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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쿠고 마사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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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쿠고 마사쓰네는 일본 에도 시대의 다이묘로, 데와국 혼조 번의 10대 번주이다. 1811년에 태어나 1850년에 사망했다. 1822년 숙부 로쿠고 마사즈미의 양자가 되어 가문을 계승했으며,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를 알현하고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사콘에곤노쇼쇼, 오사카 조다이, 교토 쇼시다이 등을 역임했다. 재임 기간 동안 번의 재정 악화와 가신 간의 다툼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결국 1848년 아들 로쿠고 마사카네에게 번주 자리를 물려주고 은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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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쿠고 마사쓰네
기본 정보
씨명로쿠고 씨
이름로쿠고 마사쓰네
이명시게지로 (유명)
관위종5위 하, 효고노카미
계명신레이인덴 호잔 에쿄 다이코지
묘소아키타현유리혼조시 데토마치의 에이센지
시대에도 시대 후기
생년분카 8년 (1811년)
사망일가에이 3년 10월 16일 (1850년11월 19일)
정치적 역할
막부에도 막부
주군도쿠가와 이에나리도쿠가와 이에요시
데와혼조 번 번주
전임 번주로쿠고 마사즈미
후임 번주로쿠고 마사타다
번주 임기1822년 ~ 1848년
가족 관계
아버지로쿠고 마사요시
어머니호리 나오타카의 딸
양아버지로쿠고 마사즈미
배우자마스야마 마사야스의 딸
자녀마사타다

2. 생애

분세이 9년 (1826년), 로쿠고 마사쓰네는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를 알현하고 종5위하 효고노카미에 서임되었다. 이후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분세이 10년 (1827년)에는 사콘에곤노쇼쇼에 임명되었다. 덴포 2년 (1831년)에는 오사카 조다이를 겸임하게 되었다. 덴포 8년 (1837년) 4월 23일, 오사카 조다이에서 면직되었지만, 덴포 11년 (1840년)에는 다시 사콘에곤노쇼쇼에 임명되었다. 덴포 14년 (1843년) 6월 26일, 사콘에곤노쇼쇼에서 면직되었고, 가에이 1년 (1848년) 12월 16일, 교토 쇼시다이에 임명되었다. 가에이 5년 (1852년) 10월 29일, 교토 쇼시다이에서 면직되었다.

한편, 만성적인 번 재정 곤궁은 로쿠고 마사쓰네의 통치 기간 내내 이어졌다. 덴포 연간 (1830-1844년)에는 쌀값 폭등으로 인해 백성의 생활이 어려워졌고, 번은 구빈책을 실시했지만, 재정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1841년에는 가신 간의 파벌 싸움인 오야마다 소동이 발생하여, 번의 통치 기반이 흔들리기도 했다. 마사쓰네는 혼마 가문과의 거래를 통해 재정난을 타개하려 했지만, 번의 재정 상황이 워낙 좋지 않아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결국 가에이 원년 (1848년)에 번주 자리를 아들 로쿠고 마사카네에게 물려주고 은거했다.

로쿠고 마사쓰네는 만노 4년 (1848년)에 병을 얻어 요양을 시작했고, 가에이 3년 (1850년)에 사망했다.

2. 1. 출생과 가독 상속

분카 8년(1811년) 로쿠고 마사쓰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분세이 5년(1822년) 숙부인 로쿠고 마사즈미의 양자가 되어 가독을 상속받았다.

2. 2. 관직 생활

분세이 9년(1826년), 로쿠고 마사쓰네는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를 알현하고 종5위하 효고노카미에 서임되었다. 이후 그의 관직 생활은 다음과 같이 전개되었다.

  • 분세이 10년(1827년): 사콘에곤노쇼쇼에 임명되었다.
  • 덴포 2년(1831년): 오사카 조다이를 겸임하게 되었다.
  • 덴포 8년(1837년): 4월 23일, 오사카 조다이에서 면직되었다.
  • 덴포 11년(1840년): 다시 사콘에곤노쇼쇼에 임명되었다.
  • 덴포 14년(1843년): 6월 26일, 사콘에곤노쇼쇼에서 면직되었다.
  • 가에이 1년(1848년): 12월 16일, 교토 쇼시다이에 임명되었다.
  • 가에이 5년(1852년): 10월 29일, 교토 쇼시다이에서 면직되었다.


이처럼 로쿠고 마사쓰네는 여러 관직을 거치며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2. 3. 번 재정 악화와 은거

만성적인 번 재정 곤궁은 로쿠고 마사쓰네의 통치 기간 내내 이어졌다. 덴포 연간(1830-1844년)에는 쌀값 폭등으로 인해 백성의 생활이 어려워졌고, 번은 구빈책을 실시했지만, 재정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841년에는 가신 간의 파벌 싸움인 오야마다 소동이 발생하여, 번의 통치 기반이 흔들리기도 했다. 마사쓰네는 이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번의 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마사쓰네는 혼마 가문과의 거래를 통해 재정난을 타개하려 했다. 혼마 가문은 에치고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거상으로, 막대한 자금을 가지고 있었다. 마사쓰네는 혼마 가문으로부터 자금을 빌리거나, 쌀 거래를 통해 재정을 확보하려 했다. 그러나, 번의 재정 상황이 워낙 좋지 않았기에, 혼마 가문과의 거래는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결국, 가에이 원년(1848년)에 마사쓰네는 번주 자리를 아들 로쿠고 마사카네에게 물려주고 은거했다.

2. 4. 사망

로쿠고 마사쓰네는 만노 4년(1848년)에 병을 얻어 요양을 시작했고, 가에이 3년(1850년)에 사망했다.

3. 가계

로쿠고 마사쓰네는 마스야마 마사야스(増山 正安)의 딸을 정실 부인으로 맞이했다. 슬하에는 2남 4녀를 두었으며, 차남은 로쿠고 마사아키(六郷政鑑)이다. 딸로는 코토코(琴子), 키요코(清子), 쇼코(尚子), 토라코(虎子)가 있다.

3. 1. 부모

로쿠고 마사쓰네(六郷政鑑)의 친부는 로쿠고 마사토시(六郷政俊)이며, 친모는 호리 나오노리(堀直教)의 딸이다. 그는 로쿠고 마사즈미(六郷政純)의 양자가 되었다.

3. 2. 배우자

마스야마 마사야스(増山 正安)의 딸이 정실 부인이 되었다.

3. 3. 자녀

로쿠고 마사쓰네는 슬하에 2남 4녀를 두었다. 차남은 로쿠고 마사아키(六郷政鑑)이다. 딸로는 코토코(琴子), 키요코(清子), 쇼코(尚子), 토라코(虎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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