 유관과 변계량에게 개수 작업을 재개하도록 명했다.[8] 1423년(세종 5년) 《고려실록》의 묘호와 시호를 사용하고, 정도전의 편향된 시각을 수정하는 등 전면적인 개수를 지시했다.[8][9]
1424년(세종 6년) 윤회가 교정한 《고려사》를 올렸다. 이후 신개, 권제 등이 편찬에 참여했고, 이계전, 어효첨에게 교정을 명했다. 1449년(세종 31년) 춘추관에 다시 편찬하도록 명하고, 김종서, 정인지, 이선제에게 감독을 맡겼다. 신숙주, 최항, 박팽년 등 당대 최고 문관들이 참여했다.
1451년(문종 1년) 《고려사》 편찬이 완료되었다. 세가 46권, 지 39권, 연표 2권, 열전 50권, 목록 2권으로 구성되었다. 1452년(문종 2년) 김종서가 《고려사》를 요약한 《고려사절요》 35권을 편찬했고, 1454년(단종 2년) 《고려사》 간행이 시작되었다.
《고려사》는 1392년부터 1451년까지 60여 년에 걸쳐 작성과 수정을 반복하며 편찬되었다.
3. 구성
《고려사》는 총 137권으로, 기전체 형식에 따라 세가, 지, 표, 열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1392년부터 1451년까지 60여 년에 걸쳐 작성과 수정을 반복하여 편찬되었으며, 고려 474년 동안 34명의 국왕이 다스린 각종 사건과 각 시대별 인물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19] 조선 건국 주도 세력인 사대부들의 역사관을 담아 후세의 정치적 지침으로 삼고자 하였다. 고려 왕의 기록은 본기(本紀)가 아닌 세가(世家)에 작성하여 격하하였다.[12]
〈지〉 중 제24권(악일, 樂一)에는 아악, 제25권(악이, 樂二)에는 속악과 삼국 속악, 용속악절도(用俗樂節度)가 기록되어 있어 고려사악지라고도 불린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공양왕으로부터 왕위를 선양받았고, 특수한 경위 때문에 제32대 우왕과 제33대 창왕은 가짜 왕족으로 여겨 신우(辛禑), 신창(辛昌)으로 낮춰 기록하였다.
3. 1. 세가(世家)
《고려사》 〈세가(世家)〉는 총 46권으로, 태조부터 공양왕까지 역대 국왕의 통치 기록을 연대순으로 서술하고 있다.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에 따라 국왕 즉위 다음 해를 원년으로 표기하였으나, 태조와 공양왕은 즉위년을 칭하지 않았다. 우왕과 창왕은 신돈의 자식으로 간주하여 세가에서 제외하고 열전에 '신우', '신창'으로 기록하였다.[19][12]- 〈충렬왕세가〉에서는 충렬왕이 충선왕에게 양위한 8개월 간(1298년 1월~7월)의 기록이 공백처리되었고, 이 부분은 〈충선왕세가〉에 수록되었다.
- 〈충선왕세가〉에서는 충선왕이 충렬왕에게 양위를 받았던 8개월 간(1298년 1월~8월)의 기록이 수록되었으나, 폐위되어 복위하기까지의 공백기간(1298년 9월~1308년 6월)은 〈충렬왕세가〉에 수록되었다.
- 〈충숙왕세가〉에서는 충숙왕이 처음 왕위에 올랐던 시기(1313년 1월~1330년 7월)의 기록을 먼저 서술한 후, 복위한 후의 기록(1332년 2월~1339년 3월)은 이전의 재위기간과 구분하여 연도를 후년(後年)이라 표기하였다. 중간의 공백기간은 〈충혜왕세가〉에 수록되었다.
- 〈충혜왕세가〉에서는 충혜왕이 처음 왕위에 올랐던 시기(1330년 7월~1332년 2월)의 기록을 먼저 서술한 후, 복위한 후의 기록(1339년 4월~1344년 1월)은 이전의 재위기간과 구분하여 연도를 후년(後年)이라 표기하였다. 중간의 공백기간은 〈충숙왕세가〉에 수록되었다.
《고려사》는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해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후손으로 묘사하여 세가에서 제외하고, 초기 고려를 선정, 말기 고려를 혼란의 시대로 묘사하였다. [20][4] 또한, 조선 문인들의 주자학적 가치관에 맞지 않는 일부 고려 왕들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편향성을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사》는 대체로 원사료에 충실하며, 특히 세종은 정치적 편견을 배제하고자 노력하였다.
3. 2. 지(志)
3. 3. 표(表)
총 2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고려 역대 왕들의 재위 기간과 중국 왕조의 연호를 대조한 연표이다. 고려와 중국과의 관계, 시대적 배경을 파악하는 데 유용하다.
3. 4. 열전(列傳)
총 50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왕비, 왕자, 공신, 문신, 무신, 충신, 간신, 반역자 등 다양한 인물들의 전기가 수록되어 있다. 인물 중심의 서술을 통해 고려 시대의 정치, 사회, 문화를 다각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특히 우왕과 창왕은 반역 열전에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서술로 해석된다. 고려사의 저술가들은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해 우왕과 창왕을 왕씨 가문이 아닌 신돈의 후손으로 묘사하고 있다.[19]
4. 판본
《고려사》는 1454년(세조 2년)에 처음 인쇄되어 널리 배포되었지만, 이 초판은 전해지지 않는다. 현재 전해지는 판본으로는 을해자 번각본, 목판본, 필사본 등이 있다.
- 을해자 번각본: 1482년에 인쇄된 것으로 추정되는 초기 판본을 바탕으로 1613년에 다시 목판으로 인쇄한 것이다.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에 소장된 완본은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며, 2010년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14]
- 목판본: 부산 남구 백련사에 소장된 부분본은 2014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14]
- 기타 판본: 여러 판본이 전해져 전 세계에 흩어져 있으며, 프랑스 국립고등사범학교와 케임브리지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된 판본 등이 포함된다.[15]
《고려사》의 현대 한국어 번역은 2001년 동아대학교 석당학원이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시작되었다.[16] 2009년 국립한국역사연구원은 구점본(句點本)을 제공하기 시작하여, 국립중앙도서관 규장각의 원본 이미지와 함께 온라인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하였다. 2010년에는 구두점, 색인 태그(인명, 지명, 직책, 관직), 항목 제목을 포함한 표점본(標點本)을 포함하도록 웹사이트가 확장되었다. 2014년부터 2015년까지 최종 단계에서 웹사이트는 《고려사》의 현대 한국어 번역을 제공하기 시작했다.[17][18]
4. 1. 을해자 번각본
동아대학교박물관 소장 《고려사》는 총 139권 75책으로 된 완질본으로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이 판본은 1482년(성종 13년)에 인출된 것으로 추정되는 을해자본(乙亥字本)을 1613년(광해군 5년)에 번각한 목판본이다. 인출 시기는 동일한 판본의 초쇄본으로 추정되는 규장각 소장의 태백산사고본과 대조해 본 결과, 자면(字面)이나 계선(界線)에서 나뭇결이나 터짐 현상 혹은 탈락 현상이 더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규장각 소장본보다 후쇄본임을 알 수 있다.[23]이 책은 총 75책 139권으로 분량이 매우 많음에도 불구하고 빠진 책이 전혀 없을 뿐 아니라 상태도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잘 보존되어 있다. 전래본 중 가장 일찍 인출된 것은 1482년(성종 13년)에 인출된 것으로 추정되는 을해자본이나, 을해자본은 완질본이 전해지지 않는다. 을해자본 다음으로 간인된 이 판본의 완질본은 현재 4질 밖에 알려져 있지 않다. 또한 그 내용이 전해지는 사료가 부족하여 연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고려의 역사를 기록한 정사(正史)로서 사료적 가치와 학술적,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자료이기 때문에 부산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104호로 지정되었다.[24]
4. 2. 목판본
백련사 《고려사》는 목판본으로 모두 65책이다. 표지는 모두 개장되었으나, 인쇄 상태는 대체로 양호하며 파손된 부분은 거의 없다. 65책이라는 결코 적지 않은 분량의 《고려사》라는 점에서 보존 가치가 있으며, 고려사 및 서지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24]세조 2년(1454년)에 《고려사》가 처음으로 인쇄되어 널리 배포되었지만, 이 초판은 전해지지 않는다. 현재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매우 잘 보존된 완본은 1613년에 목판으로 인쇄된 복각본이다. 이는 을해자(乙亥字)라고 알려진 42개의 금속활자를 사용하여 1482년에 인쇄된 것으로 추정되는 초기 판본을 기반으로 한다. 2010년 부산광역시는 1613년 판본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14] 부산 남구 백련사에 소장되어 있는 또 다른 부분본은 2014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14] 그 외에도 여러 판본이 전해져 전 세계에 흩어져 있으며, 프랑스 국립고등사범학교와 케임브리지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된 판본 등이 포함된다.[15]
4. 3. 필사본
《고려사》의 필사본은 전질의 경우 규장각에 소장된 61책과 꼴레쥬 드 프랑스에 소장된 71책이 알려져 있다.[14]2015년 2월 28일 한국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열상고전연구회 제69차 정례학술발표회에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도서관에 중국인 학자가 필사한 고려사 전질(139권 19책)이 소장되어 있음을 발표하였다. 이 필사본은 괘선지에 해서체로 필사한 것으로, 중국 청나라의 금석학자 유희해(1793년~1852년)가 소장하였고 《해동금석원》을 펴는 데 참고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금석학자 옹방강(1733년~1818년)의 아들인 옹수곤(1786년~1815년)과 장서가 고천리(1766년~1835년) 등의 손을 거쳐 주청영국공사이자 중국고서수집가였던 토마스 웨이드가 기증한 것으로 확인된다.[15]
5. 평가 및 비판
《고려사》는 《고려사절요》와 함께 고려 시대를 연구하는 데 필수적인 사료이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비판받고 있다.
- 우창비왕설의 정당화: 이성계 세력이 폐가입진을 정당화하려고 만든 설인데, 《고려사》가 간행된 지 20여 년 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1454년, 단종 2년) 1475년(성종 6년) 경연에서 성종은 우왕은 신돈의 자식이 아니라고 말했고,[31] 현대 연구자도 마찬가지로 우왕이 신돈의 자식이 아니라고 본다.[32]
- 금석문, 다른 문헌자료와의 연월일 차이: 묘지명, 개인 문집 등과 《고려사》를 비교해 보면 연월일이 적게는 하루(서공)부터 많게는 9년(대원공)이나 차이가 난다.
- 인물의 누락: 묘지명이나 개인 문집에만 나오고 《고려사》에는 아예 나오지 않거나 드문드문 언급되는 인물들이 많다.[33]
- 열전에서 인물 평가의 불공정성: 현대 연구자와 학자들은 류청신[34], 권한공[35], 변안렬[36] 등에서 인물 평가가 공정하지 않음을 지적한다.
- 오탈자, 연문: 《고려사》 안에서 같은 사실을 전하는 문장을 비교해 보면 오탈자나 연문이 많다.[37]
- 내용·연월일 오류 및 누락: 편찬 과정에서 틀린 부분들이 고쳐지지 않았고, 일부 사실들은 누락되기도 했으며, 심지어 일부 연도는 내용이 없다.[38]
《고려사》는 고려의 후신 국가인 조선의 학자 관료들이 편찬하였는데, 조선 건국의 군주인 이성계가 우왕을 폐위하고 창왕을 암살한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따라서 《고려사》의 저술가들은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는 서술을 만들려고 애썼다. 그 결과, 우왕과 창왕은 왕의 연대기(세가)에서 제외되고 열전으로 편입되어 의심스러운 혈통을 가진 허위 군주로 묘사되었다. 《고려사》에 따르면, 우왕과 창왕은 왕씨 가문이 아닌 불교 승려 신돈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의 서술은 초기 고려를 선정의 시대, 말기 고려를 혼란의 시대로 묘사하여 사회 안정을 위해 고려의 멸망이 정당화되었음을 보여주는데, 《고려사》 서문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後王失道, 權臣擅政, 姦宄競起, 伺覦神器, 驯致大乱, 至于再易位, 四易姓, 弑逆相仍, 宗社几絶。|후대의 왕들은 길을 잃고 권세가 있는 신하들은 마음대로 행동하여, 왕위를 탐내며 스스로 군대를 일으켰다. 이는 인종(1122년~1146년) 때부터 시작되어, 의종(1146년~1170년) 때 더욱 악화되었다. ... (중략) ... 그리고 허위 군주들로 인해 나라의 기반이 극도의 위험에 처하였다. 그때 고려의 운명은 진정한 통치자에게 넘어갔다.중국어
— 김종서, 《고려사》 서문[19][12]
이러한 자기 합리화적인 서술에도 불구하고, 《고려사》는 조선 초기의 고려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또 다른 편향의 원인은 조선 문인 사회를 지배하기 시작한 주자학이었다. 비록 불교는 15세기 중반까지도 조선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조선 사회의 가족 관계에 대한 견해는 고려 사회와 달랐다. 예를 들어, 고려 왕실에서는 근친혼이 흔했고, 심지어 선호되기까지 했는데, 비왕족과의 결혼은 혈통을 손상시키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또한 고려와 조선 모두 일부다처제를 실시했지만, 고려의 일부다처제는 여러 아내들이 동등한 지위를 가진 반면, 조선의 일부다처제는 한 명의 정실부인과 여러 명의 첩으로 구성되었다. 그 결과, 《고려사》는 조선 문인들의 주자학적 가치관에 맞지 않는 일부 고려 왕들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편견에도 불구하고, 《고려사》는 일반적으로 원래의 역사 자료에 충실한 것으로 간주되며, 과장 없이 사실적인 어조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세종은 《고려사》가 정치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롭도록 노력했다. 예를 들어, 그는 역사가들에게 유교적 이상을 강조하거나 새로운 왕조에 아첨하기 위해 역사적 사실을 생략하거나 변경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 정몽주와 김진양은 끝까지 고려에 충성하며 이성계에 반대했지만, 《고려사》에는 충직하고 존경받는 신하로 기록되어 있다.[20][4] 다만, 《고려사》는 고려 시대의 이름난 승려들에 대한 기록은 생략하고 있다.[4]
6. 국외 전래
《고려사》는 중국과 일본에도 전래되었다. 청나라 주이준의 《曝書亭集》 권44에 '서고려사후'(書高麗史後)라고 하여 《고려사》를 읽고 난 뒤에 쓴 글이 실려 있어, 중국에도 《고려사》가 유입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39]
7. 현대 한국어 번역
2001년 동아대학교 석당학원이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고려사》의 현대 한국어 번역 사업을 시작하였다.[16] 2009년 국립한국역사연구원에서 구점본(句點本)을 온라인으로 제공하기 시작했으며, 2014년부터 2015년까지는 최종 단계로 현대 한국어 번역본을 제공하였다.[17][1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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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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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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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관료제의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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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봉작을 받은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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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국가 행사나 기타 의식에 참가하는 의장대 및 호위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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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왕실의 의장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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恭愍王代 辛旽의 개혁정치와 禑昌非王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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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인물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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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원 간섭기 立省論과 柳淸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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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고려말⋅조선초 권한공에 대한 세평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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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은 변안열의 생애와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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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의 편찬과정에서 발생한 오류(誤謬)의 제양상(諸樣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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缺失된 忠肅王 後三年 記事의 復原을 위한 試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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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編高麗史全文』의 편찬을 위한 방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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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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