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트베리 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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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는 1368년 트베리 대공이 된 인물이다. 초기에는 숙부 바실리와의 갈등, 리투아니아와의 협력, 모스크바와의 대립 등 권력 투쟁을 겪었다. 트베리 대공 즉위 후에는 모스크바의 드미트리 돈스코이와 전쟁을 벌였으나, 결국 패배하여 불리한 조건으로 화평을 맺었다. 이후 외교적 노력을 통해 트베리 공국의 통치를 강화했으며, 1399년 사망할 때까지 재판 공정성 확보, 치안 회복에 힘썼다. 그는 트베리 공국이 러시아의 주요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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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트베리 대공)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 |
| 이름 |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
| 로마자 표기 | Mikhail Aleksandrovich |
| 원래 이름 | Михаил Александрович |
| 작위 | 트베리 대공 |
| 재위 기간 | 1368년 - 1399년 8월 26일 |
| 출생 | 1333년 |
| 출생지 | 프스코프 |
| 사망 | 1399년 8월 26일 (66세) |
| 사망지 | 트베리 |
| 왕조 | 류리크 왕조 |
| 아버지 |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
| 어머니 | 아나스타시아 |
| 배우자 | 예브도키야 콘스탄티노브나 |
| 자녀 | 알렉산드르, 이반, 알렉산드르, 보리스, 바실리, 표도르 |
| 가족 관계 | |
| 가문 | 류리크 가 |
2. 생애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는 아버지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가 프스코프로 망명했을 때 그곳에서 태어났다. 선량한 성품으로 숙부이자 당시 대공이었던 바실리의 질투를 받아 불화를 겪었지만 1363년에 화해했다.[1] 1364년, 사촌 세묜이 페스트로 사망하면서 드라고부시를 물려받았으나, 세묜의 형제 엘레메이가 이의를 제기하여 트베리 주교에게 재정을 요청했다.[1] 주교 바실리는 미하일에게 드라고부시 소유권을 인정했다.[1]
미하일의 세력 확대는 대공 바실리와의 관계를 악화시켰다.[1] 바실리는 모스크바 대공 드미트리 돈스코이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미하일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지지를 구했다.[1] 1366년, 미하일이 리투아니아에 머무는 동안 트베리 시민들이 미하일을 지지하며 봉기했으나, 바실리와 엘레메이는 이를 진압하지 못했다.[1] 리투아니아의 지원을 받은 미하일 군대는 트베리를 해방하고 엘레메이와 바실리의 왕비를 포로로 잡아 카신으로 진격했다.[1] 이후 평화가 맺어졌고, 미하일은 드미트리 돈스코이, 엘레메이와도 평화를 체결, 드라고부시에 대한 영유권을 확정지었다.[1]
그러나 엘레메이는 1367년 모스크바로 도망쳐 드미트리에게 지원을 요청했다.[1] 드미트리는 엘레메이를 비호했고, 미하일은 부주교 알렉세이의 말을 믿고 모스크바에 중재 재판을 받으러 갔으나, 드미트리에게 체포되어 투옥되었다.[1] 타타르의 항의로 미하일은 석방되었고, 둘은 화해했다.[1] 1368년, 바실리가 사망하자 미하일은 트베리 대공이 되었다.[1]
1368년 숙부 바실리의 사망으로 트베리 대공이 된 미하일을[1]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경계하여 트베리에 군대를 보냈고, 미하일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으로 피신했다.[1] 리투아니아 대공 알기르다스는 스몰렌스크, 브랸스크 군을 합쳐 미하일과 함께 모스크바를 포위했다.[1] 드미트리는 크렘린에서 3일간 버텼고, 모스크바 근교는 몽골 시대 이상으로 황폐해졌다.[1] 결국 양측은 화해했다.[1]
1370년, 미하일은 트베리 성벽을 강화했고, 드미트리는 군대를 보내 트베리를 황폐화시켰다.[1] 미하일은 리투아니아로 피신 후 킵차크 칸국의 마마이에게 블라디미르 대공 야르리크(yarlyk)를 받았다.[1] 알기르다스와 함께 모스크바를 포위했으나, 블라디미르에게 격퇴당하고 화약을 맺었다.[1]
1371년 초, 미하일은 다시 칸국에서 대공위를 인정받았으나 군사 지원은 받지 못했다.[1] 드미트리의 책략으로 블라디미르 입성을 거부당하고, 마마이의 사절마저 회유당했다.[1] 미하일은 아들 이반을 칸국에 보냈으나, 드미트리가 대공 야르리크를 얻는 데 성공했다.[1]
1371년/1372년 겨울, 미하일은 드미트리가 없는 틈을 타 모스크바를 공격, 코스트로마, 우글리치 등을 점령했다.[1] 노브고로드와 모스크바의 동맹은 미하일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1]
1373년, 알기르다스와 모스크바를 공격했으나 류베츠크 부근에서 휴전했다.[1] 카신 공작 미하일의 사망으로 트베리 주변 방어를 강화했다.[1]
1375년, 미하일은 칸국으로부터 다시 블라디미르 대공 야르리크를 받았으나,[1] 리투아니아와 칸국의 지원 약속이 지켜지지 않아 드미트리에게 트베리를 포위당하고 가혹한 조건으로 화평을 맺었다.[1]
이후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는 재판의 공정성 확보와 치안 회복에 힘썼다. 도시를 강화하고 제후들과의 관계를 회복했으며, 1385년에는 아들들의 혼인을 통해 스몰렌스크, 키예프와 관계를 맺었다. 모스크바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코브일린 가문과의 혼인을 추진, 이후 이 가문은 양국 간 갈등 해결에 기여했다. 바실리 1세와의 조약에서는 미하일이 모스크바 대공과 대등한 "형제"로 인정받았다.
1396년, 미하일 공은 마지막으로 칸국에 조공을 바쳤다. 1399년, 중병으로 아들들에게 트베리 공국을 남기고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와 권력 투쟁
아버지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가 프스코프로 망명했을 때 프스코프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량함은 당시 대공이자 숙부였던 바실리의 질투를 사, 두 사람은 불화를 겪었지만 1363년에 화해했다.[1] 1364년, 페스트로 사망한 사촌 세묜으로부터 드라고부시를 유증받았지만, 세묜의 형제 엘레메이가 이에 항의했고, 최종적으로 트베리 주교의 재정을 요청했다.[1] 주교 바실리는 미하일에게 드라고부시 소유권을 인정하는 재정을 내렸다.[1]이러한 미하일의 강대화는 대공 바실리와의 관계를 다시 악화시켰다.[1] 바실리는 당시 모스크바 대공 드미트리 돈스코이에게 지원을 요청했다.[1] 한편 미하일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지지를 구했다.[1] 1366년, 미하일이 리투아니아에 체류하는 동안 미하일을 지지하던 트베리 시민을 대공 바실리와 엘레메이가 진압하려 했으나 실패했다.[1] 리투아니아의 지원을 받은 미하일 휘하의 군세는 트베리를 해방하고 엘레메이와 대공 바실리의 왕비를 포획하여 바실리의 본거지 카신에 접근했다.[1] 여기서 평화가 맺어졌고, 동시에 미하일은 모스크바의 드미트리 대공, 그리고 엘레메이와도 평화를 체결했다.[1] 최종적으로 드라고부시에 대한 미하일의 영유가 확정되었다.[1]
그러나 엘레메이는 이에 납득하지 못하고 1367년에 모스크바로 도망쳐 대공 드미트리에게 지원을 요청했다.[1]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드미트리는 엘레메이의 비호를 선언했다.[1] 미하일은 부주교 알렉세이의 말을 믿고 중재 재판을 위해 모스크바에 갔지만, 대공 드미트리가 그를 체포하여 투옥했다.[1] 그러나 이 배신 행위에 관해 타타르에서도 항의를 받았고, 드미트리는 미하일을 석방해야 했다.[1] 두 사람은 화해했다.[1] 1368년에는 트베리 대공 바실리가 사망하고 미하일은 트베리 대공이 되었다.[1]
2. 2. 트베리 대공 즉위와 모스크바와의 전쟁 (1368년-1375년)
1368년 숙부 바실리가 사망하자 미하일은 트베리 대공이 되었다.[1] 모스크바의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미하일이 대공이 되는 것을 기뻐하지 않아 트베리에 대군을 보냈고, 미하일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으로 피신했다.[1] 당시 리투아니아 대공 알기르다스는 스몰렌스크 및 브랸스크 군을 더하여 미하일과 함께 모스크바로 향했고, 11월에 모스크바를 포위했다.[1] 드미트리는 크렘린에 틀어박혔고, 3일간의 포위를 견뎌냈다.[1] 연대기에 따르면 모스크바 근교는 몽골 시대 이상으로 황폐해졌다고 한다.[1] 결국 양측은 화해했다.[1]1370년, 미하일은 모스크바와의 주도권 다툼을 예견하고 트베리 마을의 외벽을 강화했다.[1] 예상대로 모스크바의 드미트리는 화약을 파기하고 군대를 트베리로 보냈다.[1] 미하일은 다시 리투아니아로 도망쳤고, 트베리는 모스크바 군에 의해 황폐화되었다.[1] 미하일은 킵차크 칸국의 마마이에게 블라디미르 대공 야르리크(yarlyk, ярлык)를 받았다.[1] 이후 알기르다스와 함께 다시 모스크바를 포위했으나, 세르푸호프 공작 블라디미르에 의해 격퇴당하고 화약을 체결했다.[1]
1371년 초, 미하일은 다시 칸국을 방문하여 마마이에게 다시 대공위를 인정받았으나, 군사적 지원은 거부당했다.[1] 드미트리의 책략으로 블라디미르 입성을 거부당하고, 마마이의 사절마저 드미트리에게 회유당했다.[1] 미하일은 아들 이반을 칸국에 보내 드미트리를 고발했으나, 드미트리가 칸국에서 자신을 정당화하고 대공 야르리크를 얻는 데 성공했다.[1]
1371년/1372년 겨울, 드미트리가 부재한 틈을 타 미하일은 모스크바를 공격하여 코스트로마, 우글리치, 베제츠키 베르흐를 점령했다.[1] 노브고로드마저 모스크바와 동맹을 맺는 등 불리한 상황에 놓였다.[1]
1373년, 알기르다스와 함께 모스크바를 공격했으나, 류베츠크 부근에서 격돌 후 휴전했다.[1] 카신 공작 미하일의 사망으로 휴전 기간 중 트베리 주변 방어를 강화했다.[1]
1375년, 모스크바에서 망명 온 벨리야미노프와 네코마트의 음모로 칸국으로부터 다시 블라디미르 대공 야르리크를 받았다.[1] 리투아니아와 칸국의 지원 약속을 믿고 모스크바와 전쟁을 개시했으나, 약속이 지켜지지 않아 고립무원에 빠졌다.[1] 드미트리에게 트베리를 포위당하고, 가혹한 조건으로 화평을 맺었다.[1]
2. 3. 패배 이후의 외교적 노력과 트베리 통치 강화 (1375년-1399년)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는 재판의 공정성을 확보하고 치안을 회복하는 데 힘썼다. 그는 도시를 강화하고 제후들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데 주력했다. 1385년에는 아들 보리스를 스몰렌스크 공의 딸과, 다른 아들 바실리를 키예프 공 블라디미르의 딸과 결혼시켰다. 모스크바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아들 표도르를 대귀족 코브일린 가문의 딸과 결혼시켰는데, 이 가문은 이후 모스크바와 트베리 간의 갈등을 여러 차례 해결하는 데 기여했다. 점차 모스크바와의 관계는 좋아져서 바실리 1세와의 조약에서는 미하일이 "형제"로서, 즉 모스크바 대공과 대등한 지위로 인정받게 되었다.미하일 공은 1396년에 마지막으로 칸국에 조공을 바쳤다. 1399년에는 중병에 걸려 아들들에게 트베리 공국을 남기고, 8월 말에 머리를 깎는 의식을 치른 후 일주일 뒤에 사망했다.
3. 가계
| 관계 | 이름 |
|---|---|
| 아버지 |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
| 어머니 | 갈리치의 아나스타샤 |
| 배우자 | 수즈달 공작 콘스탄틴 바실리에비치의 딸 에브도키야 |
| 자녀 |
참조
[1]
서적
Novgorodskaia Pervaia Letopis Starshego i mladshego izvodov
AN SSSR
1950
[2]
논문
Was the Prince of Novgorod a ‘Third-rate Bureaucrat’ after 1136?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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