룩셈부르크 공녀 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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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룩셈부르크 공녀 알릭스는 룩셈부르크 여대공 샤를로트와 펠릭스 드 부르봉-파르마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딸이다. 1950년 앙투안 드 라인 공자와 결혼하여 7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2019년 8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녀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가족과 함께 룩셈부르크를 떠나 망명 생활을 했으며, 룩셈부르크 우표에 등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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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셈부르크 공녀 알릭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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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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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이름 | 알릭스 마리 안네 안토니아 샤를로트 가브리엘 |
칭호 | 리뉴 공비 |
출생일 | 1929년 8월 24일 |
출생지 | 룩셈부르크, 콜마르=베르크, 베르크 성 |
사망일 | 2019년 2월 11일 |
사망 장소 | 벨기에, 에노 주, 블뢰유 성 |
아버지 | 펠릭스 드 부르봉=파르므 |
어머니 | 샤를로트 드 룩셈부르크 |
가문 | 나사우=바일부르크 가문 (공식) 부르봉=파르므 가문 (부계) |
배우자 | 앙투안 드 리뉴 (1950년 결혼, 2005년 사별) |
자녀 | 미셸 드 리뉴 워티에 공자 안느=마리 공녀 크리스틴 공녀 소피 공녀 앙투안 공자 욜란드 공녀 |
2. 생애
룩셈부르크 여대공 샤를로트와 부군 펠릭스 공 사이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인 1931년에는 룩셈부르크 우표 도안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룩셈부르크 대공가가 나치 독일의 침공을 피해 망명길에 오르면서 포르투갈과 북아메리카 등지에서 지냈다.
전후인 1950년 8월 17일, 룩셈부르크 시에서 벨기에 귀족인 앙투안 드 리뉴 공자와 결혼하여 슬하에 7명의 자녀를 두었다. 남편 앙투안은 자녀가 없던 형의 뒤를 이어 제13대 리뉴 공작 작위를 계승했다.
알릭스 공주가 과거에 사용했던 티아라는 2013년 9월 결혼한 종손 펠릭스 대공자의 신부 클레어 왕자비가 착용하여 주목받았다.
2019년 2월 11일, 벨기에 에노주 벨뢰유에 있는 리뉴 가문의 저택에서 향년 89세로 사망했다.[5]
2. 1. 유년 시절과 제2차 세계 대전
룩셈부르크 여대공 샤를로트와 그의 남편이자 파르마 공작 로베르토 1세의 아들인 펠릭스 사이에서 막내딸로 태어났다. 풀네임은 Alix Marie Anne Antonia Charlotte Gabrielle|fra이다. 1931년에 발행된 룩셈부르크 우표에는 아직 어린 알릭스의 모습이 모델로 등장한다.제2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40년 5월 10일, 룩셈부르크 대공국이 독일의 침공을 받자 룩셈부르크 대공가는 1940년 6월 포르투갈 영사 아리스티데스 드 소자 멘데스로부터 통과 비자를 받아 포르투갈로 피난했다. 그들은 1940년 6월 23일 Vilar Formoso|por에 도착했다. 코임브라와 리스본을 거쳐 가족들은 먼저 포르투갈 주재 룩셈부르크 명예 영사였던 마누엘 에스피리투 산투 소유의 Casa de Santa Maria|por에서 카스카이스에 머물렀다. 7월까지 그들은 Monte Estoril|por로 이사하여 Chalet Posser de Andrade|por에 머물렀다. 1940년 7월 10일, 알릭스 공녀는 아버지인 펠릭스 공과 그녀의 형제들, 장 대공세자, 엘리자베트 공주, 마리 아델라이드 공주, 마리 가브리엘 공주와 샤를르 공자, 유모 쥐스틴 레나르, 운전사 외젠 니클로와 그의 아내 조제핀과 함께 뉴욕으로 향하는 ''S.S. 트렌턴''호에 탑승했다.[2] 그녀는 자매들과 함께 퀘벡 시 근처의 Collège Jésus-Marie de Sillery|fra에서 공부했다.[3]
2. 2. 결혼과 자녀

1950년 8월 17일, 룩셈부르크 시에서 앙투안 공자(1925년 3월 8일 – 2005년 8월 21일)와 결혼했다.[1] 앙투안 공자는 제11대 리뉴 공작 외젠 2세의 차남으로, 자녀가 없던 형 보두앵(제12대 리뉴 공작, 1918년–1985년)이 사망한 후 제13대 리뉴 공작 작위를 계승했다.
알릭스 공주와 앙투안 공작은 슬하에 7명의 자녀를 두었다.
2. 3. 사망
알릭스 공주는 2019년 2월 11일 에노주 벨뢰유에 있는 리뉴 공작의 저택인 벨뢰유 성에서 8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5] 장례식은 룩셈부르크 시의 Mëchelskierch 교회에서 거행되었다.[4]대공실은 당시 성명을 통해 "장 대공, 대공 전하, 대공비 전하는 오늘, 리뉴 공녀이자 룩셈부르크 공녀인 알릭스 공주 전하의 별세를 매우 슬픈 마음으로 알립니다."라고 밝혔다.[4]
3. 가계
부르봉파르마의 펠릭스
로베르토 1세
카를로 3세
루이즈 마리 테레즈 다르투아
포르투갈의 마리아 안토니아
미겔 1세
뢰벤슈타인베르트하임로젠베르크의 아델하이트
샤를로트
기욤 4세
아돌프
안할트데사우의 아델하이트마리
포르투갈의 마리 안
미겔 1세
뢰벤슈타인베르트하임로젠베르크의 아델하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