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흥숙
1. 개요
박흥숙은 1954년 전라남도 영광군에서 태어나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1970년 광주광역시로 이주하여 열쇠 수리공으로 일하며 무등산에 움막집을 짓고 생활하던 중, 1977년 4월 20일 동구청 소속 철거반원들이 무허가 주택을 철거하는 과정에서 어머니의 재산이 불에 타자 쇠망치로 철거반원 4명을 살해하고 1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사건 이후 사형 반대 운동이 있었으나,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 직후인 1980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광주교도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의 삶과 사건은 도시 빈민 문제와 5.18 민주화 운동과 연관되어 사회적 의미를 가지며, '무등산 타잔, 박흥숙'이라는 제목의 관련 작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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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출신 -
김상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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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출신 -
노형욱 (공무원)
노형욱은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기획예산처, 국무조정실 등을 거쳐 국토교통부 장관을 역임하고, 현재 경제·국토교통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
대한민국의 살인자 -
이호성 (196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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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살인자 -
이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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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사망 -
오히라 마사요시
오히라 마사요시는 일본의 정치인이자 제68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외무대신 시절 한일 및 중일 국교 정상화에 기여했으며, 총리 재임 중 환태평양 연대 구상을 제시하는 등 활발한 외교 활동을 펼쳤으나 총선 직전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
1980년 사망 -
송요찬
송요찬은 일제강점기 일본군 부사관으로 복무하고 대한민국 국군 소위로 임관하여 4·3 사건 진압을 지휘했으며, 5·16 군사정변 이후 요직을 두루 거쳤으나 정치적 갈등으로 구속된 인물이다.
2. 생애
박흥숙은 1954년 전라남도 영광군에서 태어났다. 원래부터 가난한 집안이었는데,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와 친형이 연이어 사망하면서 더욱 어려워졌다. 가족들은 생계를 위해 흩어져 지내야 했다. 초등학교 생활기록부를 보면 우수한 학업 성적과 함께 가정의 가난함 정도를 알 수 있다.
1970년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에 합격했지만 돈이 없어 진학하지 못하고, 광주광역시 시내로 가서 열쇠 수리공으로 취직했다. 집을 구할 수 없었던 박흥숙과 가족들은 무등산 덕산골에 움막집을 짓고 정착했다. 움막집에는 전기나 수도 시설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지만, 그는 온 가족이 함께 살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꼈다고 한다.
1977년 4월 20일, 광주광역시 동구청 소속 건설반장 오종환을 포함한 7명의 철거반원들이 무등산 주변 무허가 주택을 철거했다. 이 과정에서 집에 불을 질렀을 때, 그의 어머니가 이사 비용으로 쓰려고 천장에 숨겨둔 30만 원이 타버렸다. 박흥숙은 철거반원들에게 "윗쪽에 노인분들이 사는 곳은 불지르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철거반원들은 그곳에도 불을 질렀다. 이에 분노한 박흥숙은 쇠망치를 들고 철거반원들에게 맞섰다.
철거반원들을 끈으로 묶고 사과를 요구했으나, 철거반원들이 반발하자 광주시장에게 항의하기 위해 끌고 가려 했다. 끈이 풀리자마자 박흥숙은 망치로 오종환, 이건태, 양관승, 윤수현 4명을 살해하고, 김영철 1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이 사건은 언론에 알려지면서, 범행 참작 사유를 들어 사형만은 안 된다는 구명 운동이 일기도 했다. 그러나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진압된 직후인 1980년 크리스마스 이브 무렵, 광주교도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2.1. 가난과 가족의 해체
박흥숙은 1954년 전라남도 영광군에서 태어났다. 원래부터 가난한 집안이었는데,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와 친형이 연이어 사망하면서 더욱 형편이 어려워졌다. 이후 가족들은 생계를 위해 뿔뿔이 흩어져 지내야 했다. 그의 초등학교 생활기록부를 보면 우수한 학업 성적과 더불어 가난한 가정 형편을 알 수 있다.
1970년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에 합격했지만 돈이 없어 진학하지 못하고 광주광역시 시내로 상경하여 열쇠 수리공으로 취직했다. 시내에서 집을 구할 수 없었던 그와 가족들은 무등산 덕산골에 정착하여 움막집을 지었다. 움막집에는 전기나 수도 시설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지만, 그는 온 가족이 함께 살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함을 느꼈다고 한다.
2.2. 무등산 움막 생활과 강제 철거
1954년 전라남도 영광군에서 태어났다. 원래부터 가난한 집안이었는데,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와 친형이 연이어 사망하면서 더욱 어려워졌다. 가족들은 생계를 위해 흩어져 지내야 했다. 초등학교 생활기록부를 보면 우수한 학업 성적과 함께 가정의 가난함 정도를 알 수 있다.
1970년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에 합격했지만 돈이 없어 진학하지 못하고, 광주광역시 시내로 가서 열쇠 수리공으로 취직했다. 집을 구할 수 없었던 박흥숙과 가족들은 무등산 덕산골에 움막집을 짓고 정착했다. 움막집에는 전기나 수도 시설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지만, 그는 온 가족이 함께 살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꼈다고 한다.
1977년 4월 20일, 광주광역시 동구청 소속 건설반장 오종환을 포함한 7명의 철거반원들이 무등산 주변 무허가 주택을 철거했다. 이 과정에서 집에 불을 질렀을 때, 그의 어머니가 이사 비용으로 쓰려고 천장에 숨겨둔 30만 원이 타버렸다. 박흥숙은 철거반원들에게 "윗쪽에 노인분들이 사는 곳은 불지르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철거반원들은 그곳에도 불을 질렀다. 이에 분노한 박흥숙은 쇠망치를 들고 철거반원들에게 맞섰다.
철거반원들을 끈으로 묶고 사과를 요구했으나, 철거반원들이 반발하자 광주시장에게 항의하기 위해 끌고 가려 했다. 끈이 풀리자마자 박흥숙은 망치로 오종환, 이건태, 양관승, 윤수현 4명을 살해하고, 김영철 1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이 사건은 언론에 알려지면서, 범행 참작 사유를 들어 사형만은 안 된다는 구명 운동이 일기도 했다. 그러나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진압된 직후인 1980년 크리스마스 이브 무렵, 광주교도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3. 사건의 전개
3.1. 철거 과정에서의 갈등
3.2. 살인 사건 발생
4. 재판과 사형 집행
4.1. 구명 운동과 사형 선고
4.2. 5.18 민주화 운동 직후 사형 집행
5. 사회적 배경과 의미
5.1. 도시 빈민 문제와 강제 철거
5.2. 5.18 민주화 운동과의 연관성
6. 관련 작품
* 무등산 타잔, 박흥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