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 막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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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도 막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603년에 설립하여 1867년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대정봉환으로 멸망할 때까지 260여 년간 존속한 일본의 무가 정권이다. 센고쿠 시대를 종식하고 일본을 통일한 도쿠가와 막부는 중앙 집권적인 통치 체제를 구축하여, 다이묘(영주)들을 통제하고 막부의 권력을 강화했다. 막부 말기에는 서구 열강의 개항 요구와 사회적 혼란 속에서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지는 격변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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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도 막부 - 하타모토
하타모토는 에도 막부 시대에 쇼군에게 직접 복무하며 1만 석 미만의 녹봉을 받던 사무라이 계급으로, 센고쿠 시대부터 존재했으나 도쿠가와 막부 하에서 제도화되었고, 메이지 유신 이후 봉건적 지위를 상실했으며, 그들의 역사와 문화적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연구되고 있다. - 에도 막부 - 에도성
에도성은 헤이안 시대 말기 에도 시게쓰구가 거처를 마련한 곳에서 시작하여 1457년 오타 도칸이 축성하였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거성으로 삼아 에도 막부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고쿄(황거)로 불리며 일부 문과 망루, 해자가 남아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무사시국 - 도쿄부
도쿄부는 1868년 에도에서 개칭된 도쿄에 설치된 일본의 행정 구역으로, 에도 시가지에서 현재의 도쿄도와 거의 같은 영역으로 확장되었으며, 1943년 도쿄도제가 시행되면서 도쿄도로 개편되었다. - 무사시국 - 에도
에도는 도쿠가와 막부의 중심지이자 일본의 정치, 경제 중심지로 성장하여 세계 최대 도시가 되었으나, 메이지 유신 이후 도쿄로 개칭되어 현재의 도쿄가 되었다. - 도쿠가와씨 - 도쿠가와 요시나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홉 번째 아들인 도쿠가와 요시나오는 오와리 도쿠가와 가문의 초대 당주로서, 오와리 번주 재임 동안 경제 발전, 문화 사업, 무예 연마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다. - 도쿠가와씨 - 오사카성
오사카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83년에 건설을 시작하여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재건되었으며, 현재 일본의 중요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과 유적을 포함하고 있다.
에도 막부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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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일본어 표기 | 徳川幕府 (도쿠가와 바쿠후) 江戸幕府 (에도 바쿠후) |
영어 표기 | Tokugawa shogunate |
존속 기간 | 1603년 ~ 1868년 |
다른 이름 | 에도 막부 |
상세 정보 | |
시대 | 에도 시대 |
정부 형태 | 봉건제 세습적 군사 독재 |
수도 | 에도 (쇼군의 거주지) 헤이안쿄 (천황의 궁궐) |
최대 도시 | 오사카 (1600년–1613년) 헤이안쿄 (1613년–1638년) 에도 (1638년–1868년) |
공용어 | 고대 일본어 |
종교 | 국교: 일본 불교 유교 기타: 신토 신불습합 일본 불교 기독교 (1853년까지 금지) |
통화 | 구리 몬, 은 부, 슈, 금 료 기반의 삼금속 도쿠가와 화폐 제도 |
정치 | |
천황 | 고요제이 천황 (초대) (1600년–1611년) 메이지 천황 (말대) (1867년–1868년) |
쇼군 | 도쿠가와 이에야스 (초대) (1603년–1605년) 도쿠가와 요시노부 (말대) (1866년–1868년) |
역사 | |
주요 사건 | 세키가하라 전투 (1600년 10월 21일) 오사카 전투 (1614년 11월 8일) 1635년 사코쿠 칙령 (1635년) 가나가와 조약 (1854년 3월 31일) 해리스 조약 (1858년 7월 29일) |
멸망 | 메이지 유신 (1868년 1월 3일) |
기타 | |
후신 | 일본 제국 에조 공화국 |
2. 역사
1603년 3월 24일(게이초 8년 음력 2월 12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쇼군(세이이타이쇼군)에 취임하며 막부를 창설한 것을 시작으로, 1867년 11월 9일 (게이오 3년 음력 10월 14일)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대정봉환으로 정권을 천황에게 넘기면서 막을 내렸다. 도쿠가와 가문의 쇼군들이 일본을 지배한 264년간의 시기를 에도 시대 또는 도쿠가와 시대라고 한다.
에도 막부는 바쿠한(幕藩) 체제 아래 사농공상의 신분을 고정하고, 기독교 금지를 구실로 쇄국 정책을 펼쳤으며, 이후 유교적 교화를 통해 전국 지배를 강화했다. 조선에 대해서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통신사를 12회 초청하여 두 세기 동안 양국 간의 밀접한 교류를 하였다.
1616년, 무라야마 토안이라는 쇼군 신하에 의한 대만 침공 시도가 실패했다.[23][24]
1615년 오사카 전투부터 1651년 케이안의 난까지 오랜 평화 시기가 이어졌다. 이 기간 동안 막부는 행정 업무를 우선시했고, 시민 사회는 무역 및 산업 활동이 급증했다. 겐로쿠 시대(1688–1704)에 일본은 물질적 번영을 누렸고, 히시카와 모로노부의 우키요에와 같은 예술이 발전했다.[25] 도쿠가와 요시무네(1716–1745) 통치 시기에는 1720년대 초 흉작과 세입 감소로 교호 개혁을 추진하여 막부 재정을 복구하려 했다.[25]
도쿠가와 시대의 사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확립한 엄격한 계급 체계를 기반으로 했다. 다이묘(영주)가 최상위에 있고, 사무라이, 농민, 장인, 상인 순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계층화는 시간이 지나면서 경직되어 문제를 야기했다. 농민에 대한 세금은 고정된 금액이었기 때문에, 사무라이 토지 소유주가 징수하는 세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감소했다. 18세기 중반까지 쇼군과 다이묘는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고, 상인 계급으로 부가 흘러갔다.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의 간세이 개혁(1787–1793)과 같은 개혁이 시행되었다.[27]
1800년까지 일본에는 10만 명이 넘는 인구를 가진 도시가 5개 있었고, 30만 명 이상의 인구를 가진 세계 20대 도시 중 3개가 포함되었다. 에도는 100만 명이 넘는 인구를 수용하며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였을 것이다.[28]
16세기부터 가톨릭 신자들이 일본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다 노부나가는 기독교와 함께 수입된 서양 기술(예: 머스킷)을 받아들였다. 그는 기독교를 불교 세력을 억누르는 도구로 사용하려 했다.[29] 기독교는 1610년대까지 성장을 허용했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기독교가 막부 안정에 위협이 된다고 여겨 기독교 신앙 금지 법률 시행에 영향을 미쳤다. 그의 후계자들도 이에야스의 법률을 강화했다. 기독교 금지는 1630년대 쇄국 정책과 관련이 있다.[31]
에도 시대 말기, 막부 타도 운동이 활발했던 격동의 시기를 막말(幕末)이라 칭한다.
2. 1. 설립 이전
무로마치 막부가 지방 영주들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하면서 센고쿠 시대가 시작되었다. 오다 노부나가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혼란을 수습하고 중앙 정부의 기틀을 다시 잡았으나, 부하의 배신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권력을 잡았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일으켜 조선을 정벌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사망하였다.[17]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쇼군이 되겠다는 야망을 드러내자, 이시다 미쓰나리는 도요토미 가문을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서군을 창설했다. 1600년, 서군과 동군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격돌했고,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으로 서군이 패배하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권력을 장악했다.[22] 1603년 3월 24일,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 막부를 설립하였다.2. 2. 도요토미가 멸망
161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있는 오사카 성을 공격했다. 이에야스는 히데요리와 그의 가족들의 목숨과 영지는 보장하되 막부의 지시를 받들 것을 요구했고, 히데요리가 이를 받아들이며 전쟁은 끝나는 듯 했다. 하지만 오사카 성에 잔류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들(낭인)은 승복할 수 없다며 무기와 낭인들을 계속 모아 다시금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에야스는 오사카 성내의 낭인들을 내칠 것을 히데요리에게 요구하였으나 낭인들을 통제하지 못한 히데요리는 돌이킬 수 없는 전쟁을 다시금 하게 된다. 결국 히데요리는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정실 오센은 오사카 성에서 도망을 시키고 어머니 요도도노와 함께 폭탄을 폭발시켜 자진하며 도요토미 가문은 멸망하게 된다.[54]2. 3. 번영
겐로쿠 시대(1688~1704)에 일본은 물질적으로 번영하였으며, 히시카와 모로노부의 우키요에와 같은 예술이 발전했다.[25] 에도 막부는 사농공상이라는 엄격한 신분 제도를 통해 사회 질서를 유지하였으나, 이는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1607년부터 1811년까지 통신사를 12회 초청하여 조선과 두 세기 동안 밀접하게 교류하였다.에도 시대에는 다이묘가 최상위 계층이었고, 사무라이, 농민, 장인, 상인 순으로 신분이 이어졌다. 막부 말기에는 이러한 차별 대우가 사회 불안정을 야기했다. 농민에게 부과된 세금은 물가 상승과 관계없이 일정했기 때문에 지배 계급의 실질적인 세입은 계속 감소했다. 이 때문에 다이묘들은 세금을 올리려 했고, 농민들은 이에 반발하여 크고 작은 반란을 일으켰다.[26]
2. 4. 막부 말기 (1853~1867)

막부 말기(幕末|바쿠마쓰일본어)는 1853년부터 1867년까지, 일본이 쇄국 정책(''사코쿠'')을 끝내고 봉건 막부에서 메이지 정부로 근대화되던 시기이다. 1850년대 도자마 다이묘들의 불만이 커지고, 매튜 C. 페리가 이끄는 미국 해군 함대의 도착으로 일본이 강제 개항되면서 반서구주의 정서가 커졌다. 이 시기 주요 이념적, 정치적 파벌은 친 제정파인 ''이신 시시''(민족주의 애국자)와 막부 세력으로 나뉘었다. 이 두 주요 세력 외에도 다른 파벌들이 막말 시대의 혼란을 이용하여 개인적인 권력을 잡으려 했다.[32]
다이묘와 천황의 연합은 막부 타도에 성공했고, 15대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사임하면서 1868년에 공식적으로 막부가 멸망하고, 제정 복고(왕정복고, ''오세이 훗코'')가 이루어졌다. 막부의 충신들은 이어진 보신 전쟁에서 계속 싸웠지만,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패배했다.[33]
외국 세력의 내항으로 군사적 위기에 직면한 막말에는 사무라이의 이완과 피폐, 재정 악화 및 사회 변화에 따른 기존 동원 제도의 붕괴, 제도·무기·교육 등 모든 면에서 뒤처짐으로 인해 서양식 군대 도입이 주장되었고, 막부 해군·막부 육군이 창설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군대와 기존의 반가는 병존했으며, 후자의 실질적인 해체는 막부가 종언을 맞이하기 직전 게이오 개혁 때 이루어졌다.
3. 정치
에도 시대의 정치 체제는 막번체제라고 불리며, 이는 막부(幕府)와 번(藩)으로 권력이 분할된 형태였다. 막부는 쇼군을 중심으로, 번은 다이묘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쇼군은 일본 전체를 통치하는 최고 권력자였으며, 교토 조정으로부터 행정에 대한 권한을 위임받았다.[24] 그러나 실제로는 천황은 국정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고, 막부가 실질적인 통치를 담당했다.[35] 막부는 금중 및 공가 제법도를 통해 황실과의 관계를 규정하고, 천황의 역할을 학문과 시에 전념하도록 제한했다.[39] 또한 교토 쇼시다이를 임명하여 천황, 조정, 귀족을 상대했다.
다이묘는 각 번의 통치자로서, 자신의 영지 내에서 자치권을 행사했다. 하지만 쇼군에 대한 충성을 맹세해야 했으며, 막부의 여러 정책에 따라 통제를 받았다. 다이묘는 신판, 후다이, 도자마의 세 가지 범주로 분류되었다.[36]
- '''신판''': 도쿠가와 일족으로, 쇼군 후계자가 없을 경우 쇼군직을 이을 수 있었다.[36]
- '''후다이''':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부터 도쿠가와 가문에 충성한 다이묘들로, 막부의 요직을 맡았다.[36]
- '''도자마''':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쿠가와 가문에 충성한 다이묘들로, 대개 큰 영지를 소유했지만 막부의 감시를 받았다.[36]
막부는 다이묘를 통제하기 위해 참근교대 등의 제도를 시행했다. 특히 도자마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가문에 대항했던 이들이 많아 영지가 축소되거나 변경에 배치되는 경우가 많았다.[36]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전략적인 결혼과 제도 강화로 인해 도자마의 반란 가능성은 줄어들었다.

막부는 외교와 무역을 독점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초기에는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등과 남만 무역을 했으나, 1635년 이후 쇄국 정책을 시행하여 청나라, 조선, 네덜란드와의 무역만 허용했다.
막부의 주요 수입원은 도쿠가와 직할령(천령)에서 걷는 세금(약 40%)이었다.[36] 다이묘 영지에는 세금을 부과하지 않았지만, 군사적 의무, 공공사업, 부역 등을 부과했다.[36]
막부 초기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슨푸 성을 중심으로 '슨푸 정권'을 운영하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에도 막부와 이원적인 통치 체제를 유지하기도 했다.[41][42]
막부 말기에는 천황의 권위가 강화되고, 고메이 천황의 누이와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결혼을 계기로 조정의 정치적 영향력이 확대되었다.[40]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행정권이 쇼군에서 천황에게 반환되었다.
3. 1. 막번체제
에도 시대의 정치 체제는 막번체제(幕藩体制)라고 불린다.[34] 막번 체제는 막부와 번으로 권력이 분할되었다.[35] 쇼군과 다이묘는 모두 자신만의 관료 체제, 정책, 영토를 가진 봉건 영주였다.[35] 각 번은 쇼군에 대한 충성을 대가로 독립적인 행정을 허용받았지만, 외교, 국가 안보,[35] 주화, 도량형, 운송은 쇼군이 담당했다.[22]막부는 다이묘를 통제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주요 정책을 시행했다.
- 부케쇼핫토(武家諸法度): 다이묘가 막부에 복종하고 막부의 승인과 토지 재분배를 따르도록 했다.[22] 다이묘는 쇼군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무가제법도를 인정해야 했다.[36]
- 참근교대(参勤交代): 다이묘가 1년마다 에도에 거주하고, 가족은 에도에 인질로 남아있도록 했다.
- 일국일성령(一国一城令): 각 번이 하나의 요새만 유지하도록 제한했다.[22]
- 무가제법도(1615년 제정): 막부 승인 없이 요새 신축 및 수리, 도망자 수용, 다이묘 가문 간 혼인 주선을 금지했다.[22]
쇼군은 특정 법률을 발표했지만, 각 번은 자율적인 법률 및 조세 시스템을 관리했다.[35] 막부는 번의 통치에 간섭하지 않았고 중앙 세금도 부과하지 않았다.[35] 대신 각 번은 도로, 우편소, 운하, 항구를 건설하고 군대를 제공하는 등 봉건적 의무를 수행했다.[35] 참근교대 제도를 통해 다이묘와 그 가족은 항상 에도에 머물며 쇼군의 감시를 받았다.[35]
막부는 영지를 폐기, 합병, 변형할 권한이 있었지만, 다이묘 간 결속을 막기 위해 막부 초기를 제외하고는 드물게 행사되었다.[35] 1690년대까지 대다수 다이묘는 에도에서 태어나 에도를 고향으로 여겼다.[22]

집권화의 대가로 센고쿠 시대와 달리 다이묘 간의 평화가 유지되었고, 영지 내 내부 찬탈은 막부에 의해 인정되지 않아 세습 상속이 보장되었다.[22]
도쿠가와 가문의 당주가 정이대장군에 임명되어 260여 개의 무가 다이묘와 주종 관계를 맺고 그들을 통제하는 제도는 1600년대 후반까지 확립되었다. 이러한 막부와 번의 복합적인 권력 체제를 막번체제라고 부른다. 단, "막부" 및 "번"이라는 말은 막말기에 널리 사용되었고, 현재도 역사 용어로 정착되어 있지만, 에도 시대 전반에 걸쳐 사용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 전까지는 장군의 정부는 "공의"·"공변" 등으로 막연하게 불렸다.
막부의 지배 체제는 막번 체제라고 불리며, 쇼군의 정부인 막부와 쇼군과 주종 관계를 맺은 다이묘의 정부인 번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쇼군은 다이묘에게 주인장을 주어 그 지행을 보장했고, 다이묘는 해당 지행 내에서 독자적으로 통치를 할 권한을 일정 정도 가졌다. 막부는 "공의"로서 국내 전체를 통치함과 동시에, 스스로도 하나의 다이묘로서 영분(천령, 어령)을 지배하고, 교토 쇼시다이, 오사카 조다이, 고봉행, 군대·다이칸 등의 지방관을 설치했다.
에도 막부의 지배에서는, 쇼군과 다이묘의 주종 관계를 확인하기 위한 군역으로서, 각 번 다이묘에게 산킨코타이나, 축성·치수 공사 등의 테츠다이 부신이 부과되었다.
"번"이라는 말이 공칭으로 사용된 것은 메이지 시대의 일로, 공문서에서는 "령", "영분", 혹은 "영지" 등이 사용되었다. 공칭으로서의 번은, 1868년 (메이지 원년)에 공포된 정체서에 의해 설치되어, 1871년 (메이지 4년)의 폐번치현에 의해 폐지되었다.
3. 2. 역직
에도 막부의 역직은 쇼군을 정점으로 다양한 직책으로 구성되었다. 주요 직책은 다음과 같다:{| class="wikitable"
|-
! 직책 || 설명
|-
| 쇼군 || 막부의 최고 권력자
|-
| 다이로 || 임시로 설치되는 최고 직책
|-
| 로주 || 최고 정책 결정 기관, 여러 명이 월별 교대로 근무
|-
| 와카도시요리 || 로주를 보좌하고 하타모토와 고케닌을 관리
|-
| 오메쓰케 || 다이묘, 조정, 종교 등을 감시
|-
| 산부교 ||
직책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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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샤부교 | 사찰과 신사를 관리 |
간조부교 | 재정을 담당 |
마치부교 | 도시 행정을 담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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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타모토 || 1만 석 미만의 도쿠가와 직속 가신 중 쇼군 알현 가능자
|-
| 고케닌 || 1만 석 미만의 도쿠가와 직속 가신 중 쇼군 알현 불가능자
|}
에도 막부는 권력 집중을 막기 위해 주요 직책에 여러 명을 임명하고, 월별 교대 근무를 시행했으며, 중요한 결정은 합의를 통해 이루어졌다.
18세기경 에도 막부는 22,000여 명의 가신을 거느렸고, 이들 중 대부분은 봉토 대신 봉급을 받았다.[36]
막부 초기에는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은퇴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각각 에도와 슨푸 성을 중심으로 이중 정부를 운영하기도 했다. 슨푸 정부에는 윌리엄 애덤스 (사무라이) 등 이에야스의 신뢰를 받는 가신들이 포함되었다.[41][42]
막부 말기에는 게이오 개혁을 통해 로주의 월번제를 폐지하고, 국내 사무, 회계, 외국, 육군, 해군의 각 총재를 전담하는 등의 개혁이 이루어졌다.
3. 3. 다이묘
다이묘는 막부의 통제를 받았으며, 신판, 후다이, 도자마의 세 가지 주요 범주로 분류되었다.[36]- '''신판''' (親藩, "친척"): 도쿠가와 일족으로, 쇼군에게 후계자가 없을 경우 쇼군직을 이을 수 있었다.[36]
- '''후다이''' (譜代, "세습"):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에 도쿠가와 가문에 충성한 다이묘들이다.[36] 이들은 자신의 영지를 다스렸으며 쇼군직의 고위 관료로 봉사했지만, 영지의 크기는 도자마에 비해 작은 경향이 있었다.[36]
- '''도자마''' (外様, "외부자"):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쿠가와 가문에 충성한 다이묘들이다.[36] 일부는 도쿠가와 군대에 맞서 싸웠지만, 일부는 중립적이거나 도쿠가와 씨족 편에서 싸우기도 했다.[36] 도자마는 가장 큰 영지를 가지고 있는 경향이 있었으며, 16개의 가장 큰 다이묘 중 11명이 이 범주에 속했다.[36]
막부는 다이묘를 통제하기 위해 무가제법도와 참근교대 제도를 시행했다. 특히,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가문에 대항했던 도자마는 영지가 축소되거나 산간 지역, 또는 멀리 떨어진 지역에 배치되었다.[36] 에도 시대 초기에는 도자마가 가장 충성심이 적을 것으로 간주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전략적인 결혼과 제도의 강화로 인해 반란 가능성은 줄어들었다. 그러나 결국 쇼군직을 무너뜨린 것은 사쓰마, 조슈, 도사의 거대한 도자마였다.[37]
막부의 요직에는 모두 후다이를 임명했는데, 이는 가마쿠라 막부, 무로마치 막부와는 다른 점이었다. 도요토미 정권 말기의 5대 로 제도는 유력 다이묘에 의한 집단 지도 체제였으며, 도자마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정권 찬탈을 막을 수 없었다. 반면 에도 막부에서는 후다이가 막부의 요직을 독점했다. 도쿠가와 가문 이외의 유력 다이묘는 지방을 통치하는 도자마로서 중앙 정권의 요직에 취임하는 일이 없어졌다.
근세 다이묘
3. 4. 하타모토
하타모토는 에도 막부의 직신 중 고케닌을 제외한 1만 석 미만의 봉록을 받는 쇼군 직속 가신을 의미한다.하타모토의 직제는 크게 로주 지배 하타모토 직제와 와카도시요리 지배 하타모토 직제로 나뉜다. 로주 지배 하타모토 직제에는 부교, 번장, 메츠케, 오반, 마치부교, 간조부교 등이 있었다. 와카도시요리 지배 하타모토 직제에는 메쓰케[14], 도목부조두, 소십인목부조두, 쓰카이반[14], 고나이도[14], 후나테[14] 등이 있었다.
그 외에도 군다이, 슨푸 근번구미 머리 등의 직제가 있었다.
3. 4. 1. 로주 지배 하타모토 직제
부교 - 요리키 - 조장 / 도신번장 - 番衆 - 伊賀者 / 進上番
- 메츠케
- * 闕所物奉行 / 肝煎坊主 / 宗門改加役人別帳改 / 道中奉行 / 服忌令分限帳改 / 日記帳改 / 十里四方鉄砲改
- 오반
- 마치부교
- 간조부교
- 旗奉行
- 작사봉행
- * 京都大工頭 / 大工頭 / 作事下奉行 / 畳奉行 / 細工所頭 / 細工所勘定役頭取 / 細工所勘定改役 / 細工方改役 / 作事方被官 / 作事方小役 / 作事方手代 / 作事方書役 / 作事方定普請同心組頭 / 作事方手大工組頭 / 作事方定小屋門番人 / 餝棟梁 / 作事方大棟梁 / 大鋸棟梁 / 小細工奉行 / 瓦奉行 / 植木奉行 / 作事方庭作
- 보청봉행
- 창봉행
- 감정음미역
- 온고쿠부교
- * 交替寄合 / 교토 마치부교 / 伏見奉行 / 나가사키 부교 / 奈良奉行 / 伊勢山田奉行 / 日光奉行 / 堺奉行 / 浦賀奉行 / 新潟奉行 / 佐渡奉行 / 箱館奉行 / 羽田奉行 / 表絵師 / 奥絵師
3. 4. 2. 와카도시요리 지배 하타모토 직제
- 메쓰케[14]
- * 徒目付組頭 / 小十人目付組頭 / 貝役 / 押太鼓役 / 掃除頭 / 提灯奉行 / 中間頭 / 駕籠頭 / 黒鍬頭 / 小人頭 / 表火之番組頭 / 玄関番 / 中の口番 / 伝奏屋敷番 / 浜吟味役 / 小普請方改役 / 二の丸火之番 / 目付支配無役世話役
- 御広敷用人
- 数奇屋坊主頭
- 番頭
- 同朋頭
- 馬医方
- 召馬預
- 馬預
- 二丸留守居
- 書物奉行
- 駒場薬園預
- 小石川薬園奉行
- 持弓頭・持筒頭
- 吹上奉行
- 定火消役
- 浜御殿奉行
- 코쇼
- 膳奉行
- 賄頭
- 先手頭・弓頭・鉄砲頭
- 膳所台所頭
- 쓰카이반[14]
- 奥膳所台所頭
- 表台所頭
- 西の丸膳所台所頭
- 西丸裏門番之頭
- 西の丸表台所頭
- 歌学者
- 典薬頭
- 고나이도[14]
- 表番外科
- 후나테[14]
- 表番医師
- 奥外科
- 奥鍼治
- 鷹匠頭
- 奥医師
- 奥右筆組頭
- 奥口科医師
- 奥眼科医師
- 寄合医師
- 御目見医師
- 小石川養生所医師
- 天文方
- 林大学頭
- 学問所奉行
- 蕃書調所頭取
- 奥儒者
- 表祐筆組頭
- 奥祐筆組頭
- 進物番
- 腰物奉行
- 納戸頭
- 西の丸諸役
- 御三卿付諸役
- 屋敷改並新地改(新地奉行)
- 召船役
- 中川番
- 히쓰케토조쿠아라타메카타
- 徒頭
- 小十人頭
- 鳥見組頭
- 出火之節見廻役
- 本所深川出火之節見廻役
- 쓰카이반
- 定火消役
- 鉄砲方
- 鉄砲百人組頭
- 中奥番
- 中奥小姓
- 書院番頭
- 新番頭
- 小普請奉行
- 奥詰衆
- 講武所奉行
- 材木石奉行
- 軍艦操練所頭取
3. 4. 3. 기타
- 군다이
- 슨푸 근번구미 머리
3. 5. 막부 말기 신설
- 쇼군 후견직
- 정사총재직
- * 가나가와 봉행
- * 효고 봉행
- * 산릉 봉행
- 국내 사무 총재직
- 외국 사무 총재직
- * 외국 총봉행
- ** 외국 봉행
- 회계총재직
- 교토 수호직
- * 교토 순찰역
- 군사 총재직
- * 막부 해군
- ** 해군 총재직
해군 봉행
* 군함 봉행
- * 막부 육군
- ** 육군 총재직
육군 봉행
* 기병 봉행
* 보병 봉행
* 철병 봉행
* 총대 봉행
4. 사회
에도 시대는 엄격한 신분 제도로 사회가 구성되어 있었다. 최상위 계급은 다이묘였고, 그 다음은 무사 계급인 사무라이였다. 그 아래에는 농민, 장인, 상인들이 위치했다. 지방에서는 다이묘와 사무라이 간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았지만, 다른 계급 간의 차별은 매우 엄격하여 사회 불안정을 초래하기도 했다. 농민에게 부과된 세금은 물가 상승과 관계없이 일정했기 때문에, 지배 계급의 실질적인 세입은 감소했다. 이로 인해 다이묘들은 세금을 인상하려 했고, 농민들은 이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조직력 부족으로 막부에 큰 위협이 되지는 못했다.
에도 시대에는 영아 살해, 즉 마비키(間引) 풍습이 있었다. 관동 지방과 동북 지방에서는 농민들의 가난이 주된 원인이었고, 도시에서는 공인, 상인 계급의 간통이 원인이었다. 막부와 번에서는 이러한 행위를 비난했지만, 처벌은 드물었고 어른 살인과 동일하게 취급되지 않았다.[3]
5. 행정 구역
대국 | 야마토국, 가와치국, 이세국, 무사시국, 가즈사국, 시모사국, 히타치국, 오미국, 고즈케국, 무쓰국, 에치젠국, 하리마국, 히고국 |
---|---|
상국 | 야마시로국, 셋쓰국, 오와리국, 미카와국, 도토미국, 스루가국, 가이국, 사가미국, 미노국, 시나노국, 시모쓰케국, 데와국, 가가국, 엣추국, 에치고국, 단바국, 다지마국, 이나바국, 호키국, 이즈모국, 미마사카국, 비젠국, 빗추국, 빈고국, 아키국, 스오국, 기이국, 아와국, 사누키국, 이요국, 부젠국, 분고국, 지쿠젠국, 지쿠고국, 히젠국 |
중국 | 아와국, 와카사국, 노토국, 사도국, 단고국, 이와미국, 나가토국, 도사국, 휴가국, 오스미국, 사쓰마국 |
하국 | 이즈미국, 이가국, 시마국, 이즈국, 히다국, 오키국, 아와지국, 이키국, 쓰시마국 |
6. 역대 쇼군
(출생-사망)
(1543–1616)

(1579–1632)

(1604–1651)

(1641–1680)

(1646–1709)

(1662–1712)

(1709–1716)

(1684–1751)

(1712–1761)

(1737–1786)

(1773–1841)
(1793–1853)

(1824–1858)

(1846–1866)

(1837–1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