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래리 프렌치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래리 프렌치는 1907년 캘리포니아주 비살리아에서 태어난 미국의 야구 선수로, 1930년부터 1942년까지 메이저 리그에서 투수로 활동했다. 그는 피츠버그 파이리츠, 시카고 컵스, 브루클린 다저스에서 뛰었으며, 197승을 기록했다. 1930년부터 1940년까지 매 시즌 10승 이상을 거두었고, 1935년과 1936년에는 4개의 셧아웃으로 내셔널 리그 1위를 기록했다. 1942년 미국 해군에 입대하여 제2차 세계 대전과 한국 전쟁에 참전했으며, 해군 대령으로 퇴역했다. 1987년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에서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너클볼 투수 - 팀 웨이크필드
    팀 웨이크필드는 플로리다 공과대학교 출신으로 MLB에서 19시즌 동안 너클볼 투수로 활약하며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2004년 월드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고, 통산 200승을 기록했으며, 은퇴 후 해설가로 활동하다 2023년 뇌암으로 사망했다.
  • 너클볼 투수 - 호이트 윌헬름
    호이트 윌헬름은 너클볼을 던지던 미국의 전 야구 선수로, 21시즌 동안 메이저 리그에서 활약하며 1070경기 출전, 143승 122패, 124세이브, 월드 시리즈 우승, 노히트 노런, 5회 올스타 선정, 2회 최우수 방어율 기록,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밥 펠러 용기상 수상 등의 업적을 남겼다.
  • 브루클린 다저스 선수 - 재키 로빈슨
    재키 로빈슨은 1947년 브루클린 다저스에 입단하여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최초의 흑인 선수로 데뷔, 뛰어난 야구 실력과 용기로 인종 차별의 벽을 허물었으며 은퇴 후에도 인권 운동가와 사업가로 활동하며 사회적 정의를 위해 헌신한 인물이다.
  • 브루클린 다저스 선수 - 칼 어스킨
    칼 어스킨은 [주제]에 대한 역사, 현황, 쟁점, 전망과 과제, 관련 단체 및 기관 등 한국 사회에서의 다양한 측면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관련 통계 및 데이터를 제공하는 문서이다.
  • 캘리포니아주 출신 야구 선수 - 재키 로빈슨
    재키 로빈슨은 1947년 브루클린 다저스에 입단하여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최초의 흑인 선수로 데뷔, 뛰어난 야구 실력과 용기로 인종 차별의 벽을 허물었으며 은퇴 후에도 인권 운동가와 사업가로 활동하며 사회적 정의를 위해 헌신한 인물이다.
  • 캘리포니아주 출신 야구 선수 - 지미 윌리엄스
    지미 윌리엄스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선수 및 감독으로 활동한 미국인으로, 토론토 블루제이스, 보스턴 레드삭스, 휴스턴 애스트로스 감독을 역임하며 1995년과 2008년 월드시리즈 우승에 기여했고, 1999년 아메리칸 리그 최우수 감독상을 수상했다.
래리 프렌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34년 야구 카드에 담긴 프렌치의 모습
1934년 야구 카드에 담긴 프렌치의 모습
본명Lawrence Herbert French (로렌스 허버트 프렌치)
출생일1907년 11월 1일
출생지캘리포니아주 비세일리아, 미국
사망일1987년 2월 9일
사망지캘리포니아주 샌디에고, 미국
포지션투수
투구좌투
타석우타
프로 경력
데뷔 (MLB)1929년 4월 18일
마지막 경기 (MLB)1942년 9월 26일
소속팀피츠버그 파이리츠 (1929–1934)
시카고 컵스 (1935–1941)
브루클린 다저스 (1941–1942)
통계 (MLB)
승패 기록197–171
평균자책점3.44
삼진1,187
수상 경력
올스타1940년

2. 야구 경력

캘리포니아주 비살리아 출신인 프렌치는 1926년부터 퍼시픽 코스트 리그포틀랜드 비버스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1] 이후 내셔널 리그피츠버그 파이리츠로 이적하여 1930년부터 1934년까지 팀의 주축 투수로 활약했다.[2]

이후 시카고 컵스로 트레이드되어 1935년부터 1941년까지 활약했다.[2] 프렌치는 파이리츠 시절부터 컵스 시절까지 포함하여 1930년부터 1940년까지 매 시즌 최소 10승 이상을 꾸준히 기록하는 안정적인 모습을 보였다.[2]

1941년 시즌 중 브루클린 다저스로 이적했으며, 1942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프로 야구 경력을 마감했다.[1]

2. 1. 마이너 리그

1926년부터 1928년까지 퍼시픽 코스트 리그포틀랜드 비버스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1]

2. 2. 메이저 리그

프렌치는 피츠버그 파이리츠, 시카고 컵스, 브루클린 다저스 소속으로 내셔널 리그에서 활약했다. 그는 1930년부터 1940년까지 매 시즌 최소 10승 이상을 꾸준히 기록했다.[2]

14년간의 메이저 리그 경력 동안 프렌치는 통산 197승 171패, 평균 자책점 3.44를 기록했으며, 3,152 이닝 투구 동안 1,187개의 탈삼진을 잡았다. 또한 40번의 셧아웃과 198번의 완투를 달성했다. 그는 선수 경력 14시즌 모두 최소 10번의 선발 등판과 6번의 구원 등판을 했다. 타자로서 프렌치는 570경기에서 .188의 타율 (1057타수 199안타)을 기록했고, 홈런 1개, 83 득점, 84 타점, 48 볼넷을 기록했다. 수비에서는 .951의 수비율을 기록했다.[2]

래리 프렌치 메이저 리그 통산 기록[2]
구분기록
승패197승 171패
평균 자책점3.44
이닝 투구3,152
탈삼진1,187
셧아웃40
완투198
타율.188 (1057타수 199안타)
홈런1
득점83
타점84
볼넷48
수비율.951



프렌치는 1935년 월드 시리즈, 1938년 월드 시리즈, 1941년 월드 시리즈에 출전했지만, 소속팀은 세 번 모두 패배했다.[2] 일부 작가들은 프렌치를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지 못한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으로 평가하기도 한다.[3]

2. 2. 1. 피츠버그 파이리츠 (1929-1934)

내셔널 리그피츠버그 파이리츠에 합류하여 1930년부터 1934년까지 매년 260이닝 이상을 던지며 팀의 주축 투수로 활약했다.[2]

2. 2. 2. 시카고 컵스 (1935-1941)

피츠버그 파이리츠는 프렌치를 시카고 컵스로 트레이드했다. 그는 1935년부터 1941년까지 컵스 소속으로 뛰었다.[2] 1935년에는 4개의 셧아웃으로 내셔널 리그(NL) 1위를 기록했고, 1936년에도 다시 4개의 셧아웃으로 리그 1위를 차지했다.[2] 프렌치는 컵스 시절을 포함하여 1930년부터 1940년까지 매 시즌 최소 10승 이상을 거두었다.[2] 또한 컵스 소속으로 1935년 월드 시리즈와 1938년 월드 시리즈에 출전했지만, 팀은 두 번 모두 패배했다.[2]

2. 2. 3. 브루클린 다저스 (1941-1942)

1941년 시카고 컵스에서 부진한 출발을 보인 후, 프렌치는 브루클린 다저스에 합류했다.[1] 다저스 소속으로 1941년 월드 시리즈에 출전했지만 팀은 패배했다.[2] 그는 1942년 시즌까지 다저스에서 활약한 후 프로 야구를 떠났다.[1]

2. 3. 통산 기록

14년간의 메이저 리그 경력 동안 프렌치는 통산 197승 171패, 평균 자책점 3.44, 3,152 이닝 투구에서 1,187개의 탈삼진을 기록했다. 또한 40번의 셧아웃과 198번의 완투를 달성했다. 그는 선수 경력 14시즌 모두 최소 10번의 선발 등판과 6번의 구원 등판을 했다. 타자로서 프렌치는 570경기에 출전하여 .188의 타율 (1057타수 199안타)을 기록했고, 홈런 1개, 83 득점, 84 타점, 48 볼넷을 기록했다. 수비에서는 .951의 수비율을 기록했다.[2] 프렌치는 1935년 월드 시리즈, 1938년 월드 시리즈, 1941년 월드 시리즈에 출전했지만, 그의 소속팀은 세 번 모두 패배했다.[2]

일부 작가는 프렌치를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지 못한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으로 평가하기도 한다.[3]

2. 4. 샤워 게임 일화

1933년 7월 12일, 보스턴 브레이브스와의 경기에서 래리 프렌치의 소속팀이 9회 초까지 8-0으로 크게 앞서고 있었다. 구원 투수였던 프렌치는 경기가 거의 끝났다고 생각하고 일찍 샤워를 하기 위해 불펜을 나섰다. 하지만 그가 샤워하는 동안, 브레이브스가 맹렬히 추격하여 점수가 8-7까지 좁혀졌다. 프렌치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샤워를 하고 있었다. 급하게 투입 지시가 내려왔지만, 프렌치는 몸을 헹굴 시간조차 없었다. 결국 그는 비눗물이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리는 채 급히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에 올라야 했다.[4]

3. 군 복무

프렌치는 1942년 야구 시즌 이후 미국 해군에 입대하여 직업 군인의 길을 걸었다.[5] 그는 제2차 세계 대전과 한국 전쟁에 참전했으며, 1969년 대령 계급으로 퇴역했다.[6] 복무 중 공로 훈장을 받았다.[5]

3. 1.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프렌치는 1942년 야구 시즌 이후 미국 해군에 입대하여 직업 군인의 길을 걸었다.[5] 그는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으며, 이후 한국 전쟁에도 참전했다.[5] 1969년 해군 대령 계급으로 퇴역했고,[6] 공로 훈장을 받았다.[5]

3. 2. 한국 전쟁 참전

프렌치는 1942년 야구 시즌 이후 미국 해군에 입대하여 직업 군인이 되었다.[5] 그는 제2차 세계 대전과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5] 해군 대령 계급으로 1969년에 퇴역했으며,[6] 이 과정에서 공로 훈장을 받았다.[5]

3. 3. 퇴역

프렌치는 1942년 야구 시즌 이후 미국 해군에 입대하여 직업 군인이 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과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5] 그는 해군 대령 계급으로 1969년에 퇴역했으며,[6] 공로 훈장을 받았다.[5]

프렌치는 1987년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에서 7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

4. 사망

프렌치는 1987년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에서 7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

참조

[1] 웹사이트 Larry French Minor Leagues Statistics & History https://www.baseball[...] 2021-11-06
[2] 웹사이트 Larry French Stats https://www.baseball[...] 2021-11-06
[3] 서적 Playing for Their Nation: Baseball and the American Military during World War II University of Nebraska Press
[4] 서적 Pirates treasures : facts · feats · firsts in Pittsburgh Pirates History Golden Goose Enterprises, Inc.
[5] 웹사이트 Larry French https://sabr.org/bio[...] Society for American Baseball Research 2019-06-12
[6] 웹사이트 Baseball in Wartime – Larry French http://baseballinwar[...] 2019-06-1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