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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야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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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시마 야히코는 1886년 도쿄에서 태어난 일본의 스포츠 선수로,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에 일본 대표로 참가했다. 그는 가쿠슈인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야구, 유도, 승마 등 다양한 스포츠에 재능을 보였다. 1911년 올림픽 예선에서 100m, 400m, 800m에서 1위를 차지하며 올림픽 출전권을 획득했고,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 개막식에서 일본 선수단의 기수를 맡았다. 올림픽에서는 100m, 200m, 400m 경기에 출전했지만, 좋은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다. 이후 요코하마 정금은행에서 근무했으며, 1954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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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야히코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12년 올림픽 당시 미시마 야히코
원어 이름三島 弥彦
로마자 표기Mishima Yahiko
출생일1886년 2월 23일
출생지도쿄도지요다구고지마치
사망일1954년 2월 1일
사망지도쿄도메구로구
국적일본
신장175 cm
체중71 kg (1910년)
스포츠 경력
종목단거리 달리기
은퇴1920년
소속닛타이
대학도쿄 제국대학
코치불명
올림픽 참가
올림픽1912 스톡홀름
기타 정보
세계 랭킹당시 192위
국내 랭킹당시 1위

2. 생애

미시마 야히코는 경시총감 미시마 미치쓰네 자작의 아들로 도쿄부 도쿄시 고지마치구(지금의 도쿄도 지요다구)에서 태어났다. 가쿠슈인을 거쳐 도쿄 제국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미시마는 학업보다 스포츠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대학 야구, 유도, 승마, 보트타기, 스모, 스케이트 등 다양한 종목에서 활약했다. 특히 당시 일본 남성들의 평균 키가 150cm 안팎이었던 것에 비해 170cm의 큰 키는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1911년 하네다 운동장에서 열린 국제 올림픽 대회 선수 예선회에서 100m, 400m, 800m에서 1위를 차지하며 1912년 하계 올림픽 출전권을 획득, 가나구리 시조와 함께 일본 대표로 참가했다. 그러나 일본 문부성의 지원은 미미했고, 예산은 스톡홀름에 두 명의 선수만 파견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1912년 하계 올림픽 개막식에서 일본 선수단 기수를 맡았으나, 육상 단거리 예선에서는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100m와 200m 예선에서 탈락했고, 400m 예선에서는 준결승에 진출했지만 오른쪽 다리 통증으로 기권했다. 이후 1916년 베를린 올림픽을 목표로 했으나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대회가 취소되면서 올림픽 출전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1913년 요코하마 정금은행에 입사하여 중국 칭다오 지점 등에서 근무했고, 1939년까지 근무했다. 1954년 도쿄도 메구로구 자택에서 동맥 경화와 대동맥류로 사망했는데, 당시 일본 언론은 그의 죽음에 큰 주목을 하지 않았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경시총감 미시마 미치쓰네 자작의 아들로 도쿄부 도쿄시 고지마치구(지금의 도쿄도 지요다구)에서 6남 6녀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3] 아버지는 미시마가 두 살 때 세상을 떠났다.

1891년(메이지 24년) 9월에 가쿠슈인에 입학하여 초등과, 중등과, 고등과를 거쳤다. 스포츠를 통해 동급생인 후타라 요시노리와 친해졌다.

1906년(메이지 39년) 육군성 및 문부성이 기획한 가쿠슈인의 만주 교원 시찰 여행에 참가했다.

1907년(메이지 40년) 9월 도쿄 제국대학 법과대학(현 도쿄 대학 법학부)에 진학했다. 가쿠슈인에서 도쿄 제국대학에는 무시험으로 진학했다.

당시 성인 남성의 평균 신장이 155cm 정도였던 시대에 170cm가 넘는 장신을 자랑했으며, 가쿠슈인 시절 야구부에서 에이스 겸 주장을 맡았고, 보트부에서도 1군 선수였다. 도쿄대 시절에는 스키 기술을 익혔으며, 이 외에도 유도 2단, 승마스모도 했고, 스케이트도 대회에 출전할 정도로 잘하는 등 스포츠에 조예가 깊었다. 스키는 일본에 처음 스키를 전파한 테오도어 에들러 폰 렐히에게 직접 지도를 받아 습득했으며, 렐히로부터 "프레지던트"라는 별명을 얻었다. 선수뿐만 아니라 소케이전에서 심판도 많이 맡았다.

2. 2. 스포츠 활동 및 올림픽 참가

미시마는 야구, 유도, 승마, 보트타기, 스모, 스케이트 등 다양한 스포츠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특히 당시 일본 남성의 평균 신장이 150cm 안팎이었던 것에 비해 170cm의 큰 키는 그에게 유리한 조건이었다.[3] 1911년 하네다 운동장에서 열린 국제 올림픽 대회 선수 예선회에서 미시마는 100m, 400m, 800m에서 1위를 차지하며 올림픽 출전권을 획득했다.[3] 100m에서는 12초대, 400m에서는 59초 6이라는 당시 일본인으로서는 좋은 기록이었다.

1912년 하계 올림픽에 가나구리 시조와 함께 일본 대표로 참가했다. 일본 문부성의 지원은 미미했고, 예산은 스톡홀름에 두 명의 선수만 파견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3] 미시마는 자비로 3500엔을 지참하여 참가했다.[3]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통해 스톡홀름으로 이동했다.

1912년 5월 16일, 가족과 스포츠 단체 "텐구 클럽", 게이오기주쿠 야구부 OB회인 "도쿄 클럽" 멤버들의 배웅을 받으며 신바시역을 출발했다.[3] 어머니는 유니폼에 손으로 일장기를 붙여 주었다.[3] 6월 2일 스톡홀름에 도착하여 훈련을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오른쪽 다리를 다쳤다.[3]

1912년 7월 6일, 올림픽 개막식에서 일본 선수단 기수를 맡았다.[3] 선수가 2명뿐이라 쓸쓸했지만, 오히려 군중의 동정을 샀다고 한다.[3] 가나구리 시조가 "NIPPON"이라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미시마가 일장기를 들고 행진했다.

같은 날 오후, 육상 단거리 예선에 출전했지만, 100m 예선에서 1초 이상 뒤져 탈락했다.[3] 200m 예선은 최하위, 400m 예선은 준결승 진출권을 얻었지만, 오른쪽 다리 통증으로 기권했다.[3]

가노 지고로, 가나구리 시조와 4년 후 베를린 대회에서의 설욕을 다짐하고 폐막식 전에 출국했다.[4] 다음 대회 개최국인 독일로 가서 경기장 등을 시찰하고, 스포츠 용품을 구입했다.[4] 1916년 베를린 올림픽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취소되었다.

1920년 하계 올림픽에는 34세로, 운동 선수로서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는 육체를 잃었기 때문인지 예선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2. 3. 은행원 생활 및 사망

1913년, 미시마는 요코하마 정금은행에 입사하여 칭다오, 런던, 베이징, 한커우 등 해외 지점에서 근무했다.[3] 1923년, 나베시마 나오카타 자작의 다섯째 딸 후미코와 결혼했다.[3] 1939년, 요코하마 정금은행 본점 검사역에 취임했다.[3] 1943년, 요코하마 정금은행을 퇴사하고 제국 잠사 창고 감사역에 취임했다.[3]

1954년 2월 1일, 메구로구 자택에서 동맥 경화와 대동맥류로 사망했다.[3] 그의 죽음은 갑작스러운 것이었고, 사망 전날 심장 통증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평소처럼 생활했다.[3]

3. 인물 및 평가

미시마 야히코는 스포츠맨으로서 다재다능했으며, 오시카와 슌로는 "미시마는 매우 낙천적인 사람이다. 느긋하며 도량이 넓고 사소한 일에 무관심한 사람이다"라고 평가했다.[9]

또한, 스포츠맨이었기 때문에 학생이나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많았으며, 잡지 『모험세계』의 "통쾌 남자 10걸 투표"에서 운동가 부문 1위를 차지했다.[9]

4. 가족 관계

미시마 미치쓰네 자작의 아들이었으며, 그의 형인 미시마 야타로는 일본 은행의 8대 총재였다. 미시마의 아버지는 그가 두 살 때 사망했다.

5. 기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국내 최종 선발회에서 심판장을 맡았다.[1] 1940년 도쿄 올림픽 유치 과정에서 체협 평의원으로 활동했다.[2] 2019년 NHK 대하드라마 『이다텐~도쿄 올림픽 이야기~』에서 이쿠타 토마가 미시마 야히코를 연기하며 그의 생애가 재조명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Yahiko Mishima https://www.olympedi[...] 2021-04-17
[2] 서적 平成新修旧華族家系大成 霞会館 1996
[3] 서적 土方梅子自伝 早川書房 1976
[4] 서적 「日本初のオリンピック代表選手 三島弥彦─伝記と資料─ 尚友ブックレット34」中、三島通陽宛三島弥彦絵葉書(1912年7月) 芙蓉書房出版 2019
[5] 뉴스 産業経済新聞 産業経済新聞 1952-06-26
[6] 간행물 日本初のオリンピック代表選手 三島弥彦─伝記と資料─ 尚友倶楽部資料調査室他編 1931-06-27 #추정 날짜. 자세한 출판일이 없어 방송 날짜 기입
[7] 뉴스 ストックホルムオリンピック追憶リレー 11 トラック 産業經済新聞 1952-06-26
[8] 뉴스 三島彌彦翁・スポーツ放談 スポーツ毎日 1953-05-02
[9] 뉴스 生田斗真演じる三島弥彦の素顔は 五輪後はエリート行員 https://digital.asah[...] 朝日新聞 2019-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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