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트 로젠베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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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는 나치 독일의 주요 이데올로그이자 정치인으로, 1893년 에스토니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나치당의 인종 이론가로서, 아리아 인종 우월주의를 주장하고 유대인과 슬라브인을 혐오했으며, 반유대주의와 반공주의를 핵심 사상으로 삼았다. 로젠베르크는 나치당 외교국 책임자, 나치당 이념 교육 감독을 담당했으며, 동부 점령 지역 장관으로 임명되어 점령 지역의 통치를 맡았다. 그는 점령지에서 문화재를 약탈하고, 유대인 가구를 몰수하는 등 전쟁 범죄에 연루되었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46년 처형되었다. 그의 저서 《20세기의 신화》는 나치즘의 핵심 텍스트로,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를 선동하여 비판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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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트 로젠베르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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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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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알프레트 에른스트 로젠베르크 |
출생일 | 1893년 1월 12일 (율리우스력 1892년 12월 31일) |
출생지 | 레발, 에스토니아 관구, 러시아 제국 (현재의 에스토니아 탈린) |
사망일 | 1946년 10월 16일 |
사망지 | 뉘른베르크 감옥, 뉘른베르크, 바이에른, 연합군 점령하의 독일 |
사망 원인 | 교수형 |
국적 | 발트 독일인 |
정당 | 나치당 |
배우자 | 힐다 레스만 (1915년–1923년, 이혼) 헤드비히 크라머 (1925년) |
자녀 | 2명 |
학력 | 공학 |
모교 | 리가 공과대학교 모스크바 최고 기술 학교 |
직업 | 건축가, 정치인, 작가 |
알려진 업적 | 20세기의 신화 저술 |
내각 | 히틀러 내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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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 유죄 판결 | |
유죄 판결 | 평화에 대한 죄를 공모 침략 범죄 전쟁 범죄 인도에 반한 죄 |
재판 | 뉘른베르크 재판 |
유죄 판결 형벌 | 사망 |
유죄 판결 상태 | 처형됨 |
직책 | |
임기 시작 | 1933년 4월 1일 |
임기 종료 | 1945년 5월 8일 |
전임자 | 직위 신설 |
후임자 | 직위 폐지 |
임기 시작 | 1933년 6월 2일 |
임기 종료 | 1945년 5월 8일 |
임기 시작 | 1934년 1월 27일 |
임기 종료 | 1945년 5월 8일 |
전임자 | 직위 신설 |
후임자 | 직위 폐지 |
임기 시작 | 1941년 7월 17일 |
임기 종료 | 1945년 4월 30일 |
총통 | 아돌프 히틀러 |
전임자 | 직위 신설 |
후임자 | 직위 폐지 |
기타 정보 | |
임기 시작 | 1930년 |
임기 종료 | 1945년 |
당선 횟수 | 7회 |
2. 초기 생애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는 1893년 1월 12일 러시아 제국령 에스토니아 레발(현 탈린)에서 발트 독일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볼데마르 빌헬름 로젠베르크/Woldemar Wilhelm Rosenbergde는 상관(商館) 지배인이었다. 어머니엘프리데/Elfriedede(결혼 전 성씨는 시레/Siréde)는 프랑스계와 독일계 혈통을 가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로젠베르크가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결핵으로 사망했고,[99] 아버지는 그가 11세 때 사망했다.[99] 그래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고모 집에서 자랐다.[99]
로젠베르크(Rosenberg)는 유대인에게 흔한 성이지만, 발트 지방에서는 비유대인에게도 일반적인 성이었다. 헝가리 유대인 기자인 프란츠 셀은 로젠베르크의 조상들 중에는 "라트비아인, 유대인, 몽골인, 프랑스인"만 있었다고 주장하며, "단 한 방울의 독일 피도 흐르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공개 서한을 발표했다.[4] 이 주장은 1937년 9월 15일 바티칸 시국 신문 ''L'Osservatore Romano''에도 실렸다.[6]
처음에는 프로테스탄트로 자랐으나, 종교에 반발했다.[99] 그는 레발 실과학교(현재의 탈린나 레알쿨)[7]에서 독일인 교사를 만나 독일의 옛 문화와 지리, 북유럽 신화와 인도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17세 때 읽은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의 저서 『19세기의 기초』는 그가 반유대주의와 게르만 민족 우월주의에 빠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 후, 건축가가 되기 위해 리가 공과대학교에 진학했다.[99] 리가 공과대학교 재학 중 고대 인도 아리아인 신화와 신비주의 철학에 심취[99]하여, 그리고리 라스푸틴(Grigoriy Rasputin)과 게오르기 구르지예프(Georgiy Gurdjieff)의 영향을 받은 러시아 신비주의 서클에 참가한 오컬티스트이기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독일군의 동부 전선 공세로 로젠베르크는 모스크바로 이주하여 모스크바 고등 공과학교(현재의 바우만 모스크바 국립 기술대학교)에 입학했다.[7][8] 그러나 곧 러시아 혁명이 발생하여 로젠베르크는 혁명의 발전을 목격했다.[100] 그는 혁명기의 아나키즘에 강한 혐오감을 가지고, 또 공산주의 혁명을 "유대인의 음모"로 여기며 이에 강하게 반감을 품게 되었다.[101] 1915년에는 힐다 리스만(Hilda Leesmann)과 결혼했다가[102] 1923년에 이혼했다. 1918년에는 건축학 자격을 취득하고,[9] 레발로 진군해 온 독일군에 입대를 지원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그 후 체결된 볼셰비키 정부와 독일의 휴전 협정인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충격을 받고, 11월에는 "조국을 얻기 위해 집을 버리고" 베를린으로 향했다.
독일군의 에스토니아 점령 기간인 1918년 로젠베르크는 구스타프 아돌프 김나지움과 탈린나 레알쿨에서 그림 교사로 일했다.[9] 그는 1918년 11월 28일 에스토니아 독립 전쟁 발발 후 11월 30일 검은 머리 집에서 유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첫 연설을 했다.[10] 그는 막스 에르빈 폰 셰우브너-리히터와 함께 후퇴하는 독일 제국군과 함께 독일로 이주했는데, 셰우브너-리히터는 로젠베르크와 그의 이데올로기에 일종의 멘토 역할을 했다. 뮌헨에 도착한 그는 디트리히 에카르트의 출판물인 ''민족 관찰자''(Völkischer Beobachter)에 기고했다. 이 무렵 그는 이미 반유대주의자였으며,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의 저서 ''19세기의 기초''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 책은 인종 이론의 핵심적인 초기 나치 책 중 하나였다. 또한 그는 반공주의자이자 반볼셰비키주의자였다.[11]
1925년에는 헤드비히 크라머와 재혼했으며, 이 결혼은 그가 연합군에 의해 처형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로젠베르크는 탈라트 파샤와 연합 진보위원회에 동조하고, 이 위원회가 자행한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지지했으며, "항상 아르메니아인들을 보호해 온 의도적인 유대인 정책"이 있었고, "세계 대전 중 아르메니아인들은 독일을 상대로 한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터키를 상대로 스파이 활동을 주도했다"고 주장했다.[16][17] 이 무렵 로젠베르크와 힐다의 결혼 생활은 사실상 파국을 맞이했다.[103]
2. 1. 가족 배경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는 1893년 1월 12일 당시 러시아 제국 에스토니아 주지사령에 속해 있던 레발(현재 에스토니아 탈린)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엘프리데(결혼 전 성씨 시레)는 프랑스계와 독일계 혈통을 가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로젠베르크가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사망했다.헝가리 유대인 기자인 프란츠 셀은 로젠베르크의 조상들 중에는 "라트비아인, 유대인, 몽골인, 프랑스인"만 있었다고 주장하며, "단 한 방울의 독일 피도 흐르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공개 서한을 발표했다.[4] 이 주장은 1937년 9월 15일 바티칸 시국 신문 ''L'Osservatore Romano''에도 실렸다.[6]
로젠베르크는 두 번 결혼했다. 1915년 에스토니아계 히르다 레스만과 결혼했다가 1923년에 이혼했다. 1925년에는 헤드비히 크라머와 재혼했으며, 이 결혼은 그가 연합군에 의해 처형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2. 2. 교육 및 초기 경력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는 레발의 페트리-레알슐레(현재 탈린나 레알쿨)를 졸업하고,[7] 1910년 가을 리가 공과대학교에서 건축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군이 리가에 접근하자 학교 전체가 모스크바 제국 고등 기술학교로 대피했고,[7][8] 그는 그곳에서 1917년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레발에 머무는 동안 유명한 화가 안츠 라이크마의 화실에 다녔지만, 전시 기록은 없다.독일군의 에스토니아 점령 기간인 1918년 로젠베르크는 구스타프 아돌프 김나지움과 탈린나 레알쿨에서 그림 교사로 일했다.[9] 그는 1918년 11월 28일 에스토니아 독립 전쟁 발발 후 11월 30일 검은 머리 집에서 유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첫 연설을 했다.[10] 그는 맥스 에르빈 폰 셰우브너-리히터와 함께 후퇴하는 독일 제국군과 함께 독일로 이주했는데, 셰우브너-리히터는 로젠베르크와 그의 이데올로기에 일종의 멘토 역할을 했다. 뮌헨에 도착한 그는 디트리히 에카르트의 출판물인 ''민족 관찰자''(Völkischer Beobachter)에 기고했다. 이 무렵 그는 이미 반유대주의자였으며,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의 저서 ''19세기의 기초''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 책은 인종 이론의 핵심적인 초기 나치 책 중 하나였다. 또한 그는 반공주의자이자 반볼셰비키주의자였다.[11] 로젠베르크는 탈라트 파샤와 연합 진보위원회에 동조하고, 이 위원회가 자행한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지지했으며, "항상 아르메니아인들을 보호해 온 의도적인 유대인 정책"이 있었고, "세계 대전 중 아르메니아인들은 독일을 상대로 한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터키를 상대로 스파이 활동을 주도했다"고 주장했다.[16][17]
3. 나치당 활동
1919년 말경, 디트리히 에카르트의 소개로 아돌프 히틀러를 만나 독일노동자당(DAP)에 입당했으며, 당원 번호는 626번이었다.[105] DAP는 1920년에 나치당으로 개칭되었다.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는 러시아어에 능통하고 동방 문제에 정통하여 초기 나치당 내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했다.[105]
로젠베르크는 에카르트가 주재하던 신문 『좋은 독일어로(Völkischer Beobachter)』에 기고하며 투레 협회에도 참여했다.[99][105] 1920년 12월, 당이 이 신문을 인수하여 『폴키셔 베오바흐터』(「민족의 관찰자」)로 개명한 후, 로젠베르크는 편집 보조가 되었다.[106] 1922년에는 『폴키셔 베오바흐터』의 주필이 되었다.[107]
1923년, 맥주홀 폭동 실패 이후 히틀러는 투옥 중인 자신을 대신하여 로젠베르크를 나치 운동의 임시 지도자로 임명했다. 히틀러는 나중에 로젠베르크의 약하고 게으른 성격 때문에 그를 선택했다고 언급했지만, 이는 히틀러가 로젠베르크의 직무 수행에 대한 불만을 과거의 사건에 투영한 것일 수도 있다.
1924년 1월 1일, 로젠베르크는 나치의 전위조직인 대독일 국민 공동체를 설립했다. 이 조직은 뮌헨에 본부를 두었으며, 바이에른 지역 나치당원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주요 회원으로는 막스 아만, 필립 보일러, 헤르만 에서, 프란츠 크사베어 슈바르츠, 율리우스 슈트라이허 등이 있었다.[18] 로젠베르크는 리더십 부족으로 율리우스 슈트라이허에게 밀려났고, 1924년 7월 9일 슈트라이허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18][19]
1929년, 독일 문화를 위한 투쟁 연맹을 설립하고, 유대인 문제 연구소[20][21]를 설립하여 독일 문화에서 유대인의 영향을 규명하고 공격하는 데 힘썼다. 1930년에는 국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인종 이론에 관한 저서 『20세기의 신화』를 출판하여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의 영향을 받은 자신의 사상을 드러냈다. 히틀러는 이 책을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불렀고,[23] 그 유사 종교적인 어조를 못마땅해했다.[11]
초기 연설에서 로젠베르크는 히틀러에게 공산주의가 독일의 심각한 위협이라고 주장하며, 유대 볼셰비즘을 나치즘의 이데올로기적 표적으로 삼는 데 영향을 주었다.[24]
나치의 권력 장악 이후, 1933년 4월에 나치당 외교국의 책임자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6월 2일 나치당에서 두 번째로 높은 정치적 지위인 라익스라이터로 임명되었다. 1934년 1월 27일, 히틀러는 로젠베르크를 "NSDAP의 지적 및 이데올로기 교육 감독을 위한 총통 대표"로 임명했다.[29]
3. 1. 초기 나치당 내 역할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는 러시아어에 능통하고 동방 문제에 정통하여 초기 나치당 내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했다.[105] 1919년 말경, 디트리히 에카르트의 소개로 아돌프 히틀러를 만나 독일노동자당(DAP)에 입당했으며, 당원 번호는 626번이었다.[105] DAP는 1920년에 나치당으로 개칭되었다.1923년, 맥주홀 폭동 실패 이후 히틀러는 투옥 중인 자신을 대신하여 로젠베르크를 나치 운동의 임시 지도자로 임명했다. 히틀러는 나중에 로젠베르크의 약하고 게으른 성격 때문에 그를 선택했다고 언급했지만, 이는 히틀러가 로젠베르크의 직무 수행에 대한 불만을 과거의 사건에 투영한 것일 수도 있다.
1924년 1월 1일, 로젠베르크는 나치의 전위조직인 대독일 국민 공동체를 설립했다. 이 조직은 뮌헨에 본부를 두었으며, 바이에른 지역 나치당원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로젠베르크는 리더십 부족으로 율리우스 슈트라이허에게 밀려났고, 1924년 7월 9일 슈트라이허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18][19]
로젠베르크는 에카르트가 주재하던 신문 『좋은 독일어로(Völkischer Beobachter)』에 기고하며 투레 협회에도 참여했다.[99][105] 1920년 12월, 당이 이 신문을 인수하여 『폴키셔 베오바흐터』(「민족의 관찰자」)로 개명한 후, 로젠베르크는 편집 보조가 되었다.[106] 1922년에는 『폴키셔 베오바흐터』의 주필이 되었다.[107]
1929년, 독일 문화를 위한 투쟁 연맹을 설립하고, 유대인 문제 연구소[20][21]를 설립하여 독일 문화에서 유대인의 영향을 규명하고 공격하는 데 힘썼다. 1930년에는 국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인종 이론에 관한 저서 『20세기의 신화』를 출판하여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의 영향을 받은 자신의 사상을 드러냈다.
초기 연설에서 로젠베르크는 히틀러에게 공산주의가 독일의 심각한 위협이라고 주장하며, 유대 볼셰비즘을 나치즘의 이데올로기적 표적으로 삼는 데 영향을 주었다.[24]
3. 2. 히틀러의 대리인
1923년, 뮌헨 폭동 실패 후 반역죄로 투옥되었던 히틀러는 로젠베르크를 나치 운동의 지도자로 임명했다. 히틀러는 나중에 로젠베르크를 약하고 게으르다고 여겼기에 그를 선택한 것은 전략적이었다고 비공개적으로 언급했다. 히틀러는 나치당의 임시 지도자가 너무 인기가 많아지거나 권력욕에 굶주리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1924년 1월 1일, 로젠베르크는 나치의 전위조직인 대독일 국민 공동체를 설립했다.[18] 뮌헨에 본부를 둔 이 조직은 바이에른(국가사회주의의 발상지)에 국한되었고, 주요 회원으로는 막스 아만, 필립 보일러, 헤르만 에서, 프란츠 크사베어 슈바르츠, 율리우스 슈트라이허 등이 있었다.[18] 그러나 로젠베르크는 곧 에세르와 슈트라이허에게 실권을 빼앗겼다.[19]
히틀러가 수감된 후, 로젠베르크에게 당 지도를 위임했지만, 로젠베르크의 권력은 거의 없었다. 1월 31일 잘츠부르크에서 열린 간부 회합에서 당 지도자 대리로 지명되었으나, 뮌헨에 남아 있던 간부 에세르, 슈트라이히어, 아만과 로젠베르크의 관계는 최악이었고, 그들은 그를 "부분적으로 유대인"이거나 "프랑스의 스파이"라고 비난했다.
로젠베르크는 당의 합병에는 반대했지만,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나치당의 세력 확장을 도모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선거에서의 협력 관계를 맺는 것에는 동의했다. 이러한 운동의 연합체인 "국가 사회주의 자유 운동"은 1924년 5월 독일 국회 선거에서 200만 표에 가까운 득표를 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처음에는 선거에도 반대했고, 합병 문제에 대해서도 의견을 명확히 하지 않는 등 로젠베르크의 방침에 명확한 동의를 주지 않았다. 또한 6월 16일 히틀러가 "아무도 자신의 대리로 행동하거나 성명을 발표할 권한이 없다"고 발표함으로써 로젠베르크의 당 지도자 대리 지위는 상실되었다. 히틀러는 나중에 로젠베르크가 이 시기에 불충실했다고 그를 강하게 비난했다.
3. 3. 이데올로그로서의 활동
1929년, 로젠베르크는 독일 문화를 위한 투쟁 연맹을 설립했다.[20][21] 이 단체는 독일 문화에서 유대인의 영향을 제거하고, 급진적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유대교의 역사를 기록하는 데 전념했다.[20][21] 1930년, 그는 국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나치 정권 말기까지 의원직을 유지했다.[20][21] 같은 해, 인종 이론에 관한 그의 저서인 『20세기의 신화』(Der Mythus des 20. Jahrhunderts)를 출판했다.[22] 이 책은 "유대인 문제"와 같은 나치 이데올로기의 핵심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의 책의 속편으로 기획되었다.[22] 1945년까지 100만 부 이상 판매되었지만, 나치즘 내에서의 영향력은 의심스럽다.[22] 히틀러는 이 책을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불렀고,[23] 그 유사 종교적인 어조를 못마땅해했다.[11]로젠베르크는 초기 연설에서 프랑스와 영국에 대한 복수에 초점을 맞춘 히틀러를 설득하여 공산주의가 독일을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라고 주장했다.[24] 그 결과, "유대 볼셰비즘"은 1920년대 초 나치즘의 이데올로기적 표적이 되었다.[11]
나치의 권력 장악 이후, 1933년 4월에 나치당 외교국의 책임자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6월 2일 나치당에서 두 번째로 높은 정치적 지위인 라익스라이터로 임명되었다. 1934년 1월 27일, 히틀러는 로젠베르크를 "NSDAP의 지적 및 이데올로기 교육 감독을 위한 총통 대표"로 임명했다.[29]
히틀러는 실용적인 정치에 중점을 둔 반면, 로젠베르크에게는 종교와 철학이 핵심이었고 그는 당 내에서 가장 큰 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했다.[83] 그러나, 나치당 내에서 로젠베르크의 영향력에 대한 질문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는 다른 나치 지도자들처럼 카리스마와 정치적 기술이 부족하고 다소 고립되어 있었다고 여겨졌다.[84] 그의 사상은 협소하고 유연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히틀러의 측근들에게 무시당했고, 요제프 괴벨스에게도 "이데올로기(관념)의 트림"이라며 경멸당했다.[140]
4. 나치 정권 하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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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4월,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는 나치당의 대외정책 전국 지도자 및 나치당 외무국(Außenpolitisches Amt der NSDAP)의 수장이 되었다. 외무국의 주요 임무는 동유럽과 발칸 반도의 파시스트 집단과 연락을 유지하는 것이었으며,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의 외무부, 요아힘 폰 리벤트롭의 리벤트롭 기관(Dienststelle Ribbentrop), 에른스트 빌헬름 보레의 나치당 해외부 대관구(NSDAP/AO)와 경쟁했다.
로젠베르크는 외무국 책임자로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외국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고, 러시아어에는 능숙했지만 영어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112] 또한, 대화 내용도 5분 정도 지나면 인종에 관한 이야기로 귀결되었다.[99] 런던을 처음 방문했을 때 두 명의 영국인과 친분을 맺었지만, 이들은 나중에 스파이로 밝혀졌다.[99]
1939년,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 유대인 문제 연구소(Institut zur Erforschung der Judenfrage)를 설립했다.[107]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에는 호에 슐레(나치당 전문 고등 교육 기관) 설립을 담당하게 되었고,[113] 1940년 1월, 아돌프 히틀러는 당 및 정부 관계자들에게 호에 슐레 설립에 필요한 장서 수집을 돕도록 명령했다.[99] 로젠베르크는 전국 지도자 로젠베르크 특수 부대를 설치하여 점령지에서 문서와 미술품을 약탈했다.[99] 이 부대는 게슈타포, 국가 안전 본부, 비밀 야전 경찰의 지원을 받아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의 도서관, 문헌관, 개인 소장품을 약탈했다.[99]
로젠베르크 특수 부대는 파리에 있던 세계 유대인 연맹과 라비 양성 학교에서 5만 권, 파리의 대형 유대계 서점(립슈츠)에서 2만 권의 책을 약탈했다.[114] 처음에는 책과 자료 약탈이 주 임무였지만, 히틀러의 미술관 건설 계획과 헤르만 괴링의 수집벽 때문에 미술품 약탈에도 나섰다.[115] 로젠베르크는 약탈한 미술품을 나치당의 공유 재산으로 여겼지만, 괴링은 미술품 분배를 독단적으로 결정했고, 로젠베르크 자신도 약탈한 미술품을 자택에 장식했다.[121][99]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는 1934년 나치 전체의 정신적, 세계관적 교육 및 육성 감시를 위한 총통 수임자가 되었다.[107] 1934년부터 로젠베르크 사무소(Amt Rosenberg)를 설립하여 나치 이론의 선전과 국내 여론 활동을 감시했다.[107] 1939년에는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Frankfurt am Main)에 유대인 문제 연구소(Institut zur Erforschung der Judenfrage)를 설립했다.[107]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후, 호에 슐레(나치당 전문 고등 교육 기관) 설립을 로젠베르크가 담당하게 된다.[113] 1940년 1월, 히틀러는 당 및 정부 관계자들에게 호에 슐레 설립에 있어서 장서 수집을 하고 있는 로젠베르크를 지원하도록 명령했다.[99] 로젠베르크는 전국 지도자 로젠베르크 특수 부대를 설치하여 점령지에서 문서와 미술품 압수를 담당하게 했다.[99] 이 부대는 게슈타포(Gestapo), 국가 안전 본부(Reichssicherheitshauptamt), 비밀 야전 경찰(Sicherheitsdienst)의 지원을 받아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의 도서관, 문헌관, 개인 소장품을 잇달아 약탈했다.[99]
로젠베르크 특수 부대는 파리에 있던 세계 유대 연맹과 라비(Rabbi) 양성 학교에서 5만 권, 파리의 대형 유대계 서점(립슈츠)에서 2만 권의 책을 약탈했다.[114] 또한 동부에서도 책을 약탈하여 수십만 권의 책을 몰수했다.[134]
1941년 7월 17일, 로젠베르크는 소련 침공 이후 동부 점령 지역 총독부(''Reichsministerium für die besetzten Ostgebiete'') 장관에 임명되어 점령 지역 통치를 담당했다.[69] 알프레트 마이어가 그의 부장관으로서 반제 회의에 그를 대표하여 참석했고, 로젠베르크의 요청으로 동부 점령 지역 총독부의 다른 관리인 게오르크 라이브란트도 회의에 참석했다.[69]
로젠베르크는 히틀러에게 정복한 동부 지역의 조직 계획을 제시했는데, 소련이 통제했던 지역을 새로운 총독령으로 대체할 새로운 행정 구역 설립을 제안했다. 여기에는 오스트란트(발트 3국 및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우크라이나 및 인근 지역), 카프카스(카프카스 지역), 모스크바(모스크바 대도시권 및 인근 러시아 유럽 지역)가 포함된다.[69]
로젠베르크는 공산주의 신념 때문에 소련의 모든 사람들이 하등 인간이라고 믿었지만,[69] 이러한 제안은 지정학적 "동방 생활권" 계획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이는 공산주의와 볼셰비즘을 결정적인 선제적인 군사 행동으로 완전히 근절하기 위한 준비 단계에서 소련의 확장에 대한 완충 역할을 할 것이었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베어마흐트 부대가 소련이 통제하는 영토를 침공했을 때, 그들은 즉시 제안된 오스트란트와 우크라이나의 총독령을 각각 힌리히 로제와 에리히 코흐의 지도하에 시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행정 지역의 조직은 독일 점령하의 슬라브인에 대한 처우 문제로 로젠베르크와 SS 간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로젠베르크는 슬라브인들을 독일인보다 열등하게 여겼지만 아리아인으로 간주했다. 그는 유대인이 아닌 점령당한 사람들의 처우에 대해 히틀러와 힘러에게 자주 불평했다.[70] 그는 대핀란드, 발트 국가, 우크라이나, 카프카스로 구성된 완충 위성 국가의 창설을 제안했다.[39]
로젠베르크는 동부 점령 지역 장관으로서, 소비에트 집단 농장(''콜호즈'')의 종식을 알리는 포스터를 발행하고, 1942년 2월에는 농업법을 발표하여 가족 농장을 복원하려 했다. 그러나 농장 해체는 전시 식량 생산과 상충되었고, 헤르만 괴링은 이름만 바꾸는 것을 제외하고는 집단 농장을 유지해야 한다고 요구했으며, 히틀러는 토지 재분배를 "어리석은 짓"이라고 비난했다.[73]
로젠베르크는 또한, 소비에트 파르티잔과의 전쟁인 '반데크리그'(Bandenkrieg)에서의 지원을 요청하는 포스터를 게시했지만, 독일의 정책은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켰다.[74]
1941년 4월, 로젠베르크는 히틀러와 곧 있을 독소전쟁 개전 후 동부 지역 국가들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124] 로젠베르크는 소련에 대해서는 산업을 해체하고, 교통망을 완전히 파괴하여 국토를 완전히 황폐화시키고 쓰레기장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의견을 밝혔다.[99] 발트 3국에 대해서는 독일의 동맹국으로 만들되, 라트비아(Latvia)의 지식 계층은 근절하고, 리투아니아(Lithuania)의 25만 명의 유대인은 추방해야 한다고 했다.[99] 우크라이나(Ukraine)는 독소전쟁 중 및 독소전쟁 후에도 독일이 필요로 하는 곡물과 원자재를 제공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99] 벨라루스(Belarus)는 구제할 수 없는 국가이기 때문에 독립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99]
동부 점령 지역성은 현지에 있는 부하는 자택에 설치하는 가구와 가구가 부족했다.[132] 그래서 로젠베르크는 히틀러에게 서부 점령지의 유대인으로부터 가구를 몰수할 것을 제안하고, 가구 장식 작전(Möbelaktion)에 의해 가구를 몰수했다.[99] 가구 장식 작전에 의해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에서 과거 유대인이 살았던 아파트 등 총 6만 9천 가구에서 가구를 빼앗았다.[99] 빼앗은 가구는 결국 독일 국내의 공습 피해를 입은 독일 국민에게 인도되었다.[133]
1940년 로젠베르크는 국민사회주의 이념 및 교육 연구 센터인 '국가사회주의당 고등교육기관'의 책임자가 되었다.[67] 이 기관에서 발전한 '라인하르트 로젠베르크 특별 임무부대(ERR)'는 예술품과 문화재 약탈을 목적으로 활동했다.[67] ERR은 특히 파리에서 활동하며 로스차일드 가문이나 폴 로젠베르크 가문과 같은 유명 유대인 가문으로부터 도난당한 예술품을 약탈했다.[67] 헤르만 괴링은 자신의 사적 만족을 위해 ERR을 이용하여 예술품을 수집했다.[67]
로젠베르크는 히틀러의 고향인 오스트리아 린츠에 건설될 대학에서 사용할 최고의 악기와 악보를 수집하기 위해 "음악 특별 임무부대"를 설립했다.[68] "음악 특별 임무부대"에 내려진 명령은 독일과 독일군이 점령한 모든 국가에서 발견된 유대인의 모든 재산, 그리고 모든 악기나 악보를 즉시 베를린으로 운송하는 것이었다.[68]
로젠베르크 특수 부대는 파리에 있던 세계 유대 연맹과 라비 양성 학교에서 5만 권, 파리의 대형 유대계 서점(립슈츠)에서 2만 권의 책을 약탈했다.[114] 처음에는 책이나 자료 약탈이 주 임무였지만, 히틀러가 고향 린츠에 미술관을 건설할 계획을 세우고, 헤르만 괴링도 수집벽이 있어 사실상 그들의 대리로 미술품 약탈에 나섰다.[115]
프랑스 미술품 약탈 당시에는 로젠베르크와 괴링이 협력했지만, 약탈이 완료되자 괴링은 권한 없이 미술품 분배 방법을 결정하는 명령을 내렸다.[117] 분배 방법은 첫째 히틀러, 둘째 괴링, 셋째 로젠베르크 순으로 미술품을 얻고, 넷째 독일 또는 프랑스의 미술관이 남은 미술품을 얻으며, 그래도 남은 미술품은 경매에 부쳐 판매하여 그 수익을 전쟁 미망인에게 기부하는 것이었다.[118]
결과적으로 로젠베르크 특수 부대는 프랑스에서 2만 2천 점의 미술품을 압수하여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포함한 독일 국내에 '보관'했다.[119][99] 그러나 괴링은 독일로 옮긴 미술품을 차례차례 착복했다.[120] 로젠베르크는 약탈한 미술품은 나치당의 공유 재산이라고 생각했지만, 자신도 약탈한 미술품을 자택에 장식했다.[121][99]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로젠베르크는 '호에 슐레'(나치당 전문 고등 교육 기관) 설립을 담당하며 도서관에 필요한 장서 수집을 시작했다.[113][99] 1940년 1월, 히틀러는 당 및 정부 관계자들에게 로젠베르크의 장서 수집을 지원하도록 명령했다.[99] 로젠베르크는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시 당국에 유대인 관련 자료 제출을 요구하고 도서관을 매입했으며,[99] 전황이 좋아지자 프랑스에서도 유대인 및 프리메이슨 관련 주요 기관이 방치한 문서를 압수했다.[99] 로젠베르크는 히틀러에게 망명한 유대인이 버린 자료를 수집하는 부대 설립을 요청했고, 외무국 아래 전국 지도자 로젠베르크 특수 부대가 설치되어 점령지에서의 문서·미술품 압수를 담당했다.[99] 이 부대는 게슈타포, 국가 안전 본부, 비밀 야전 경찰의 지원을 받아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의 도서관, 문헌관, 개인 소장품을 잇달아 약탈했다.[99]
로젠베르크는 동부 점령 지역성 장관으로서, 부하들의 가구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히틀러에게 서부 점령지의 유대인으로부터 가구를 몰수할 것을 제안했다.[132][99] '가구 장식 작전'을 통해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에서 유대인이 살았던 6만 9천 가구에서 가구를 빼앗았고, 이 가구는 독일 국내의 공습 피해를 입은 독일 국민에게 인도되었다.[99][133] 로젠베르크 특수 부대는 동부에서도 책을 약탈하여 수십만 권을 몰수했다.[134]
4. 1. 나치당 외교국 책임자
1933년 4월,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는 나치당의 대외정책 전국 지도자 및 나치당 외무국(Außenpolitisches Amt der NSDAP)의 수장이 되었다. 외무국의 주요 임무는 동유럽과 발칸 반도의 파시스트 집단과 연락을 유지하는 것이었으며,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의 외무부, 요아힘 폰 리벤트롭의 리벤트롭 기관(Dienststelle Ribbentrop), 에른스트 빌헬름 보레의 나치당 해외부 대관구(NSDAP/AO)와 경쟁했다.로젠베르크는 외무국 책임자로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외국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고, 러시아어에는 능숙했지만 영어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112] 또한, 대화 내용도 5분 정도 지나면 인종에 관한 이야기로 귀결되었다.[99] 런던을 처음 방문했을 때 두 명의 영국인과 친분을 맺었지만, 이들은 나중에 스파이로 밝혀졌다.[99]
1939년,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 유대인 문제 연구소(Institut zur Erforschung der Judenfrage)를 설립했다.[107]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에는 호에 슐레(나치당 전문 고등 교육 기관) 설립을 담당하게 되었고,[113] 1940년 1월, 아돌프 히틀러는 당 및 정부 관계자들에게 호에 슐레 설립에 필요한 장서 수집을 돕도록 명령했다.[99] 로젠베르크는 전국 지도자 로젠베르크 특수 부대를 설치하여 점령지에서 문서와 미술품을 약탈했다.[99] 이 부대는 게슈타포, 국가 안전 본부, 비밀 야전 경찰의 지원을 받아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의 도서관, 문헌관, 개인 소장품을 약탈했다.[99]
로젠베르크 특수 부대는 파리에 있던 세계 유대인 연맹과 라비 양성 학교에서 5만 권, 파리의 대형 유대계 서점(립슈츠)에서 2만 권의 책을 약탈했다.[114] 처음에는 책과 자료 약탈이 주 임무였지만, 히틀러의 미술관 건설 계획과 헤르만 괴링의 수집벽 때문에 미술품 약탈에도 나섰다.[115] 로젠베르크는 약탈한 미술품을 나치당의 공유 재산으로 여겼지만, 괴링은 미술품 분배를 독단적으로 결정했고, 로젠베르크 자신도 약탈한 미술품을 자택에 장식했다.[121][99]
4. 2. 나치 이념 및 교육 책임자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는 1934년 나치 전체의 정신적, 세계관적 교육 및 육성 감시를 위한 총통 수임자가 되었다.[107] 1934년부터 로젠베르크 사무소(Amt Rosenberg)를 설립하여 나치 이론의 선전과 국내 여론 활동을 감시했다.[107] 1939년에는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Frankfurt am Main)에 유대인 문제 연구소(Institut zur Erforschung der Judenfrage)를 설립했다.[107]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후, 호에 슐레(나치당 전문 고등 교육 기관) 설립을 로젠베르크가 담당하게 된다.[113] 1940년 1월, 히틀러는 당 및 정부 관계자들에게 호에 슐레 설립에 있어서 장서 수집을 하고 있는 로젠베르크를 지원하도록 명령했다.[99] 로젠베르크는 전국 지도자 로젠베르크 특수 부대를 설치하여 점령지에서 문서와 미술품 압수를 담당하게 했다.[99] 이 부대는 게슈타포(Gestapo), 국가 안전 본부(Reichssicherheitshauptamt), 비밀 야전 경찰(Sicherheitsdienst)의 지원을 받아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의 도서관, 문헌관, 개인 소장품을 잇달아 약탈했다.[99]
로젠베르크 특수 부대는 파리에 있던 세계 유대 연맹과 라비(Rabbi) 양성 학교에서 5만 권, 파리의 대형 유대계 서점(립슈츠)에서 2만 권의 책을 약탈했다.[114] 또한 동부에서도 책을 약탈하여 수십만 권의 책을 몰수했다.[134]
4. 3. 동부 점령 지역 장관
1941년 7월 17일, 로젠베르크는 소련 침공 이후 동부 점령 지역 총독부(''Reichsministerium für die besetzten Ostgebiete'') 장관에 임명되어 점령 지역 통치를 담당했다.[69] 알프레트 마이어가 그의 부장관으로서 반제 회의에 그를 대표하여 참석했고, 로젠베르크의 요청으로 동부 점령 지역 총독부의 다른 관리인 게오르크 라이브란트도 회의에 참석했다.[69]로젠베르크는 히틀러에게 정복한 동부 지역의 조직 계획을 제시했는데, 소련이 통제했던 지역을 새로운 총독령으로 대체할 새로운 행정 구역 설립을 제안했다. 여기에는 오스트란트(발트 3국 및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우크라이나 및 인근 지역), 카프카스(카프카스 지역), 모스크바(모스크바 대도시권 및 인근 러시아 유럽 지역)가 포함된다.[69]
로젠베르크는 공산주의 신념 때문에 소련의 모든 사람들이 하등 인간이라고 믿었지만,[69] 이러한 제안은 지정학적 "동방 생활권" 계획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이는 공산주의와 볼셰비즘을 결정적인 선제적인 군사 행동으로 완전히 근절하기 위한 준비 단계에서 소련의 확장에 대한 완충 역할을 할 것이었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베어마흐트 부대가 소련이 통제하는 영토를 침공했을 때, 그들은 즉시 제안된 오스트란트와 우크라이나의 총독령을 각각 힌리히 로제와 에리히 코흐의 지도하에 시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행정 지역의 조직은 독일 점령하의 슬라브인에 대한 처우 문제로 로젠베르크와 SS 간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로젠베르크는 슬라브인들을 독일인보다 열등하게 여겼지만 아리아인으로 간주했다. 그는 유대인이 아닌 점령당한 사람들의 처우에 대해 히틀러와 힘러에게 자주 불평했다.[70] 그는 대핀란드, 발트 국가, 우크라이나, 카프카스로 구성된 완충 위성 국가의 창설을 제안했다.[39]
로젠베르크는 동부 점령 지역 장관으로서, 소비에트 집단 농장(''콜호즈'')의 종식을 알리는 포스터를 발행하고, 1942년 2월에는 농업법을 발표하여 가족 농장을 복원하려 했다. 그러나 농장 해체는 전시 식량 생산과 상충되었고, 헤르만 괴링은 이름만 바꾸는 것을 제외하고는 집단 농장을 유지해야 한다고 요구했으며, 히틀러는 토지 재분배를 "어리석은 짓"이라고 비난했다.[73]
로젠베르크는 또한, 소비에트 파르티잔과의 전쟁인 '반데크리그'(Bandenkrieg)에서의 지원을 요청하는 포스터를 게시했지만, 독일의 정책은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켰다.[74]
1941년 4월, 로젠베르크는 히틀러와 곧 있을 독소전쟁 개전 후 동부 지역 국가들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124] 로젠베르크는 소련에 대해서는 산업을 해체하고, 교통망을 완전히 파괴하여 국토를 완전히 황폐화시키고 쓰레기장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의견을 밝혔다.[99] 발트 3국에 대해서는 독일의 동맹국으로 만들되, 라트비아(Latvia)의 지식 계층은 근절하고, 리투아니아(Lithuania)의 25만 명의 유대인은 추방해야 한다고 했다.[99] 우크라이나(Ukraine)는 독소전쟁 중 및 독소전쟁 후에도 독일이 필요로 하는 곡물과 원자재를 제공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99] 벨라루스(Belarus)는 구제할 수 없는 국가이기 때문에 독립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99]
동부 점령 지역성은 현지에 있는 부하는 자택에 설치하는 가구와 가구가 부족했다.[132] 그래서 로젠베르크는 히틀러에게 서부 점령지의 유대인으로부터 가구를 몰수할 것을 제안하고, 가구 장식 작전(Möbelaktion)에 의해 가구를 몰수했다.[99] 가구 장식 작전에 의해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에서 과거 유대인이 살았던 아파트 등 총 6만 9천 가구에서 가구를 빼앗았다.[99] 빼앗은 가구는 결국 독일 국내의 공습 피해를 입은 독일 국민에게 인도되었다.[133]
4. 4. 문화재 약탈
1940년 로젠베르크는 국민사회주의 이념 및 교육 연구 센터인 '국가사회주의당 고등교육기관'의 책임자가 되었다.[67] 이 기관에서 발전한 '라인하르트 로젠베르크 특별 임무부대(ERR)'는 예술품과 문화재 약탈을 목적으로 활동했다.[67] ERR은 특히 파리에서 활동하며 로스차일드 가문이나 폴 로젠베르크 가문과 같은 유명 유대인 가문으로부터 도난당한 예술품을 약탈했다.[67] 헤르만 괴링은 자신의 사적 만족을 위해 ERR을 이용하여 예술품을 수집했다.[67]로젠베르크는 히틀러의 고향인 오스트리아 린츠에 건설될 대학에서 사용할 최고의 악기와 악보를 수집하기 위해 "음악 특별 임무부대"를 설립했다.[68] "음악 특별 임무부대"에 내려진 명령은 독일과 독일군이 점령한 모든 국가에서 발견된 유대인의 모든 재산, 그리고 모든 악기나 악보를 즉시 베를린으로 운송하는 것이었다.[68]
로젠베르크 특수 부대는 파리에 있던 세계 유대 연맹과 라비 양성 학교에서 5만 권, 파리의 대형 유대계 서점(립슈츠)에서 2만 권의 책을 약탈했다.[114] 처음에는 책이나 자료 약탈이 주 임무였지만, 히틀러가 고향 린츠에 미술관을 건설할 계획을 세우고, 헤르만 괴링도 수집벽이 있어 사실상 그들의 대리로 미술품 약탈에 나섰다.[115]
프랑스 미술품 약탈 당시에는 로젠베르크와 괴링이 협력했지만, 약탈이 완료되자 괴링은 권한 없이 미술품 분배 방법을 결정하는 명령을 내렸다.[117] 분배 방법은 첫째 히틀러, 둘째 괴링, 셋째 로젠베르크 순으로 미술품을 얻고, 넷째 독일 또는 프랑스의 미술관이 남은 미술품을 얻으며, 그래도 남은 미술품은 경매에 부쳐 판매하여 그 수익을 전쟁 미망인에게 기부하는 것이었다.[118]
결과적으로 로젠베르크 특수 부대는 프랑스에서 2만 2천 점의 미술품을 압수하여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포함한 독일 국내에 '보관'했다.[119][99] 그러나 괴링은 독일로 옮긴 미술품을 차례차례 착복했다.[120] 로젠베르크는 약탈한 미술품은 나치당의 공유 재산이라고 생각했지만, 자신도 약탈한 미술품을 자택에 장식했다.[121][99]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로젠베르크는 '호에 슐레'(나치당 전문 고등 교육 기관) 설립을 담당하며 도서관에 필요한 장서 수집을 시작했다.[113][99] 1940년 1월, 히틀러는 당 및 정부 관계자들에게 로젠베르크의 장서 수집을 지원하도록 명령했다.[99] 로젠베르크는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시 당국에 유대인 관련 자료 제출을 요구하고 도서관을 매입했으며,[99] 전황이 좋아지자 프랑스에서도 유대인 및 프리메이슨 관련 주요 기관이 방치한 문서를 압수했다.[99] 로젠베르크는 히틀러에게 망명한 유대인이 버린 자료를 수집하는 부대 설립을 요청했고, 외무국 아래 전국 지도자 로젠베르크 특수 부대가 설치되어 점령지에서의 문서·미술품 압수를 담당했다.[99] 이 부대는 게슈타포, 국가 안전 본부, 비밀 야전 경찰의 지원을 받아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의 도서관, 문헌관, 개인 소장품을 잇달아 약탈했다.[99]
로젠베르크는 동부 점령 지역성 장관으로서, 부하들의 가구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히틀러에게 서부 점령지의 유대인으로부터 가구를 몰수할 것을 제안했다.[132][99] '가구 장식 작전'을 통해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에서 유대인이 살았던 6만 9천 가구에서 가구를 빼앗았고, 이 가구는 독일 국내의 공습 피해를 입은 독일 국민에게 인도되었다.[99][133] 로젠베르크 특수 부대는 동부에서도 책을 약탈하여 수십만 권을 몰수했다.[134]
5. 인종 이론 및 종교관
5. 1. 인종 이론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는 나치당의 주요 인종 이론가로서, 조르주 드 고비노(Arthur de Gobineau),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Houston Stewart Chamberlain), 매디슨 그랜트(Madison Grant), 로스롭 스토다드(Lothrop Stoddard) 등의 저서와 히틀러의 신념을 바탕으로 인종 계층 구조를 만들었다.[30][31] 그는 노르딕 이론을 바탕으로 "아리아 인종"을 최상위에, 흑인과 유대인을 최하위에 두었다.[30][31] 또한 로제르 구제노 드 무소(Roger Gougenot des Mousseaux)의 저서 ''Le Juif, le judaïsme et la judaïsation des peuples chrétiens''(1869)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영원한 유대인''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하는등 유대 프리메이슨 음모론의 영향을 받았다.[32]로젠베르크는 스토다드의 1922년 저서 ''The Revolt Against Civilization: The Menace of the Under-men''에서 ''언터멘시''(Untermensch)라는 용어를 차용했다.[33] 그는 아리아 우월주의, 극단적인 독일 민족주의, 광적인 반유대주의를 신봉했으며, 동성애를 노르딕 인구 확장의 방해 요소로 보았다.
로젠베르크의 슬라브인에 대한 태도는 유동적이었다.[34][35] 그는 "동방으로의 진출"("Drang nach Osten") 사상에 따라 슬라브 동부의 정복과 식민지화를 자신의 사명으로 보았으며,[36][37] 러시아 슬라브인들이 볼셰비즘에 압도되었다고 묘사했다.[38] 우크라이나인에 관해서는 독일 동부 국경에 대한 압력을 완화하기 위해 완충 국가를 설립하는 것을 선호했다.[39] 전쟁 중에는 볼셰비즘에 맞서 동슬라브인들과 협력하고 그들에게 국가 독립을 제공하는 것을 찬성하기도 했다.[40][41] 그는 인종 이론에 동의하지 않는 파시스트 이탈리아를 비판하기도 했다.[42]
5. 2. 종교관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는 루터교 신자로 자랐으나, 후에 기독교를 '부정적 기독교'라고 비난하며 거부하고 '피의 종교'라는 새로운 종교를 주장했다.[43][44] 그는 1920년 저서 『탈무드의 부도덕성』에서 유대인들을 적그리스도와 동일시했다.[45] 그는 기독교의 보편성, 원죄 교리, 영혼 불멸에 대한 가르침을 거부하며, "사실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이 우리 민족을 약화시켰다"고 말했다.로젠베르크는 휴스턴 스튜어트 챔벌린의 사상에서 영감을 얻어 "부정적 기독교"(프로테스탄티즘과 가톨릭이 설파하는 전통적인 기독교)를 비난했고, 대신 소위 "긍정적" 기독교[46][47]를 주장했다. '긍정적 기독교'는 예수가 유대인이 아니라 고대 갈릴리에 거주했던 인도-유럽계 집단의 일원으로 유대교에 맞서 싸웠다는 주장에 기반한 것이었다.[48][49] 그는 마르키온과 카타리파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50] 로젠베르크에게 비지성적인 종교적 교리는 북유럽 인종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으며, 개인을 그의 인종적 본성에 연결시켰다.[51] 로젠베르크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일반적인 사상은 부정적인 기독교이며, 따라서 우리(독일) 영혼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53][54]
1934년 1월, 히틀러는 로젠베르크를 라익의 문화 및 교육 지도자로 임명했다.[58][59] 로마의 교황청 신앙교리성(Congregation for the Doctrine of the Faith)은 로젠베르크의 저서 『20세기의 신화』가 "가톨릭교회의 모든 교리와 기독교의 근본 원리를 경멸하고 거부"한다는 이유로 금서 목록(Index Librorum Prohibitorum)에 올릴 것을 권고했다.[60]
로젠베르크는 중세 독일의 신비주의자 에크하르트를 숭배하여 진정한 종교를 독일 신비주의로 여겼으며, 1930년에 『20세기의 신화』를, 1934년에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종교』를 출판했다.[107][110] 그는 반유대주의뿐 아니라 반기독교적인 입장에 있었으며, 예수의 신성과 부활 등을 믿지 않았다.[107] 로젠베르크는 기독교의 아가페(愛), 겸손, 헤세드(憐憫), 헤ーン(恩寵)보다 영혼의 아름다움, 자유롭고 고귀한 영혼을 중시했고, 유대교에는 불멸의 신앙이나 형이상학적인 종교가 없다고 하여 유대적=로마적 세계관에 대신하여 북방 종족의 게르만 인간의 내면적 측면을 칭송했다.[107]
6. 전후 재판 및 처형
로젠베르크는 1945년 5월 19일 플렌스부르크-미르빅에서 연합군에 체포되었다.[75] 그는 뉘른베르크 재판에 회부되어 평화에 대한 범죄 공모, 침략전쟁 계획, 개시 및 수행, 전쟁 범죄, 반인도적 범죄의 네 가지 혐의 모두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았다.[76] 최종 판결은 그를 노르웨이 침공과 소련 침공의 주요 계획자 중 한 명으로 지목했으며, 유럽 점령국의 체계적인 약탈과 동유럽의 잔혹한 상황에 대해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다.[76] 재판 중 그는 회고록을 썼는데, 이는 사후에 세르주 랑과 에른스트 폰 쉔크의 분석적 논평과 함께 출판되었다.[77]
그는 사형 선고를 받고 1946년 10월 16일 아침 뉘른베르크 교도소에서 다른 사형 선고를 받은 피고들과 함께 처형되었다.[78] 그의 시신은 다른 9명의 처형된 남성들과 헤르만 괴링의 시신과 마찬가지로 뮌헨 동쪽 묘지(Ostfriedhof (Munich))에서 화장되었고, 재는 이자르 강에 뿌려졌다.[79]
재판 내내 로젠베르크가 나치 철학과 이데올로기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그 예로는 1930년에 출판된 그의 책인 ''20세기의 신화''가 있는데, 여기서 그는 "자유주의 제국주의"와 "볼셰비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증오를 선동하고, 전쟁 중 독일에서 "생활권" 사상의 영향을 확대하고, 특히 기독교 교회와 유대인의 박해를 용이하게 했으며, 베르사유 조약에 반대했다.[80][81]
국제 뉴스 서비스의 처형을 취재한 조셉 킹스버리-스미스에 따르면, 로젠베르크는 교수대에서 마지막 진술을 할 것이 있느냐는 질문에 "아니오"라는 한마디로 대답한 유일한 사형수였다.[82]
6. 1. 뉘른베르크 재판
로젠베르크는 1945년 5월 19일 플렌스부르크-미르빅에서 연합군에 체포되어[75]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평화에 대한 범죄 공모, 침략전쟁 계획, 개시 및 수행, 전쟁 범죄, 반인도적 범죄 등 4가지 혐의 모두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았다.[76] 최종 판결은 그를 노르웨이 침공과 소련 침공의 주요 계획자 중 한 명으로 지목했으며, 유럽 점령국의 체계적인 약탈과 동유럽의 잔혹한 상황에 대해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다.[76]
재판 과정에서 로젠베르크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부인하고, 자신의 사상이 나치 범죄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회고록을 썼는데, 이는 사후에 세르주 랑과 에른스트 폰 쉔크의 분석적 논평과 함께 출판되었다.[77] 그러나 재판부는 로젠베르크가 나치 이데올로기의 핵심 인물이며, 그의 저서 ''20세기의 신화''는 "자유주의 제국주의"와 "볼셰비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증오를 선동하고, 전쟁 중 독일에서 "생활권" 사상의 영향을 확대하고, 특히 기독교 교회와 유대인의 박해를 용이하게 했으며, 베르사유 조약에 반대했다는 점을 들어 유죄를 인정했다.[80][81]
국제 뉴스 서비스의 처형을 취재한 조셉 킹스버리-스미스에 따르면, 로젠베르크는 교수대에서 마지막 진술을 할 것이 있느냐는 질문에 "아니오"라는 한마디로 대답한 유일한 사형수였다.[82] 그는 사형 선고를 받고 1946년 10월 16일 아침 뉘른베르크 교도소에서 다른 사형 선고를 받은 피고들과 함께 처형되었다.[78] 그의 시신은 다른 9명의 처형된 남성들과 헤르만 괴링의 시신과 마찬가지로 뮌헨 동쪽 묘지(Ostfriedhof (Munich))에서 화장되었고, 재는 이자르 강에 뿌려졌다.[79]
6. 2. 처형
로젠베르크는 1945년 5월 19일 플렌스부르크-미르빅에서 연합군에 체포되었다.[75] 그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재판을 받았고, 평화에 대한 범죄 공모, 침략전쟁 계획, 개시 및 수행, 전쟁 범죄, 반인도적 범죄 등 네 가지 혐의 모두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았다.[76] 최종 판결은 그를 노르웨이 침공과 소련 침공의 주요 계획자 중 한 명으로 지목했다. 또한 유럽 점령국의 체계적인 약탈과 동유럽의 잔혹한 상황에 대해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다.[76]
그는 사형 선고를 받고 1946년 10월 16일 아침 뉘른베르크 교도소에서 다른 사형 선고를 받은 피고들과 함께 처형되었다.[78] 그의 시신은 다른 9명의 처형된 남성들과 헤르만 괴링의 시신과 마찬가지로 뮌헨 동쪽 묘지(Ostfriedhof (Munich))에서 화장되었고, 재는 이자르 강에 뿌려졌다.[79]
재판 내내 로젠베르크가 나치 철학과 이데올로기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그의 저서 ''20세기의 신화''(1930년)는 "자유주의 제국주의"와 "볼셰비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증오를 선동하고, 전쟁 중 독일에서 "생활권" 사상의 영향을 확대하고, 특히 기독교 교회와 유대인의 박해를 용이하게 했으며, 베르사유 조약에 반대했다.[80][81]
국제 뉴스 서비스의 처형을 취재한 조셉 킹스버리-스미스에 따르면, 로젠베르크는 교수대에서 마지막 진술을 할 것이 있느냐는 질문에 "아니오"라는 한마디로 대답한 유일한 사형수였다.[82]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는 “침략 전쟁의 공모”, “침략 전쟁의 실행”, 인도에 대한 죄, 전쟁 범죄의 네 가지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재판에서는 로젠베르크가 “인식된 나치당의 이데올로그”일 뿐만 아니라 리벤트로프에 이어 외교 정책의 책임자로 여겨진 점도 중요하게 고려되었다. 1946년 10월 1일 모든 죄목에 대해 유죄 판결이 내려졌고, 사형이 선고되었다.
뉘른베르크 교도소 부속 심리 분석관 구스타프 길버트 대위가 개정 전에 피고인 전원에게 실시한 벡슬러-벨뷰 성인 지능 검사에 따르면, 로젠베르크의 지능 지수는 127이었다.[138]
1946년 10월 16일 사형이 집행되었고, 직전에 사형 집행인으로부터 마지막 말이 없냐는 질문을 받자 “없다(Nein)”라고만 대답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 되었다. 자살한 괴링을 포함하여 로젠베르크 등 11명의 시신은 미군 사진 기자에 의해 촬영되었다. 촬영 후 나무 상자에 담겨 미군 트럭으로 뮌헨 교외의 묘지 화장장으로 운반되어 소각되었다. 유골은 이스라 강의 지류인 콘벤츠 강에 뿌려졌다.[139]
7. 유산 및 평가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는 나치즘의 핵심 이데올로그로서, 그의 사상은 나치 독일의 인종 정책, 전쟁 범죄, 홀로코스트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93] 그의 저서 《20세기의 신화》는 나치즘의 바이블로 여겨졌으며, 나치 정권의 선전 도구로 활용되었다.[140] 그러나 그의 사상은 학문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비판받아 마땅하며, 현대 사회에서는 인종차별과 극단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사례로 간주된다.
히틀러는 실용적인 정치에 중점을 둔 반면, 로젠베르크는 종교와 철학에 관심을 가졌고 당 내에서 큰 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했다.[83] 나치당 내에서 로젠베르크의 영향력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그는 다른 나치 지도자들과 달리 카리스마와 정치적 기술이 부족하고 다소 고립되어 있었다고 여겨졌다. 히틀러는 일부 연설에서 로젠베르크의 견해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으나, 인종에 대한 영적 견해는 거부하고 생물학에 기반한 견해를 제시했다.[84]
마르틴 보르만과 같은 일부 나치 지도자들은 반기독교적이었고 로젠베르크에 동정적이었다.[89] 하인리히 힘러의 견해는 로젠베르크의 견해와 가장 가까웠다.[91] 로젠베르크는 기독교가 사라지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힘러는 적극적으로 반대되는 이교 의식을 만들려고 했다.
로젠베르크의 개인적 견해와 나치 엘리트의 실용주의 사이에는 갈등이 있었다. 나치의 목표는 로젠베르크가 희망했던 것처럼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독일 생활에 스며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당과 국가의 자원을 총력전에 집중시키는 것이었다.
뉘른베르크 재판 당시, 로젠베르크의 자필 일기는 미국 검찰의 문서 담당 책임자였던 해리 피스(Harry Fiss)에 의해 번역되었다.[92]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증거로 사용된 후, 일기는 로버트 켐프너(Robert Kempner) 검사에게 넘겨진 다른 자료들과 함께 분실되었다가[93] 2013년 6월 13일, 뉴욕주 루이스턴에서 회수되었다.[94] 1936년부터 1944년까지의 기록이 담긴 425장의 분리된 페이지로 구성된 이 일기는 현재 워싱턴에 있는 미국 홀로코스트 추모 박물관(USHMM)의 소유이다.[93]
8. 저작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는 나치 독일의 주요 이념가이자 정치인으로, 다양한 저작을 남겼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1930년에 출판된 《20세기의 신화》가 있다. 이 책은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 사상을 담고 있으며, 나치즘의 핵심 텍스트 중 하나로 여겨진다.
로젠베르크는 《20세기의 신화》 외에도 1920년 《탈무드의 부도덕성》, 1921년 《프리메이슨의 범죄》, 1922년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본질, 원칙 및 목표》를 포함한 다수의 저작을 출판했다. 또한 1922년에는 《러시아의 역병: 볼셰비즘, 그 수괴, 하수인, 희생자》, 《볼셰비즘, 기근, 죽음》, 《국가의 적, 시온주의》등을 출판했다. 1923년에는 《시온 현자 의정서와 유대 세계 정치》,《유대 볼셰비즘》을 출판했다. 1935년에는 《디트리히 에카르트: 유산》, 1937년에는 《우리 시대의 암흑주의자들: "20세기의 신화"에 대한 공격에 대한 답변》, 《프로테스탄트 로마 순례자들: 루터에 대한 배신과 "20세기의 신화"》를 출판했다. 1949년에는 《인류 범죄자의 초상》이 세르주 랑과 에른스트 폰 쉔크의 분석적 해설과 함께 출판되었다.[77] 그는 또한 《형식의 힘》을 저술했으나, 출판년도는 미상이다.
로젠베르크의 저작들은 나치즘의 사상적 기반을 형성하고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의 저작들은 극단적인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를 조장하여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1920년에는 《시온 현자 의정서》의 독일어 번역본을 출판했는데, 이는 러시아어 이외의 최초 언어로 된 《의정서》였다.
그의 저서들은 일본어로도 번역되었는데, 《20세기의 신화》는 1938년에 번역 출판되었고, 《나치당의 본질, 원칙 및 목표》는 1941년에 번역되었다. 《이념의 형성》, 《피와 명예》는 1942년에, 《유대 시온 운동의 실상》은 1943년, 《유대 민족의 역사적 발자취》는 1944년에 번역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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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서적
ロバート&デイヴィッド
[104]
서적
ロバート&デイヴィッド
[105]
서적
ロバート&デイヴィッド
[106]
서적
ロバート&デイヴィッド(2017年)
[107]
서적
上山安敏(2005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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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ロバート&デイヴィッド(2017年)
[109]
서적
ロバート&デイヴィッド(2017年)
[110]
서적
Die Religion des Meister Eckehart
Hoheneichen-Verlag, München
1934
[111]
서적
モッセ1996
[112]
서적
ロバート&デイヴィッド(2017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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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ロバート&デイヴィッド(2017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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ロバート&デイヴィッド(2017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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ロバート&デイヴィッド(2017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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ロバート&デイヴィッド(2017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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ロバート&デイヴィッド(2017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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ロバート&デイヴィッド(2017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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ロバート&デイヴィッド(2017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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ロバート&デイヴィッド(2017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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ロバート&デイヴィッド(2017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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ロバート&デイヴィッド(2017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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ロバート&デイヴィッド(2017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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ロバート&デイヴィッド(2017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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ロバート&デイヴィッド(2017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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ロバート&デイヴィッド(2017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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ロバート&デイヴィッド(2017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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ロバート&デイヴィッド(2017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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ロバート&デイヴィッド(2017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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ロバート&デイヴィッド(2017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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ロバート&デイヴィッド(2017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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ロバート&デイヴィッド(2017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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ロバート&デイヴィッド(2017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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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ロバート&デイヴィッド(2017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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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ロバート&デイヴィッド(2017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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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ロバート&デイヴィッド(2017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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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ロバート&デイヴィッド(2017年)
[138]
서적
第三帝国の演出者 ヘルマン・ゲーリング伝 下
早川書房
1977
[139]
서적
パーシコ(1996)
[140]
서적
ロバート&デイヴィッド(2017年)
[141]
웹사이트
Detention report of Alfred Rosenberg, Chief Nazi ideologist and Reich Minister for the Occupied Eastern Territories, 23/06/1945 - Yad Vashem Photo Archive
http://collections.y[...]
2019-03-01
[142]
서적
地図で読む世界の歴史 ヒトラーと第三帝国
河出書房新社
[143]
서적
トータル・ウォー 第二次世界大戦の原因と結果(上巻) 西半球編
河出書房新社
1991
[144]
서적
Hitler, 1889-1936: Hubris
https://books.google[...]
W. W. Norton & Company
2000
[145]
서적
[146]
웹인용
Alfred Rosenberg Diary - 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http://collections.u[...]
collections.ushmm.org
2015-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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