랠프 크레이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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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랠프 크레이그는 미국의 육상 선수로,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 100m와 200m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미시간 대학교에서 허들 선수로 시작하여 스프린터로 전향한 그는 1910년과 1911년 IC4A 220야드에서 우승했으며, 1911년 40야드 허들에서 기록을 갱신했다. 1912년 올림픽 100m 결승에서 도널드 리핀코트를 제치고 금메달을 획득했으며, 200m에서도 우승하여 2관왕을 달성했다. 선수 은퇴 후, 59세의 나이에 1948년 런던 올림픽 요트 종목 후보 선수로 등록되었고, 개회식 기수로 참여했다.

랠프 크레이그 - [인물]에 관한 문서
선수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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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프 크레이그 c. 1912
본명랄프 쿠크 크레이그
애칭해당 사항 없음
출생일1889년 6월 21일
출생지미시간주 디트로이트
사망일1972년 7월 21일 (83세)
사망지뉴욕주 레이크조지
신장1.82m
체중73kg
스포츠 경력
종목단거리 달리기
소속 클럽디트로이트 애슬레틱 클럽
자기 최고 기록100m: 10.7초 (1912년)
200m: 21.7초 (1912년)
올림픽 메달
금메달
금메달
대회올림픽
금메달1912 스톡홀름 100m
금메달1912 스톡홀름 20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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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수 경력

랠프 크레이그는 원래 허들 선수였으나, 미시간 대학교에 입학한 후 스프린터로서 뛰어난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대학 시절 IC4A(전미 대학 스포츠 연맹)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주목받는 선수로 성장했다.

1912년, 크레이그는 미국 올림픽 대표로 선발되어 스톡홀름 올림픽에 참가했다. 그는 이 대회 100m와 200m에서 모두 금메달을 획득하며 2관왕에 올랐다. 특히 강력한 경쟁자였던 도널드 리핀코트를 연달아 꺾으며 승리했다. 그러나 4×100m 릴레이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스톡홀름 올림픽이 끝난 직후 크레이그는 육상 선수 생활에서 은퇴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흐른 뒤, 59세의 나이로 1948년 런던 올림픽요트 종목 미국 대표팀의 후보 선수로 다시 한번 올림픽 무대를 밟았다. 비록 실제 경기에 출전하지는 못했지만, 개회식에서 미국 선수단의 기수로 행진하는 영광을 누렸다.

2.1. 대학 시절

랠프 크레이그는 원래 허들 선수였으나, 미시간 대학교에 입학한 후 스프린터로서의 재능을 발견하고 발전시켰다. 그는 대학 시절 동안 뛰어난 성적을 거두며 주목받는 선수로 성장했다. 특히 1910년과 1911년에는 IC4A(전미 대학 스포츠 연맹) 선수권 대회 약 201.17m 종목에서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으며, 1911년에는 약 36.58m 허들 종목에서 새로운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같은 해 5월, 미시간 대학 유니폼을 입고 참가한 마지막 대학 대항 경기에서는 약 91.44m 달리기 대학 기록과 약 201.17m 달리기 세계 기록 타이를 기록하며 팀이 종합 3위를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대학 시절 활약은 이후 올림픽에서의 성공으로 이어지는 발판이 되었다.

2.1.1. 1910년 IC4A 220야드 우승

크레이그는 원래 허들 선수였으나, 미시간 대학교에 입학한 후 스프린터로서의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1910년, 그는 IC4A(전미 대학 스포츠 연맹) 선수권 대회의 220야드 종목에서 우승했다. 다음 해인 1911년에도 같은 종목에서 다시 우승했다.

2.1.2. 1911년 IC4A 220야드 우승

미시간 대학교 재학 중이던 1910년, IC4A(전미 대학 스포츠 연맹) 220야드 종목에서 우승하였다. 이듬해인 1911년에도 같은 종목에서 다시 한번 우승하며 2년 연속 챔피언 자리를 지켰다.

2.1.3. 1911년 40야드 허들, 100야드, 220야드 기록

1911년 3월, 크레이그는 40야드 허들을 5.2초에 달려 포레스트 스미슨이 보유하고 있던 종전 기록을 깨고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 같은 해 5월, 미시간 대학 유니폼을 입고 출전한 마지막 대학 대항 경기에서 그는 100야드 달리기를 9.8초에 주파하며 대회 기록과 타이를 이루었고, 220야드 달리기에서는 21.2초를 기록하여 세계 기록과 타이를 이루었다.

2.2.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

미시간 대학교에서 단거리 육상 선수로 활약하던 랠프 크레이그는 스톡홀름 올림픽에 미국 대표로 선발되었다. 그는 이 대회 100m와 200m에서 강력한 경쟁자였던 도널드 리핀코트를 연달아 꺾고 금메달을 획득하며 대회 2관왕의 영예를 안았다. 그러나 4×100m 릴레이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2.2.1. 100m 금메달

1912년 크레이그는 올림픽 대표로 선출되어 스톡홀름 올림픽 100m에 출전했다. 결승전에서는 예선에서 10초 6의 세계 기록을 세운 도널드 리핀코트Don Lippincott영어가 가장 유력한 금메달 후보로 꼽혔다. 그러나 7번의 부정 출발이라는 혼란 끝에 시작된 레이스에서 크레이그는 10초 8의 기록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기대를 모았던 리핀코트는 동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2.2.2. 200m 금메달

스톡홀름 올림픽 100m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랠프 크레이그는 200m 종목에도 출전했다. 이 종목에서도 100m에서 경쟁했던 도널드 리핀코트와 다시 한번 맞붙었다. 크레이그는 리핀코트와 치열한 접전을 벌인 끝에 21.7초의 기록으로 결승선을 통과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리핀코트와의 기록 차이는 불과 10분의 1초였다. 이 우승으로 크레이그는 대회 2관왕을 달성하는 영예를 안았다.

2.2.3. 4x100m 릴레이 불참

스톡홀름 올림픽에서 100m와 200m 개인 종목을 석권하며 2관왕에 오른 랠프 크레이그는 4×100m 릴레이 대표팀에는 합류하지 않았다. 그가 왜 이 종목에 출전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3. 은퇴 이후

스톡홀름 올림픽 직후 육상 선수 생활에서 은퇴했다. 그러나 36년 만인 1948년, 59세의 나이로 런던 올림픽요트 종목 후보 선수로 다시 참가했다. 실제 경기에 출전하지는 않았으나 개회식에서 미국 기수로 나섰다.

3.1. 요트 선수 전향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에서 육상 2관왕을 달성한 후 선수 생활에서 은퇴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흘러 59세가 된 1948년, 요트 선수로서 런던 올림픽에 미국 대표팀 후보 선수로 참가했다. 비록 실제 경기에 출전하지는 못했지만, 개회식에서 미국 선수단의 기수를 맡아 행진했다.

3.2. 1948년 런던 올림픽 기수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 이후 선수 생활에서 은퇴했던 크레이그는 36년이 지난 1948년, 59세의 나이로 다시 올림픽 무대에 서게 되었다. 그는 런던 올림픽 요트 경기의 후보 선수로 참가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비록 실제 경기에 출전하지는 못했지만, 개회식에서 미국 선수단의 기수를 맡아 행진하는 영광을 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