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말더듬이 노트케르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말더듬이 노트케르(Notker the Stammerer, 840년경 출생, 912년 사망)는 프랑크 왕국 출신의 수도사이자 학자, 작가, 음악가이다. 그는 성 갈렌 수도원에서 교육받고, 그곳에서 사서, 손님 담당자 등의 직책을 역임했으며, 수도원 학교 교장으로도 활동했다. 노트케르는 시퀀스 모음집 《리베르 힘노룸》을 편찬했고, 샤를마뉴에 대한 전기인 《게스타 카롤리 마그니》를 저술했다. 그의 작품은 9세기 서방 교회 음악 발전에 영향을 미쳤으며, 사후 시복되었지만 공식적으로 성인으로 추대되지는 않았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남자 음악가 - 혜강
    혜강은 죽림칠현의 한 명이자 위나라 종실의 인척으로 유교적 권위주의와 형식주의를 비판하며 노장사상에 심취하여 은둔 생활을 즐겼고, 여안을 변호하다가 종회의 모함으로 사마소에 의해 처형당한 인물이다.
  • 프랑크인 역사가 - 그레고리우스 투로넨시스
    그레고리우스 투로넨시스는 6세기 갈리아의 주교이자 역사가이며 《프랑크 족의 역사》의 저자로서, 갈로-로마 사회 상류 계층 출신으로 프랑크 왕국과 교류하며 격동의 시대를 기록했고, 그의 저술은 메로빙거 왕조 시대의 갈리아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며 특히 《프랑크 족의 역사》는 초기 프랑크족 역사의 핵심 자료로 평가받는다.
  • 프랑크인 역사가 - 킬데브란두스 1세
    힐데브란두스 1세는 아우스트라시아 궁재 피핀 2세의 아들이자 카를 마르텔의 형제 또는 이복 형제이며, 카를 마르텔 치세 동안 궁정 역사가로 활동하며 부르군트 백작과 프로방스 공작 직위를 물려받아 사라센 원정에 참여하고 카를 마르텔을 찬양하는 작품을 남겼다.
  • 베네딕도회 수도승 - 자크 마리탱
    프랑스의 철학자, 작가, 외교관이자 신토마스주의의 주요 인물인 자크 마리탱은 자연과학을 전공 후 가톨릭으로 개종,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에 심취하여 신토마스주의를 발전시키고 정치적 휴머니즘을 통해 현대 사회를 비판하며 가톨릭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 베네딕도회 수도승 - 아베 프레보
    아베 프레보는 격정적인 삶을 바탕으로 인간 심리를 탐구하는 작품을 남긴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사제, 번역가이다.
말더듬이 노트케르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말더듬이 노트케르
본명노트케르 발불루스
다른 이름노트케르 1세
장크트갈렌의 노트케르
시인 노트케르
10세기 장크트갈렌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필사본에 묘사된 노트케르.
10세기 장크트갈렌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필사본에 묘사된 노트케르.
출생년 경
출생지장크트갈렌 수도원 근처
사망912년 4월 6일
사망지장크트갈렌 수도원
직업작곡가, 시인, 학자
주요 작품리베르 힘노룸
게스타 카롤리 마그니

2. 생애

노트케르는 840년경 스위스 투르가우 지역의 유서 깊은 프랑크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작센족, 훈족, 슬라브족과의 전쟁에 참전했던 용감한 전사 아달베르트(Adalbert)에게 양육되며 샤를마뉴의 전쟁담을 들으며 자랐다. 성 갈렌 수도원 학교에서 당대 최고의 지성 알쿠인의 제자인 그리말트(Grimald)에게 교육받았다. 성 갈렌 수도원의 수사가 된 후 교사, 사서, 손님 담당자 등 다양한 직책을 맡으며 학문 연구와 저술 활동에 매진했다. 특히 수도원 학교 교장으로서 솔로몬 3세 등 유능한 제자들을 양성했다. 912년에 사망했으며,[1] 1512년 교황 레오 10세에 의해 시복되어 복자 칭호를 받았다.

2. 1. 유년 시절과 교육

노트케르는 840년경 현재의 스위스 장크트갈렌 수도원 근처에서 태어났다.[1] 그의 가족은 알레만니아 또는 스위스 출신으로, 투르가우의 욘스빌에 토지를 소유한 부유한 가문이었다.[2] 에케하르트 5세는 노트케르가 취리히주 엘그의 하일리구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했지만, 역사학자 Gerold Meyer von Knonau|게롤트 마이어 폰 크노나우de는 이를 기각하고 욘스빌 근처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어린 시절 치아 손실로 인해 말더듬이가 된 노트케르는, 그로 인해 라틴어 별칭 balbulus|발불루스la(babbler|말더듬이영어)라는 별명을 얻었다.[2] 그는 어린 나이에 장크트갈렌에서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여, 여생을 수도원에서 보냈다. 그의 스승으로는 스위스 수도승 Iso von St. Gallen|이소 폰 장크트갈렌de과 아일랜드 수도승 모엥갈("마르켈루스")이 있었다.[2] 알쿠인의 제자인 바이스부르크의 그리말드에게서 가르침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에케하르트 4세의 ''장크트갈렌 수도원 연대기''에 따르면, 노트케르는 투오틸로, 장크트갈렌의 라트페르트와 함께 교육받았으며, 이들은 모두 수도원의 교사이자 작곡가가 되었다.[2][1]

2. 2. 수도원 생활과 업적

노트케르는 학자로서 장크트갈렌 수도원에서 사서(890년), 손님 담당자(hospitarius|호스피타리우스la, 892년, 894년) 등 여러 직책을 맡았다. 그는 뛰어난 교사로 명성을 얻어 수도원 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제자 중에는 콘스탄츠 주교를 역임한(890년 ~ 912년) 솔로몬이 있었다.

노트케르는 수도원 외부에서도 조언을 구하는 인물이었으며, 883년 12월 4일부터 6일까지 수도원을 방문한 뚱보 카를에게 조언을 하기도 했다. 카를은 노트케르가 쓴 샤를마뉴의 초기 전기 ''De Carolo Magno''의 수신자였다. 에케하르트 4세는 노트케르를 "몸은 연약하지만 정신은 그렇지 않고, 혀는 말더듬이지만 지성은 그렇지 않으며, 신성한 일에 대담하게 나아가고, 그의 시대에 비할 데 없는 성령의 그릇"이라고 칭송했다.

노트케르는 수도원에서 명성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장크트갈렌 수도원수도원장이 되지는 않았으며, 다른 곳에서 수도원장직 제안을 여러 번 거절했다. 그는 912년 4월 6일 장크트갈렌에서 사망했다.[1]

3. 주요 작품

노트케르는 음악,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교회 전례에 사용되는 시퀀스(Sequentiala) 모음집인 《리베르 힘노룸(Liber Hymnorum, 찬가집)》을 편찬하여 9세기 후반 서방 교회 음악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1][2] 샤를마뉴 대제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한 《게스타 카롤리 마그니(Gesta Karoli Magni, 대 카롤루스 대왕의 업적)》는[1] 역사학자 필리프 야페에게 혹평을 받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작품의 지적 비전과 사회, 교회, 정치 질서에 대한 일관된 아이디어가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순교자들의 생애를 기록한 《순교록(Martyrology)》을 편찬했으며,[1] 에르칸베르트가 시작한 《프랑크 왕들의 개요(Breviarium Regum Francorum)》를 완성했다.[1]

3. 1. 음악

노트케르는 교회 전례에 사용되는 시퀀스(Sequentiala) 모음집인 《리베르 힘노룸(Liber Hymnorum, 찬가집)》을 편찬했다. 쥐미에주 수도원에서 가져온 안티포너(Antiphonarium, 교송집)에서 영감을 받아 시퀀스를 작곡했으며, 이는 9세기 후반 서방 교회 음악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1][2]

3. 1. 1. 《리베르 힘노룸》(Liber Hymnorum)

884년에 완성된 《리베르 힘노룸》(Liber Hymnorum)은 교회력에 따라 멜로디와 텍스트를 묶어 정리한 책이다.[1] 노트케르는 이 책의 서문에서 쥐미에주 수도원의 안티포너(Antiphoner)가 멜로디에 구절을 붙여 사람들이 쉽게 기억할 수 있도록 한 것에 영감을 받았다고 밝혔다.[2]

3. 1. 2. 기타 음악 작품

다양한 음악 작품들이 노트케르의 작품으로 여겨지지만, 그 확실성은 다양하다. 시퀀스 멜로디 "아베 베아티 게르미니스"는 10세기 중반 자료에서 그에게 귀속되었다.[1]

에케하르트 4세가 멜로디 "프리그돌라"와 "오치덴탄"을 노트케르의 작품으로 언급한 것은, 이 곡들이 노트케르 시대 이전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어 문제가 있다.[1] 찬가 ''생명의 중간''은 1613년 Jodocus Metzler|요두쿠스 메츨러de에 의해 그에게 잘못 귀속되었다.[2][1]

3. 2. 문학

노트케르는 샤를마뉴 대제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한 《게스타 카롤리 마그니(Gesta Karoli Magni, 대 카롤루스 대왕의 업적)》를 저술했다.[1] 이 작품은 샤를마뉴와 그의 가족에 관한 일화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역사학자 필리프 야페는 "전설, 사가, 발명 및 무모한 실수 덩어리"라고 평가하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작품의 지적 비전과 사회, 교회, 정치 질서에 대한 일관된 아이디어가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노트케르는 순교자들의 생애를 기록한 《순교록(Martyrology)》을 편찬했다.[1] 900년경에 작성되었으나, 일부 성인들의 기록이 누락된 불완전한 사본만이 남아있다.[1] 노트케르는 《순교록》에서 성 콜룸바의 기적을 입증하는 듯한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1]

그는 에르칸베르트가 시작한 《프랑크 왕들의 개요(Breviarium Regum Francorum)》를 완성했다.[1]

3. 2. 1. 《게스타 카롤리 마그니》(Gesta Karoli Magni)

'''''게스타 카롤리 마그니'''''(Gesta Karoli Magni, 「대 카롤루스 대왕의 업적」)는 '''''데 카롤로 마그노'''''(De Carolo Magno, 「대 카롤루스에 관하여」)라고도 알려져 있으며, 아인하르트의 ''카롤루스 대제의 생애''(Vita Karoli Magni) 이후 샤를마뉴에 대한 초기 전기 중 하나이다.[1][2] 말더듬이 노트케르는 이 작품이 귀속된 가명인 "생 갈의 수도사"(Monachus Sangallensisla)와 일반적으로 동일시된다.

이 작품은 선형적인 전기가 아니라, 샤를마뉴와 그의 가족과 관련된 두 권의 ''모범''—일화적인 "교훈적인 이야기"—으로 구성되어 있다. 역사학자 필리프 야페는 노트케르를 "역사적 사건의 진정한 흐름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도 재미있는 일화와 재치 있는 이야기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비웃었고, 작품 자체를 "전설, 사가, 발명 및 무모한 실수 덩어리"라고 묘사했다. 마찬가지로, 고전 학자 H. W. 가로드는 그것을 "대체로 신화적인 기록"이라고 일축했다. 반면, 역사학자 매튜 인네스는 노트케르가 "유머와 일화적 스타일"을 사용하여 "그의 능력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을 조장한다고 언급하며, "최근의 학문은 [''게스타 카롤리 마그니''에 대해] 그 지적 비전의 근본적인 명확성을 강조하고 사회, 교회, 정치의 올바른 질서에 대한 일관된 아이디어를 발견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3. 2. 2. 《순교록》(Martyrology)

노트케르의 문학 작품 중에는 순교자 또는 다른 기독교 성인들의 간략한 전기와 함께 기록한 목록인 순교록 편찬이 있었다.[1] 900년경에 작성되었으며, 6월 13-17일, 7월 3-6일, 8월 19-26일, 10월 27일, 12월 31일에 태어난 일부 성인을 포함하지 않는 단 하나의 불완전한 사본만 남아 있다.[1] 이 작품이 불완전하게 남아 있다는 사실은 노트케르가 그의 "야심 찬 프로젝트"를 단순히 끝내지 못했음을 시사할 수 있다.[1]

노트케르는 그의 순교록에서 성 콜룸바의 기적 중 하나를 입증하는 듯했다. 아일랜드 수도원의 중요한 아버지인 성 콜룸바는 강한 아일랜드 연관성을 가진 성 갈에게도 중요했다. 수도원장 아돔난은 콜룸바가 예지력을 통해 로마 근처 이탈리아의 한 도시가 신성한 처벌로 불타는 유황에 의해 파괴되고 3천 명이 죽는 것을 보았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콜룸바가 이를 본 직후, 골(Gaul)에서 온 선원들이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해 도착했다. 노트케르는 그의 순교록에서 이 사건이 일어났고 지진으로 '새로운'이라는 도시가 파괴되었다고 주장했다. 노트케르가 주장한 이 도시가 무엇인지 불분명하지만, 일부는 이 도시가 이전에 Νεάπολις|네아폴리스grc(새 도시)라고 불렸던 나폴리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폴리는 콜룸바가 태어나기 전인 512년에 화산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콜룸바가 생존해 있을 때가 아니었으며, 역사학자 리처드 샤프는 "노트케르는 아돔난이 무엇을 의도했는지 알기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위치에 있지 않았다"라고 언급했다.[1]

3. 2. 3. 기타 문학 작품

에르칸베르트가 시작한 ''프랑크 왕들의 개요''(Breviarium Regum Francorum)를 완성했다.[1] 의미 있는 문자(일부 그레고리오 성가의 연주 지침)를 설명하는 라틴어 키는 노트케르의 것으로 여겨지지만, 때때로 노트케르 라베오의 것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한다.[2]

4. 유산

학자들은 노트케르의 주요 업적에 대해 다양한 평가를 내린다. 알반 버틀러 신부는 그의 시퀀스를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꼽았고, 역사학자 로사몬드 맥키터릭은 《Gesta Karoli Magni》(카롤루스 대제의 일화)가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노트케르는 콘스탄츠의 솔로몬 2세와 함께 성 갈에서 교육받은 가장 중요한 작가로 꼽히며, 당대 최고의 문학적 서기이자 학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후대의 학자 노트케르 피지쿠스와 노트케르 라베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이들은 각각 "노트케르 2세"와 "노트케르 3세"로 불린다.

4. 1. 시복과 성인 추대 논란

노트케르는 공식적으로 성인으로 시성되지는 않았지만, 1512년 교황 레오 10세에 의해 성 갈과 인근 교회에서 성인으로 인정받았으며, 1513년에는 콘스탄츠 교구에서도 성인으로 인정받았다. 일부에서는 레오 10세의 행위를 시복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성 갈과 다른 교회에서는 매년 4월 6일에 그를 기념한다.

4. 2. 현대의 재조명

19세기 중반, 스위스 음악학자 안젤름 슈비거는 노트케르의 현존하는 멜로디 거의 전부를 현대 악보로 처음 옮겼다. 슈비거가 접근할 수 없었던 오래된 필사본 자료가 현재 이용 가능해졌지만, 그의 많은 악보는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이는 "자료에 대한 더 포괄적인 접근 방식은 노트케르 자신의 사용에 더 가깝고 음악적으로 더 나은 판독 값을 생성할 것"을 의미한다. 2017년에는 슈테판 모렌트에 의해 노트케르의 시퀀스 20곡에 대한 현대판이 EOS Verlag를 통해 출판되었다.

참조

[1] 서적 Sharpe
[2] 웹인용 Cantica Chorus Gregorianus - Annotamentum http://www.cantica.b[...] 2020-06-18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