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쿠히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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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쿠히메는 1645년 이케다 미츠마사의 딸로 태어나, 두 번의 결혼 생활에서 비극적인 사건을 겪었다. 첫 번째 남편 이케다 요시사다는 로쿠히메의 질투심으로 인해 할복했고, 두 번째 남편 타키가와 카즈무네는 로쿠히메에게 살해당했다. 이러한 사건들로 인해 "오니히메"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그녀의 삶은 당시 여성의 억압과 차별을 보여주는 사례로 현대 사회에서 해석되기도 한다. 로쿠히메의 이야기는 일본 전통극의 소재로 활용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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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쿠히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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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희 (六姫) | |
다른 이름 | 로쿠히메 (일본어: 六姫) |
종류 | 고전 낙어 |
유파 | 소텐샤 계통 |
첫 공연 | 분카 연간 (1804년 ~ 1818년) |
등장인물 | |
등장인물 | 미노야 우메가에, 가메야 쓰루, 다루마야 소가, 기누타 우시와카, 사가미 지고로, 이마리 사자 |
배경 | 에도 시대 |
주요 내용 | 6명의 예쁜 아이들이 자라서 성장하는 이야기 |
육희의 종류 | |
우메가에 (梅ケ枝) | 미노야 우메가에 (美濃屋梅ケ枝) |
쓰루 (鶴) | 가메야 쓰루 (亀屋鶴) |
소가 (宗我) | 다루마야 소가 (達磨屋宗我) |
우시와카 (牛若) | 기누타 우시와카 (砧碓若) |
지고로 (猪吾) | 사가미 지고로 (相模猪吾) |
사자 (獅子) | 이마리 사자 (伊万里獅子) |
2. 생애
1645년(쇼호 2년) 이케다 미츠마사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미츠마사가 정실 카츠코(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양녀, 센히메의 딸)를 꺼려, 이미 미츠마사와의 사이에 1남 5녀를 둔 로쿠히메의 어머니 쿠니는 측실 대우도 받지 못하고 시녀로 있었다. 로쿠히메는 외조부모 덴에몬 부부 밑에서 자랐다. 5살 봄, 이케다가 가로 헤키 이노에몬 타다아키가 맞이하여, 에도의 이케다 저택으로 갔다.
만지 원년 12월 18일 (1659년 1월 10일), 이케다가 시오키 가로 이케다 데와 요시나리의 아들 이케다 요시사다와 결혼했으나, 비정상적인 질투심으로 남편을 괴롭혔다.
간분 2년 1월 1일 (1662년 2월 19일), 타키가와 카즈마스의 후손 이케다가 반가시라 滝川縫殿의 아들 타키가와 기타이부 카즈무네와 재혼했다. 부부 사이는 원만했고, 간분 6년 (1666년) 3월 요타로를 낳았으나 2살에 요절했다. 간분 10년 (1670년) 딸 요시히메가 태어났다.
로쿠히메는 "오니히메"라 불렸으나, 질투로 남편을 죽인 것을 나쁘게 여기지 않았다. 미츠마사는 로쿠히메가 타키가와가에 둔 요시히메를 데려오고 싶다는 소원을 들어주었다. 엔포 3년 (1675년) 오카야마성 니시노마루 동쪽 이시야마에 로쿠히메와 요시히메의 저택을 지었다. "이시야마 고텐", 로쿠히메는 "이시야마도노"라 불렸다. 엔포 7년 (1679년) 사망했다. 요시히메는 이시야마 고텐에서 이케다가 가신에게 시집갔다.
묘소는 와이다니 이케다가 묘소 시치노야마에 있다.
2. 1. 출생과 성장
1645년(쇼호 2년), 이케다 미츠마사의 딸로 태어났다. 하지만 어머니 쿠니는 정실인 히데타다의 양녀 카츠코(센히메의 딸)를 꺼린 아버지 미츠마사와의 사이에서 이미 1남 5녀를 두었음에도 측실은커녕 시녀 신분이었다. 이 때문에 로쿠히메는 외조부모 덴에몬 부부 밑에서 자랐다.그러나 로쿠히메가 5세가 되던 해 봄, 이케다가의 가로 헤키 이노에몬 타다아키가 맞이하러 와, 아버지가 사는 에도의 이케다 저택에서 살게 되었다.
2. 2. 첫 번째 결혼과 비극
만지 원년 12월 18일 (1659년 1월 10일), 로쿠히메는 이케다 가문의 가신 이케다 요시나리의 아들 이케다 요시사다와 결혼했다. 그러나 로쿠히메는 비정상적인 질투심을 보였고, 남편 요시사다는 이 때문에 괴로워했다.로쿠히메는 요시사다가 외출할 때마다 "어디 가시나요? 언제 돌아오시나요?"라고 물었고, 그가 약속 시간보다 늦게 돌아오면 반드시 방 안의 무언가가 부서져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시누이 쿠마히메가 친정으로 돌아와 오빠 요시사다와 다정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자 "슈케 도노(主計殿)는 제 남편입니다. 설령 여동생이라고 해도 친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라고 끼어들었다. 쿠마히메는 울면서 방을 나와 부모님께 호소했다고 한다.
이후 요시사다는 외출을 삼가고 로쿠히메 곁에서 지냈지만, 1년 뒤 그의 초췌함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였다. 어느 가을, 요시사다는 이웃집 딸 카요가 연주하는 거문고 소리를 듣고 그리움을 느꼈다. 원래 요시사다는 카요와 결혼할 예정이었으나, 헤키 타다아키가 로쿠히메와의 혼담을 밀어붙여 파기되었던 것이다. 로쿠히메는 요시사다의 표정을 놓치지 않고 거문고 연주자가 누구냐고 추궁했다. 요시사다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로쿠히메는 단도를 들고 요시사다를 위협하며 카요의 이름을 고백하게 했다.
며칠 뒤인 만지 3년 8월 14일 (1660년 9월 18일), 요시사다는 로쿠히메의 질투심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쳤다. 그러나 그는 오카야마현 쿠라시키시 텐조에 은신해 있던 것이 발각되어 할복했다. 로쿠히메는 남편의 죽음에도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2. 3. 두 번째 결혼과 살인
간분 2년 1월 1일 (1662년 2월 19일), 로쿠히메는 타키가와 카즈마스의 후손인 이케다가 반가시라 滝川縫殿의 적남 타키가와 기타이부 카즈무네와 재혼했다. 사냥감을 이케다 저택에 전하러 온 기타이부를 로쿠히메가 눈여겨본 것이라고 한다. 부부 사이는 원만했고, 간분 6년 (1666년) 3월에는 아들 요타로가 태어났지만, 2살에 요절했다. 이후 간분 10년 (1670년)에는 딸 요시히메가 태어났다.요시히메가 3살이 되던 해, 로쿠히메는 남편에게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일찍 자라고 주의를 주려고 남편의 방을 찾았다가 기타이부와 노보시(登志)라는 여자가 함께 있는 것을 목격했다. 화가 난 로쿠히메는 토코노마(床の間)의 칼걸이에 있던 작은 칼을 뽑아 남편을 살해했다. 노보시의 비명을 들은 하인들이 이 참극을 알게 되었다.
기타이부의 아버지 누이도노(縫殿)는 입막음을 위해 노보시를 은밀하게 처분하고, 타다아키에게는 "적남 기타이부, 난심 끝에 자살, 로쿠히메를 성으로 데려가 주십시오" 라고 적어 보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이것이 로쿠히메의 질투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기타이부가 죽기 전날, 요곡 연습을 나간 뒤, 몇몇 동료들과 아사히카와 둑을 따라 걷고 있는 것을 여러 사람이 목격했기 때문이다.
2. 4. 이시야마 고텐과 죽음
아버지 이케다 미츠마사는 로쿠히메와 딸 요시히메를 위해 오카야마성 내에 이시야마 고텐(石山御殿)을 지어주었다. 로쿠히메는 "이시야마도노(石山殿)"로 불리며 여생을 보냈고, 1679년 (엔포 7년)에 사망했다. 묘소는 와이다니 이케다가 묘소에 있다.3. 평가 및 영향
로쿠히메는 극심한 질투심과 두 번의 비극적인 결혼 생활로 인해 "오니히메"(鬼姫, 귀신 공주)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당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일본 전통극 등에서 소재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로쿠히메는 첫 남편 이케다 치카에 요시사다의 외출과 귀가를 끈질기게 추궁하고, 여동생과의 대화에도 질투를 느껴 요시사다를 심리적으로 압박했다. 요시사다는 결국 로쿠히메를 피해 도망쳤으나 붙잡혀 할복했다.
두 번째 남편 타키가와 기타다이후 카즈무네는 로쿠히메와 사이가 좋았으나, 로쿠히메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격분하여 살해당했다. 이러한 사건들로 인해 로쿠히메는 "오니히메"라고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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