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볼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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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볼리 전투는 1797년 1월 14일부터 15일까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군과 요제프 알빈치 장군이 지휘하는 오스트리아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알빈치 장군은 5개 사단으로 나뉜 2만 8천 명의 병력으로 주베르 장군의 프랑스군을 공격하려 했으나, 나폴레옹은 앙드레 마세나의 지원군을 투입하여 트라바소 고지대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군의 전열이 갖춰지지 않은 틈을 타 기병대를 활용한 협공으로 승리했다. 이 전투로 북 이탈리아에 있던 오스트리아군은 궤멸되었고, 나폴레옹은 만토바를 함락시키며 큰 승리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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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볼리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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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투 | 리볼리 전투 |
| 전쟁 |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중 프랑스 혁명 전쟁의 이탈리아 전역 |
| 날짜 | 1797년 1월 14일 - 15일 |
| 장소 | 리볼리 베로네세, 베네치아 공화국 |
| 결과 | 프랑스의 승리 |
| 교전 세력 | |
| 교전국 1 | 프랑스 공화국 |
| 교전국 2 | 합스부르크 군주국 |
| 지휘관 | |
| 프랑스 지휘관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바르텔레미 카트린 주베르 앙드레 마세나 가브리엘 베낭스 레 루이 알렉상드르 베르티에 샤를 르클레르 앙투안 샤를 루이 드 라살 오노레 비알 |
| 오스트리아 지휘관 | 요제프 알빈치 요제프 오츠카이 폰 오츠코 안톤 립타이 데 키슈팔루드 프란츠 요제프 드 뤼지냥 후작 하인리히 15세 로이스 추 그라이츠 공자 페터 폰 쿠오스다노비치 요제프 필리프 부카소비치 |
| 병력 규모 | |
| 프랑스군 | 22,000명 |
| 오스트리아군 | 28,000명 |
| 피해 규모 | |
| 프랑스군 | 3,200–5,000명 |
| 오스트리아군 | 12,000–14,300명 |
2. 배경
알빈치 장군은 가르다 호수 동쪽 산에 머무르고 있던 주베르 장군의 부대를 압도하여 만토바 북부로 향하는 진로를 확보하고, 수적 우위로 나폴레옹 휘하의 소규모 이탈리아 군(Army of Italy)을 격파하려 하였다. 그러나 주베르는 위치를 고수했고, 나폴레옹은 마세나 휘하 분대를 파견하여 주베르를 지원, 리볼리 북부 트라바소(Trambasore) 고지대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전투는 알빈치의 병력 집중 시도와 프랑스군 지원군 움직임의 성패에 따라 결정될 상황이었다.[1]
2. 1. 오스트리아군의 전략
알빈치 장군은 분산되어 있던 5개 부대를 집결하여 가르다 호수 동쪽 산에 머무르고 있던 주베르 장군의 부대를 압도하려 하였다. 이를 통해 만토바 북부로 향하는 진로를 확보하고, 수적 우위로 밀어붙여 나폴레옹 휘하의 소규모 이탈리아군을 격파하려 하였다. 그러나 주베르는 자신의 위치를 고수했고, 나폴레옹은 마세나 휘하의 분대를 파견하여 주베르를 지원하도록 하여 트라바소(Trambasore) 고지대에 있는 리볼리 북부의 유리한 지형에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전투는 병력을 집중시키려 했던 알빈치의 노력이 성공하느냐, 아니면 프랑스군의 지원군 움직임이 성공하느냐에 따라 결정될 상황이었다.[1]알빈치의 계획은 28,000명의 병력을 5개 부대로 집중시켜 가르다 호 동쪽 산악 지대에 있는 주베르를 기습하여 제압하고, 그로 인해 오스트리아군이 우세한 병력으로 만토바 북쪽의 탁 트인 지역으로 진출하여 보나파르트의 소규모 이탈리아군을 격파하는 것이었다. 알빈치는 1월 12일 주베르의 10,000명에게 공격을 가했다. 그러나 주베르는 이를 막아냈고, 이후 베르티에의 지원을 받았으며, 1월 14일 새벽 2시에는 보나파르트가 마세나 사단의 병력을 이끌고 와서 트람바소레 고지대의 리볼리 바로 북쪽의 유리한 지점에 방어선을 구축하려는 주베르를 지원했다. 이 전투는 분산된 알빈치의 부대 집중 시도와 프랑스 증원군의 도착 사이의 대결이 될 것이었다.[1]
2. 2. 프랑스군의 대응
알빈치는 28,000명의 병력을 5개 부대로 나누어 가르다 호 동쪽 산악 지대에 있는 주베르를 기습, 제압하려 했다. 이를 통해 오스트리아군은 우세한 병력으로 만토바 북쪽의 탁 트인 지역으로 진출하여 보나파르트의 소규모 이탈리아군을 격파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1월 12일, 알빈치는 주베르가 이끄는 10,000명의 부대를 공격했다. 그러나 주베르는 공격을 막아냈고, 루이 알렉상드르 베르티에의 지원을 받았다. 1월 14일 새벽 2시, 보나파르트는 앙드레 마세나 사단의 병력을 이끌고 리볼리 북쪽 트람바소레 고지대의 유리한 지점에 방어선을 구축하려는 주베르와 합류했다. 이 전투는 분산된 알빈치의 부대 집중 시도와 프랑스 증원군의 도착 사이의 대결이 될 것이었다.3. 전투 서열
리볼리 전투/전투 서열을 참조하십시오.
4. 전투 경과
알빈치 장군은 분산된 5개 부대를 집결하여 가르다 호수 동쪽 산에 주둔하던 주베르 부대를 압도하려 했다. 이를 통해 만토바 북쪽 진로를 확보하고,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나폴레옹 휘하의 소규모 이탈리아 군을 격파하려 했다. 그러나 주베르는 위치를 고수했고, 나폴레옹은 마세나 부대를 파견하여 주베르를 지원, 트라바소(Trambasore) 고지대 리볼리 북쪽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전투는 알빈치의 병력 집중과 프랑스군 증원 부대 도착 간의 경쟁 형태가 되었다.[1]
4. 1. 1월 14일: 격전의 시작
14일 아침, 로이스 공(Prince Reuss) 휘하의 오스트리아 부대가 리볼리 협곡을 통해 프랑스군의 우측으로 우회하려고 시도하면서 트라바소 고지대를 따라 격전이 벌어졌다. 11시 경, 상황은 나폴레옹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오스트리아 용기병대(Dragoons)는 협곡을 통해 진군해오고 있었고, 뤼지낭(Lusignan) 휘하의 또 다른 오스트리아군이 리볼리 남쪽에서 프랑스군의 퇴로를 차단했다. 알빈치는 트라바소 고지대에서 승기를 잡고 의기양양해진 휘하 대대를 이끌고 앞으로 나갔지만, 이들은 전투와 험한 지형으로 인해 전열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군이 전열을 갖추지 않은 채 진군해오는 치명적인 실수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베르티에, 나폴레옹, 그리고 주베르는 서로의 휘하 병력을 통합하여 협공을 펼쳤다. 프랑스군 대포 15문이 오스트리아 용기병대를 향해 포격을 시작했고, 샤를 르클레르(Charles Leclerc)와 앙투안 샤를 루이 라살(Antoine Charles Louis Lasalle)가 이끄는 기병대의 지원을 받아 두 개의 종대가 전진하기 시작했다. 하나는 협곡에, 다른 하나는 트라바소 고지대에 있었다. 협곡에 꽉 들어차 있던 오스트리아군 부대는 오스트리아 용기병대가 프랑스군의 포격을 이기지 못하고 퇴각해오자 혼란에 빠져 궤주하기 시작했다. 고지대에 분산되어 있던 오스트리아 보병대는 프랑스군 기병대가 그들 한가운데로 난입해 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루이 레 휘하 부대와 클로드 빅토르 휘하 여단이 전장에 도착하여 남부에서 프랑스군을 저지하고 있던 뤼지낭 휘하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였고, 여기서 프랑스군은 포로 3,000명을 얻었다.
4. 2. 1월 15일: 프랑스의 승리
1월 14일 아침, 알빈치는 주베르의 부대와 교전을 시작했다. 알빈치는 카프리노와 산 마르코 예배당 사이에 오스트리아군 3개 부대를 통합했다. 프란츠 요제프 데 루시냥의 여단은 몬테 발도 북쪽으로 진격했고, 페터 비투스 폰 쿠스다노비치와 요제프 필리프 부카소비치의 병력은 아디제강 양쪽 길로 내려오고 있었다. 주베르는 새벽 전, 리볼리에서 인카날레로 가는 길을 따라 이동하면서 프랑스군을 이끌고 산 마르코 예배당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공격하여 몰아냈다.[3]오전 9시에 사무엘 코블로스와 안톤 립테이의 오스트리아 여단은 트람바소레 고지에서 프랑스군에게 반격을 가했다. 하인리히 폰 로이스-플라우엔 공작의 부대는 리볼리 협곡을 통해 프랑스군의 오른쪽을 돌파하려 했다. 한편, 프랑스군의 오른쪽 측면에서 부카소비치는 아디제강 동쪽 둑을 따라 진격하여 오스테리아 맞은편에 포대를 설치했다. 그의 포격과 쿠스다노비치의 압박으로 프랑스군은 오스테리아 마을에서 리볼리 고원으로 밀려났다. 오전 11시쯤, 보나파르트의 입장은 절망적이 되어가고 있었다. 루시냥 휘하의 오스트리아 부대가 리볼리 남쪽으로 퇴각하는 길을 차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나파르트는 퇴각로를 다시 열기 위해 가르다호에서 새로 도착한 마세나의 제18 혼성 여단("더 브레이브")에 의지했다. 한편, 알빈치는 트람바소레 고지에서 승리한 대대에게 전진을 촉구했지만, 그들은 전투와 거친 지형으로 인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다.
보나파르트는 제18 혼성 여단을 루시냥을 저지하기 위해 파견하고, 모든 주의를 쿠스다노비치에게 돌렸다. 그는 이 부대의 패배가 전투의 핵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프랑스군은 예비대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고, 대부분 이미 확보된 병력으로 이를 수행해야 했다. 보나파르트는 내선과 포병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트람바소레 고지에서 정면으로 오스트리아군을 상대하는 주베르의 병력을 가능한 한 줄이고 협곡 앞에 집중시켰다. 15문의 프랑스 포대가 집결하여 협곡에서 나타나는 진격하는 오스트리아 부대에 산탄을 근거리에서 퍼부었다. 이 파괴적인 화력은 먼저 진격하는 오스트리아 용기병에게 쏟아져 그들을 붕괴시키고 자신의 보병을 휩쓸고 대혼란을 야기했다. 이 시점에서 샤를 르클레르의 여단이 부대를 정면으로 공격했고, 주베르는 산 마르코에서 측면에서 강력한 사격을 가했다. 여기서 제22 경기병 샤쇠르 기병 26명과 앙투안 샤를 드 라살은 난전에 돌입했다. 라살의 부대는 오스트리아 대대 전체를 포획하고 적의 깃발 5개를 빼앗았다.

중앙에서는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았다. 요제프 옥스카이는 산 마르코에서 공격을 재개하여 오노레 비알의 여단을 몰아냈다. 그러나 정오에 조아생 뮈라 휘하의 프랑스 기병대가 옥스카이의 부대 측면을 공격했고, 그들은 아침에 점령했던 위치로 밀려났다.
쿠스다노비치는 협곡을 돌파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부대에 포병 사정거리 밖으로 물러나라고 명령했다. 한편, 루시냥이 기욤 브륀의 여단과 정면으로 교전하는 동안, 가브리엘 베낭스 레이의 사단은 카스텔누오보에서 올라왔고, 클로드 빅토르의 여단(예비대)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2,000명 미만이 남은 루시냥의 오스트리아 부대를 궤멸시켰다.
프랑스군은 3,200명의 사상자와 1,000명의 포로를 잃은 반면, 오스트리아군은 4,000명의 사상자와 8,000명의 포로, 그리고 40문의 포를 잃었다. 포로 수는 10,000명에 달할 수 있지만, 총 손실은 군 전체 병력의 3분의 2를 초과한다. 한 권위자는 프랑스군의 총 손실을 5,000명, 오스트리아군의 총 손실을 14,000명으로 추산한다.
5. 결과 및 영향
다음날 주베르는 알빈치를 추격하여 휘하 부대를 거의 궤멸시켰다. 알빈치 휘하의 오스트리아 잔당은 혼란 상태로 알프스 너머로 도망쳤다.[1][2] 리볼리 전투는 이 때까지 나폴레옹이 거둔 승리 중 최대의 승리였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5,000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오스트리아군은 14,000명의 사상자를 냈다.[3]
그 후 나폴레옹은 조반니 디 프로베라에게 관심을 돌렸다. 1월 13일 프로베라의 군단(9,000명)은 레냐노 북쪽을 건너 장 세뤼리에 휘하 프랑스군에 의해 포위된 만토바를 구원하기 위해 곧바로 진격했다. 1월 15일 밤, 프로베라는 다고베르트 지그문트 폰 뷔름저에게 일제 공격을 감행하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1월 16일, 뷔름저는 공격을 가했지만 세뤼리에에 의해 만토바로 다시 밀려났다. 오스트리아군은 리볼리에서 급행군한 마세나의 정면 공격과 피에르 오제르 사단의 후방 공격을 받아 전군이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북 이탈리아에 있던 오스트리아군은 소멸되었다.
2월 2일 만토바는 16,000명의 수비대와 함께 항복했는데, 이는 30,000명 군대의 전부였다. 병사들은 '전쟁의 영예'를 안고 행진하여 무기를 내려놓았다. 뷔름저는 참모진과 호위를 받으며 자유롭게 떠날 수 있었다. 나머지는 1년 동안 프랑스에 대항하여 복무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한 후 오스트리아로 보내졌으며, 요새에서 1,500문의 대포가 발견되었다. 2월 18일, 보나파르트는 8,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로마로 진격하여 교황령과 합의를 보려 했다. 만토바가 함락되면서 오스트리아군은 이탈리아 땅에서 몰려났고, 교황 비오 6세는 톨렌티노에서 휴전에 동의했다. 눈이 알프스 고개를 막았지만 오스트리아는 여전히 보나파르트의 평화 협정 조건을 거부했다. 그는 마지막 동부 원정을 준비하여 빈의 관문까지 오스트리아의 심장부로 진격했다.
파리 중심부에 있는 리볼리 거리(Rue de Rivoli)는 이 전투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6. 전투의 의의 (대한민국 관점)
리볼리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군에게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프랑스 파리 중심부에 리볼리 거리(Rue de Rivoli)가 조성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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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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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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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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