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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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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임견미는 고려 후기의 무신으로, 공민왕과 우왕 시기에 권력을 휘두르며 매관매직과 토지 편취 등 전횡을 일삼다 최영, 이성계에 의해 제거된 인물이다.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 동녕부 토벌 등 군사적 활동에서 공을 세워 문하시중까지 올랐으나, 이인임과 함께 권력을 장악하고 인사권을 독점하는 등 권력을 남용하여 비판을 받았다. 그는 당나라의 간신 이임보에 비견될 정도로 시샘이 많고 음흉했으며, 이인임의 심복으로서 권문세족과 함께 사대부들을 억압했다.

2. 생애

1380년(우왕 6년) 이인임과 함께 경복흥 세력을 제거하고, 1381년(우왕 7년) 문하시중(정1품)에 올라 평원부원군(平原府院君)에 봉해졌다.[1] 1383년(우왕 9년)에는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종1품)으로서 정방의 도길부, 우현보, 이존성과 함께 정방제조를 겸임했다.[12] 이인임과 함께 권력의 정점에 섰던 그는 '우왕이 호출해도 병을 핑계로 무시했으며 재차 부르자 가니 교만함이 이와 같았다.'고 기록되어 있다.[1] 같은 평리 출신으로 이인임의 일당인 홍영통과 조민수 역시 시중이었지만, 임견미가 권력을 독점하여 시중의 고유 권한인 인사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1]

1388년(우왕 14년) 이인임·지윤·염국보·염흥방(廉興邦) 형제 등과 함께 매관매직을 일삼고 백성의 토지를 빼앗는 등 전횡을 일삼다가 최영·이성계에게 제거되었다.[2]

2. 1. 초기 활동

고려의 무신.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 임언수(林彦修)의 아들이다. 부친 임언수가 군(君) 봉작을 받은 것은 임견미가 문하시중에 오른 후로, 임견미의 직계가 권문세족이나 유력 호족 출신은 아니었다.[1] 공민왕 초 우다치(于達赤[3])에 들어가 공을 세우고 중랑장(中郞將-정5품 무관)에 등용됐다. 1362년(공민왕 11년)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나주도병마사[4]로 왕을 호종해 1등 공신이 되었고, 이듬해 대호군(大護軍[5]-종3품 무관)에 제수됐다. 밀직부사(정3품 문관)를 거쳐 진주도병마사가 됐다.[1]

그 뒤 다시 전리판서(典理判書[6]-정3품 문관)에 오르는 등 내외직을 두루 거쳤다. 1368년(공민왕 17년) 주원장의 명군원나라연경을 포위해 고려 정세가 한 치 앞을 알 수 없자 북계(평안도) 순무사(巡撫使)로 군을 총괄했고, 1370년(공민왕 19년) 동녕부 토벌에 부원수로서 이성계와 함께 싸웠으며, 1374년(공민왕 23년)엔 서북면 도순문사(都巡問使[7])가 됐다. 제주에서 목호의 난이 일어나자 다시 부원수로서 토벌 작전을 수행했다.

1375년(우왕1년) 심양왕[8]이자 고려왕족인 터터부카가 고려왕위를 노리고 김의(金義), 김서(金湑) 등과 함께 고려 국경을 넘는다는 소식에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9])로 서경 상원수(上元帥)로 출진, 이에 대비했다.

1377년(우왕 3년) 왜구가 침입하자 문하평리(門下評理-종2품) 겸 동강부원수(東江副元帥) 겸 서해도조전원수(西海道助戰元帥)로 출전했다. 왜구 격퇴 후 평리(종2품 내직)[10]로 옮겼다. 당시 우왕은 내재추(內宰樞)를 통해 명을 내렸는데,[11] 임견미·홍영통(洪永通)·조민수(曺敏修)가 임명돼 개경 왕궁에 상주했다.[1]

2. 2. 군사적 활동

임견미는 공민왕 초 우다치(于達赤|우다치중국어)에 들어가 공을 세우고 중랑장(정5품 무관)에 등용되었다.[1] 1362년(공민왕 11년)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나주도병마사[4]로 왕을 호종해 1등 공신이 되었고 이듬해 대호군(종3품 무관)[5]에 제수되었다. 밀직부사(정3품 문관)를 거쳐 진주도병마사가 되었다.[1]

1368년(공민왕 17년) 주원장의 명군원나라연경을 포위해 고려 정세가 한 치 앞을 알 수 없자 북계(평안도) 순무사(巡撫使)로 군을 총괄했고, 1370년(공민왕 19년) 동녕부 토벌에 부원수로서 이성계와 함께 싸웠으며, 1374년(공민왕 23년)엔 서북면 도순문사[7]가 되었다. 제주에서 목호의 난이 일어나자 다시 부원수로서 토벌 작전을 수행했다.

1375년(우왕 1년) 심양왕[8]이자 고려왕족인 터터부카가 고려왕위를 노리고 김의(金義), 김서(金湑) 등과 함께 고려 국경을 넘는다는 소식에 지문하부사[9]로 서경 상원수(上元帥)로 출진, 이에 대비했다.

1377년(우왕 3년) 왜구가 침입하자 문하평리(종2품) 겸 동강부원수(東江副元帥) 겸 서해도조전원수(西海道助戰元帥)로 출전했다. 왜구 격퇴 후 평리(종2품 내직)[10]로 옮겼다.

2. 3. 정치 활동

공민왕 초 우다치(于達赤)[3]에 들어가 공을 세우고 중랑장(中郞將-정5품 무관)에 등용되었다. 1362년(공민왕 11년)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나주도병마사[4]로 왕을 호종해 1등 공신이 되었고 이듬해 대호군(大護軍[5]-종3품 무관)에 제수되었다. 밀직부사(정3품 문관)를 거쳐 진주도병마사가 되었다.[1]

그 뒤 다시 전리판서(典理判書[6]-정3품 문관)에 오르는 등 내외직을 두루 거쳤다. 1368년(공민왕 17년) 주원장의 명군원나라연경을 포위해 고려 정세가 한 치 앞을 알 수 없자 북계(평안도) 순무사(巡撫使)로 군을 총괄했다. 1370년(공민왕 19년) 동녕부 토벌에 부원수로서 이성계와 함께 싸웠으며, 1374년(공민왕 23년)엔 서북면 도순문사(都巡問使[7])가 되었다. 제주에서 목호의 난이 일어나자 다시 부원수로서 토벌 작전을 수행했다.

1375년(우왕 1년) 심양왕[8]이자 고려왕족인 터터부카가 고려왕위를 노리고 김의(金義), 김서(金湑) 등과 함께 고려 국경을 넘는다는 소식에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9])로 서경 상원수(上元帥)로 출진, 이에 대비했다.

1377년(우왕 3년) 왜구가 침입하자 문하평리(門下評理-종2품) 겸 동강부원수(東江副元帥) 겸 서해도조전원수(西海道助戰元帥)로 출전했다. 왜구 격퇴 후 평리(종2품 내직)[10]로 옮겼다. 당시 우왕은 내재추(內宰樞)를 통해 명을 내렸는데[11] 임견미·홍영통(洪永通)·조민수(曺敏修)가 임명돼 개경 왕궁에 상주했다.[1]

1380년(우왕 6년) 이인임과 함께 경복흥(慶復興) 세력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 그는 1381년(우왕 7년) 마침내 문하시중(정1품)과 평원부원군(平原府院君)의 봉작을 받았다. 1383년(우왕 9년)에는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종1품)으로 정방(政房)[12] 도길부(都吉敷)·우현보(禹玄寶)·이존성(李存性)과 함께 정방제조를 겸임했다. 이인임과 함께 권력의 정점에 섰던 그는 '우왕이 호출해도 병을 핑계로 무시했으며 재차 부르자 가니 교만함이 이와 같았다.'고 기록되어 있다.[1] 같은 평리 출신으로 이인임의 일당인 홍영통과 조민수 역시 시중이었지만 임견미가 권력을 독점하고 휘둘러 시중의 고유권한인 인사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1]

1388년(우왕 14년)까지 이인임·지윤·염국보·염흥방(廉興邦) 형제 등과 함께 매관매직 및 백성의 토지를 편취하고 겸병하는 등 전횡을 일삼다가 최영·이성계에게 제거되었다.[2]

2. 4. 권력 장악과 몰락

임견미는 고려 말 무신으로, 공민왕 초 우다치(于達赤|우다치중국어)에 들어가 공을 세우고 중랑장(정5품 무관)에 등용되었다.[1] 1362년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나주도병마사[4]로 왕을 호종해 1등 공신이 되었고, 이듬해 대호군(종3품 무관)에 임명되었다.[5] 이후 밀직부사(정3품 문관), 진주도병마사[1], 전리판서(정3품 문관)[6] 등 내외직을 두루 거쳤다.

1368년(공민왕 17년) 명군원나라연경을 포위하여 고려 정세가 불안해지자 북계(평안도) 순무사로 군을 총괄했다.[1] 1370년(공민왕 19년) 동녕부 토벌에 부원수로 이성계와 함께 참전했고, 1374년(공민왕 23년)에는 서북면 도순문사[7]가 되었다. 제주에서 목호의 난이 일어나자 다시 부원수로서 토벌 작전을 수행했다.[1]

1375년(우왕 1년) 심양왕[8] 터터부카가 고려 왕위를 노리고 고려 국경을 넘는다는 소식에 지문하부사(정3품 문관)[9]로 서경 상원수(上元帥)로 출진하여 이에 대비했다.[1] 1377년(우왕 3년) 왜구가 침입하자 문하평리(종2품) 겸 동강부원수 겸 서해도조전원수로 출전하여 왜구를 격퇴한 후 평리(종2품 내직)[10]로 옮겼다.[1]

1380년(우왕 6년) 이인임과 함께 경복흥 세력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고,[1] 1381년(우왕 7년) 문하시중(정1품)과 평원부원군(平原府院君)의 봉작을 받았다.[1] 1383년(우왕 9년) 수문하시중(종1품)으로 정방 도길부, 우현보, 이존성과 함께 정방제조를 겸임했다.[12] 이인임과 함께 권력의 정점에 섰던 그는 '우왕이 호출해도 병을 핑계로 무시했으며 재차 부르자 가니 교만함이 이와 같았다.'고 기록되어 있다.[1]

1388년(우왕 14년)까지 이인임, 지윤, 염국보, 염흥방 형제 등과 함께 매관매직 및 백성의 토지를 편취하고 겸병하는 등 전횡을 일삼다가[2] 최영, 이성계에게 제거되었다.[2]

3. 평가

고려사》는 임견미를 이인임의 심복이자 권문세족의 일원으로,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 간신으로 묘사하며 부정적으로 평가한다.[2]

3. 1. 비판적 시각

1451년(문종 1년)에 완성된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임견미는 시샘이 많고 음흉했으나 말재주가 있어 사람들이 그를 당나라 숙종 때의 간신인 이임보(李林甫)에 견주었다고 한다. 이인임이 오랫동안 정권을 잡으면서 도당들을 곳곳에 심었는데, 임견미는 바로 그 심복이었다.[2]

이인임과 임견미 등 권문세족들은 사대부들을 싫어하여 많은 이들을 궐에서 쫓아냈는데, 염흥방도 그 중 하나였다. 이후 임견미가 염흥방의 집안이 대대로 벼슬한 큰 집안이라 혼인을 청하자, 염흥방도 과거 쫓겨났던 일을 생각하고 자기 몸을 보존하고자 이인임과 임견미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랐다.[2]

염흥방의 의붓형인 이성림이 시중이 되면서, 간신배들의 족속들이 요직을 차지했다. 이들은 권력을 멋대로 휘두르며 관직을 팔고 남의 토지를 빼앗았으며, 왕릉, 궁궐, 주현, 진, 역에 소속된 토지까지 모조리 차지했다. 이로 인해 백성은 유랑하고 도적떼가 마구 일어나 재물이 고갈되자 온 나라 사람들이 이를 갈았다. 이 때 "우리 최영과 이성계가 그들의 소행을 분하게 여겨 마음과 힘을 합쳐 우왕을 설득해 제거하니 나라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며 길에서 노래하고 춤추었다."라고 진술하고 있다.[2]

4. 가족

5. 등장 매체

참조

[1] 웹사이트 국역 고려사 열전 임견미 편 https://terms.naver.[...]
[2] 서적 고려사
[3] 간행물 우다치 1968
[4] 문서 고려의 최고 의사결정기관
[5] 문서 대호군
[6] 문서 고려 전기 상서육부(尙書六部)의 정3품 관직인 상서가 개칭된 것
[7] 문서 원수
[8] 문서 심양왕
[9] 문서 지문하사
[10] 문서 평리
[11] 문서 내재추
[12] 문서 고려 말기 최고의사결정 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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