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쿨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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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이쿨라 전투는 기원전 208년, 제2차 포에니 전쟁 중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하스드루발 바르카가 이끄는 카르타고 군을 상대로 이베리아 반도에서 벌인 전투이다. 스키피오는 카르타고 노바를 점령한 후, 이베리아 반도에 흩어져 있던 카르타고 군을 각개격파하기 위해 바이쿨라에서 하스드루발을 공격했다. 스키피오는 지형을 이용하여 방어하는 하스드루발 군을 포위 공격하여 승리했지만, 하스드루발은 병력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진군하려 했다. 이 전투는 로마가 이베리아 반도에서 주도권을 잡는 데 기여했으며, 스키피오의 군사적 능력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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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쿨라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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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전투 | 바에쿨라 전투 |
일부 | 제2차 포에니 전쟁 |
![]() | |
날짜 | 기원전 208년 봄 |
장소 | 바에쿨라 (산토 토메, 하엔), 현재의 스페인 |
결과 | 로마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로마 공화정 |
교전국 2 | 카르타고 |
지휘관 1 |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
지휘관 2 | 하스드루발 바르카 |
병력 규모 | |
로마 | 40,000 ----30,000 로마 및 이탈리아인 10,000 이베리아인 |
카르타고 | 30,000 |
사상자 규모 | |
로마 | 알 수 없음 |
카르타고 | 20,000 ----8,000명 사망 (리비우스) 12,000명 포로 (폴리비오스) |
2. 배경
폴리비오스에 따르면,[2]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카르타고 노바를 기습 공격하여 점령한 후, 이베리아 반도에 주둔한 세 카르타고 군대는 서로 분리된 채로 남아 있었고, 그들의 장군들은 서로 반목하여 로마인들이 그들을 하나씩 상대할 기회를 주었다.
기원전 208년 초, 스키피오는 하스드루발 바르카를 공격하기 위해 바에티스 강(오늘날의 과달키비르 강) 상류에 위치한 바에쿨라로 향했다. 하스드루발은 로마군의 접근을 알고 자신의 야영지를 바에쿨라 남쪽의 높고 가파른 고원으로 옮겼다. 이곳은 측면은 계곡, 전후방은 강으로 보호받는 천혜의 요새였다. 하스드루발은 고원을 이중으로 나누어 하단에는 경보병, 상단에는 주력 부대를 배치하는 전략을 택했다.
스키피오는 이처럼 강력한 지형을 어떻게 공격해야 할지 고민했지만, 다른 두 카르타고 군대가 하스드루발과 합류할 것을 우려하여 3일째 되는 날 공격을 결심했다.[3]
2. 1. 로마와 카르타고의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충돌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카르타고 노바를 기습 공격하여 점령한 후, 이베리아 반도에 주둔한 세 카르타고 군대는 서로 분리된 채로 남아 있었고, 그들의 장군들은 서로 반목하여 로마인들이 그들을 하나씩 상대할 기회를 주었다.[2]기원전 208년 초,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3만 명의 로마군과 이탈리아군, 그리고 1만 명의 스페인 보조군을 이끌고 하스드루발 바르카를 공격했다. 하스드루발의 3만 명의 군대는 바에티스 강(오늘날의 과달키비르 강) 상류에 위치한 바에쿨라에서 겨울을 보냈다.
로마군의 접근을 알게 된 하스드루발은 자신의 야영지를 강력한 방어 위치로 옮겼다. 바에쿨라 남쪽에 위치한 높고 가파른 고원이었는데, 측면은 계곡으로, 전후방은 강으로 보호받고 있었다. 더욱이 고원은 두 단계로 형성되어 있었으며, 하스드루발은 하단에는 경보병을, 그 뒤에는 주 야영지를 배치했다.
스키피오는 도착 후 처음에는 그처럼 강력한 지형을 어떻게 공격할지 확신하지 못했지만, 다른 두 카르타헤나 카르타고 군대가 자신의 무대응을 이용하여 하스드루발 바르카와 합류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3일째 되는 날 공격을 감행했다.[3]
2. 2. 스키피오의 등장과 카르타고 노바 점령
폴리비오스에 따르면,[2]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카르타고 노바를 기습 공격하여 점령한 후, 이베리아 반도에 주둔한 세 카르타고 군대는 서로 분리된 채로 남아 있었고, 그들의 장군들은 서로 반목하여 로마인들이 그들을 하나씩 상대할 기회를 주었다고 한다.기원전 208년 초,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3만 명의 로마군과 이탈리아군, 그리고 1만 명의 스페인 보조군을 이끌고 하스드루발 바르카를 공격했다. 하스드루발의 3만 명의 군대는 바에쿨라에서 겨울을 보냈는데, 이곳은 바에티스 강(오늘날의 과달키비르 강) 상류에 위치해 있었다.
로마군의 접근을 알게 된 하스드루발은 자신의 야영지를 강력한 방어 위치로 옮겼다. 바에쿨라 남쪽에 위치한 높고 가파른 고원이었는데, 측면은 계곡으로, 전후방은 강으로 보호받고 있었다. 더욱이 고원은 두 단계로 형성되어 있었으며, 하스드루발은 하단에는 경보병을, 그 뒤에는 주 야영지를 배치했다.
스키피오는 도착 후 처음에는 그처럼 강력한 지형을 어떻게 공격할지 확신하지 못했지만, 다른 두 카르타헤나 카르타고 군대가 자신의 무대응을 이용하여 하스드루발 바르카와 합류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3일째 되는 날 공격을 감행했다.[3]
3. 전투 경과
스키피오는 본격적인 공격에 앞서, 두 군대를 나누어 각각 계곡 입구와 바이쿨라 북쪽 길목을 막는 부대를 배치했다.[6] 이는 주력 부대의 안전을 확보하면서 카르타고 군의 퇴각을 방해하기 위한 전략이었다.[6]
이후, 로마 경무장 부대가 먼저 카르타고군을 향해 진격했다.[6] 가파른 경사와 쏟아지는 화살에도 불구하고, 로마군은 근접전에서 카르타고 경무장 부대를 쉽게 제압했다.[6]
스키피오는 선봉 부대를 보강한 후, 가이우스 렐리우스에게 중장 보병 절반을 이끌고 적진의 오른쪽으로 이동하게 하고, 자신은 왼쪽을 공격하여 카르타고군 주둔지를 양쪽에서 압박하는 포위 공격을 펼쳤다.[6]
하스드루발은 로마군의 공격을 단순한 소규모 접전으로 오판하고 주력 부대를 제대로 배치하지 않았다. 스키피오는 최종 공격 직전까지 주력 부대를 숨겨두었기 때문에, 하스드루발의 군대는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로마군에게 삼면이 포위되었다.[6]
포위된 상황에서도 하스드루발은 코끼리 부대, 주요 보급품, 그리고 일부 카르타고 병력을 이끌고 퇴각하는 데 성공했다.[6] 전투에서 발생한 주요 손실은 대부분 경무장 부대와 이베리아 동맹군에게 집중되었다. 이는 로마 군단병들이 하스드루발을 추격하기보다는 카르타고 진영을 약탈하는 쪽을 선택했기 때문이다.[6]
3. 1. 하스드루발의 방어 진지 구축
기원전 208년 초, 스키피오는 바에티스 강(현재의 과달키비르 강) 연안의 바이쿨라(현재의 산토 토메 en)에서 겨울을 나고 있던 하스드루발의 군대를 향해 진격했다.[5] 로마군의 접근을 알게 된 하스드루발은 야영지를 방어에 적합한 위치, 즉 측면은 계곡으로, 전후는 강으로 방어할 수 있는 바이쿨라 남쪽 고지 평탄부로 이동했다. 또한 평탄부를 2단으로 만들어, 하단에는 경보병을, 상단에는 주력군을 배치하여 방어 진지를 구축했다.3. 2. 스키피오의 공격 계획
스키피오는 본 공격에 앞서, 두 군대를 분리하는 계곡 입구를 막기 위해 한 부대를, 북쪽으로 바이쿨라로 향하는 길을 막기 위해 또 다른 부대를 보냈다. 이로써 그는 주력 부대의 안전을 확보하는 동시에 카르타고군의 퇴각 시도를 방해했다.[6][5]이러한 사전 배치 후, 로마 경무장 부대가 먼저 카르타고군에 맞서 진격했다.[6][5] 가파른 경사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쏟아지는 화살 속에서 로마군은 육탄전에 돌입하자마자 카르타고 경무장 부대를 쉽게 물리쳤다.[6][5]
선봉 부대를 강화한 후, 스키피오는 가이우스 렐리우스에게 남은 중장 보병의 절반을 이끌고 적 위치의 오른쪽으로 이동하게 하고, 자신은 왼쪽을 공격하게 하여 카르타고군 주둔지의 측면을 공격하는 포위 공격을 감행했다.[6][5]
한편, 하스드루발은 로마군의 공격을 단지 소규모 교전으로만 생각하고(스키피오는 최종 공격까지 주력 부대를 진영에 숨겨두었다), 제대로 주력을 배치하지 못해 준비가 덜 된 그의 군대는 로마군에게 삼면이 포위되었다.[6][5]
3. 3. 하스드루발의 패배와 후퇴
하스드루발은 스키피오의 공격을 소규모 교전으로 오판하고 주력 부대를 제대로 배치하지 않았다. 스키피오는 최종 공격까지 주력 부대를 진영에 숨겨두었기 때문이다.[1] 이 때문에 카르타고군은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로마군에게 삼면이 포위되었다.[1]스키피오는 본 공격에 앞서 두 군대를 분리하는 계곡 입구를 막기 위해 한 부대를, 북쪽으로 바이쿨라로 향하는 길을 막기 위해 또 다른 부대를 보냈다.[1] 이는 주력 부대의 안전을 확보하고 카르타고군의 퇴각을 방해하기 위함이었다.[1]
이러한 사전 배치 후, 로마 경무장 부대가 먼저 카르타고군에 맞서 진격했다.[1] 가파른 경사와 쏟아지는 화살에도 불구하고, 로마군은 육탄전에 돌입하자마자 카르타고 경무장 부대를 쉽게 물리쳤다.[1]
스키피오는 선봉 부대를 강화한 후, 가이우스 렐리우스에게 남은 중장 보병의 절반을 이끌고 적 위치의 오른쪽으로 이동하게 하고, 자신은 왼쪽을 공격하게 하여 카르타고군 주둔지의 측면을 공격하는 포위 공격을 감행했다.[1]
포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스드루발은 코끼리, 주요 보급 부대 및 일부 카르타고 군대와 함께 무사히 퇴각할 수 있었다.[1] 전투에서의 주요 손실은 대부분의 경무장 부대와 이베리아 동맹군으로 보였다.[1] 이는 군단병들이 하스드루발을 진지하게 추격하기보다는 카르타고 진영을 약탈하는 것을 선택했기 때문이다.[1]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바이쿨라 전투 이후 하스드루발은 병력이 줄어든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진군했고, 이를 막지 못한 스키피오는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비판받았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이베리아 부족들과 동맹을 맺으며 로마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기원전 207년, 카르타고 증원군이 이베리아 반도에 상륙하여 기원전 206년 일리파 전투를 통해 손실을 회복하려 했다.
4. 1. 하스드루발의 이탈리아 진군
바이쿨라 전투 이후, 하스드루발은 병력이 줄어든 군대(주로 켈트이베리아 용병과 갈리아 전사로 구성됨)를 이끌고 피레네 산맥의 서쪽 고개를 넘어 갈리아로 진군한 후, 형인 한니발과 합류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진격했다.[1]하스드루발의 이탈리아 진군을 막지 못한 스키피오의 행동은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비판받았다. 스키피오는 바이쿨라 전투에서의 승리를 이용하여 카르타고군을 이베리아에서 몰아내지 않고, 대신 타라코에 있는 자신의 기지로 물러났다.[2] 그는 카르타고 노바와 바이쿨라에서의 로마의 승리 이후 편을 바꾼 많은 이베리아 부족들과 동맹을 맺었다.[2]
기원전 207년, 카르타고의 증원군이 이베리아 반도에 상륙했고, 곧 기원전 206년 일리파 전투에서 그들의 손실을 회복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를 시작할 것이다.[3] 하스드루발은 일리파 전투 이후 전력이 저하된 군대를 이끌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갈리아로 들어갔다. 그 후 이탈리아로 침입하여 한니발과 합류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전사했다.
스키피오도 하스드루발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놓친 것에 대해 비판받기도 했지만, 적대적인 부족이 많은 미지의 산악 지역을 추격했을 경우, 이베리아에 남은 2개의 카르타고 군과 하스드루발 군에게 협공을 당해 트라시메노 호수 전투의 재앙을 겪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 대신, 스키피오는 군대를 타라코(현재의 타라고나)로 철수시키고, 카르타고 노바 함락 이후 로마 측에 붙은 이베리아 부족과의 동맹 관계 강화에 힘썼다.
한편, 카르타고의 원군은 겨울 동안 이베리아 반도에 도착하여, 지금까지의 손실을 만회하기 위한 마지막 군사 행동을 시작하게 되지만, 이 또한 일리파 전투에서 실패했다.
4. 2. 스키피오에 대한 비판과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상황
스키피오는 하스드루발의 이탈리아 진군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해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1] 그러나 스키피오는 바이쿨라 전투에서의 승리를 바탕으로 이베리아 반도에서 로마의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1] 그는 타라코에 있는 자신의 기지로 물러나, 카르타고 노바와 바이쿨라에서의 로마의 승리 이후 편을 바꾼 많은 이베리아 부족들과 동맹을 맺었다.[1]4. 3.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전환점
바이쿨라 전투 이후, 하스드루발은 켈트이베리아 용병과 갈리아 전사로 구성된 병력이 줄어든 군대를 이끌고 피레네 산맥의 서쪽 고개를 넘어 갈리아로 진군한 후, 형인 한니발과 합류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진격했다.[1]하스드루발의 이탈리아 진군을 막지 못한 스키피오의 행동은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비판받았다. 스키피오는 바이쿨라 전투에서의 승리를 이용하여 카르타고군을 이베리아에서 몰아내지 않고, 대신 타라코에 있는 자신의 기지로 물러났다.[2] 그는 카르타고 노바와 바이쿨라에서의 로마의 승리 이후 편을 바꾼 많은 이베리아 부족들과 동맹을 맺었다.[3]
기원전 207년, 카르타고의 증원군이 이베리아 반도에 상륙했고, 곧 기원전 206년 일리파 전투에서 그들의 손실을 회복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를 시작할 것이다.[4]
참조
[1]
간행물
An Epic Conflict
Archaeological Institute of America
[2]
서적
Livy XXVII.18
[3]
서적
Polybius VIII.39 Livy XXVII.18
[4]
서적
Polybius
[5]
서적
Livy
[6]
서적
Polyb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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