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실리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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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실리 3세는 이반 3세의 아들이자 모스크바 대공국의 대공(1505년 ~ 1533년)이다. 그는 아버지의 영토 확장 정책을 이어받아 프스코프 공화국, 볼로콜람스크, 랴잔 대공국, 노우호로드시베르스키 등을 병합하며 영토를 넓혔다. 리투아니아와의 전쟁에서 스몰렌스크를 점령하고, 사파비 왕조와 동맹을 시도했으며, 크림 칸국에 맞서 싸웠다. 또한 차르 칭호와 비잔티움 제국의 이중두상 독수리를 채택했다. 후계자를 얻기 위해 첫 번째 아내와 이혼하고 엘레나 글린스카야와 재혼하여 이반 4세를 낳았으며, 승천 교회를 건립했다. 그는 농양으로 사망하기 전 수도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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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 3세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바실리 3세 |
로마자 표기 | Vasilii III Ivanovich |
러시아어 표기 | Василий III Иванович |
칭호 | 모스크바 대공 및 전 러시아의 군주 |
왕조 | 류리크 왕조 |
아버지 | 이반 3세 |
어머니 | 소피아 팔레올로기나 |
출생일 | 1479년 3월 25일 |
출생지 | 모스크바, 모스크바 대공국 |
사망일 | 1533년 12월 3일 |
사망지 | 모스크바, 모스크바 대공국 |
매장지 | 대천사 대성당 |
종교 | 러시아 정교회 |
통치 | |
즉위 | 1505년 11월 6일 |
퇴위 | 1533년 12월 3일 |
선임자 | 이반 3세 |
후임자 | 이반 4세 |
대관식 | 1502년 4월 14일 |
공동 군주 | 해당사항 없음 |
섭정 | 해당사항 없음 |
결혼과 자녀 | |
배우자 | 솔로모니아 사부로바 (1505년 결혼, 1525년 이혼) 엘레나 글린스카야 (1526년 결혼) |
자녀 | 이반 4세 유리 바실리예비치 |
참고 문헌 | |
참고 문헌 | 알렉산드르 필류시킨, Ivan the Terrible : a military history, 2008, 런던, ISBN 9781848325043 데이비드 매켄지, A history of Russia, the Soviet Union, and beyond, 2002, 벨몬트, CA, Wadsworth/Thomson Learning, 6판, 115쪽, ISBN 9780534586980 |
2. 생애
1479년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반 3세와 소피아 팔레올로기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1526년, 47세가 된 바실리 3세는 20년 넘게 결혼 생활을 이어온 솔로모니아 사부로바와의 사이에서 후계자를 얻지 못해, 솔로모니아를 마녀로 고발하고 이혼 후 수녀원으로 보냈다. 이후 세르비아 공주 출신의 엘레나 글린스카야와 결혼했다. 엘레나는 가톨릭식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반대가 많았지만, 바실리 3세는 엘레나에게 흠뻑 빠져 러시아의 사회적 규범을 무시하고 수염을 다듬어 젊어 보이려 했다. 결혼 후, 엘레나는 이반 4세와 유리를 낳았다.[5] 한 이야기에 따르면, 솔로모니아 사부로바는 이혼 몇 달 후, 수녀원에서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바실리 3세에게는 세 명의 형제(유리(1480년 출생), 시메온(1487년 출생), 안드레이(1490년 출생))와 다섯 명의 자매(엘레나(1474년 출생 및 사망), 테오도시아(1475년 출생 및 사망), 또 다른 엘레나(1476년 출생), 또 다른 테오도시아(1485년 출생), 유독시아(1492년 출생))가 있었다.[5]
1533년 볼로콜람스크 근처에서 사냥을 하던 중 농양으로 인한 심한 통증을 느껴 모스크바로 돌아와 수도승이 된 후, 같은 해 12월 3일 사망했다.[5]
2. 1. 통치
1505년 아버지 이반 3세의 뒤를 이어 모스크바 대공으로 즉위하였다.2. 1. 1. 대외 정책
바실리 3세는 아버지 이반 3세의 정책을 이어받아 모스크바 대공국의 영토를 확장했다. 1510년 프스코프 공화국, 1513년 볼로콜람스크, 1521년 랴잔 대공국, 1522년 노우호로드시베르스키를 모스크바 대공국에 편입시켰다.[3] 1512년부터 1514년까지 러시아-리투아니아 전쟁을 통해 리투아니아의 주요 요새였던 스몰렌스크를 점령하여 러시아에 큰 타격을 주었다.[3]1521년에는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기 위한 이란-러시아 동맹을 제안한 이웃 사파비 왕조의 샤 이스마일 1세가 보낸 사절을 맞이했다.[4]
바실리 3세는 크림 칸국을 상대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1519년에는 패배하기도 했지만, 통치 말년에는 볼가 강 유역에 러시아의 영향력을 확립했다. 1531년에서 1532년 사이에는 카잔 칸국의 왕위에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칸갈리 칸을 앉혔다.[3]
바실리 3세는 차르라는 칭호와 비잔티움 제국의 이중두상 독수리 문양을 채택한 최초의 모스크바 대공이었다.[3]

2. 1. 2. 대내 정책
대내적으로는 봉건제를 지지하던 반대파들과의 권력 투쟁을 벌이고 있던 동방 정교회를 지지했다. 재위 기간 동안 보야르들과 제후들이 받고 있던 일반 특권과 면책특권이 일부 제한되었고 젠트리의 부농 제도가 향상되었다.2. 2. 가정사
1526년, 47세가 된 바실리 3세는 20년 넘게 결혼 생활을 이어온 솔로모니아 사부로바와의 사이에 후계자를 얻지 못했다. 솔로모니아는 남편의 실망을 알고 마법사를 찾아보고 순례를 떠나는 등 후계자를 얻기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바실리는 보이아르들을 불러 러시아의 국정을 맡길 만한 두 형제를 신뢰하지 않으며 그들이 결혼하는 것을 금지한다고 선포했다.보이아르들은 그에게 새로운 배우자를 맞이할 것을 제안했다. 부인의 불임을 이유로 이혼하는 것은 불법이었기 때문에, 그는 솔로모니아를 마녀로 고발했다. 성직자들의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불임인 아내와 이혼하고 수녀원으로 유배 보낸 후 반대했던 성직자들 또한 유배 보냈으며, 곧 세르비아 공주 출신의 엘레나 글린스카야 공주(친구인 미하일 글린스키의 조카)와 결혼했다. 엘레나가 가톨릭식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선택에 찬성하는 보이아르는 많지 않았다. 바실리는 엘레나에게 흠뻑 빠져 러시아의 사회적 규범을 무시하고 수염을 다듬어 젊어 보이려 했다. 삼일간의 결혼 축제 후, 두 사람은 결혼 생활을 시작했지만, 처음에는 엘레나가 솔로모니아처럼 불임인 것으로 보였다. 러시아 백성은 이것이 신이 이 결혼을 불허하는 징조라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실리와 백성의 큰 기쁨에, 새로운 차리차는 아들을 낳았고, 그는 이반 4세로서 그의 뒤를 이었다. 3년 후, 두 번째 아들인 유리가 태어났다.[5] 한 이야기에 따르면, 솔로모니아 사부로바는 논란이 된 이혼 몇 달 후, 자신이 수감된 수녀원에서도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그는 세 명의 형제가 있었다: 유리(1480년 출생), 시메온(1487년 출생), 안드레이(1490년 출생). 그리고 다섯 명의 자매: 엘레나(1474년 출생 및 사망), 테오도시아(1475년 출생 및 사망), 또 다른 엘레나(1476년 출생), 또 다른 테오도시아(1485년 출생), 유독시아(1492년 출생)가 있었다.[5]
2. 3. 죽음
볼로콜람스크 근처에서 말을 타고 사냥을 하던 중 바실리 3세는 오른쪽 엉덩이에 심한 통증을 느꼈는데, 이는 농양 때문이었다. 그는 콜프 마을로 옮겨졌고, 거기서 두 명의 독일 의사들이 그를 진찰했지만, 일반적인 치료법으로 감염을 막을 수 없었다.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다고 생각한 바실리는 모스크바로 돌아갈 것을 요청했고, 이동 중에 성 요셉 성당에 머물렀다. 1533년 11월 25일, 바실리는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죽기 전에 수도승이 되기를 요청했다. 바실리는 바를람이라는 이름을 받고 1533년 12월 3일 자정에 사망했다.[5]참조
[1]
서적
Ivan the Terrible : a military history
2008
[2]
서적
A history of Russia, the Soviet Union, and beyond
Wadsworth/Thomson Learning
2002
[3]
백과사전
[4]
서적
Relations between Tehran and Moscow, 1979–2014
https://www.academia[...]
2014-12-22
[5]
서적
Ivan le terrible
https://archive.org/[...]
Flammar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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