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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디아 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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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르디아 습격은 1941년 4월 19일/20일 밤, 영국군 특공대 레이포스가 추축국의 통신망 교란과 시설 파괴를 목표로 감행한 기습 작전이다. 이 작전은 제7, 8, 11, 50/52 특공대로 구성된 레이포스 A 대대가 HMS 글렌가일을 통해 바르디아에 상륙하여 진행되었으나, 유도등 문제, 잘못된 해변 상륙 등으로 인해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 습격으로 인해 7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독일군은 서부 사막군에 대한 압박을 완화하기 위해 병력을 전환해야 했다. 레이포스는 이후 크레타 전투 등에 투입되어 병력 손실을 입었고, 1941년 7월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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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디아 습격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정보
분쟁서부 사막 전역의 일부
시기1941년 4월 19일 ~ 4월 20일
장소키레나이카 바르디아
결과연합군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
교전국 2

지휘관
독일에르빈 롬멜
이탈리아이탈로 가리볼디
연합군콜빈 중령
병력 규모
연합군A 대대 레이포스
RTR 트룹





사상자 및 피해
연합군사망: 1명
포로: 70명
추축군포병대 1개 파괴
보급품 집적소 1개 파괴
기타 정보
상륙 주정에 탑승한 영국 코만도

2. 배경

1941년 1월, 영국에서 지중해 지역의 기습 작전에 참여하기 위해 레이포스(Layforce)라고 알려진 2,000명 규모의 임시 특공대가 파견되었다. 로버트 레이콕 대령 지휘 하에, 이 부대는 제7 특공대, 제8(근위) 특공대, 제11(스코틀랜드) 특공대, 제3 특공대의 분대, 그리고 폴보트 부대로 구성되었다. 1941년 3월 이집트에 도착했을 때, 제50 특공대와 제52 특공대가 합류하여 전력이 강화되었다. 특공대의 대규모 병력이 이 지역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추축국으로부터 숨기기 위해, 제7, 8, 11, 50/52 특공대는 레이포스 A, B, C, D 대대로 위장되었다.

2. 1. 레이포스

1941년 1월, 영국에서 지중해 지역의 기습 작전에 참여하기 위해 레이포스(Layforce)라고 알려진 2,000명의 임시 특공대가 파견되었다. 로버트 레이콕 대령의 지휘하에, 이 부대는 제7 특공대, 제8(근위) 특공대, 제11(스코틀랜드) 특공대, 제3 특공대의 분대, 그리고 폴보트 부대로 구성되었다. 1941년 3월 이집트에 도착했을 때, 제50 특공대와 제52 특공대가 합쳐져 전력이 강화되었다. 특공대의 대규모 병력이 이 지역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추축국으로부터 숨기기 위해, 제7, 8, 11, 50/52 특공대는 레이포스 A, B, C, D 대대로 위장되었다.

2. 2. 해바라기 작전 (Unternehmen Sonnenblume)

1941년 초, 컴파스 작전은 이집트와 리비아 동부의 키레나이카에서 이탈리아군을 상대로 한 영국 및 영연방의 대승리였다. 아치볼드 웨이벌 장군은 그리스 전역의 일환으로 제13군단(리처드 O'코너 중장)의 상당 부분을 그리스로 파견하라고 명령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이탈리아의 재앙에 대응하여 이탈리아의 붕괴를 막기 위해 새로운 아프리카 군단을 북아프리카로 파견하여 증원하는 ''Unternehmen Sonnenblume'' (해바라기 작전)을 명령했다. 에르빈 롬멜은 신병, 더 나은 장비와 전차, 그리고 카리스마 넘치는 지휘관을 갖춘 아프리카 군단을 이끌었다. 롬멜은 트렌토와 아리에테를 포함한 6개 이탈리아 사단과 함께 북아프리카에 도착했을 때, 그의 명령은 방어에 집중하라는 것이었다.

첫 번째 이탈리아-독일 공세에서 추축군은 3월 24일 엘 아게일라에서 영국군을 기습하여 빠르게 격파했고, 이 성공을 이용하여 4월 15일까지 영국군을 살룸과 토브룩에 이르기까지 리비아-이집트 국경으로 밀어냈다. 필립 니엄 중장(그리스로의 이동 이후 키레나이카 사령부로 개명된 제13군단의 새로운 지휘관), O'코너, 그리고 제2 기갑사단 지휘관 마이클 갬비어-패리 소장이 포로로 잡혔다. 서부 사막군은 동아프리카에서 소환된 노엘 베레스포드-피어스 중장 휘하로 인수되었다. 제2 기갑사단의 기갑 여단은 그리스 전역을 위한 병력 제공에 사용되었고, 키레나이카에 있는 나머지 사단은 기계 고장과 연료 부족으로 전차 대부분을 잃었다. 추축군의 토브룩 점령 시도는 여러 차례 실패했고, 이집트 국경에 전선이 형성되었다. 1941년 4월, 레이포스의 배치 계획이 변경되었고, 그들의 첫 번째 작전은 바르디아에 대한 기습이 될 것이었다.

3. 기습 작전

A black and white photograph of HMS Glengyle, an infantry assault ship
HMS ''Glengyle'', 보병 상륙함


바르디아 습격은 1941년 4월 19일/20일 밤, A 대대와 레이포스가 추축국의 통신망을 교란하고 시설과 장비에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기 위해 계획한 작전이다. A 대대와 왕립 전차 연대 소속 전차 부대가 상륙정(LCA)을 통해 4개의 해변에 동시에 상륙하는 것이 작전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바르디아 인근에서 LCA 1척을 내릴 수 없었고, 나머지 척들을 내리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폴보트 부대가 설치하기로 했던 유도등도 보이지 않았는데, 이는 폴보트 부대를 수송하던 잠수함아군 사격을 피하기 위해 잠수하여 회피 기동을 했기 때문이다.

주요 상륙 부대는 늦게 도착하여 잘못된 해변에 상륙했지만, 상륙은 저항 없이 이루어졌다. 특공대는 목표물을 파괴하기 위해 내륙으로 향했으나, 바르디아에는 이탈리아군이나 독일군이 없었고, 잘못된 정보로 인해 일부 목표물을 놓쳤다. 특공대는 이탈리아 보급 기지와 이탈리아 해안 포병대를 파괴한 후 LCA로 돌아가 재탑승했다.

3. 1. 진행 과정



바르디아 습격은 1941년 4월 19일/20일 밤, A 대대와 레이포스가 추축국의 통신망을 교란하고 시설과 장비에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기 위해 계획한 작전이다. A 대대와 왕립 전차 연대 소속 전차 부대가 상륙정(LCA)을 통해 4개의 해변에 동시에 상륙할 예정이었다. 상륙 부대는 대공 순양함 와 구축함 , , 의 호위를 받으며 에 의해 이 지역으로 수송되었다.

주요 상륙 부대는 늦게 도착하여 잘못된 해변에 상륙했다. 폴보트 부대가 설치하기로 한 유도등은 보이지 않았는데, 이는 폴보트 부대를 수송하던 잠수함아군 사격을 피하기 위해 잠수하여 회피 기동을 하는 바람에 가는 길이 지연되었기 때문이다. 상륙은 저항 없이 이루어졌고, 특공대는 목표물을 파괴하기 위해 내륙으로 이동했다. 바르디아에는 이탈리아군이나 독일군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으며, 잘못된 정보로 인해 일부 목표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는 목표물이 있어야 할 곳에 없거나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공대는 이탈리아 보급 기지와 이탈리아 해안 포병대를 파괴한 후 LCA로 돌아가 재탑승했다.

습격은 특공대 손실 없이 끝날 뻔했지만, 과민한 특공대의 아군 사격으로 특공대 장교 1명이 사망하고, 길을 잃은 후 잘못된 철수 해변에 도착한 70명이 포로로 잡히면서 마무리되었다.

3. 2. 결과 및 분석

바르디아 습격은 70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제한적인 결과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전략적 효과를 가져왔다. 독일군은 서부 사막군에게 큰 압력을 가하던 솔룸에서 기갑 여단 대부분을 전환하여 한동안 후방 지역을 방어하게 했다. 반면 레이포스는 장비나 훈련을 받지 못한 일반 보병으로 사용되어 덜 운이 좋았다. 몇 안 되는 예비군 중 하나였던 레이포스는 크레타 전투에 파견되어 후위 부대로 싸우다 600명의 병력을 잃고 철수했다. C 대대는 크레타로 보내지지 않고 레바논으로 보내져 리타니 강 전투에서 120명 이상을 잃었다. 일반 영국 육군 대대의 대체 시스템이 없어 인력이 꾸준히 소모되면서 레이포스는 비효율적인 상태로 남았고, 1941년 7월에 해산되었다.

습격에 참여했던 작가 에블린 워는 1941년 11월 ''라이프 매거진'' 기사에서 독일군이 "상상 속의 침공을 격퇴하기 위해 강력한 전차 및 장갑차 부대를 보냈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1976년에 출판된 그의 일기에는 저항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특공대의 무능함에 대한 매우 다른 모습이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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