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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프랑수아 드 콩티 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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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이프랑수아 드 콩티 친왕은 18세기 프랑스의 군인이자 귀족으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폴란드 왕위 계승 문제에 연루되기도 했으며, 퐁파두르 부인과의 갈등, 재무 총감 튀르고와의 대립을 겪었다. 또한 장 자크 루소의 후원자였으며, 루이 15세의 비밀 정보기관의 초대 기관장을 역임했다. 그는 미술품 수집가이기도 했으며, 그의 아들 루이 프랑수아 조제프가 콩티 공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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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프랑수아 드 콩티 친왕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알렉시스 시몬 벨의 루이 프랑수아 드 부르봉 초상화
알렉시스 시몬 벨의 초상화, 1730년경
칭호콩티 공
전체 이름루이 프랑수아 드 부르봉
가문부르봉-콩티 가문
아버지루이 아르망 2세, 콩티 공
어머니루이즈 엘리자베트 드 부르봉
출생일1717년 8월 13일
출생지프랑스 왕국, 파리
사망일1776년 8월 2일
사망지프랑스, 파리
서명
통치
계승콩티 공
재위1727년 5월 4일 – 1776년 8월 2일
이전프랑수아 루이
이후루이 프랑수아 2세
결혼
배우자루이즈 디안 도를레앙 (1732년 결혼, 1736년 사망)
자녀루이 프랑수아 2세, 콩티 공

2. 생애

루이 프랑수아 1세는 부르봉 왕조의 방계인 콩티 가문 출신으로, 파리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 필리프 2세, 오를레앙 공작의 딸 루이즈 디안 도를레앙과 결혼하여 아들 루이 프랑수아 조제프를 낳았으나, 아내는 일찍 사망했다.

그는 군인으로서 경력을 쌓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참전하여 보헤미아, 이탈리아, 독일,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등지에서 활약하며 군사적 명성을 얻었다. 특히 1744년 빌라프랑카 강제 통과와 코니 전투에서의 승리는 그의 군사적 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2] 하지만 프랑스군 총사령관 삭스 원수와의 불화로 1747년 군 지휘권을 내려놓았다.[2]

정치적으로는 폴란드 왕위 계승에 도전하기도 했다. 루이 15세의 개인적인 지지를 받았으나, 프랑스 정부 내의 반대와 복잡한 국제 정세 속에서 결국 왕위에 오르지는 못했다.[5] 이 과정에서 루이 15세는 공식 외교 채널과는 별개로 비밀 지령을 내리기도 했는데, 이는 훗날 스크레 뒤 루아(Secret du Roi, 왕의 비밀)라는 국왕 직속 첩보망으로 발전했으며 루이 프랑수아는 이 조직의 초대 책임자를 맡기도 했다.[5]

한때 루이 15세의 신임을 받았으나, 왕의 애첩이었던 퐁파두르 후작 부인과의 갈등으로 인해 궁정 내 영향력을 잃었다.[5] 이후 정부 정책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7년 전쟁 발발 시 군 지휘를 거부하기도 했다. 그는 특히 재무 총감 튀르고와 대립각을 세웠다.[5]

궁정에서 물러난 후에는 몰타 기사단의 그랑 프리외(Grand Prieur) 자격으로 파리의 탕플 궁전에 거주하며 예술과 문학 후원에 힘썼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문학적 취향을 물려받았으며, 자신의 연인이었던 부플레 백작부인과 함께 살롱을 운영하며 장자크 루소와 같은 문인들을 후원했다. 또한 방대한 미술품 컬렉션을 수집했으며, 그의 컬렉션 중에는 어린 모차르트가 연주하는 모습이 담긴 그림도 있었다. 1760년에는 유명한 부르고뉴 와인 포도밭인 '라 로마네'를 구입하여 자신의 이름을 붙여 오늘날의 로마네 콩티로 만들었다.[2]

루이 프랑수아는 용감하고 유능한 장군이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야심가이자 문학과 예술을 사랑한 후원가로서 다면적인 삶을 살았다. 그의 작위는 아들 루이 프랑수아 조제프가 계승했다.

2. 1. 초기 생애와 결혼

루이 프랑수아 1세 드 부르봉은 파리에서 태어났다.

1731년, 그는 필리프 2세, 오를레앙 공작(국왕 루이 15세의 미성년 기간 동안 프랑스 섭정)의 막내딸인 루이즈 디안 도를레앙과 결혼했다. 루이즈 디안은 루이 프랑수아의 어머니 루이즈 엘리자베스 드 부르봉의 사촌이기도 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루이 14세와 그의 정부(情婦)였던 마담 드 몽테스팡의 딸인 프랑수아즈마리 드 부르봉이었다. 이 결혼은 루이 프랑수아의 어머니인 콩티 과부 공작부인과 장모가 될 오를레앙 과부 공작부인이 주선했다.

부부는 1734년 장남 루이 프랑수아 조제프를 낳았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길지 않았다. 1736년, 루이즈 디안은 이시 성에서 둘째 아이를 사산한 후 급사했다. 아내를 잃은 후 루이 프랑수아는 파리 근교의 라일 아담 성에서 지냈다.

1740년, 그는 국왕 루이 15세에게 그의 둘째 딸 앙리에트 드 프랑스 (1727–1752)와의 결혼을 제안했지만, 국왕은 이를 거절했다.

2. 2. 군사 경력

1741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자, 벨일 공작 휘하의 군인으로 보헤미아에 출진했다.[5] 이후 이탈리아로 전선이 옮겨져 군대를 지휘하게 되었고, 1744년 빌라프랑카 강제 통과[2]와 코니 전투에서의 승리로 군사적 명성을 얻었다.[2]

1745년에는 독일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견제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1746년에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로 전출되었다.[2] 그러나 당시 프랑스군 총사령관이었던 삭스 원수와의 불화로 인해 1747년 군무에서 물러났다.[2]

이후 1756년에 7년 전쟁이 발발했을 때, 루이 프랑수아는 군 지휘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거부했는데, 이는 당시 정부의 행정에 대한 반대 의사를 나타낸 것으로 해석된다.

2. 3. 폴란드 왕위 계승 문제

1747년, 당시 폴란드의 왕이었던 아우구스트 3세의 병세가 악화되자, 왕위 공백을 우려한 일부 폴란드 귀족들은 루이 프랑수아에게 폴란드 왕위를 제안했다.[5] 그는 루이 15세의 개인적인 지지를 얻었으나, 프랑스 정부의 대신들은 다른 입장을 취했다. 당시 프랑스의 왕세자비였던 마리 조제프 드 작스가 아우구스트 3세의 딸이었기 때문에, 대신들은 그녀의 가문인 작센 가문이 폴란드 왕위를 잇기를 원했다.[5]

이러한 의견 대립 속에서 루이 15세는 독자적으로 움직였다. 그는 대신들이 각국 대사들에게 보낸 공식 지침과는 별개로, 비밀리에 자신의 개인적인 관계망을 이용하여 동유럽 주재 프랑스 대사들에게 루이 프랑수아를 지지하라는 상반된 지시를 내렸다.[5] 이처럼 국왕의 비밀 지령을 전달하기 위해 사용된 체계는 훗날 스크레 뒤 루아(Secret du Roi, 왕의 비밀)로 알려진 루이 15세의 사적인 첩보 네트워크로 발전하게 된다.[5]

결과적으로 루이 프랑수아는 폴란드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루이 15세의 신임을 유지했으나, 1755년 왕의 총애를 받던 퐁파두르 후작 부인의 궁정 내 음모로 인해 국왕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5] 관계가 틀어진 후, 1756년 7년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는 라인강 방면 군대의 지휘관직을 제안받았으나 거절했으며, 이후 정부의 정책에 노골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5] 루이 15세는 이런 그를 가리켜 "나의 사촌, 변호사"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는 특히 재무 총감이었던 튀르고를 싫어하여 공공연히 적대했으며, 1775년 디종에서 발생한 민중 봉기에 튀르고가 관여했다는 의심을 품기도 했다.[5]

2. 4. 퐁파두르 부인과의 갈등, 그리고 로마네 콩티

루이 프랑수아는 폴란드 왕국의 왕위를 계승하려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루이 15세의 개인적인 지지를 얻었지만, 왕세자비 마리 조제프 드 작스가 당시 폴란드 왕 아우구스트 3세의 딸이었기 때문에 프랑스 대신들은 작센 가문을 지지했다. 이러한 복잡한 상황 속에서 루이 15세는 대신들의 공식 입장과 다른 지시를 대사들에게 비밀리에 전달하기도 했는데, 이는 훗날 '왕의 비밀'(Secret du Roi)로 알려진 첩보망의 시초가 되었다.[5] 비록 폴란드 왕이 되지는 못했지만, 루이 프랑수아는 한동안 루이 15세의 신임을 유지했다.

그러나 1755년, 왕의 총애를 받던 애첩 퐁파두르 후작 부인과의 갈등과 그녀의 궁정 내 영향력 행사로 인해 루이 15세의 신임을 잃게 되었다. 이로 인해 루이 15세와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1756년 7년 전쟁이 발발했을 때 군 지휘를 맡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루이 프랑수아는 정부 정책에 노골적으로 반대하기 시작했으며, 이 때문에 루이 15세로부터 "나의 사촌, 변호사"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정부와의 관계가 악화된 상황 속에서도 그는 1760년, 당시 '라 로마네'로 불리던 부르고뉴의 유명 포도밭을 사들였다. 그는 이 포도밭에 자신의 이름 '콩티'를 붙여 오늘날 세계 최고가 와인 중 하나로 꼽히는 '로마네 콩티'가 탄생하게 되었다.[2] 일설에는 이 포도밭을 두고 퐁파두르 부인과 경쟁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루이 프랑수아는 이후에도 정부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특히 재무 총감 튀르고에게 강한 적대감을 보였으며, 그의 강한 반정부 성향 때문에 1775년 디종에서 발생한 민중 봉기를 배후에서 지원했다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2. 5. 튀르고와의 대립

1771년, 콩티는 재상 모푸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주도하며 정부에 맞서 ''고등 법원''을 지지했다. 그는 특히 재무 총감 튀르고에게 강한 적대감을 보였으며, 1775년 디종에서 발생한 봉기를 튀르고가 배후에서 지원했다고 의심했다. 한편, 콩티 자신 역시 강한 반정부 성향 때문에 이 봉기를 도왔다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2. 6. 말년과 유산

루이 15세의 신임을 얻었으나, 1755년 왕의 애첩 퐁파두르 후작 부인과의 관계로 인해 신임을 잃었다. 1756년 7년 전쟁 발발 시 군 지휘를 거부하며 정부 정책에 반대 의사를 표했다. 특히 튀르고 남작을 싫어하여 적대했으며, 1775년 디종에서 일어난 반란에 튀르고가 관여했다고 의심하기도 했다. 1760년에는 유명한 로마네 콩티 포도밭을 매입하였다.

궁정에서 물러난 후, 몰타 기사단의 그랑 프리외(Grand Prieur) 자격으로 파리 르 마레 지구의 탕플 궁전에 거주하며 은퇴 생활을 보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문학적 취향을 물려받았으며, 용감하고 유능한 장군이자 군사학 연구에도 힘썼다. 또한 루이 15세의 비밀 외교 기관인 스크레 뒤 루아(Secret du Roi)의 초대 책임자였다.[5]

그의 연인이었던 부플레 백작부인은 탕플 궁전에서 살롱을 운영하며 많은 문인들과 교류했고, 이를 통해 루이 프랑수아는 장자크 루소의 후원자가 되었다.

루이 프랑수아는 방대하고 유명한 미술품 컬렉션을 모았으며, 생애 마지막 20년간 수집한 작품들을 탕플 궁전의 갤러리에 보관했다. 이 컬렉션은 1777년 경매를 통해 매각되었으며, 이는 당시 파리 미술 시장에 큰 영향을 주었다. 컬렉션에는 미셸 바르텔레미 올리비에가 그린 '탕플 궁전에서의 다과회'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 그림에는 어린 모차르트가 클라비코드를 연주하는 모습이 담겨 있으며 현재 베르사유 궁전에 소장되어 있다.

그의 아들 루이 프랑수아 조제프(1734–1814)가 마지막 콩티 공작위를 계승했다.

3. 가족 관계

1731년, 필리프 2세 도를레앙 공작의 막내딸이자 어머니의 사촌인 루이즈 디안과 결혼했다.[5] 이 결혼은 그의 어머니 콩티 공작부인과 장모 오를레앙 공작부인이 주선했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짧았으며, 1736년 아내 루이즈 디안은 이시 성에서 둘째 아이를 사산하고 사망했다. 이후 그는 파리 근처 라일 아담 성에 머물렀다.

1740년에는 루이 15세의 둘째 딸 앙리에트 공주와의 결혼을 제안했으나 국왕에게 거절당했다.

아내 루이즈 디안과의 사이에서 다음 두 자녀를 두었다.

이름초상화생애비고
루이 프랑수아 조제프
콩티 공자
1734년 9월 1일 –
1814년 3월 13일
파리에서 태어났으며, 콩티 공자위를 계승하기 전에는 "라 마르슈 백작"으로 알려졌다. 프란체스코 3세 데스테와 샤를로트 아글레 드 오를레앙의 딸인 그의 사촌 마리아 포르투나타 데스테와 결혼했으며, 적자는 없었다. 79세의 나이로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사망했다.
X 드 부르봉[3]
1736년 9월 26일이시 성에서 태어났으며, 사산되었고, 어머니는 출산 후 사망했다.


4. 문화적 유산

루이 프랑수아는 아버지로부터 문학적 취향을 물려받았으며, 용감하고 유능한 장군이었을 뿐만 아니라 군사학 연구에도 힘썼다. 그는 궁정에서 추방된 후 몰타 기사단의 그랑 프리어로서 파리 르 마레 지구의 탕플 궁전에 거주하며 은퇴 생활을 보냈다.

그의 연인이었던 교양 있는 부플레 백작부인은 파리에 있는 그의 저택에서 살롱을 주재했으며, 이곳에는 많은 문인들이 드나들었다. 루이 프랑수아는 부플레 백작부인을 통해 장자크 루소의 후원자가 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생애 마지막 20년 동안 방대하고 유명한 미술품 컬렉션을 모아 탕플 궁전의 특별 갤러리에 보관했다. 이 컬렉션에는 미셸 바르텔레미 올리비에가 1764년에 그린 '탕플 궁전의 거울의 방에서 열린 영국식 다과회'라는 작품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 그림에는 클라비코드 앞에서 연주하는 어린 모차르트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이 그림은 현재 베르사유 궁전에 소장되어 있다. 그의 컬렉션은 1777년 4월부터 6월 사이에 열린 경매를 통해 흩어졌으며, 이 경매는 이후 10년간 파리 미술 시장에 영향을 미쳤다.

1760년에는 퐁파두르 후작 부인과의 경쟁 끝에 유명한 '로마네 콩티' 포도밭을 손에 넣기도 했다.

참조

[1] 간행물 Les six Filles de Louis XV Revue des Deux Mondes 1874
[2] 웹사이트 Wine Doctor: Côte de Nuits part 3 http://www.thewinedo[...] 2009-12-02
[3] 문서 X in place of the name of a child means that the child had no name, in this case because the child died at birth.
[4] 서적 Genealogie ascendante jusqu'au quatrieme degre inclusivement de tous les Rois et Princes de maisons souveraines de l'Europe actuellement vivans https://books.google[...] Frederic Guillaume Birnstiel
[5] 웹사이트 Wine Doctor: Côte de Nuits part 3 http://www.thewinedo[...] 2009-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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