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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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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치 독일은 "나치 독일" 또는 "제3제국"으로 불리며,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을 지배한 전체주의 국가이다.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은 권력을 장악한 후, 반유대주의와 인종주의를 바탕으로 한 정책을 펼쳤다. 이들은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주장하며, 유대인, 로마인, 동성애자, 장애인 등 특정 집단을 탄압하고 학살했다. 나치 독일은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켜 유럽을 휩쓸었고, 홀로코스트를 통해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1945년 독일의 패망과 함께 나치 정권은 붕괴되었고, 전후 독일은 탈나치화 과정을 거쳐 민주주의 국가로 재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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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지도 및 위치 정보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최대 영토 확장 (1942년 말)
1942년 후반 제2차 세계 대전 도중 나치 독일의 최대 강역
1944년 대독일국 나치당 행정 구역
1944년 나치 독일의 행정 구역(붉은색 선이 국경)
기본 정보
공식 명칭독일국 (1933년–1943년)
대독일국 (1943년–1945년)
현지 명칭(1933년–1943년)
(1943년–1945년)
약칭독일
존속 기간1933년 1월 30일 – 1945년 5월 23일
정치 체제나치당 일당제 파시스트 전체주의 국가
수도베를린
최대 도시수도와 동일
공용어독일어
종교54% 개신교
40% 가톨릭
3.5%
1.5% 무종교
1% 기타
화폐라이히스마르크 (ℛℳ)
국가"독일의 노래" ("")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 ("")
표어(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하나의 지도자)
국기 및 국장
나치 독일의 국기
국기 (1935–1945)
나치 독일의 국장
국장 (1935–1945)
주요 사건
건국나치당 권력 장악 (1933년 1월 30일)
주요 사건 1전권 위임법 (1933년 3월 23일)
주요 사건 2뉘른베르크법 (1935년 9월 15일)
주요 사건 3안슐루스(1938년 3월 12-13일)
주요 사건 4폴란드 침공 (1939년 9월 1일)
주요 사건 5히틀러 사망 (1945년 4월 30일)
주요 사건 6베를린 함락 (1945년 5월 2일)
주요 사건 7독일 항복 (1945년 5월 8일)
주요 사건 8플렌스부르크 정부 붕괴 (1945년 5월 23일)
멸망베를린 선언 (1945년 6월 5일)
국가 원수
국가 원수 1파울 폰 힌덴부르크 (1933년–1934년)
국가 원수 2아돌프 히틀러 (1934년–1945년)
국가 원수 3카를 되니츠 (1945년)
정부 수반
정부 수반 1아돌프 히틀러 (1933년–1945년)
정부 수반 2요제프 괴벨스 (1945년 4월 30일–5월 1일)
정부 수반 3루츠 그라프 슈베린 폰 크로지크 (1945년 5월 2일–5월 23일)
입법부
입법부국가의회
상원국가상원 (1934년 해산)
면적 및 인구
면적 (1939년)633,786 km²
면적 (1940년)823,505 km²
인구 (1939년)79,375,281 명
인구 (1940년)109,518,183 명
현재 국가
현재 국가독일
폴란드
러시아
오스트리아
체코
슬로바키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프랑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벨기에
슬로베니아
덴마크
노르웨이

2. 명칭

나치당 집권 시기의 독일은 일반적으로 "나치 독일" 또는 "제3제국"으로 불렸다. "천년 제국"(Tausendjähriges Reichde)이라는 용어도 종종 사용되었다.[1] "제3제국"이라는 단어는 아서 모엘러 반 덴 브룩이 1923년에 출판한 《제3제국》(Das Dritte Reichde)에서 처음 사용되었는데,[2] 이 책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800/962년~1806년)을 "제1제국", 독일 제국(1871년~1918년)을 "제2제국"으로 칭하며 나치 독일이 이들의 뒤를 이을 것이라고 주장했다.[3]

1938년 오스트리아 합병 이후, 독일 민족주의 의식이 고조되면서 민간에서 "Grossdeutschlandde(대독일)"과 같은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했고, 대독일국 사단 등 부대 명칭에도 사용되었다. 1943년 6월 24일 총통 관저 장관 한스 하인리히 라머스는 공문서에서 "Grossdeutsches Reichde(그로스도이체스 라이히, 대독일국)"이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사용했다.[4] 같은 해 10월 24일 이후에는 우표에도 이것이 인쇄되는 등 사실상의 국호로 취급되었지만, 공식적인 개칭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에서 발행된 스메타나가 그려진 우표(1944년).
「대독일국」이라는 국호가 사용되고 있다.


"나치"라는 명칭은 본래 나치당의 반대자들이 사용하던 멸칭이었으나, 정권 장악 전부터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다.[5] 영어권에서는 나치 정권 이후의 독일을 "Nazi Germany"라고 불렀다. 일본에서도 1930년대 초반부터 "나치스 독일"과 같은 표현이 사용되었다.[6]

신성 로마 제국독일 제국을 계승하는 "이상 국가"라는 의미에서 "제3제국"(Drittes Reichde)이라는 명칭도 선전에 사용되었지만, 나치에 대한 비판이나 풍자에도 자주 이용되었기 때문에, 1939년 여름 이후 아돌프 히틀러요제프 괴벨스 선전부 장관은 이 용어의 사용을 자제하도록 했다. 그러나 완전히 금지된 것은 아니어서 이후에도 "제3제국"이라는 명칭이 사용되는 경우가 있었다.

재통일 이후 독일에서는 Nazizeitde(나치 시대), Nazi-Deutschlandde(나치 독일)이라는 용어도 사용되지만,[7] 분단 시대 서독에서도 "NSDAP" 등의 호칭이 일반적이었고, 나치스라는 명칭은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8] Nationalsozialismus, 또는 그것을 줄인 "NS"가 나치스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9]

3. 역사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막대한 배상금을 물게 되었고, 이는 경제 침체의 한 원인이었다. 정부는 화폐 발행으로 배상금과 전쟁 부채를 갚으려 했으나, 이는 초인플레이션을 야기하여 물가 폭등, 경제 혼란, 식량 폭동을 초래했다.[1] 1923년 1월, 독일 정부가 배상금 지불을 중단하자 프랑스군은 루르 지역의 독일 공업 지대를 점령하여 사회적 혼란을 야기했다.[2]

1929년 미국 주식 시장 대폭락으로 독일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다.[9] 수백만 명이 실직하고 여러 주요 은행이 파산했다.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는 이 위기를 이용하여 경제를 강화하고 일자리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하며 지지를 얻으려 했다.[10] 많은 유권자들은 나치당이 질서를 회복하고 독일의 국제적 명성을 개선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1932년 연방 선거에서 나치당은 제국 의회에서 37.4%의 득표율로 230석을 차지하며 최대 정당이 되었다.[11]

1933년 1월 30일,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아돌프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했다. 이는 '마흐테르그라이풍(권력 장악)으로 알려져 있다.[1] 히틀러는 총리로 임명된 직후, 대통령령과 전권위임법을 통해 헌법을 사실상 정지시키고 반대 정당들을 금지했다. 독일 법률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장검의 밤 사건을 통해 돌격대를 숙청하는 등 정치적 적대 세력을 제거하여 독재 체제를 강화했다.

1934년 8월 2일,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자 히틀러는 총리직과 대통령직을 통합하고, '총통 겸 총리'라는 직함으로 국가 원수의 권한을 흡수하여 독일의 독재자가 되었다.

1933년 2월 초,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을 위반하는 재무장을 비밀리에 시작했다. 1935년 독일 재군비 선언을 통해 재무장을 시작했다.[2] 1936년에는 라인란트에 군대를 진주시켜 베르사유 조약을 위반했다.[3] 같은 해 스페인 내전에 개입하여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을 지원했다.[4]

1938년에는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 리투아니아클라이페다(메멜) 할양을 요구하여 관철했다. 같은 해 9월에는 체코슬로바키아주데텐란트 할양을 요구했다. 영국프랑스는 반발했으나, 이탈리아 베니토 무솔리니의 제안으로 뮌헨 회담이 열렸고, 히틀러는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타협을 이끌어냈다.

1939년 3월, 히틀러는 폴란드 회랑단치히 자유시 반환을 요구했고, 영국은 폴란드를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히틀러는 영국이 행동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 9월 침공을 준비했다.[5] 독일은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을 체결, 폴란드와 발트 3국을 독일과 소련의 영향권으로 나누는 비밀 의정서에 합의했다.[7]

제2차 세계 대전 중 유럽에서 독일과 추축국의 영토 (클릭하면 전체 크기의 동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


추축국이 최절정에 달했을 때의 유럽


1939년 9월 1일, 독일은 폴란드 침공을 시작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8] 1940년, 독일은 덴마크, 노르웨이를 점령하고, 프랑스저지대 국가들을 공격했다. 프랑스는 6월 22일 항복했다.[9] 이후 독일은 영국 본토 항공전을 벌였으나 영국 왕립 공군을 격파하는 데 실패, 영국 침공을 연기했다.[10]

1941년, 독일은 유고슬라비아그리스를 침공했다.[11]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을 통해 소비에트 연방을 공격했다.[12]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 이후 독일은 미국에 선전포고했다.[13]

1942년, 독일은 청색 작전을 통해 캅카스 지역 유전을 목표로 공세를 펼쳤으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했다.[14] 1943년, 쿠르스크 전투 이후 독일은 동부 전선에서 공세를 펼치지 못했다.

1944년 6월,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감행했고, 독일은 양면 전선에 직면했다. 1945년 4월, 베를린 전투가 시작되었고, 4월 30일 히틀러는 자살했다.[15] 5월 8일, 독일은 연합국에 항복하면서 나치 독일은 붕괴했다.

3. 1. 배경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고, 이는 경제 침체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독일 정부는 배상금과 전쟁 부채를 갚기 위해 화폐를 발행했지만, 이는 초인플레이션을 야기하여 물가 폭등, 경제 혼란, 그리고 식량 폭동을 초래했다.[1] 1923년 1월, 독일 정부가 배상금 지불을 중단하자 프랑스군은 루르 지역의 독일 공업 지대를 점령했고, 이는 광범위한 사회적 혼란을 야기했다.[2]

흔히 나치당으로 알려진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은 1920년에 창당되었다. 이는 1년 전에 결성된 독일 노동자당의 후신이었으며, 당시 활동하던 여러 극우 정당 중 하나였다.[3] 나치당의 강령에는 바이마르 공화국 파괴, 베르사유 조약 거부, 극단적인 반유대주의, 그리고 반볼셰비즘이 포함되어 있었다.[4] 그들은 강력한 중앙 정부, 게르만 민족을 위한 ''레벤스라움(생활 공간)'' 확대, 인종에 기반한 국가 공동체 형성, 그리고 유대인의 시민권 박탈을 포함한 적극적인 인종 청소를 약속했다.[5]

나치는 푈키셰 운동에 기반한 국가 및 문화적 쇄신을 제안했다.[6] 나치당, 특히 그들의 준군사 조직인 돌격대(SA)는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물리적 폭력을 사용하여 경쟁 조직의 회의를 방해하고 그 구성원뿐만 아니라 거리에서 유대인들을 공격했다.[7] 이러한 극우 무장 단체는 바이에른에서 흔했으며, 구스타프 리터 폰 카르의 극우 주 정부에 의해 용인되었다.[8]

1929년 미국 주식 시장의 대폭락으로 독일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다.[9] 수백만 명이 실직했고 여러 주요 은행이 파산했다.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는 이러한 위기를 이용하여 당에 대한 지지를 얻으려고 했다. 그들은 경제를 강화하고 일자리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10] 많은 유권자들은 나치당이 질서를 회복하고 사회적 혼란을 진압하며 독일의 국제적 명성을 개선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1932년 연방 선거에서 나치당은 제국 의회에서 37.4%의 득표율로 230석을 차지하며 최대 정당이 되었다.[11]

3. 2. 나치당의 권력 장악

1933년 1월 30일,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아돌프 히틀러총리로 임명했다. 이는 '마흐테르그라이풍'(Machtergreifungde, 권력 장악)으로 알려져 있다.[1]

1933년 2월 27일 밤, 국가의회 의사당 건물에 화재가 발생했다. 나치당은 네덜란드 공산주의자 마리누스 반 데르 루브를 방화범으로 지목했고, 히틀러는 이를 공산주의 봉기의 시작이라고 주장했다. 1933년 2월 28일, 〈국가의회 화재에 관한 법률〉이 통과되어 집회와 언론의 자유를 포함한 시민의 자유가 박탈되었고, 경찰은 기소 없이 사람들을 무기한 구금할 수 있게 되었다. 나치당의 돌격대는 전국적으로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했고, 독일 공산당원 4천 명이 체포되었다.[2]

1933년 3월 23일, 바이마르 헌법을 개정한 〈전권 위임법〉이 국가의회에서 통과되었다. 이 법은 히틀러와 그의 정부가 대통령이나 의회의 동의 없이 법률을 통과시킬 수 있게 했다.[3] 나치당은 공산당 의원들의 출입을 금지하고, 사회민주당 의원들의 참석을 저지했다.[4]

1933년 5월 10일, 정부는 사회민주당의 자산을 압류했고, 6월 22일에는 당을 불법화했다.[5] 다른 정당들도 해산되었고, 1933년 7월 14일 〈정당 결성에 대한 법률〉이 통과되면서 독일은 일당제 국가가 되었고, 나치당만이 유일한 합법 정당이 되었다.[6] 이후 1933년, 1936년, 1938년에 실시된 선거는 나치당의 통제 하에 있었다.[7]

모든 시민 단체의 지도부는 나치당원이나 동조자로 대체되었고, 나치당에 합병되거나 해체되었다.[8] 1933년 5월 1일, 나치 정권은 "전국 노동의 날"을 선포하고 노동조합 대표들을 베를린으로 초대했다. 다음 날, 돌격대는 전국의 노동조합 사무실을 파괴했고, 모든 노동조합은 해체되었으며 지도자들은 체포되었다.[9] 〈전문 공무원 복직을 위한 법률〉로 유대인이나 나치당에 대한 헌신이 의심스러운 공무원들은 해고되었다.[10]

나치당은 흑적금 삼색기를 포함한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의 상징을 폐지하고, 이전 독일 제국의 흑백적 삼색기를 복원했다. 1935년 9월, 하켄크로이츠 국기가 유일한 국기가 되었고,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Horst-Wessel-Liedde)가 두 번째 국가가 되었다.[11]

돌격대 지도부는 더 큰 권력을 요구했고, 히틀러는 슈츠슈타펠(Schutzstaffelde)과 게슈타포(Gestapode)를 이용해 돌격대 지도부 전체를 숙청했다.[12] 에른스트 룀을 포함한 돌격대 지도부와 그레고어 슈트라서, 쿠르트 폰 슐라이허 등의 정치적 반대파가 체포되어 총살되었다.[13] 장검의 밤(Nacht der langen Messerde)으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1934년 6월 30일부터 7월 2일까지 최대 200명이 사망했다.[14]

1934년 8월 2일, 힌덴부르크가 사망했다. 〈독일국의 국가원수에 관한 법률〉에 따라 대통령 직책이 폐지되고 그 권한이 총리와 합쳐졌다.[15] 히틀러는 국가원수이자 정부수반이 되었고, 지도자 겸 국가수상(Führer und Reichskanzlerde)으로 명명되었다.[16] 독일은 히틀러를 지도자로 한 전체주의 국가가 되었고,[17] 군인들은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했다.[18] 1934년 8월 19일, 대통령직과 총리직의 통합은 국민투표에서 90%의 찬성을 얻었다.[19]

요제프 괴벨스, 대중계몽선전국가부 장관.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바이마르 시대의 갈등이 끝났다는 것에 안도했고, 요제프 괴벨스대중계몽선전국가부의 선전에 휩쓸렸다.[20] 나치당은 혁명 초기 활동, 법적 매커니즘 조작, 경찰권 동원으로 권력을 공고화했다.[21] 최초의 나치 강제 수용소는 1933년 다하우에 지어졌다.[22]

1933년 4월부터 유대인의 지위와 권리를 재정의하는 조치가 시행되었고, 1935년 뉘른베르크법으로 유대인의 기본권이 박탈되었다.[23] 나치당은 유대인의 재산, 결혼권, 직업 선택권을 빼앗았고, 유대인을 독일 사회에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선언했다.[24]

3. 3. 권력 강화

1933년 히틀러는 독일 총리로 임명된 직후, 대통령령과 전권위임법을 통해 헌법을 사실상 정지시키고 반대 정당들을 금지했다. 독일 법률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장검의 밤 사건을 통해 돌격대를 숙청하는 등 정치적 적대 세력을 제거하여 독재 체제를 강화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1934년 '''총통 및 제국 총리'''라는 직함으로 독일의 국가 원수가 되었다.


1934년 8월 2일,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자 히틀러는 총리직과 대통령직을 통합하고, '총통 겸 총리'라는 직함으로 국가 원수의 권한을 흡수하여 독일의 독재자가 되었다. 국가 원수가 된 히틀러의 지위는 일본어로 총통이라 불린다. 이후 국가방위군은 최고사령관이나 국가가 아닌 히틀러 개인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되었다.[11]

1934년 6월 30일부터 7월 2일까지 돌격대 지도부를 숙청한 장검의 밤 사건으로 최대 200명이 사망했다.[9] 히틀러는 돌격대와 게슈타포를 이용해 SA 지도부 전체를 숙청했다.[9]

1933년 2월 초,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을 위반하는 재무장을 비밀리에 시작했다. 1933년 5월 17일, 히틀러는 세계 평화에 대한 열망을 밝히고, 다른 유럽 국가들도 군축에 동의한다면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군축 제안을 받아들였다.[13] 그러나 다른 유럽 국가들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자, 10월에 독일은 세계 군비 감축 회의와 국제연맹에서 탈퇴했다.[13] 11월에 실시된 1933년 독일 국민투표에서 유권자의 95%가 독일의 국제 연맹 탈퇴를 지지했다.[13]

1935년 3월, 히틀러는 공군을 창설하고 국가방위군을 55만 명까지 증강할 것이라고 발표했다.[14] 같은 해 6월, 영국-독일 해군 협정을 통해 영국은 독일의 함선 건조에 동의했다.[14]

1936년 3월 7일, 히틀러는 프랑스-소련 상호원조조약을 근거로 베르사유 조약을 위반하여 라인란트 비무장지대에 3천여 명의 병력을 진군시켰다.[15]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전쟁의 위험을 감수할 만큼의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여 대응하지 않았다.[15]

3. 4. 군비 확장과 대외 팽창

1933년 2월 초, 히틀러는 재무장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처음에는 비밀리에 진행해야 했다. 이는 베르사유 조약을 위반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1933년 5월 17일, 히틀러는 국가의회에서 세계 평화에 대한 열망을 촉구하는 연설을 했다. 그는 유럽의 다른 국가들이 모두 동의한다면,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제안한 군사적 군축을 수락할 것이라고 발표했다.[1] 그러나 다른 유럽 강대국들이 루스벨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자, 히틀러는 10월부터 독일을 세계 군비 감축 회의와 국제 연맹에서 탈퇴시켰다. 그는 군축 조항이 독일에게만 적용된다면 불공평하다고 주장했다.[2] 같은 해 11월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유권자의 95%가 독일의 국제 연맹 탈퇴에 찬성했다.[3]

1934년, 히틀러는 군 사령관들에게 독일 국민들이 더 많은 생활 공간과 자원을 필요로 하므로 더 많은 영토를 얻을 수 있는 정복 전쟁을 시작해야 하며, 1942년까지 재무장을 완료해야 한다고 말했다.[4]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15년 동안 국제 연맹의 감독을 받았던 자를란트는 1935년 1월 국민투표를 통해 독일의 일부가 되었다.[5] 1935년 3월, 히틀러는 공군을 창설하고 국가방위군을 55만 명까지 증강할 것이라고 발표했으며,[6] 1935년 6월 영국-독일 해군 협정을 통해 영국이 독일의 함선 건조에 동의하도록 설득했다.[7]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에 대해 영국과 프랑스 정부가 온건한 항의만 지속하자, 1936년 3월 7일 히틀러는 프랑스-소련 상호원조조약을 근거로 베르사유 조약을 위반하여 라인란트 비무장지대에 3천여 명의 병력을 진군시키라고 명령했다.[8] 라인란트는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비무장지대였지만 독일의 일부였기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히틀러의 조약 위반에 대응하여 전쟁을 감수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다.[9] 1932년 치러진 일당제 선거에서 나치당은 98.9%의 지지를 받았다.[9] 1936년 히틀러는 일본과 방공 협정을, 무솔리니의 이탈리아와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으며, 무솔리니는 이를 "로마-베를린 추축"이라고 홍보했다.[10]

히틀러는 1936년 7월 시작된 스페인 내전에서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의 국민파를 지원하기 위해 군수품을 포함한 물적 자원을 제공했다. 1937년 게르니카 폭격으로 유명한 콘도르 군단은 독일이 스페인 내전에 파견한 의용군으로, 다양한 항공기와 승무원, 전차 부대가 포함되었다.[11] 국민파는 1939년 내전에서 승리하여 나치 독일의 비공식 동맹국이 되었다.[12]

1938년 2월,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의 총리 쿠르트 슈슈니크에게 독일의 국경을 확보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슈슈니크는 오스트리아의 독립 유지에 관한 국민투표를 3월 13일에 실시할 것이라고 발표했지만, 3월 11일 히틀러는 그에게 최후통첩을 보내 모든 권력을 오스트리아 나치당에게 넘기지 않으면 침공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독일군은 다음 날인 3월 12일 오스트리아에 입성했고, 오스트리아 국민들은 열렬히 환영했다.[13]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주데텐란트는 당시 상당수의 독일인들의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지역이었으며, 주데텐 독일인당 내의 분리주의 단체의 압력을 받은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독일에 이 지역의 경제적 양보를 제안했다.[14] 히틀러는 주데텐란트를 독일에 포함시키는 것을 넘어 체코슬로바키아를 완전히 파괴하기로 결정했으며,[15] 나치당은 침공에 대한 지지를 얻기 위해 선전 캠페인을 벌였다.[16]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는 아직 전쟁을 할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히틀러의 계획에 반대했다.[17]

이러한 히틀러의 계획으로 인해 영국, 체코슬로바키아, 그리고 이들의 동맹국인 프랑스가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총리 네빌 체임벌린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일련의 회의를 주선했고, 그 결과 1938년 9월 29일에 뮌헨 협정이 체결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주데텐란트가 독일에 합병되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고, 체임벌린은 런던에 도착해 환호를 받으며 이 협정이 "우리 시대의 평화"를 가져왔다고 발표했다.[18]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의 외환 자산은 나치에 의해 모두 압수되었고, 금속 자원과 무기, 항공기와 같은 생산 제품의 비축물도 압수되어 독일로 운송되었다. 헤르만 괴링 제국 군수품(de)은 두 국가의 철강과 석탄 생산 시설을 통제했다.[19]

1934년 1월, 독일은 폴란드와의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다.[20] 그 이후, 1939년 3월 히틀러는 단치히 자유시와 독일 본토와 동프로이센을 분리하는 폴란드 회랑 지역을 독일에 반환할 것을 요구했으며, 이에 영국은 폴란드가 공격을 받으면 폴란드를 지원하여 참전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히틀러는 영국이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1939년 9월에 침공하기 위해 준비할 것을 명령했다.[21] 5월 23일, 히틀러는 장군들에게 폴란드 회랑을 점령할 뿐만 아니라 폴란드를 희생하여 독일 영토를 동쪽으로 크게 확장한다는 전반적인 계획을 설명했으며, 이번에는 오스트리아나 체코슬로바키아와 달리 상당한 저항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22]

독일은 이탈리아와의 동맹을 재확인하고 덴마크, 에스토니아, 라트비아와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으며 루마니아, 노르웨이, 스웨덴과 무역 관계를 공식화했다.[23]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는 소련과의 협상을 통해 1939년 8월 독일-소비에트 연방 간의 불가침 조약인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을 체결했으며,[24] 조약에는 폴란드와 발트 3국을 독일과 소련의 영향권으로 나누는 기밀 의정서가 포함되었다.[25]

3. 5. 제2차 세계 대전

1933년 독일은 국제 연맹에서 탈퇴했다.[1] 1935년 독일 재군비 선언을 통해 재무장을 시작했다.[2] 1936년에는 라인란트에 군대를 진주시켜 베르사유 조약을 위반했다.[3] 같은 해 스페인 내전에 개입하여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을 지원했다.[4]

1939년 3월, 히틀러는 폴란드 회랑단치히 자유시 반환을 요구했고, 영국은 폴란드를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히틀러는 영국이 행동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 9월 침공을 준비했다.[5] 5월 23일, 히틀러는 폴란드 회랑 점령과 더불어 폴란드를 희생시켜 독일 영토를 동쪽으로 확장한다는 계획을 밝혔다.[6] 독일은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을 체결, 폴란드와 발트 3국을 독일과 소련의 영향권으로 나누는 비밀 의정서에 합의했다.[7]

1939년 9월 1일, 독일은 폴란드 침공을 시작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8] 1940년, 독일은 덴마크, 노르웨이를 점령하고, 프랑스저지대 국가들을 공격했다. 프랑스는 6월 22일 항복했다.[9] 이후 독일은 영국 본토 항공전을 벌였으나 영국 왕립 공군을 격파하는 데 실패, 영국 침공을 연기했다.[10]

1941년, 독일은 유고슬라비아그리스를 침공했다.[11]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을 통해 소비에트 연방을 공격했다.[12]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 이후 독일은 미국에 선전포고했다.[13]

1942년, 독일은 청색 작전을 통해 캅카스 지역 유전을 목표로 공세를 펼쳤으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했다.[14] 1943년, 쿠르스크 전투 이후 독일은 동부 전선에서 공세를 펼치지 못했다.

1944년 6월,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감행했고, 독일은 양면 전선에 직면했다. 1945년 4월, 베를린 전투가 시작되었고, 4월 30일 히틀러는 자살했다.[15] 5월 8일, 독일은 연합국에 항복했다.

3. 6. 붕괴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이 대패하면서,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1944년에는 독일에 대한 대규모 폭격이 강화되었고, 연합군의 반격으로 독일의 점령 지역은 점차 축소되었다. 프랑스에 대한 연합군의 침공 이후, 독일은 완전히 수세에 몰렸고, 영토는 계속해서 연합군에게 점령당했다.

히틀러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저항할 것을 명령하여, 전쟁 말기까지 불필요한 희생과 기반 시설 파괴를 초래했다. 그는 법무장관 오토 게오르크 티라크를 통해 저항하는 사람들을 군법회의에 회부하도록 명령하여 수천 명이 처형되었다. 많은 점령지 주민들은 연합군에 항복했지만, 히틀러는 교통, 교량, 산업 시설 등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러한 초토화 작전은 군수장관 알베르트 슈페어의 저지로 완전히 시행되지는 못했다.

1945년 7월 베를린 중심부 폭격 이후의 상황을 촬영한 미국 육군 항공대 영상.


1945년 4월 16일부터 5월 2일까지 벌어진 베를린 전투 동안, 히틀러와 참모진은 퓌러엄폐호에서 생활했다. 4월 30일, 소련군이 총통 관저 근처까지 진격하자, 히틀러와 그의 부인 에바 브라운자살했다. 5월 2일, 헬무트 바이틀링 장군은 소련군의 바실리 추이코프 장군에게 무조건 항복했다. 히틀러의 뒤를 이어 카를 되니츠가 대통령이 되었고, 요제프 괴벨스가 총리가 되었지만, 괴벨스와 그의 부인 마그다 괴벨스는 자녀들을 살해한 후 자살했다.

1945년 5월 4일에서 8일까지, 남아있던 대부분의 독일군이 무조건 항복했으며, 독일의 항복문서에 따라 나치 정권은 종식되고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되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히틀러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거의 사라졌다. 독일인들의 자살률은 특히 붉은 군대가 진격하던 지역에서 증가했으며, 군인과 당원들 사이에서 자살은 명예로운 대안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자살은 소련군의 만행에 대한 소문과 선전으로 인해 더욱 확산되었으며, 특히 여성들은 강간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다. 1945년 5월 1일, 데민(Demminde)에서는 1만 6천 명의 인구 중 1천 명 이상이 자살했다. 노이브란덴부르크에서 600명, 슈톨프에서 1000명, 베를린에서 최소 7,057명이 자살했다.

4. 정치

아돌프 히틀러(1933년)


나치 독일의 정치는 지도자 원리에 기반했다. 이는 민족 지도자인 나치당과 그 지도자인 아돌프 히틀러에게 모든 민족이 따라야 한다는 원리로, 정치, 경제, 시민 생활 전반에 적용되었다. 히틀러의 '지도자' 지위는 법으로 정의된 것이 아니라 국가와 법 위에 존재한다고 여겨졌다. 따라서 국민은 지도자의 의지에 복종하고 충성을 맹세해야 했다.[15]

이 체제에서는 명문화된 법보다 히틀러의 의지가 중요하고 합법적이었다. 히틀러는 하급 지도자들에게 상당한 재량권을 주었고, 사회 다윈주의에 따른 권력 투쟁을 장려했다. 이 때문에 히틀러의 의지를 따른다고 주장하는 지도자들 간의 권력 투쟁이 빈번하여 권력적 무질서 상태가 나타났다.[16]

국가계몽선전성 설치 당일 기자회견에서 요제프 괴벨스는 "정부와 민족 전체의 강제적 동일화 실현"이 목표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독일 민족에게도 나치즘에 기반한 동일화가 요구되었다. 나치당 외 정당, 노동조합, 사적 모임은 점차 배제되고 금지되었다. 대신 사람들은 국가나 당 주도의 행사나 집회에 동원, 참가해야 했고, 다른 일에 관심을 가질 시간을 빼앗겼다.

1933년 7월, 나치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이 해산되었고, 히틀러는 "당이 이제 국가가 되었다"고 선언했다. 정당 신설 금지 법으로 나치당 외 다른 정당 설립 및 존속이 금지되었다. 12월에는 "나치즘 혁명 승리 결과,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이 독일 국가 사상 담당자가 되고, 당은 국가와 불가분하게 결합된다"는 법률이 제정되었다.

국내 정치 기구도 나치즘의 영향을 받았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내각은 합의 기관이었으나 점차 형식화되었고, 일부 장관들만 권력을 가졌다. 관료 기구와 함께 당 기구도 권력 일부가 되었고, 때로는 우위에 섰다. 당의 지방 구분인 가우는 공적인 것이 되었고, 가우 지도자는 지방 수장으로서 큰 권한을 행사했다. 친위대는 국내 치안 권력을 장악한 강력한 조직이 되었다. 초기 외교 분야에서는 외무성 외에 당 외교정책국, 리벤트로프 개인 사무소가 병립하여 각각 외교 활동을 하기도 했다.

나치당은 바이마르 공화정의 지방 자치를 저해 요인으로 보고, 히틀러 내각 성립 후 주의 자치권을 빼앗았다. 중앙 정부에서 국가 대리관, 국가 감찰관을 파견하여 중앙 권한을 강화하고, 지방 의회는 해산, 주 정부는 형해화되었다. 나치당 지방 조직 가우가 실질적 지방 구분이 되고, 가우 지도자가 지방 지배자가 되었다.

1934년 8월, 공무원과 군인들은 히틀러 개인에게 무조건 복종을 맹세해야 했으며, 이로 인해 히틀러의 말이 기존의 모든 법률보다 우선하는 "지도자원리"가 확립되었다.[11] 히틀러가 승인한 모든 행위는 살인까지도 합법화되었다.[12] 내각 장관 제안 법안은 루돌프 헤스 승인을 받아야 했다.[13]

독일 법 체계에 나치당 이념을 강요한 법학자들(왼쪽부터 롤란트 프라이슬러, 프란츠 슐레겔베르거, 오토 게오르크 티라크, 커트 로텐베르거)


바이마르 공화국 사법 체계와 법률은 정치 외 범죄 처리를 위해 유지되었다.[14] 그러나 법원은 나치 집권 후 더 많은 사형을 선고, 집행했고,[14] 가벼운 범죄라도 3번 이상 유죄 판결 시 상습범으로 지정, 무기한 투옥될 수 있었다.[15] 성 노동자, 소매치기 등은 본질적 범죄자로 간주되어 재판 없이 무기한 구금되었다.[16]

1934년 정치 범죄 처리를 위한 인민법정이 설립되었다.[17] 1945년 해산까지 5천 건 넘는 사형을 선고했고,[18] 공산주의자, 선동 전단 인쇄, 히틀러 등에 대한 농담도 중범죄로 사형을 선고받을 수 있었다.[19] 게슈타포는 정치범, 유대인 등 '바람직하지 않은' 이들을 감금하며 치안 유지를 담당했다.[20] 풀려난 정치범들은 즉시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강제 수용소에 구금되는 경우가 많았다.[21]

나치 독일 인종 정책에 사용된 표 (나치당 유사과학)


나치 독일은 인종 구분을 위한 법률 정당화를 위해 "라센샨데"(Rassenschande|인종적 더럽힘de) 개념을 선전했다.[22] 1935년 뉘른베르크법 제정으로 처음에는 아리아인과 유대인 간 성관계, 결혼만 금지했으나, 이후 "롬인, 흑인, 또는 이들의 사생아"까지 범위를 확대했다.[23] 또한 45세 미만 독일 여성의 유대인 가정 하인 고용을 금지했다.[24] 〈독일국 시민권법〉은 "독일인 또는 관련 혈통"만 시민이 될 수 있다고 명시하여,[25] 유대인 등 아리아인이 아닌 사람들의 시민권을 박탈하고, 나치당을 "충분히" 지지하지 않는 이들에게 시민권 부여를 거부했다.[25] 11월 추가 법령에서 유대인을 3명 이상 유대인 조부모가 있거나, 2명 이상 유대인 조부모가 있는 유대교 신앙인으로 정의했다.[26]

4. 1. 이념

나치당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발생한 사회적, 경제적 격변 속에서 등장한 극우 파시즘 정당이었다.[1] 1929년 대공황이 시작되기 전인 1928년에는 연방 투표의 2.6%를 획득하는 데 그치며 소규모의 변방 정당으로 남아 있었다.[2] 그러나 1930년에는 연방 투표의 18.3%를 획득하며 국가의회에서 두 번째로 큰 정당이 되었다.[3] 1923년 실패한 맥주홀 폭동 이후 수감 중에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 사회를 인종에 기반한 사회로 변혁시키려는 그의 계획을 담은 《나의 투쟁》을 저술했다.[4]

나치당의 이념은 반유대주의, 인종 위생, 우생학의 요소들을 모아 범독일주의와 실지회복주의와 결합하여 게르만족을 위한 더 많은 레벤스라움(Lebensraum|생활권de)을 확보하려는 목표를 세웠다.[5]

나치 정권은 폴란드소련을 공격하여 새로운 영토를 확보하려고 시도했으며, 이곳에 거주하던 유대인슬라브족을 대량 학살하거나 추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유대인과 슬라브족을 아리아인보다 열등하고 유대-볼셰비즘 음모의 일부라고 주장했다.[6][7]

나치당은 독일인들만이 볼셰비즘 세력을 물리치고 국제적인 유대인들의 지배로부터 인류를 구할 수 있다고 믿었다.[8] 또한, 정신적, 신체적 장애인, 롬인, 동성애자, 여호와의 증인, 사회 부적응자 등을 "살 가치가 없는 생명"이라고 규정하고 척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9][10] 추가로 프리메이슨과 같은 종교 집단은 엄격하게 감시되고 박해받았다.[11]

푈키셰 운동의 영향을 받은 나치 정권은 문화적 모더니즘과 지성주의에 반대했고 광범위한 군대의 발전을 주장했다.[12][13] 나치 정권은 창의성과 예술은 선전 매체로 사용할 수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억압했으며,[14] 전당대회에서 깃발과 같은 상징, 의식을 사용하여 단결을 촉진하고 당의 인기를 높여나갔다.[15]

1934년 9월,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에서 하인리히 힘러, 히틀러, 빅토르 루체가 나치식 경례를 하고 있다.

4. 2. 정부



나치 독일의 정치는 원칙적으로 나치당 이데올로기인 지도자 원리에 따랐다. 한 명의 지도자에게 피지도자 계층이 따르는, 즉 민족의 지도자인 나치당, 그 지도자인 히틀러에게 민족 전체가 따른다는 이 원리는 정치 분야뿐만 아니라 경제와 시민 생활 전반에 적용되었다. 히틀러의 지위인 지도자(Führer)는 법으로 정의된 것이 아니라, 국가와 법 위에 선다고 여겨졌다. 따라서 민족 공동체 구성원인 국민은 지도자의 의지에 복종하고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 의무라고 여겨졌다.

이 체제에서는 명문화된 법보다 히틀러의 의지에 따르는 것이 중요하고 합법적이라고 여겨졌다. 한편 히틀러는 하급 지도자들에게 상당한 자유 재량권을 허용했으며, 사회 다윈주의에 기반한 권력 투쟁을 인정하고 장려했다. 이 때문에 히틀러의 의지를 구현한다고 자칭하는 각 지도자 간의 권력 투쟁이 빈발하여 권력적 아나키로 평가되는 상황이 되었다.

국가계몽선전성이 설치된 날의 기자회견에서 요제프 괴벨스가 “정부와 민족 전체의 강제적 동일화 실현”이 동성의 목적이라고 언급했듯이, 독일 민족에게도 나치즘에 기반한 동일화가 요구되었다. 그 때문에 나치당 이외의 정당, 노동조합, 사적인 클럽은 차례차례 배제되고 금지되었다. 대신 사람들은 국가나 당의 주도로 이루어지는 이벤트나 집회에 동원·참가하는 것이 의무화되었고, 다른 사건에 관심을 가질 시간을 빼앗겼다.

1933년 7월 6일까지 나치당을 제외한 기존 정당들은 모두 해산당했고, 히틀러는 "당이 이제 국가가 되었다"고 선언했다. 7월 14일에는 정당 신설 금지법이 공포되어 유일한 정당인 나치당을 제외한 다른 정당의 설립 및 존속이 금지되었다. 12월 1일에는 "나치즘 혁명의 승리 결과,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이 독일 국가 사상의 담당자가 되고, 당은 국가와 불가분하게 결합된다"는 내용의 법률(당과 국가의 통일을 보장하기 위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국내 정치 기구도 나치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는 내각이 합의 기관이었지만, 점차 형식적인 것으로 전락하고 권력을 가진 것은 일부 장관들에 불과하게 되었다. 독일 제국 이래의 관료 기구와 병립하여 당의 기구도 권력의 일부가 되어, 때로는 우위에 서기도 했다. 당의 지방 구분이었던 가우는 공적인 것이 되고, 가우 지도자는 지방 수장으로서 큰 권한을 휘둘렀다. 또한 친위대의 세력 확장은 커서, 국내의 치안 권력을 장악한 최강력 조직 중 하나가 되었다. 나치스 시대 초기의 외교 분야에서는, 외무성 외에 당의 외교정책국, 리벤트로프의 개인 사무소가 병립하여 각각 별개의 외교 활동을 하기도 했다.

나치당은 바이마르 공화정 하의 강력한 지방 자치를 저해 요인으로 생각했으며, 히틀러 내각 성립 후 주의 자치권은 차츰 빼앗겨 갔다. 중앙 정부에서 국가 대리관이나 국가 감찰관이 파견되어 중앙 정부의 권한이 강화되는 한편, 지방 의회는 해산당하고 주 정부는 형해화되었다. 또한 나치당의 지방 조직 가우가 실질적인 지방 구분이 되고, 가우 지도자가 지방의 지배자가 되었다.

4. 3. 법

1934년 8월, 공무원과 군인들은 히틀러 개인에게 무조건적인 복종을 맹세해야 했으며, 이로 인해 히틀러의 말이 기존의 모든 법률보다 우선한다는 "지도자원리"의 기초가 되었다.[11] 히틀러가 승인한 모든 행위는, 심지어 살인까지도 합법화되었다.[12] 내각 장관이 제안한 모든 법안은 최고 공무원 임명을 거부할 권한을 가진 총통 대리 루돌프 헤스의 승인을 받아야만 했다.[13]

바이마르 공화국의 사법 체계와 법률은 정치 외의 범죄를 처리하기 위해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다.[14] 그러나 법원은 나치당 집권 이후 훨씬 더 많은 사형을 선고하고 집행했으며,[14] 사소한 범죄라도 세 가지 이상의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상습범으로 지정되어 무기한 투옥될 수 있었다.[15] 성 노동자나 소매치기범과 같은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범죄자이며 지역사회에 위협이 되는 것으로 법원에 의해 판단되었으며, 수천 명이 체포되어 재판 없이 무기한 구금되었다.[16]

새로운 유형의 법원인 인민법정(Volksgerichtshofde)이 1934년 정치 범죄를 다루기 위해 설립되었다.[17] 인민법정은 1945년 해산될 때까지 5천 건이 넘는 사형을 선고했으며,[18] 공산주의자, 선동 전단지 인쇄, 심지어 히틀러나 다른 고위 관료들에 대한 농담까지도 중범죄로 취급되어 사형을 선고받을 수 있었다.[19] 게슈타포는 정치범, 유대인을 포함하여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되는 이들을 찾아내 감금하면서 나치당의 이념을 강화하기 위한 치안 유지를 담당했다.[20] 감옥에서 풀려난 정치범들은 풀려난 즉시 게슈타포에 의해 다시 체포되어 강제 수용소에 구금되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21]

나치 독일은 인종 구분을 위한 법률을 정당화하기 위해 "라센샨데"(Rassenschande|인종적 더럽힘de)라는 개념을 전파하고 선전에 사용했다.[22] 1935년 9월, 뉘른베르크법이 제정되었으며, 처음에는 아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의 성관계 또는 결혼만을 금지했으나 이후에는 "롬인, 흑인, 또는 이들의 사생아"까지 이 법의 범위를 확대했다.[23] 또한 이 법은 45세 미만의 독일 여성을 유대인 가정의 하인으로 고용하는 것을 금지했다.[24] 〈독일국 시민권법〉은 "독일인 또는 관련 혈통"만이 독일국 시민이 될 수 있다고 명시했으며,[25] 이로 인해 법이 제정되자 유대인을 포함한 아리아인이 아닌 사람들은 독일 시민권을 박탈당했고, 나치당을 "충분히" 지지하지 않는 이들에게 시민권 부여를 거부할 수 있도록 했다.[25] 11월에 비준된 추가 법령에서는 유대인을 3명 이상의 유대인 조부모가 있는 사람 또는 2명 이상의 유대인 조부모가 있는 유대교 신앙을 따르는 사람으로 정의했다.[26]

5. 군사 및 준군사 조직

1921년 창설된 돌격대(SA)는 나치당의 최초 준군사 조직으로, 초기에는 집회와 시위에서 나치 지도자들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았다.[12] 이들은 경쟁 정당 세력과의 거리 싸움, 유대인 등에 대한 폭력 행위에도 가담했다.[18] 에른스트 뢸름 지휘 하에 돌격대는 1934년 예비군을 포함하여 450만 명이 넘는 회원으로 성장했지만, 당시 정규군은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10만 명으로 제한되어 있었다.[12] 뢸름은 육군 지휘 및 SA 흡수를 시도했고,[13] 힌덴부르크와 국방장관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는 SA 활동 억제 실패 시 계엄령 선포를 위협했다.[14] 히틀러는 집권 1년 반 만에 뢸름을 포함한 SA 지도부 숙청을 명령, 1934년 이후 SA는 주요 세력에서 제외되었다.[13]

친위대(SS)는 초기 SA 후원 하의 소규모 경호 부대였으나, 나치 독일에서 가장 크고 강력한 집단으로 성장했다.[18] 1929년부터 하인리히 힘러가 이끌었던 SS는 1938년까지 25만 명이 넘는 회원을 보유했다.[19] 힘러는 SS를 정예 경비대이자 히틀러의 최후 방어선으로 여겼다.[20]

SS 군사 부대인 무장친위대는 제2의 육군으로 발전, 중화기 및 장비는 정규군에 의존, 대부분 부대는 국방군 최고사령부(OKW)의 전술적 통제를 받았다.[21] 1942년 말, 엄격한 선발 및 인종 요건은 더 이상 따르지 않았고, 1943년 무장친위대는 더 이상 정예 전투 부대라 주장할 수 없었다.[22]

SS 부대는 민간인과 연합군 병사들에게 많은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23] 1935년부터 SS는 유대인 박해 주도, 게토와 강제 수용소로 유대인들을 몰아넣었다.[24] 2차 대전 발발 후, SS 아인자츠그룹펜 부대는 폴란드와 소련으로 진군하는 육군을 따라가며, 1941년부터 1945년까지 130만 명의 유대인 포함, 200만 명 이상을 학살했다.[25] SS-토텐코프프페어밴데(해골 부대)는 수백만 명을 더 학살한 강제 수용소 및 절멸 수용소를 운영했다.[27]

1931년 힘러는 부관 하이드리히 휘하의 SS 정보국 안전경찰(SD)을 조직했다.[29] 이 조직은 공산주의자 및 정치적 반대자 체포 임무를 맡았다.[30] 힘러는 SS 경제 행정 본부 후원 하의 평행 경제 기반을 마련, 주택 공사, 공장 및 출판사를 소유했다.[31]

5. 1. 국방군 (Wehrmacht)

1935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의 통합군은 베어마흐트(Wehrmacht, 국방군)로 불렸다. 여기에는 헤어(Heer, 육군), 크리그스마리네(Kriegsmarine, 해군) 그리고 루프트바페(Luftwaffe, 공군)가 포함되었다. 1934년 8월 2일부터 군인들은 히틀러에게 무조건적인 복종을 서약해야 했다. 이전의 서약이 국가 헌법과 합법적인 제도에 대한 충성을 요구했던 것과는 달리, 이 새로운 서약은 군인들이 불법적인 일을 명령받더라도 히틀러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했다.[1] 히틀러는 육군이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 이동 학살대)을 용인하고 전술적으로 가능할 경우 물류 지원까지 제공해야 한다고 명령했다. 아인자츠그루펜은 동유럽에서 수백만 명의 살인을 저지른 집단이다.[2] 베어마흐트 병사들은 또한 반유격전 작전이라는 명목 하에 민간인을 총살하거나 집단 학살에 직접 참여했다.[3] 당시 당의 입장은 유대인들이 유격전의 배후이며 따라서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4] 1941년 7월 8일, 하이드리히는 동부 정복 지역의 모든 유대인들을 유격대로 간주해야 한다고 발표하고 15세에서 45세 사이의 모든 유대인 남성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5] 8월까지 이는 전체 유대인 인구로 확대되었다.[6]

1942년 스탈린그라드 전투 부근의 팬저부대 전차 및 기타 장갑차 부대


군사적으로 국가를 준비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경제는 장기적인 소모전을 지속할 수 없었다. 적의 강력한 요새를 피하는 신속한 조정된 공격을 포함하는 전격전(블리츠크리그, "전격전") 전술을 기반으로 한 전략이 개발되었다. 공격은 포격으로 시작하여 폭격과 기총소사가 이어졌다. 다음으로 전차가 공격하고 마지막으로 보병이 들어와 점령 지역을 확보했다.[7] 1940년 중반까지 승리는 계속되었지만, 영국을 패배시키지 못한 것이 전쟁의 첫 번째 주요 전환점이었다. 소련 공격 결정과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결정적인 패배는 독일군의 후퇴와 최종적인 전쟁 패배로 이어졌다.[8] 1935년부터 1945년까지 베어마흐트에서 복무한 군인의 총 수는 약 1,820만 명이며, 그중 530만 명이 사망했다.[9]

5. 2. 돌격대 (SA)와 친위대 (SS)

에른스트 뢸름의 지휘 아래 돌격대(SA)는 1934년까지 예비군을 포함하여 450만 명이 넘는 회원으로 성장했다. 당시 정규군은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여전히 10만 명으로 제한되어 있었다.[12] 뢸름은 육군을 지휘하고 SA의 계급에 흡수하려고 했다.[13]

힌덴부르크와 국방장관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는 SA의 활동이 억제되지 않으면 계엄령을 선포하겠다고 위협했다.[14] 히틀러는 돌격대(SA)와 게슈타포를 이용해 SA 지도부 전체를 숙청했다.[15] 히틀러는 SA 참모총장(Stabschef) 에른스트 뢸름과 다른 SA 지도자들, 그리고 그레고어 슈트라서, 전 총리 쿠르트 폰 슐라이허 등 여러 히틀러의 정적들을 체포하여 처형했다.[16] 1934년 6월 30일부터 7월 2일까지 최대 200명이 사망했는데, 이 사건은 장검의 밤으로 알려지게 되었다.[17] 1934년의 숙청 이후 SA는 더 이상 주요 세력이 아니었다.[13]

초기에는 SA의 후원 아래 소규모 경호 부대였던 친위대(SS)는 나치 독일에서 가장 크고 강력한 집단 중 하나로 성장했다.[18] 1929년부터 제국친위대장 하인리히 힘러가 이끌었던 SS는 1938년까지 25만 명이 넘는 회원을 보유했다.[19] 힘러는 처음에 SS를 정예 경비대, 히틀러의 최후 방어선으로 여겼다.[20]

SS의 군사 부대인 무장친위대는 제2의 육군으로 발전했다. 무장친위대는 중화기와 장비에 있어 정규군에 의존했으며, 대부분의 부대는 국방군 최고사령부(OKW)의 전술적 통제를 받았다.[21] 1942년 말까지, 처음에 시행되었던 엄격한 선발과 인종적 요건은 더 이상 따르지 않았다. 확장에 기반한 모집과 징집으로 1943년 무장친위대는 더 이상 정예 전투 부대라고 주장할 수 없었다.[22]

SS 부대는 민간인과 연합군 병사들에게 많은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23] 1935년부터 SS는 유대인 박해를 주도하여 유대인들을 게토와 강제 수용소로 몰아넣었다.[24]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SS 아인자츠그룹펜 부대는 폴란드와 소련으로 진군하는 육군을 따라갔고, 1941년부터 1945년까지 130만 명의 유대인을 포함하여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학살했다.[25] 아인자츠그룹펜 대원 중 3분의 1은 무장친위대원으로 구성되었다.[26] SS-토텐코프프페어밴데(해골 부대)는 수백만 명이 더 학살된 강제 수용소와 절멸 수용소를 운영했다.[27] 최대 6만 명의 무장친위대원이 수용소에서 근무했다.[28]

1931년 힘러는 그의 부관 하이드리히 휘하의 안전경찰(SD)로 알려지게 된 SS 정보국을 조직했다.[29] 이 조직은 공산주의자와 다른 정치적 반대자들을 찾아 체포할 임무를 맡았다.[30] 힘러는 SS 경제 행정 본부의 후원 아래 평행 경제의 기초를 마련했다. 이 지주회사는 주택 공사, 공장 및 출판사를 소유하고 있었다.[31]

6. 경제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 경제는 베르사유 조약에 따른 배상금 지불로 인해 심각한 침체를 겪었다. 독일 정부는 배상금과 전쟁 부채를 갚기 위해 화폐를 발행했지만, 이는 초인플레이션을 야기하여 물가 폭등, 경제 혼란, 식량 폭동을 초래했다.[26] 1923년 1월, 독일 정부가 배상금 지불을 중단하자 프랑스군이 루르 지역의 독일 공업 지대를 점령하여 광범위한 사회적 혼란이 발생했다.[27]

1929년 미국 주식 시장 붕괴는 독일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28] 수백만 명이 실직하고 여러 주요 은행이 파산했다. 히틀러와 나치는 이 위기를 기회로 삼아 경제를 강화하고 일자리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하며 지지를 얻었다.[29] 많은 유권자들은 나치당이 질서를 회복하고 사회적 혼란을 진압하며 독일의 국제적 명성을 개선할 수 있다고 믿었다. 1932년 연방 선거에서 나치당은 제국 의회에서 37.4%의 득표율로 230석을 차지하며 최대 정당이 되었다.[30]

나치 집권 초기, 경제학자 할마르 샤흐트는 적자 재정 계획을 통해 실업률을 크게 감소시켰다. 융커스 항공기 제작소를 비롯한 항공 산업이 성장했고, 원자재 및 완제품 수입 규제를 통해 독일 시장에서 외국 경쟁을 제거하고 국제수지를 개선하려 했다. IG 파르벤과의 협력을 통해 합성 대체물 개발을 장려했으며, 독일 자동차 고속도로 건설 등 공공 사업을 추진했다.[8]

1934년 초부터 재무장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군사 지출이 크게 증가했다. 1936년 헤르만 괴링은 4개년 계획의 전권 대리인으로 임명되어 재무장을 가속화했다.[20] 제철소, 합성고무 공장 건설 외에도 임금 및 물가 통제를 실시하고 주식 배당 발행을 제한했다.[1]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나치 독일의 경제는 자유 시장과 중앙 계획을 결합한 혼합경제 체제로 전환되었다. 프리츠 토트 사후 알베르트 슈페어가 군수장관을 맡아 계획과 통제를 중앙 집중화하고, 소비재 생산을 줄이며, 강제 노동과 노예 노동을 이용하여 생산성을 향상시켰다.,

아우슈비츠 IG 파르벤 공장의 ''오스타르바이터'' 배지를 단 여성


전시 경제는 대규모 노예 노동에 의존했으며, 20개 유럽 국가에서 약 1,200만 명의 사람들이 강제로 동원되었다. 이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강제 노동에 시달렸으며, 높은 질병률, 부상률, 사망률을 보였다. 또한, 점령 지역의 자원을 약탈하는 등 대규모 약탈 경제에 의존했다.

1933년 9월 리하르트 발터 다레가 식량농업상에 취임하면서 독일 농업에도 통제가 이루어졌다. 국가식량단(Reichsnährstand)이 결성되어 농업협동조합, 생산자, 가공·정제업자, 거래업자 간의 이해 조정을 담당했다. 국가농장세습법을 제정하여 농민의 소유지를 ‘세습농지’로 인정하고, 양도·부담 설정·임대를 금지했다. 또한 이 법은 농민(Bauer)은 독일 국적을 가지고, 독일 민족 또는 동등한 혈통을 가져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이는 다레가 주장한 ‘피와 흙’(Blut und Boden) 이론에 기반한 것으로, 농민은 세습농지에서 떠날 수 없게 되었다[25] (Agrarwirtschaft und Agrarpolitik im Deutschen Reich (1933–1945)|나치 독일의 농업과 농정de).

6. 1. 초기 경제 정책

나치가 처음 직면한 가장 시급한 경제 문제는 30%에 달하는 전국 실업률이었다.[1] 독일 제국은행(Reichsbank) 총재이자 경제장관이었던 경제학자 할마르 샤흐트(Hjalmar Schacht)는 1933년 5월 적자 재정 계획을 세웠다. 자본 프로젝트는 메포 어음(Mefo bills)이라는 약속 어음 발행으로 충당되었다. 어음이 지불을 위해 제시되면, 독일 제국은행은 돈을 인쇄했다. 히틀러와 그의 경제 팀은 다가올 영토 확장이 치솟는 국가 부채를 상환할 수단을 제공할 것으로 예상했다.[2] 샤흐트의 행정부는 대공황 동안 어느 나라보다도 가장 큰 규모로 실업률의 급격한 감소를 달성했다.[1] 경제 회복은 불균등했고, 노동 시간 단축과 필수품의 불규칙적인 공급으로 인해 1934년 초부터 이미 정권에 대한 환멸로 이어졌다.[3]

1933년 10월, 융커스 항공기 제작소(Junkers Aircraft Works)가 몰수되었다. 다른 항공기 제조업체들과 함께 항공부 장관 괴링의 지휘 아래 생산이 증가했다. 1932년 연간 100대를 생산하는 3,200명의 인력에서 10년도 채 안 되는 기간에 25만 명의 근로자를 고용하여 연간 1만 대 이상의 기술적으로 앞선 항공기를 생산하는 산업으로 성장했다.[4]

원자재와 완제품 수입을 규제하기 위한 정교한 관료 체제가 만들어져 독일 시장에서 외국 경쟁을 제거하고 국가의 국제수지를 개선하려는 의도였다. 나치는 석유와 섬유와 같은 재료의 합성 대체물 개발을 장려했다.[5] 1933년, 시장에서 공급 과잉이 발생하고 석유 가격이 낮아지자 나치 정부는 IG 파르벤(IG Farben)과 이익 배분 계약을 체결하여 뢰우나(Leuna) 합성유 공장에 투자된 자본에 대해 5%의 수익을 보장했다. 그 금액을 초과하는 이익은 국가에 귀속되었다. 1936년까지 파르벤은 거래를 후회했는데, 당시 초과 이익이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6] 석유의 적절한 전시 공급을 확보하기 위한 또 다른 시도로 독일은 1939년 3월 루마니아를 위협하여 무역 협정을 체결했다.[7]

적자 지출로 자금을 조달받은 주요 공공 사업에는 '''독일 자동차 고속도로'''(Reichsautobahn) 네트워크 건설과 이전 정부가 시작한 주택 및 농업 개선 프로그램에 대한 자금 지원이 포함되었다.[8] 건설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민간 기업에 신용이 제공되었고 주택 구매 및 수리에 대한 보조금이 제공되었다.[9] 아리아계통의 젊은 부부가 결혼할 의향이 있는 경우, 아내가 직장을 그만둘 조건으로 최대 1,000 라이히스마르크의 대출을 받을 수 있었고, 태어나는 각 자녀에 대해 상환해야 하는 금액이 25%씩 감소했다.[10] 여성이 가정 밖에서 실업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단서 조항은 숙련 노동자 부족으로 인해 1937년에 삭제되었다.[11]

새로운 독일의 일부로 널리 퍼진 자동차 소유를 구상한 히틀러는 디자이너 페르디난트 포르셰(Ferdinand Porsche)에게 누구든 살 수 있는 자동차를 목표로 하는 '''KdF-바겐'''(힘으로써 기쁨을 자동차) 계획을 세우도록 했다. 시제품은 1939년 2월 17일 베를린 독일 국제 모터쇼(International Motor Show)에 전시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공장은 군용 차량 생산으로 전환되었다. 전쟁 후에야 차량 이름이 폭스바겐 비틀(폭스바겐)(국민 자동차)로 바뀌어 판매되었다.[12]

(왼쪽부터) 히틀러, 로베르트 라이(Robert Ley) (독일 노동 전선(German Labour Front) 책임자), 페르디난트 포르셰(Ferdinand Porsche) (군수품 제조업체), 헤르만 괴링(Hermann Göring) (4개년 계획(Four Year Plan) 책임자) (1942)


나치가 1933년 집권했을 때 600만 명이 실업 상태였고 1937년에는 100만 명 미만으로 줄었다.[13] 이는 부분적으로 여성이 노동 시장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14] 1933년부터 1938년 사이에 실질 임금은 25% 감소했다.[1] 1933년 5월 노동 조합 해산 후 자금이 압수되고 지도부가 체포되었으며,[15] 나치와 협력하려는 사람들도 포함되었다.[16] 새로운 조직인 독일 노동 전선(German Labour Front)이 만들어져 나치당 간부 로베르트 라이(Robert Ley)의 지휘 아래 놓였다.[15] 많은 실업자들이 이 조직에 강제로 징집되어 제복과 도구를 받고 일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거리에서 실업자가 사라져 나치가 경제 상황을 개선하고 있다는 인식에 기여했다.[17] 평균 주당 근무 시간은 1933년 43시간이었고, 1939년에는 47시간으로 증가했다.[18]

1934년 초, 재무장에 대한 초점이 이동했다. 1935년까지 군사 지출은 정부의 상품 및 서비스 구매의 73%를 차지했다.[19] 1936년 10월 18일, 히틀러는 재무장을 가속화하기 위한 4개년 계획(Four Year Plan)의 전권 대리인(Plenipotentiary)으로 괴링을 임명했다.[20] 제철소, 합성고무 공장 및 기타 공장의 신속한 건설을 촉구하는 것 외에도 괴링은 임금 및 물가 통제를 실시하고 주식 배당 발행을 제한했다.[1] 증가하는 적자에도 불구하고 재무장에 대한 대규모 지출이 이루어졌다.[21] 1938년 말에 발표된 해군과 공군 대폭 증강 계획은 독일이 계획된 부대를 건설할 재정 및 물적 자원뿐 아니라 운영에 필요한 연료도 부족했기 때문에 이행할 수 없었다.[22] 1935년 의무 군 복무제가 도입되면서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10만 명으로 제한되었던 ''라이히스베어''(Reichswehr)는 제2차 세계 대전 시작 시 75만 명의 현역 군인으로 확장되었고, 예비군 100만 명이 더 있었다.[23] 1939년 1월까지 실업률은 301,800명으로 감소했고, 9월에는 77,500명으로 감소했다.[24]

1933년 9월 리하르트 발터 다레가 식량농업상에 취임한 이후, 독일 농업에도 통제의 손길이 미쳤다. 9월 12일에는 국가식량단(Reichsnährstand)이 결성되었고, 나치당의 농업전국지도자이기도 한 다레가 농업협동조합, 생산자, 가공·정제업자, 거래업자 간의 이해 조정을 담당하게 되었다. 9월 23일에는 국가농장세습법이 제정되어 농민의 소유지를 ‘세습농지’로 인정하고, 양도·부담 설정·임대를 금지했다. 또한 이 법에서 농민(Bauer)은 독일 국적을 가지고, 독일 민족 또는 동등한 혈통을 가져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이는 다레가 주장한 ‘피와 흙’(Blut und Boden) 이론에 기반한 것으로, 농민은 세습농지에서 떠날 수 없게 되었다[25] (Agrarwirtschaft und Agrarpolitik im Deutschen Reich (1933–1945)|나치 독일의 농업과 농정de).

6. 2. 군비 확장과 4개년 계획

1933년 2월 초, 아돌프 히틀러는 재무장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처음에는 비밀리에 진행했다. 이는 베르사유 조약을 위반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1933년 5월 17일, 히틀러는 국가의회에서 연설하여 세계 평화에 대한 열망을 촉구했고,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제안한 군사적 군축을 수락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단, 다른 유럽 국가들도 모두 똑같이 따른다는 조건이었다.[1] 다른 유럽 강대국들이 루스벨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자, 히틀러는 10월부터 독일을 세계 군비 감축 회의와 국제연맹에서 탈퇴시켰다. 그는 군축 조항이 독일에게만 적용된다면 불공평하다고 주장했다.[2] 같은 해 11월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유권자의 95%가 독일의 국제 연맹 탈퇴에 찬성했다.[3]

1934년, 히틀러는 군 사령관들에게 독일 국민들이 더 많은 생활 공간과 자원을 필요로 하므로 더 많은 영토를 얻을 수 있는 정복 전쟁을 시작해야 하며, 1942년까지 재무장을 완료해야 한다고 말했다.[4]

1936년 10월 18일, 히틀러는 헤르만 괴링을 재무장을 가속화하기 위한 4개년 계획의 전권 대리인으로 임명했다.[5] 괴링은 제철소, 합성고무 공장 및 기타 공장의 신속한 건설을 촉구하는 것 외에도 임금 및 물가 통제를 실시하고 주식 배당 발행을 제한했다.[6] 증가하는 적자에도 불구하고 재무장에 대한 대규모 지출이 이루어졌다.[7]

6. 3. 전시 경제와 강제 노동

나치 독일의 전시 경제는 자유 시장과 중앙 계획을 결합한 혼합경제였다. 역사가 리처드 오버리(Richard Overy)는 이를 소련의 계획경제와 미국의 자본주의 시스템의 중간쯤에 있는 것으로 묘사한다.

1942년, 군수장관 프리츠 토트(Fritz Todt) 사후 히틀러는 알베르트 슈페어를 후임으로 임명했다. 전시 소비재 배급으로 개인 저축이 증가했고, 이 자금은 전쟁 수행을 지원하기 위해 정부에 대출되었다. 1944년까지 전쟁은 독일 국내총생산의 75%를 소비했는데, 이는 소련의 60%, 영국의 55%와 비교된다. 슈페어는 계획과 통제의 중앙 집중화, 소비재 생산 감소, 그리고 강제 노동과 노예 노동의 이용을 통해 생산성을 향상시켰다., 전시 경제는 결국 대규모 노예 노동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 독일은 공장과 농장에서 일할 20개 유럽 국가에서 약 1,200만 명의 사람들을 강제로 데려와 노예로 삼았다. 약 75%가 동유럽 출신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연합군 폭격의 희생자가 되었는데, 그들은 열악한 공습 방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열악한 생활 조건은 높은 질병률, 부상률, 사망률뿐만 아니라 사보타주와 범죄 활동으로 이어졌다. 전시 경제는 또한 대규모 약탈에 의존했는데, 처음에는 국가가 유대인 시민들의 재산을 압류하는 것을 통해, 나중에는 점령 지역의 자원을 약탈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졌다.

독일로 들어온 외국인 노동자들은 방문 노동자, 군사 수용자, 민간 노동자, 동부 노동자의 네 가지 등급으로 분류되었다. 각 그룹은 서로 다른 규정을 적용받았다. 나치는 독일인과 외국인 노동자 간의 성관계를 금지했다.,

1944년까지 50만 명이 넘는 여성이 독일군에서 보조병으로 복무했다. 1939년부터 1944년까지 유급 고용 여성의 수는 271,000명(1.8%) 증가하는 데 그쳤다. 소비재 생산이 감소함에 따라 여성들은 전시 경제의 고용을 위해 그 산업을 떠났다. 그들은 또한 남성이 맡았던 일, 특히 농장과 가족 소유 상점에서 일자리를 맡았다.

1942년부터 소련 포로들은 강제 노동력으로 여겨졌고, 일을 할 수 있도록 더 나은 대우를 받았다. 1944년 12월까지 75만 명의 소련 포로들이 독일 무기 공장(헤이그 협약 및 제네바 협약 위반), 광산 및 농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7. 인종 정책과 우생학



나치 독일은 인종 구분을 위한 법률을 정당화하기 위해 "라센샨데"(Rassenschande|인종적 더럽힘de)라는 개념을 선전했다.[2] 1934년 8월, 공무원과 군인들은 히틀러 개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맹세해야 했으며, 이로 인해 히틀러의 말이 기존의 모든 법률보다 우선한다는 "지도자원리"의 기초가 되었다. 히틀러가 승인한 모든 행위는 살인까지도 합법화되었다.

1935년 뉘른베르크법이 제정되어 아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의 성관계 또는 결혼이 금지되었고, 이후에는 "롬인, 흑인, 또는 이들의 사생아"까지 범위가 확대되었다. 이 법은 45세 미만의 독일 여성을 유대인 가정의 하인으로 고용하는 것을 금지했다. 〈독일국 시민권법〉은 "독일인 또는 관련 혈통"만이 독일국 시민이 될 수 있다고 명시하여, 유대인을 포함한 아리아인이 아닌 사람들은 독일 시민권을 박탈당했고, 나치당을 "충분히" 지지하지 않는 이들에게 시민권 부여를 거부할 수 있도록 했다. 11월에 비준된 추가 법령에서는 유대인을 3명 이상의 유대인 조부모가 있는 사람 또는 2명 이상의 유대인 조부모가 있는 유대교 신앙을 따르는 사람으로 정의했다.

1933년에 제정된 ‘단종법’에 따라 나치는 정신병이나 알코올 중독 환자를 포함하여 유전적 결함이 있다고 여겨진 4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강제로 처분했다. 1940년에는 T4 작전에 따라 수천 명의 장애를 가진 병약한 사람들이 살해되었다. 이는 나치 선전에서 “독일의 지배 종족으로서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라고 기술되었다. T4 작전은 표면적으로는 1941년에 중지되었지만, 이러한 정책들은 후에 홀로코스트로 이어졌다.

7. 1.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



나치즘반유대주의는 나치당과 나치 정권의 기본 원칙이었다. 나치 독일의 인종 정책은 우월한 아리아 인종의 존재에 대한 믿음에 기초했다. 나치는 아리아 우월 인종과 열등 인종, 특히 유대인들 사이의 인종 갈등을 주장했는데, 유대인들은 사회에 침투한 혼혈 인종으로 여겨졌으며 아리아 인종의 착취와 억압에 책임이 있다고 여겨졌다.[1]

인종주의, 특히 반유대주의는 이 정권의 중심적 특징이었다. 게르만인(북방 인종)은 가장 순수한 아리아 인종으로 여겨졌다.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는 살해되거나 투옥되거나 추방되었다. 기독교 교회 또한 많은 지도자들이 투옥되고 억압되었다.

나치는 선전을 통해 "인종 오염"(Rassenschandede) 개념을 보급하여 인종 법의 필요성을 정당화했다.[2] 1935년 9월, 뉘른베르크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은 처음에 아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의 성관계와 결혼을 금지했으며, 나중에 "집시, 흑인 또는 그들의 사생아"를 포함하도록 확대되었다.[3] 이 법은 또한 45세 미만의 독일 여성이 유대인 가정에서 가정부로 일하는 것을 금지했다.[4] 제국 시민권법은 "독일인 또는 관련 혈통"의 사람만 시민이 될 수 있다고 명시했다.[5] 따라서 유대인과 다른 비아리아인들은 독일 시민권을 박탈당했다. 이 법은 또한 나치가 정권에 충분히 협조적이지 않은 사람에게 시민권을 박탈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6] 11월에 발표된 보충 법령은 조부모 3명이 유대인이거나, 유대교를 믿는 조부모가 2명인 사람을 유대인으로 규정했다.[7]

나치즘에서는 “아리아인이야말로 세계를 지배할 가치가 있는 인종이다”라는 아리아인 우월주의가 사용되었고, 그중에서도 용모가 뛰어나고 지능이 높으며 운동 신경이 뛰어난 자가 가장 아리아인적이라고 여겨졌다.

7. 2. 유대인 박해



나치 독일은 인종 구분을 위한 법률을 정당화하기 위해 "라센샨데"(Rassenschande|인종적 더럽힘de)라는 개념을 전파하고 선전에 사용했다.[1] 1935년 9월, 뉘른베르크법이 제정되었으며, 처음에는 아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의 성관계 또는 결혼만을 금지했으나 이후에는 "롬인, 흑인, 또는 이들의 사생아"까지 이 법의 범위를 확대했다.[2] 또한 이 법은 45세 미만의 독일 여성을 유대인 가정의 하인으로 고용하는 것을 금지했다.[3] 〈독일국 시민권법〉은 "독일인 또는 관련 혈통"만이 독일국 시민이 될 수 있다고 명시했으며,[4] 이로 인해 법이 제정되자 유대인을 포함한 아리아인이 아닌 사람들은 독일 시민권을 박탈당했고, 나치당을 "충분히" 지지하지 않는 이들에게 시민권 부여를 거부할 수 있도록 했다.[4] 11월에 비준된 추가 법령에서는 유대인을 3명 이상의 유대인 조부모가 있는 사람 또는 2명 이상의 유대인 조부모가 있는 유대교 신앙을 따르는 사람으로 정의했다.[5]

1933년 4월부터 유대인의 지위와 권리에 대한 수많은 조치가 시행되었다.[6] 이러한 조치들은 1935년 뉘른베르크 법률의 제정으로 절정에 달했는데, 이 법률은 유대인의 기본권을 박탈했다.[7] 나치는 유대인으로부터 재산, 비유대인과의 혼인권, 많은 노동 분야(법률, 의학, 교육 등)에 종사할 권리를 빼앗았다. 결국 나치는 유대인들을 독일 시민과 사회에 있어 바람직하지 않은 존재로 선언했다.[8]

1938년 11월 9일 밤부터 10일 새벽에 걸쳐 나치당원과 돌격대가 독일 전역의 유대인 주택, 상점, 회당 등을 습격하고 방화한 수정의 밤 사건이 발생했고, 이를 계기로 유대인에 대한 조직적인 박해 정책이 더욱 본격화되었다.

7. 3. 로마인 박해

로마족은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초기 정권부터 박해를 받았다. 독일계 사람들과의 결혼이 금지되었고, 1935년부터는 강제 수용소로 보내져 많은 수가 살해되었다.[11][12]

1939년 폴란드 침공 이후, 2,500명의 로마족과 신티족이 독일에서 총독부로 추방되어 노동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생존자들은 벨제츠, 소비보르, 트레블링카에서 학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941년 말에는 추가로 5,000명의 신티족과 오스트리아 라러리족이 우치 게토로 이송되었는데, 이들 중 절반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게토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1942년 초 헬름노 멸절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나치는 모든 로마족을 독일에서 추방하려 했고, 이를 위해 "Zigeunerlager"(집시 수용소)에 가두었다. 하인리히 힘러는 1942년 12월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 독일에서 로마족을 추방하라고 명령했다. 총 23,000명의 로마족이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고, 그중 19,000명이 사망했다. 독일 외 지역에서도 로마족은 강제 노역에 동원되거나 즉결 처형되었다. 발트 국가와 소련에서는 3만 명의 로마족이 SS, 독일군, 아인자츠그룹에 의해 살해되었다. 점령된 세르비아에서는 1,000명에서 12,000명의 로마족이, 독립국 크로아티아에서는 25,000명의 로마족 거의 전부가 살해되었다. 전쟁 종식 시점의 추산에 따르면 로마족 희생자의 총 수는 약 22만 명으로, 유럽 로마족 인구의 약 25%에 해당한다.

7. 4. 기타 박해받는 집단

나치 독일은 유대인, 로마인(집시), 여호와의 증인, 동성애자, 장애인 등 특정 집단을 '인종을 더럽히는 존재'로 규정하고 대규모 박해를 자행했다. 이는 나치 독일과 홀로코스트에 의한 동성애자 박해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정권 초기부터 유대인 공직자들은 추방되었고, 1935년 9월 15일 뉘른베르크 당대회에서 뉘른베르크법이 공포되었다. 이 법으로 아리아인과 유대인 간의 결혼 및 성관계가 금지되었고, 유대인의 시민권은 사실상 부정되었다. 이후 민간 차원에서도 유대인 박해가 증가했다.

신티·로마인(로마인, 집시)에 대한 박해도 1935년부터 시작되어, 프랑크푸르트 시는 집시 수용소를 설치했다. 1936년 독일 내무부는 「집시 재앙과 싸우기 위한 지침」을 제정, 집시의 지문과 사진을 찍도록 규정했다. 1937년 친위대는 「집시의 위협과 싸우기 위한 전국 센터」를 설치하고 집시의 정의를 내리도록 지시했다.

1935년 뉘른베르크법 제정으로 유대인들은 독일 내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아리아화라는 명목 하에 유대인과 유대인 소유 기업의 자산은 몰수되어 독일인에게 넘어갔다.

1938년 7월 5일, 스위스 에비앙에서 32개국이 독일 유대인 난민 보호 문제를 논의했지만(에비앙 회의), 대부분의 국가는 유대인 수용에 소극적이었다. 히틀러는 이를 두고 "유대인에게 동정을 표하면서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유럽 각국의 위선"이라고 비판했다.

1938년 11월 9일 밤부터 10일 새벽, 나치당원과 돌격대가 독일 전역의 유대인 주택, 상점, 회당 등을 습격하고 방화한 수정의 밤 사건은 유대인에 대한 조직적인 박해 정책을 본격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7. 5. 동방 총계획 (Generalplan Ost)

독일의 동부 전선 전쟁은 아돌프 히틀러가 유대인을 독일 국민의 주적으로 보았고, 독일의 확장을 위해서는 '생활권'(Lebensraum)이 필요하다는 오랜 견해에 기반했다. 히틀러는 폴란드와 소비에트 연방 정복을 위해 동유럽에 주목했다.[1] 히틀러는 러시아인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슬라브인의 인종적 열등성에 대한 믿음으로 러시아 정복은 불가피하다고 확신했다.[2] 1939년 폴란드 점령 후, 총독부에 거주하는 모든 유대인들은 게토에 격리되었고, 신체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은 강제 노역을 해야 했다.[3] 1941년, 히틀러는 폴란드 국민을 완전히 파괴하기로 결정했다. 15~20년 이내에 총독부는 폴란드인으로부터 청소되어 독일 식민지 주민들로 재정착될 예정이었다.[4] 약 380만~400만 명의 폴란드인이 노예로 남게 될 것이며,[5] 나치가 정복한 국가의 시민들을 이용해 만들려고 했던 1,400만 명의 노동력의 일부가 될 것이었다.[6][7]

누가 죽임을 당해야 하는지를 결정하기 위해 하인리히 힘러는 독일 혈통으로 간주되는 사람들을 분류하는 시스템인 ''민족 목록(Volksliste)''을 만들었다.[8] 그는 게르만계 혈통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 민족 독일인으로 분류되는 것을 거부한 사람들은 강제 수용소로 추방하거나, 자녀를 빼앗거나, 강제 노동에 배정해야 한다고 명령했다.[9][10] 이 계획에는 아리아-북유럽 특징을 가진 것으로 여겨지는, 독일계 혈통으로 추정되는 어린이들을 납치하는 것도 포함되었다.[11] 목표는 소련 정복 후 ''동방 총계획(Generalplan Ost)''을 시행하는 것이었지만, 침략이 실패하자 히틀러는 다른 선택을 고려해야 했다.[12][13] 한 가지 제안은 유대인들을 폴란드, 팔레스타인 또는 마다가스카르로 강제 추방하는 것이었다.[3]

또한 나치는 헝거 플랜(Hunger Plan)이라는 행동을 통해 기아로 정복 지역의 인구를 3천만 명 감소시킬 계획을 세웠다. 식량 공급은 독일군과 독일 민간인에게 돌릴 것이다. 도시들은 파괴될 것이고, 땅은 숲으로 돌아가거나 독일 식민지 주민들이 재정착할 것이다.[14] 헝거 플랜과 ''동방 총계획''은 소련에서 8천만 명의 기아를 초래했을 것이다.[15] 이 부분적으로 이행된 계획은 소련과 유럽 다른 지역에서 약 1,930만 명의 민간인과 전쟁 포로(POW)의 민족 학살적인 죽음으로 이어졌다.[16] 전쟁 과정에서 소련은 총 2,700만 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이 중 900만 명 미만이 전투 사망자였다.[17] 소련 인구의 4분의 1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했다.[18]

7. 6. 홀로코스트와 최종 해결 방안

나치 독일은 유대인, 로마인, 그리고 그들의 가치관에 따라 인종을 더럽힌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 대한 대규모 박해로 악명 높다.

1938년 11월 9일, 수정의 밤으로 인한 피해


정권 장악 직후부터 공직에 있던 유대인들은 그 직위에서 쫓겨나기 시작했다. 1935년 9월 15일, 뉘른베르크법("독일인의 혈통과 명예 보호에 관한 법률"과 "제국 시민법")이 공포되어 아리아인과 유대인 간의 결혼과 성관계가 금지되었고, 유대인의 시민권은 사실상 부정되었다.[32] 이 법률 공포 후 민간 차원의 유대인 박해도 증가했다.

각지의 상점에는 "유대인 출입 금지" 간판이 세워졌고, 벤치는 아리아인용과 유대인용으로 나뉘었다. 유대인 기업은 경제부가 정한 헐값에 아리아인에게 매각되었고, 유대인 의사는 유대인 이외의 진료가 금지되었으며, 유대인 변호사는 모두 활동 금지가 되었다.

뉘른베르크법에서 대상이 아니었지만, 신티·로마인(로마인, 집시)에 대한 박해도 시작되어, 1935년에는 프랑크푸르트 시가 집시 수용소를 설치했다. 1936년에는 독일 내무부가 "집시 재앙과 싸우기 위한 지침"을 제정하고, 이후 집시의 지문과 사진을 찍도록 규정했다. 1937년에는 친위대도 "집시의 위협과 싸우기 위한 전국 센터"를 설치하고 그 센터에 집시의 정의를 내리도록 지시했다. 1935년뉘른베르크법이 제정됨으로써 유대인들은 독일 국내에서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또한 4개년 계획 전권을 맡은 괴링의 지휘 아래, 아리아화라고 불리는 유대인으로부터의 경제적 수탈이 실행되었다. 유대인과 유대인이 경영하는 것으로 간주된 기업의 자산은 몰수되어 독일인들에게 넘겨졌다.

1938년 7월 5일,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즈벨트의 제안으로 스위스 에비앙에서 32개국이 독일에서 탈출하는 유대인 난민 보호 문제를 논의했지만(에비앙 회의), 모든 국가는 유대인의 자국 수용에 소극적이었다.

1938년 11월 9일 밤부터 10일 새벽에 걸쳐 나치당원과 돌격대가 독일 전역의 유대인 주택, 상점, 회당 등을 습격하고 방화한 수정의 밤 사건이 발생했고, 이를 계기로 유대인에 대한 조직적인 박해 정책이 더욱 본격화되었다.

1941년 12월 모스크바 공격 실패 무렵, 히틀러는 유럽 유대인들을 즉각 몰살하기로 결정했다.[13] 점령지인 폴란드와 소비에트 연방에서 유대인 민간인 학살이 계속되는 동안, 1942년 1월 20일 반제 회의에서 유럽 유대인 인구(1천1백만 명) 전멸 계획이 공식화되었다. 일부는 노동으로 죽게될 것이고 나머지는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 방안의 이행 과정에서 살해될 것이었다.[14] 처음에는 아인자츠그룹의 총살대가, 그 후에는 고정 가스실이나 가스반을 사용하여 희생자들을 살해했지만, 이러한 방법은 이러한 규모의 작전에는 비실용적이었다.[15][16] 1942년까지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헤움노, 소비보르, 트레블링카 등에 가스실을 갖춘 절멸 수용소가 설립되었다.[17] 살해된 유대인의 총 수는 550만 명에서 600만 명으로 추산되며,[18] 100만 명이 넘는 어린이들이 포함된다.[19]

1945년 미군이 해방시킨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 화장장 밖에 시체가 가득 실린 마차


연합군은 폴란드 망명 정부와 바르샤바의 폴란드 지도부로부터, 주로 폴란드 지하 조직의 정보에 기반한 학살에 대한 정보를 받았다.[20][21] 독일 시민들은 점령지에서 돌아온 병사들이 목격하고 행한 일을 보고했기 때문에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22] 역사학자 리처드 J. 에번스는 대부분의 독일 시민들이 이 대량 학살을 반대했다고 말한다.[23]

8. 사회

인종주의, 특히 반유대주의는 나치 정권의 중심적인 특징이었다. 게르만인(북방 인종)은 가장 순수한 아리아 인종으로 여겨졌다.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는 살해되거나 투옥되거나 추방되었다.

나치 시대의 특징적인 정책 중 하나는 정치와 사회 전체를 균질화하려는 "강제적 동일화"(강제적 동질화)였다. 국가계몽선전성이 설치된 날의 기자회견에서 요제프 괴벨스는 “정부와 민족 전체의 강제적 동일화 실현”이 목적이라고 밝혔다.[15] 그 때문에 나치당 이외의 정당, 노동조합, 사적인 클럽은 차례차례 배제되고 금지되었다. 대신 사람들은 국가나 당의 주도로 이루어지는 이벤트나 집회에 동원·참가하는 것이 의무화되었고, 다른 사건에 관심을 가질 시간을 빼앗겼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강제수용소(아우슈비츠 1호 강제수용소)의 시체 소각로


1942년 우크라이나에서 아인자츠그룹펜(Einsatzgruppen)의 총구를 향해 자신의 몸으로 아이를 감싸 안은 유대인 여성


전쟁 중 유대인과 소수 민족에 대한 박해는 독일 국내와 점령 지역에서 지속되고 강화되었다. 1941년부터 유대인들은 다윗의 별을 착용해야 했고, 게토로 이주당했다. 1942년 1월에 열린 반제 회의에서는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책”이 결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16] 독일 국내와 점령 지역의 많은 유대인들은 나치 강제 수용소로 보내져 총살, 독가스, 강제 노동으로 인한 기아와 질병 등으로 살해되었다. 이러한 학대와 대량 학살은 홀로코스트(히브리어로는 쇼아(Shoah))라 불린다.

나치의 인종주의 이데올로기가 주요 원인이 된 다른 인종에 대한 대량 학살로는, 신티·로마인에 대한 학살(폴라이모스, 로마 홀로코스트)[17][18], 점령 지역에 있던 슬라브족들에 대한 강제 이주와 식량 착취로 인한 대량 아사[19][20][21] 등이 있다.

인종적으로 가치를 낮추는 존재로 여겨진 여호와의 증인 신자[22], 동성애자[23], 정치범, 흉악범 등에 대한 탄압도 강화되어 강제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는 사람들도 증가했다. 또한 전쟁 포로와 점령국 국민을 포함한 1,000만 명 이상이 강제 노동에 종사했으며, 열악한 환경에 놓인 사람들이 잇따라 희생되었다.

1944년, 전쟁이 패전으로 향하면서 전선에 가까운 수용소는 철거가 시작되었고,[24] 수감자들은 도보로 이동당해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죽음의 행진).[25] 히틀러가 홀로코스트 실행을 명령한 문서는 확인되지 않았고, 구두 명령이 있었다는 설 등을 포함하여 여러 연구가 이루어져 왔지만, 문서에 의한 명령은 그 정책의 전개에 있어서 필요 없다고 보는 것이 홀로코스트 연구자들의 결론이다.[26] 친위대는 홀로코스트 박해에 대해서도 증거를 은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27] 종전을 앞두고 문서 자료의 소각도 이루어졌으나,[28] 홀로코스트 관련 1차 사료는 많이 남아 있으며, 중앙 관청을 비롯한 대량의 행정 문서,[29] 생존자들의 증언, 존더코만도가 매장한 문서와 사진[30] 등이 알려져 있다.

나치 독일의 만행에 대한 주장 중 상당 부분이 날조 또는 과장된 것으로 밝혀졌다. 구체적인 예는 다음과 같다.

  • 카틴 숲 학살: 1945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독일의 만행으로 주장되었으나, 실제로는 소련의 만행으로 밝혀짐.
  • 비니차 대학살: 독일의 만행으로 소련이 주장했으나, 실제로는 소련의 만행으로 밝혀짐.
  • 아우슈비츠 수용소: 뉘른베르크 재판 검찰은 400만 명이 희생되었다고 주장했으나, 현재는 110만 명으로 하향 조정됨.
  • 마이다네크 수용소: 해방 직후 소련은 200만 명이 희생되었다고 주장했으나, 현재는 8만 명으로 하향 조정됨.
  • 작센하우젠 수용소: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는 84만 명의 소련 포로가 살해되었다고 주장했으나, 현재는 날조로 밝혀짐.
  • 다하우 수용소: 종전 직후 미국은 약 24만 명이 희생되었다고 주장했으나, 현재는 4만 명 정도로 하향 조정됨.
  • 홀로코스트의 명령, 계획은 존재했다고 여겨져 왔으나,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음.[31] (라울 힐베르크도 명령이나 계획은 없다고 인정함.[32])
  • 인간 비누: 현재는 인간으로부터 비누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날조이며, 반독일 선전으로 밝혀짐.


상기 외에도 수정주의자나 부정주의자들이 존재하며, 다양한 주장을 하고 있다.

8. 1. 교육

1933년에 제정된 반유대주의 법률로 인해 유대인 교사, 교수 및 교육계 공무원들이 모두 해임되었다.[33] 대부분의 교사는 국가사회주의 교사 연맹(NSLB)에 가입해야 했고, 대학교수들은 국가사회주의 독일 강사 연맹에 가입해야 했다.[33][34] 교사들은 히틀러에게 충성과 복종을 서약해야 했으며, 당의 이상에 충분히 부합하지 않는 교사들은 학생이나 동료 교사의 신고를 받고 해임되는 경우가 많았다.[35][36] 봉급 부족으로 많은 교사들이 직업을 그만두었고, 그 결과 교사 부족으로 평균 학급 규모는 1927년 37명에서 1938년 43명으로 증가했다.[37]

내무장관 빌헬름 프릭, 베른하르트 루스트의 국가 과학, 교육 및 문화부 및 기타 기관에서는 초·중등학교 수업 내용과 사용 가능한 교과서에 대해 빈번하고 종종 상반되는 지침을 발표했다.[38] 정권에 부적합하다고 여겨지는 책은 학교 도서관에서 제거되었다.[39] 1934년 1월, 나치 이데올로기 주입이 의무화되었다.[39] 당 엘리트의 미래 구성원으로 선발된 학생들은 초등 교육을 위해 아돌프 히틀러 학교에서, 중등 교육을 위해 국가 정치 교육 기관에서 12세부터 세뇌 교육을 받았다. 엘리트 군 장교 후보자들의 세부적인 세뇌 교육은 오르덴스 성에서 이루어졌다.[40]

학교에서 나치식 경례를 하는 학생들(1934년). 어린아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세뇌 교육을 받았다.


초·중등 교육은 인종 생물학, 인구 정책, 문화, 지리 및 체력에 중점을 두었다.[41] 생물학, 지리학, 심지어 산수까지 대부분 과목의 교육과정이 인종에 초점을 맞추도록 변경되었다.[42] 체육은 군사 교육이 중심이 되었고, 물리학 교육은 탄도학 및 공기역학과 같은 군사적 응용 분야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학생들은 국가 공공 계몽 및 선전부의 학교 부서에서 제작한 모든 영화를 시청해야 했다.

대학에서는 최고 직책 임명을 놓고 교육부, 대학 이사회 및 국가사회주의 독일 학생 연맹 간에 권력 다툼이 있었다. 학생 연맹과 여러 정부 부처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대학교수들은 나치 시대 동안 강의나 강의 계획서를 변경하지 않았다. 이는 특히 주로 가톨릭 지역에 위치한 대학에서 두드러졌다. 독일 대학의 등록 학생 수는 1931년 10만 4000명에서 1939년 4만 1000명으로 감소했지만, 유대인 의사들이 직업을 잃게 되면서 의과대학 등록은 급증했고, 의대 졸업생들은 좋은 취업 전망을 갖게 되었다. 1934년부터 대학생들은 SA가 운영하는 빈번하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군사 훈련에 참석해야 했다. 1학년생들은 또한 국가 노동 봉사단 노동 수용소에서 6개월 동안 복무해야 했고, 2학년생은 추가로 10주 동안 복무해야 했다.

8. 2. 여성과 가족의 역할

나치는 여성을 사회 정책의 초석으로 삼았다. 나치는 페미니스트 운동이 유대 지식인들이 만든 것이라며 반대하고, 독일 여성이 "자신의 세계는 남편, 가족, 자녀, 그리고 가정"임을 인식하는 가부장적 사회를 대신 주장했다.[39] 페미니스트 단체들은 해산되거나 전국적으로 단체들을 조정하여 모성과 가사 활동을 장려하는 나치 여성 연맹에 편입되었다. 육아, 재봉, 요리에 관한 강좌가 제공되었다. 아니타 아우크스부르크, 리다 구스타바 하이만, 헬레네 슈테커를 포함한 저명한 페미니스트들은 망명을 강요받았다.[40] 이 연맹은 나치 독일에서 유일하게 나치가 승인한 여성 잡지인 ''NS-Frauen-Warte''를 발행했다.[41] 이 잡지는 일부 선전적인 측면도 있었지만, 주로 일반 여성 잡지였다.[42]

나치는 여성들이 직장을 그만두도록 장려했고, 인종적으로 적합한 여성에 의한 대가족 창출을 선전 캠페인을 통해 장려했다. 여성들은 네 명의 아이를 낳으면 Ehrenkreuz der Deutschen Mutter (독일 어머니 훈장) 동상을, 여섯 명을 낳으면 은상을, 여덟 명 이상을 낳으면 금상을 받았다.[40] 대가족에게는 비용을 돕기 위한 보조금이 지급되었다. 이러한 조치로 출산율이 증가했지만, 네 명 이상의 자녀를 둔 가정의 수는 1935년에서 1940년 사이에 5% 감소했다. 여성을 직장에서 제외하는 것은 남성을 위한 일자리를 확보하려는 의도였지만, 여성들은 대부분 가정부, 직조공, 또는 식음료 산업에 종사했고 이러한 직업은 남성들에게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나치 철학은 전쟁 준비 과정에서 다량의 여성이 탄약 공장에 고용되는 것을 막았기 때문에 외국 노동자들이 들어왔고, 전쟁이 시작된 후에는 노예 노동자들이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1943년 1월, 히틀러는 50세 미만의 모든 여성에게 전쟁 노력을 돕기 위해 작업 배정을 받도록 요구하는 법령에 서명했다. 그 후 여성들은 농업 및 산업 일자리로 유입되었고, 1944년 9월까지 1,490만 명의 여성이 탄약 생산에 종사했다.

나치 지도자들은 합리적이고 이론적인 일이 여성의 본성에 어긋난다는 생각을 지지했고, 따라서 여성이 고등 교육을 추구하는 것을 막았다. 1933년 4월에 통과된 법은 대학에 입학하는 여성의 수를 남성의 10%로 제한했다. 이로 인해 중등학교에 등록한 여성 수는 1926년 43만 7천 명에서 1937년 20만 5천 명으로, 고등 교육 기관에 등록한 여성 수는 1933년 12만 8천 명에서 1938년 5만 1천 명으로 감소했다. 그러나 전쟁 중 남성이 군대에 입대해야 했기 때문에 1944년까지 여성이 고등 교육 시스템 등록자의 절반을 차지했다.

1941년 체조 연습을 하는 Bund Deutscher Mädel (독일 소녀 연맹)의 젊은 여성들


나치는 여성들이 강하고 건강하며 활력이 넘치는 모습을 기대했다. 땅을 경작하고 강한 아이들을 낳는 건장한 농촌 여성이 이상적인 여성으로 여겨졌고, 여성들은 야외 활동으로 인해 건강하고 햇볕에 그을린 모습으로 칭찬받았다. 나치 가치관을 주입하기 위한 조직들이 만들어졌는데, 1939년 3월 25일부터 10세 이상의 모든 어린이에 대한 히틀러 유겐트 가입이 의무화되었다. 히틀러 유겐트의 ''융마델붕트''(소녀 연맹) 부서는 10세에서 14세의 소녀들을 위한 것이었고, ''Bund Deutscher Mädel'' (BDM; 독일 소녀 연맹)은 14세에서 18세의 젊은 여성들을 위한 것이었다. BDM의 활동은 체육에 중점을 두었다.

나치 정권은 성 문제에 관한 자유로운 행동 규범을 장려했고, 사생아를 낳은 여성에게 동정적이었다.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문란이 증가했고, 미혼 군인들은 종종 여러 여성들과 동시에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군인의 아내들은 종종 부정 행위에 연루되었다. 성은 때때로 외국 노동자로부터 더 나은 일을 얻기 위한 상품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팸플릿은 독일 여성들에게 그들의 혈통에 대한 위험으로 외국인 노동자와의 성관계를 피하도록 촉구했다.

히틀러의 승인을 받아 힘러는 나치 정권의 새로운 사회가 특히 인종 순수성이 검증된 SS 대원들이 낳은 아이들에 대해 사생아 출산에 대한 낙인을 제거해야 한다고 의도했다. 그의 바람은 각 SS 가족이 4명에서 6명의 자녀를 갖는 것이었다. 1935년 힘러가 설립한 ''레벤스봄''(생명의 샘) 협회는 임신 중인 미혼모들을 수용하기 위한 일련의 산후 시설을 만들었다. 수용 전에 양쪽 부모 모두 인종 적합성 검사를 받았다. 그 결과 태어난 아이들은 종종 SS 가족에게 입양되었다. 이 시설들은 SS 대원과 나치당 대원의 아내들에게도 이용 가능했고, 이들은 곧 이용 가능한 자리의 절반 이상을 채웠다.

의학적 이유를 제외하고 낙태를 금지하는 기존 법률은 나치 정권에 의해 엄격하게 시행되었다. 1930년대 초 낙태 건수는 연간 3만 5천 건에서 1930년대 말에는 연간 2천 건 미만으로 감소했지만, 1935년에는 우생학적 이유로 낙태를 허용하는 법이 통과되었다.

8. 3. 건강

나치 독일은 강력한 금연 운동을 전개했는데, 1939년 프란츠 H. 뮬러의 선구적인 연구가 흡연과 폐암 사이의 인과관계를 증명했기 때문이다. 국가 보건국은 강연과 팸플릿 제작 등 흡연을 제한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많은 직장, 기차, 그리고 근무 중인 군인들에게는 흡연이 금지되었다. 정부 기관들은 석면과 살충제와 같은 다른 발암 물질을 통제하기 위해서도 노력했다. 일반적인 공중 보건 캠페인의 일환으로 상수도가 정화되었고, 소비재에서 납과 수은이 제거되었으며, 여성들에게는 정기적인 유방암 검진을 받도록 권장되었다.

정부 운영 건강 보험 계획이 있었지만, 1933년부터 유대인들은 보험 혜택을 받지 못했다. 같은 해, 유대인 의사들은 정부 보험 가입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1937년에는 유대인 의사들이 비유대인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1938년에는 의료 행위 권리가 완전히 박탈되었다.

1941년부터 수용소 수감자들에게 많은 유사과학적인 의학 실험이 행해졌다. 가장 악명 높은 의학 실험을 실시한 의사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SS-하우프트슈투름퓌러 요제프 멩겔레였다. 그의 많은 피해자들이 사망했다. 수용소 수감자들은 제약 회사에 의약품 테스트 및 기타 실험을 위해 판매되었다.

8. 4. 환경

나치 사회에는 동물권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동물원과 야생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정부는 동물과 환경 보호를 위해 여러 조치를 취했다. 1933년, 나치는 의학 연구에 허용되는 사항에 영향을 미치는 엄격한 동물 보호법을 제정했다. 그러나 이 법은 느슨하게 시행되었고, 생체 해부 금지에도 불구하고 내무부는 동물 실험 허가를 쉽게 발급했다.

괴링이 이끄는 국가 임업청은 산림 관리인들이 야생 동물에게 적합한 서식지를 보장하기 위해 다양한 나무를 심도록 요구하는 규정을 시행했고, 1933년 새로운 국가 동물 보호법이 제정되었다. 이 정권은 1935년 과도한 경제 개발로부터 자연 경관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 자연 보호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자연 보호 구역을 조성하기 위해 사유지를 수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고 장기 계획을 지원했다. 대기 오염을 억제하기 위한 형식적인 노력이 있었지만, 전쟁이 시작되자 거의 시행되지 않았다.

8. 5. 종교

1933년 나치가 권력을 장악했을 당시 독일 인구의 약 67%는 개신교, 33%는 로마 가톨릭 신자였으며, 유대인은 1% 미만이었다.[24] 오스트리아 합병 이후 실시된 1939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인구의 54%가 자신을 개신교, 40%가 로마 가톨릭, 3.5%가 갓글뢰비히(나치 종교 운동), 1.5%가 무종교라고 답했다.[25] 나치 독일은 샤를마뉴 탄생 1200주년 기념 대규모 축제와 같이 다양한 새로운 기독교 기념 행사를 제정했는데, 샤를마뉴는 주변 대륙 게르만족을 무력으로 기독교화한 프랑크 왕국의 황제였다.[26] 나치 선전은 히틀러를 그리스도와 같은 메시아, "기독교 모델에 따른 구원의 인물", "적그리스도로부터 세상을 해방시킬 인물"로 묘사했다.[27]

강제적 동일화 과정에서 히틀러는 독일의 28개 기존 개신교 주 교회로부터 통합된 개신교 제국 교회를 만들려고 시도했다.[28] 나치 지지자인 루트비히 뮐러가 제국 주교로 임명되었고, 나치 지지 압력 단체인 독일 기독교인이 새로운 교회를 장악했다.[29] 그들은 유대인 기원 때문에 구약 성서에 반대했고, 개종한 유대인들을 교회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요구했다.[30] 목사 마르틴 니몰러는 일부 성직자들이 나치 정권에 반대하는 고백 교회를 결성하여 대응했다.[31] 1935년 고백 교회 총회가 나치의 종교 정책에 항의하자, 700명의 목사가 체포되었다.[32] 뮐러가 사임하자 히틀러는 한스 케를을 교회 문제 담당 장관으로 임명하여 개신교 통제 노력을 계속했다.[33] 1936년 고백 교회 사절단은 종교 박해와 인권 침해에 대해 히틀러에게 항의했고, 수백 명의 목사가 추가로 체포되었다.[32][33] 교회는 계속 저항했고, 1937년 초 히틀러는 개신교 교회를 통합하려는 희망을 포기했다.[32] 니몰러는 1937년 7월 1일에 체포되어 다음 7년 동안 대부분을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와 다하우 강제수용소에서 보냈다.[34] 신학 대학이 폐쇄되었고, 다른 개신교 교파의 목사와 신학자들도 체포되었다.[32]

1940년 나치가 정권 반대 성직자들을 위해 전용 성직자 막사를 설치했던 다하우 강제수용소의 수용소 막사
[35]

나치가 권력을 장악한 후 독일 가톨릭 교회에 대한 박해가 뒤따랐다.[36] 히틀러는 가톨릭계 바이에른 인민당과 가톨릭 중앙당의 관리들을 체포하여 정치적 가톨릭주의를 신속하게 제거했으며, 이들은 다른 모든 나치가 아닌 정당들과 함께 7월까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37] 1933년, 바티칸과의 ''라이히스콘코르다트''(제국 협약) 조약이 체결되었으나, 독일에서 교회에 대한 지속적인 괴롭힘이 이어졌다.[31] 이 조약은 정권이 가톨릭 기관의 독립을 존중하고 성직자의 정치 참여를 금지해야 한다고 규정했다.[38] 그러나 히틀러는 협약을 일상적으로 무시하고 기능이 엄격하게 종교적인 것이 아닌 모든 가톨릭 기관을 폐쇄했다.[39] 성직자, 수녀, 평신도 지도자들이 표적이 되었고, 그 후 몇 년 동안 수천 명이 체포되었는데, 종종 위조된 외환 밀수나 부도덕 혐의였다.[40] 1934년 긴 칼의 밤 암살에서 몇몇 가톨릭 지도자들이 표적이 되었다.[41] 대부분의 가톨릭 청소년 단체는 해산을 거부했고, 히틀러 청소년단 지도자 발두르 폰 시라흐는 단원들에게 거리에서 가톨릭 소년들을 공격하도록 부추겼다.[42] 선전 캠페인에서는 교회가 부패했다고 주장했고, 공개 집회에 대한 제한이 가해졌으며, 가톨릭 출판물은 검열을 받았다. 가톨릭 학교는 종교 교육을 줄여야 했고, 십자가는 관공서에서 제거되었다.

비오 11세는 1937년 고난 주일에 독일로 밀반입되어 모든 설교단에서 낭독된 ''"미트 브렌넨데 조르게"''("타는 듯한 염려와 함께") 회칙을 통해 정권의 교회에 대한 체계적인 적대감을 규탄했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괴벨스는 정권의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단속과 선전을 강화했다. 교파 학교의 등록이 급격히 감소했고, 1939년까지 모든 그러한 학교는 해산되거나 공공 시설로 전환되었다. 이후 가톨릭 항의에는 1942년 3월 22일 독일 주교들의 "기독교와 교회에 대한 투쟁"에 관한 사목 서한이 포함되었다. 나치 시대에 가톨릭 사제의 약 30%가 경찰의 징계를 받았다. 광범위한 보안망이 성직자들을 감시했고, 사제들은 자주 고발당하거나 체포되거나 다하우의 전용 성직자 막사를 포함한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1939년에 합병된 폴란드 지역에서는 나치가 잔혹한 탄압과 가톨릭 교회의 체계적인 해체를 선동했다.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나치당 외교국 국장이자 히틀러가 임명한 나치 독일의 문화 및 교육 지도자)는 가톨릭교를 나치의 주요 적 중 하나로 여겼다. 그는 "독일에 수입된 외국 기독교 신앙의 절멸"을 계획했고, 모든 교회, 대성당, 예배당에서 성경십자가를 ''나의 투쟁''과 욱일승천기로 대체하려고 했다. 다른 기독교 종파들도 표적이 되었고, 나치당 관방부의 마르틴 보르만은 1941년 "국가 사회주의와 기독교는 화해할 수 없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9. 문화

나치 독일은 '민중공동체''(Volksgemeinschaft)라는 개념을 장려했는데, 이는 인종적 순수성에 기반한 계급 없는 사회를 건설하고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투쟁과 정복을 준비해야 한다는 목표였다.

1933년 국민계몽선전부의 통제하에 국가문화원(Reichskulturkammer)이 조직되었다. 국가문화원은 영화, 라디오, 신문, 미술, 음악, 연극, 문학과 같은 문화 생활 전반을 통제하기 위한 하부 기구를 두었고, 해당 직종 종사자는 각 조직에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했다. 유대인과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은 예술 분야에서 일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많은 이들이 이민을 갔다. 책과 대본은 출판 전 국민계몽선전부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문화 매체가 선전 목적으로만 독점 사용되면서, 문화적 기준은 저하되었다.



1930년대에 독일에서 라디오가 인기를 얻었으며, 1939년까지 가구의 70% 이상이 수신기를 소유하고 있었다. 1933년 7월까지 라디오 방송국 직원들은 좌파 및 기타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정리되었다.[4]

9. 1. 문화 정책

이 체제는 인종적 순수성에 기반한 계급 없는 사회를 건설하고,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전쟁, 정복 및 투쟁을 준비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는 '민중공동체''(Volksgemeinschaft)라는 개념을 장려했다. 1933년 독일 노동 전선은 ''Kraft durch Freude''(KdF) 조직을 설립했다. 이 조직은 수만 개의 사적으로 운영되는 레크리에이션 클럽을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순항, 휴가지, 콘서트와 같은 엄격하게 통제된 휴가와 오락을 제공했다.[1][2]

1933년 9월 국민계몽선전부의 통제하에 ''국가문화원''(Reichskulturkammer)이 조직되었다. 영화, 라디오, 신문, 미술, 음악, 연극, 문학과 같은 문화 생활의 여러 측면을 통제하기 위해 하부 기구가 설립되었다. 이러한 직종의 구성원은 각 조직에 가입해야 했다. 유대인과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예술 분야에서 일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민을 갔다. 책과 대본은 출판 전에 국민계몽선전부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이 체제가 문화적 매체를 선전으로만 독점적으로 사용하려고 했기 때문에 기준이 저하되었다.[3]

1930년대에 독일에서 라디오가 인기를 얻었으며, 1939년까지 가구의 70% 이상이 수신기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는 다른 어떤 국가보다 많았다. 1933년 7월까지 라디오 방송국 직원들은 좌파 및 기타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정리되었다.[4] 권력 장악 직후에는 선전과 연설이 일반적인 라디오 방송이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괴벨스는 청취자들이 오락을 위해 외국 방송국으로 눈을 돌리지 않도록 더 많은 음악을 방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5]

국가 제국 언론부는 신문을 포함한 다른 매체들을 통제하여 신문과 출판사들을 폐쇄하거나 매입했다. 1939년까지 신문과 잡지의 3분의 2 이상을 국민계몽선전부가 직접 소유하게 되었다.[7] 나치당의 일간 신문인 ''민족관찰자(Völkischer Beobachter)''는 로젠베르크가 편집했으며, 그는 북유럽 우월성을 주장하는 인종 이론 서적 ''20세기의 신화(The Myth of the Twentieth Century)''를 저술하기도 했다.[8] 괴벨스는 통신사를 통제했고 독일의 모든 신문이 정권에 우호적인 내용만 보도하도록 강요했다. 괴벨스는 국민계몽선전부를 통해 매주 24개의 지시문을 발표하여 어떤 뉴스를 보도하고 어떤 각도로 보도해야 하는지 자세히 지시했으며, 특히 생략해야 할 내용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신문이 지시를 충실히 따랐다.[9] 신문 독자 수는 내용의 질 저하와 라디오 인기 급증으로 인해 감소했다.[10] 사람들이 공식 채널 이외의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면서 전쟁 말기에는 선전의 효과가 떨어졌다.[11]

많은 저술가들이 국외로 떠났고, 일부는 망명 중에 정권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 괴벨스는 남아 있는 저자들이 게르만 신화와 피와 토양(Blut und Boden)의 개념을 다룬 책에 집중할 것을 권고했다. 1933년 말까지 유대인 저자의 책이나 유대인 등장인물이 등장하는 책을 중심으로 1,000권이 넘는 책이 나치 정권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었다.[12] 나치의 책 사르기가 일어났으며, 1933년 5월 10일 밤에만 19건의 사건이 발생했다.[6]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헬렌 켈러(Helen Keller), 알프레드 케르(Alfred Kerr),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Erich Maria Remarque), 업튼 싱클레어(Upton Sinclair), 야코프 바서만(Jakob Wassermann), H. G. 웰스(H. G. Wells), 에밀 졸라(Émile Zola) 등 수십 명의 저술가의 수만 권의 책이 공개적으로 불태워졌다. 평화주의 작품과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가치를 주장하는 문학, 바이마르 공화국을 지지하는 글, 유대인 저자가 쓴 글 등이 파괴 대상이 되었다.[3]

9. 2. 검열

신문을 포함한 다른 매체들은 국가의 통제를 받았다. 제국 언론부는 신문과 출판사들을 폐쇄하거나 매입했다. 1939년까지 신문과 잡지의 3분의 2 이상을 선전부가 직접 소유하게 되었다.[1] 나치당의 일간 신문인 ''민족관찰자(Völkischer Beobachter)''는 로젠베르크가 편집했으며, 그는 북유럽 우월성을 주장하는 인종 이론 서적 ''20세기의 신화(The Myth of the Twentieth Century)''를 저술하기도 했다.[2] 괴벨스는 통신사를 통제했고 독일의 모든 신문이 정권에 우호적인 내용만 보도하도록 강요했다. 괴벨스는 선전부를 통해 매주 24개의 지시문을 발표하여 어떤 뉴스를 보도하고 어떤 각도로 보도해야 하는지 자세히 지시했으며, 특히 생략해야 할 내용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신문이 지시를 충실히 따랐다.[3] 신문 독자 수는 내용의 질 저하와 라디오 인기 급증으로 인해 감소했다.[4] 사람들이 공식 채널 이외의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면서 전쟁 말기에는 선전의 효과가 떨어졌다.[5]

많은 저술가들이 국외로 떠났고, 일부는 망명 중에 정권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 괴벨스는 남아 있는 저자들이 게르만 신화와 피와 토양(Blut und Boden)의 개념을 다룬 책에 집중할 것을 권고했다. 1933년 말까지 유대인 저자의 책이나 유대인 등장인물이 등장하는 책을 중심으로 1,000권이 넘는 책이 나치 정권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었다.[6] 나치의 책 사르기가 일어났으며, 1933년 5월 10일 밤에만 19건의 사건이 발생했다.[7]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헬렌 켈러(Helen Keller), 알프레드 케르(Alfred Kerr),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Erich Maria Remarque), 업튼 싱클레어(Upton Sinclair), 야코프 바서만(Jakob Wassermann), H. G. 웰스(H. G. Wells), 에밀 졸라(Émile Zola) 등 수십 명의 저술가의 수만 권의 책이 공개적으로 불태워졌다. 평화주의 작품과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가치를 주장하는 문학, 바이마르 공화국을 지지하는 글, 유대인 저자가 쓴 글 등이 파괴 대상이 되었다.[8]

9. 3. 건축과 예술

나치 독일은 ''민중공동체''(Volksgemeinschaft)라는 개념을 장려했다. 이는 인종적 순수성에 기반한 계급 없는 사회를 건설하고,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투쟁과 정복을 준비해야 한다는 목표였다.[1] 1933년 독일 노동 전선은 ''Kraft durch Freude''(KdF) 조직을 설립하여 수만 개의 레크리에이션 클럽을 장악하고, 휴가와 오락을 엄격하게 통제했다.[2]

1933년 9월, ''국가문화원''(Reichskulturkammer)이 선전부 통제하에 조직되었다. 영화, 라디오, 신문, 미술, 음악, 연극, 문학 등 문화 생활 전반을 통제하기 위한 하부 기구가 설립되었고, 해당 직종 종사자는 각 조직에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했다. 유대인과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은 예술 분야에서 일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많은 이들이 이민을 갔다. 책과 대본은 출판 전 선전부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문화적 매체가 선전 목적으로만 독점 사용되면서, 문화적 기준은 저하되었다.[3]

베를린 재건 계획에는 넓은 대로 양쪽 끝에 건설될 '''인민회관(Volkshalle)'''(인민회관)과 개선문이 포함되어 있었다.


히틀러는 건축에 개인적인 관심을 가지고 파울 트로스트(Paul Troost), 알베르트 슈페어(Albert Speer)와 협력하여 신고전주의 양식을 기반으로 한 로마 건축 스타일의 공공 건물을 건설하였다.[4] 슈페어는 뉘른베르크의 나치 당 대회장과 베를린의 새로운 총통 관저 건물과 같은 인상적인 구조물들을 건설하였다.[5] 히틀러의 베를린 재건 계획에는 로마 판테온을 본뜬 거대한 돔과 파리 개선문(Arc de Triomphe)보다 두 배 이상 높은 개선문이 포함되었으나, 실제로 건설되지는 않았다.[6]

히틀러는 추상 미술, 다다이즘, 표현주의, 근대 미술을 퇴폐적이라고 규정하고, 이러한 믿음은 정책의 근거가 되었다.[7] 1933년 많은 미술관 관장들이 해임되고 나치 당원들로 교체되었다.[8] 약 6,500점의 근대 미술 작품이 박물관에서 제거되고 나치 심사위원회가 선정한 작품들로 대체되었다.[9] 1935년까지 16개 도시에서 "예술의 퇴폐"와 같은 제목으로 거부된 작품들의 전시회가 열렸다. 요제프 괴벨스가 주최한 퇴폐 예술 전람회는 1937년 7월부터 11월까지 뮌헨에서 개최되어 200만 명이 넘는 관람객을 끌어들이며 큰 인기를 얻었다.[10]

1933년 11월,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는 '''국가음악회(Reichsmusikkammer)''' 회장으로 임명되었다.[11] 다른 예술 형식과 마찬가지로, 나치는 인종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음악가들을 배척했고, 현대적이거나 무조음악적인 음악을 불쾌하게 여겼다.[12] 재즈는 특히 부적절하고 외국적인 것으로 간주되었고, 외국 재즈 음악가들은 추방당했다.[12] 히틀러는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의 음악을 선호했으며, 1933년부터 1942년까지 매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참석했다.[12]

9. 4. 영화

레니 리펜슈탈(촬영감독 뒤) 1936년 하계 올림픽 촬영 현장


1930년대와 1940년대 독일에서는 영화가 인기였으며, 1942년, 1943년, 1944년에는 관객 수가 10억 명이 넘었다.[13] 1934년까지 독일의 통화 수출 제한 규정으로 인해 미국 영화 제작자들은 수익을 미국으로 가져갈 수 없게 되어 주요 영화 스튜디오들은 독일 지사를 폐쇄했다. 반유대주의적 내용으로 인해 다른 국가에서 상영이 불가능해지면서 독일 영화의 수출은 급감했다. 우니베르숨 필름 AG와 토비스는 가장 큰 두 개의 영화 회사였는데 선전부에 매각되었고, 1939년까지 대부분의 독일 영화를 제작했다. 제작물이 항상 공공연하게 선전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일반적으로 정치적 함의를 지녔고, 주제와 내용에 관한 당의 노선을 따랐다. 각본은 사전 검열을 받았다.[14]

레니 리펜슈탈의 ''승리의 의지''(1935)—1934년 뉘른베르크 집회를 기록—과 ''올림피아''(1938)—1936년 하계 올림픽을 다룸—은 카메라 움직임과 편집 기법에 있어 후대 영화에 영향을 준 선구적인 작품이다. 망원 렌즈와 트랙에 장착된 카메라와 같은 새로운 기술이 사용되었다. 두 영화 모두 미학적 가치가 나치 이념 선전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15][16]

10. 유산

히틀러와 나치가 주창한 정치 프로그램은 제2차 세계 대전을 초래하여 유럽을 황폐화시키고 빈곤하게 만들었다. 독일 자체는 Stunde Nullde(제로 아워)로 특징지어지는 대규모 파괴를 겪었다.[5] 제2차 세계 대전 중 민간인 사망자 수는 전쟁 역사상 전례가 없었다.[6] 결과적으로 나치 이데올로기와 그 정권이 취한 행동은 거의 보편적으로 심각한 부도덕으로 간주된다.[7] 역사가, 철학자, 정치인들은 종종 히틀러와 나치 정권을 묘사하기 위해 ""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8]

나치 독일은 미디어와 학계에서 지속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 에번스는 이 시대가 "그 살인적인 인종차별주의가 전 인류에게 경고로 서 있기 때문에 거의 보편적인 호소력을 발휘한다"고 언급했지만,[9] 젊은 신나치들은 나치 상징이나 슬로건이 제공하는 충격적인 가치를 즐긴다.[10]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나치 상징의 표시나 사용이 불법이다.[11] 나치 독일은 서독(독일 연방 공화국), 동독(독일 민주 공화국),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세 국가로 계승되었다.[12]

10. 1. 뉘른베르크 재판

1945년 11월부터 1946년 10월까지 연합국은 뉘른베르크 재판을 열어 나치 고위 관리 23명을 전쟁범죄 혐의로 기소했다. 이들은 범죄 공모, 평화에 대한 범죄, 전쟁범죄, 인도에 대한 범죄 혐의로 기소되었다.[1] 3명을 제외한 전원이 유죄 판결을 받았고, 12명은 사형을 선고받았다.[2]

뉘른베르크 재판의 피고석에 앉은 피고인들


1946년부터 1949년까지 후속 뉘른베르크 재판이 12건 열려 184명이 기소되었다.[1] 같은 기간 연합국은 3,887건의 사건을 조사해 489건을 재판에 회부했다. 그 결과 1,426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고, 이 중 297명은 사형, 279명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며 나머지는 감형되었다. 사형 선고의 약 65%가 집행되었다.[3] 폴란드는 다른 국가보다 전쟁범죄 조사에 적극적이어서 아우슈비츠 수용소 직원 789명 중 673명을 기소했다.[4]

10. 2. 탈나치화



연합국은 1945년 11월부터 1946년 10월까지 뉘른베르크 재판을 열어 나치 고위 관리 23명을 전쟁범죄로 재판했다. 이들은 범죄 공모, 평화에 대한 범죄, 전쟁범죄, 인도에 대한 범죄 혐의로 기소되었다. 3명을 제외한 전원이 유죄 판결을 받았고, 12명은 사형을 선고받았다.[1] 1946년부터 1949년까지 후속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184명의 피고인이 재판을 받았다.[2]

1946년부터 1949년까지 연합국은 3,887건을 조사했고, 489건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 결과 1,426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고, 297명은 사형, 279명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며 나머지는 감형받았다. 사형 선고의 약 65%가 집행되었다.[3] 폴란드는 다른 국가보다 적극적으로 전쟁범죄를 조사하여, 아우슈비츠 수용소 직원 789명 중 673명을 기소했다.[4]

히틀러와 나치의 정치 프로그램은 세계 대전을 초래하여 유럽을 황폐화시키고 빈곤하게 만들었다. 독일은 Stunde Nullde(제로 아워)로 특징지어지는 대규모 파괴를 겪었다.[5] 제2차 세계 대전 중 민간인 사망자 수는 전쟁 역사상 전례가 없었다.[6] 결과적으로 나치 이데올로기와 그 정권의 행동은 거의 보편적으로 심각한 부도덕으로 간주된다.[7] 역사가, 철학자, 정치인들은 히틀러와 나치 정권을 묘사할 때 ""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8] 나치 독일은 미디어와 학계에서 지속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 에번스는 이 시대가 "살인적인 인종차별주의가 전 인류에게 경고로 남아있기 때문에 거의 보편적인 호소력을 발휘한다"고 언급했지만,[9] 젊은 신나치들은 나치 상징이나 슬로건이 제공하는 충격적인 가치를 즐긴다.[10]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나치 상징의 표시나 사용이 불법이다.[11]

연합국이 시작한 탈나치화 과정은 의학, 공학 등 분야의 전문가 필요성이 커서 부분적으로만 성공했다. 그러나 나치적 견해는 좋지 않게 여겨졌고, 그러한 견해를 표명한 사람들은 직장에서 해고되는 경우가 많았다.[12] 전후 초기부터 1950년대까지 독일인들은 전시 경험에 대해 침묵했고, 전쟁범죄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더라도 공동의 죄책감을 느꼈다.[13]

1961년 아돌프 아이히만 재판과 1978년 방영된 텔레비전 미니시리즈 ''홀로코스트''는 많은 독일인들에게 Vergangenheitsbewältigungde(과거와의 씨름) 과정을 전면에 내세웠다.[14] 1970년대부터 나치 독일 연구가 학교 교육과정에 도입되면서 사람들은 가족 구성원의 경험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 시대에 대한 연구와 그 실수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려는 의지는 독일에서 강력한 민주주의 발전으로 이어졌지만, 반유대주의와 신나치 사상의 잔류하는 암류가 남아 있다.[15]

10. 3. 현대 독일에서의 나치즘

현대 독일에서 나치즘과 관련된 상징이나 슬로건의 사용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11] 나치 독일은 서독, 동독, 오스트리아로 계승되었다.[12]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연합국은 탈나치화를 추진했지만, 전문 인력 부족으로 부분적인 성공에 그쳤다.[13] 나치 관점은 비판받았고, 그러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종종 해고되었다.[13] 전후 초기부터 1950년대까지 독일인들은 전쟁 경험에 대해 침묵하며 공동의 죄책감을 느꼈다.[14]

1961년 아돌프 아이히만 재판과 1978년 TV 미니시리즈 ''홀로코스트'' 방영은 많은 독일인들이 과거와 직면하는 Vergangenheitsbewältigung|과거와의 씨름de 과정을 시작하게 했다.[15] 1970년대부터 나치 독일 연구가 학교 교육과정에 도입되면서, 사람들은 가족 구성원의 경험을 연구하기 시작했다.[16] 이러한 노력은 독일에서 강력한 민주주의 발전으로 이어졌지만, 반유대주의와 신나치 사상의 잔재는 여전히 남아있다.[16]

2017년 쾨르베르 재단 조사에 따르면, 조사 대상 14~16세 청소년 중 47%만이 아우슈비츠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17] 언론인 앨런 포세너는 독일 영화와 텔레비전이 국가 역사를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한 것을 국가의 "증가하는 역사적 기억 상실증"의 부분적인 원인으로 지적했다.[18]

참조

[1] 웹사이트 ドイツ連邦共和国国歌 https://japan.diplo.[...] ドイツ連邦共和国大使館・総領事館 2022-03-14
[2] 기타 국가원수에 관한 법률이 발효한 날
[3] 이미지 Erlass RK 7669 E https://commons.wiki[...]
[4] 신문기사 ナチス独政府遂に海運把握 : 二大会社の実権を奪い外国船舶を駆逐す {{新聞記事文庫|url|0100210[...] 神戸大学附属図書館 2019-02-13
[5] 신문기사 天声人語 {{新聞記事文庫|url|0100251[...] 神戸大学附属図書館 2019-02-13
[6] 신문기사 長期総力戦の遂行に農村の役割頗る大 : 谷萩大佐 内原訓練所で力説 {{新聞記事文庫|url|0100103[...] 神戸大学附属図書館 2019-02-13
[7] 서적 Literatur in Nazi-Deutschland. Ein biographisches Lexikon. Europa Verlag
[8] 웹사이트 NS-Staat http://www.bpb.de/th[...] 연방정치교육센터 2019-02-13
[9] 웹사이트 Nationalsozialismus, der https://www.dwds.de/[...] DWDS 2022-08-23
[10] 기타 루돌프 하베스트
[11] 웹사이트 NHitlerdeutschland, das https://www.dwds.de/[...] DWDS 2022-08-23
[12] 기타 라인하르트 지크문트-슐체
[13] 서적 昭和ニュース辞典第7巻 昭和14年-昭和16年 毎日コミュニケーションズ 1994
[14] 서적 제2차 세계대전 히틀러의 전투 분게이슌주 1992-08
[15] 웹사이트 Watch Web of Make Believe: Death, Lies and the Internet Netflix Official Site https://www.netflix.[...] 2022-06-23
[16] 웹사이트 Ukraine’s ‘Neo-Nazi’ Battalion Is Greasing Bullets in Pig Fat for Rus… https://archive.ph/5[...] 2022-03-08
[17] 웹사이트 극우 극단주의자의 위협 고조와 국제적 연계 국제테러리즘 요람 2021 공안조사청 https://www.moj.go.j[...] 2022-05-20
[18] 뉴스 아마존과 구글, 네오나치와 백인우월주의 상품 삭제 BBC 방송 지적 받아 https://www.bbc.com/[...] 2022-05-20
[19] 웹사이트 전 네오나치가 백인우월주의자의 탈퇴를 돕다 “배제”가 아닌 “관계”를 아사히신문 GLOBE+ https://globe.asahi.[...] 2022-05-20
[20] 뉴스 나는 네오나치였다 흑인 여성과 사랑에 빠지기 전까지 https://www.bbc.com/[...] 2022-05-20
[21] 웹사이트 우크라이나: EU는 정상회담에서 LGBT의 권리에 대해 다루어야 한다 https://www.hrw.org/[...] 2013-02-21
[22] 웹사이트 극우 극단주의자의 위협 고조와 국제적 연계 국제테러리즘 요람 2021 공안조사청 https://www.moj.go.j[...] 2022-05-20
[23] 뉴스 U.S. Considers C14 And National Corps Nationalist Hate Groups https://ukranews.com[...] Ukrainian News Agency 2022-02-27
[24] 서적 The German Economy in the Twentieth Century Routledge 1990
[25] 웹사이트 히틀러의 경제학 http://ww1.m78.com/t[...] 별궁 온랑 2019-02-13
[26] 서적 제2차 세계대전 히틀러의 전투 분게이슌주 1992-07
[27] 논문 토트 아우토반 히틀러: 아우토반 이야기 https://www.tsukuba-[...]
[28] 논문 양 세계대전 간기 독일에서의 노동사 연구의 “신 전개” https://oisr-org.ws.[...]
[29] 논문 양 세계대전 간기 독일에서의 노동사 연구의 “신 전개” https://oisr-org.ws.[...]
[30] 논문 토트 아우토반 히틀러: 아우토반 이야기 https://www.tsukuba-[...]
[31] 서적 검증 나치는 “좋은 일”도 했는가?
[32] 기타 야마나카 케이이치/형법 I/32P
[33] 학술지 홀로코스트를 상기하다 로마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새로운 상상을 둘러싼 고찰 https://cir.nii.ac.j[...] 도요대학 사회학부 기요
[34] 웹사이트 유럽 거주 로마족(집시)의 제노사이드, 1939~1945년 https://encyclopedia[...] 2024-11-29
[35] 웹사이트 제3제국에서의 동성애자의 박해 홀로코스트 백과사전 https://encyclopedia[...] 2024-11-29
[36] 논문 第二次大戦下の迫害と子供 日本フランス語フランス文学会関東支部
[37] 논문 フリッツ・バウアーとアウシュヴィッツ裁判 : 「刑法による過去の克服」が提起する理論的課題 https://cir.nii.ac.j[...] 立命館大学法学会
[38] 논문 抵抗はどこまで可能だったのか : その現実と戦後の解釈 https://cir.nii.ac.j[...] 南山大学ヨーロッパ研究センター
[39] 웹사이트 The Missing Hitler Orders https://codoh.com/li[...]
[40] 서적 ヒルバーグユダヤ上
[41] 서적
[4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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