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리 피츠제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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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배리 피츠제럴드(본명: 윌리엄 조셉 쉴즈)는 아일랜드 출신의 배우이다. 1930년 영화 《주노와 공작》으로 데뷔하여, 1944년 영화 《나의 길을 가련다》에서 피츠기번 신부 역을 맡아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하고 남우주연상 후보에도 올랐다. 그는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영화와 텔레비전 부문 별을 받았으며, 《말 없는 사나이》, 《네이키드 시티》 등 다수의 영화에 출연했다. 1961년 심근 경색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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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리 피츠제럴드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 |
| 본명 | 윌리엄 조지프 쉴즈 |
| 직업 | 배우 |
| 활동 기간 | 1924년–1961년 |
| 형제자매 | 아서 쉴즈 (동생) |
| 수상 | |
| 아카데미상 | 조연 남우조연상 1944년 『나의 길을 가련다』 |
| 뉴욕 영화 비평가 협회상 | 남우주연상 1944년 『나의 길을 가련다』 |
| 골든 글로브상 | 남우조연상 1944년 『나의 길을 가련다』 |
| 출생 및 사망 | |
| 출생일 | 1888년 3월 10일 |
| 출생지 | 더블린, 아일랜드 |
| 사망일 | 1961년 1월 4일 |
| 사망지 | 더블린, 아일랜드 |
2. 초기 생애
'''배리 피츠제럴드'''(Barry Fitzgerald, 1888년 3월 10일 ~ 1961년 1월 14일)는 아일랜드의 배우이다. 본명은 '''윌리엄 조셉 쉴즈'''(William Joseph Shields)이다.[3][4][5]
배리 피츠제럴드는 1930년 주노와 공작을 시작으로 영화 경력을 쌓았다. 존 포드 감독의 영화 별이 빛나는 밤에에 출연하기 위해 할리우드로 건너갔으며, 이후 여러 영화에서 조연으로 활약했다.
피츠제럴드는 더블린 포토벨로의 월워스 로드에서 패니 소피아(결혼 전 성은 엉거랜드)와 아돌퍼스 쉴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아일랜드인이었고 어머니는 독일인이었다.[3][4][5] 그는 아일랜드 배우 아서 쉴즈의 형이었다.
스케리스 칼리지를 졸업한 후 공무원으로 일하기 시작했으며, 1911년 더블린 상공회의소에서 주니어 서기로 시작했다.[6][34] 이후 실업 사무소에서 일했으며, "여유로운 일자리였다."라고 회고했다.[7]
3. 경력
1944년, 레오 맥캐리 감독의 영화 나의 길을 가련다에서 빙 크로스비와 함께 주연을 맡아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영화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과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에 동시에 노미네이트되었고,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당시 규정으로는 주·조연상 동시 노미네이트가 가능했으나, 이후 규정이 바뀌어 주연 배우는 주연상에만 노미네이트될 수 있게 되었다.[25] 제2차 세계 대전 중 금속 부족으로 인해 석고로 만들어진 오스카상 트로피를 골프 연습 중 실수로 파손시키기도 했다.[26] 나의 길을 가련다 이후 파라마운트와 장기 계약을 체결했다.
말 없는 사나이(1952년) 등 여러 영화에 출연했으며, 럭스 비디오 극장, 제너럴 일렉트릭 극장, 알프레드 히치콕 presents 등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
| 연도 | 제목 | 역할 | 비고 |
|---|---|---|---|
| 1930 | 주노와 공작 | ||
| 1936 | 프라우 앤 더 스타 | ||
| 1938 | 아이 양육 | ||
| 1938 | 마리 앙투아네트 | ||
| 1938 | 포맨 앤 프레어 | ||
| 1940 | 머나먼 항해 | ||
| 1941 | 울프 선장 | ||
| 1941 |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 ||
| 1941 | 타잔의 비밀 보물 | ||
| 1943 | 더 어메이징 미시즈 홀리데이 | ||
| 1943 | 콜벳 K-225 | ||
| 1944 | 나의 길을 가련다 | 피츠기번 신부 |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수상 |
| 1944 | 논 벗 더 론리 하트 | 헨리 트윗 | |
| 1945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 ||
| 1945 | 스토크 클럽 | ||
| 1946 | 선원으로서의 2년간 | ||
| 1947 | 버라이어티 걸 | ||
| 1947 | 웰컴 스트레인저 | ||
| 1948 | 네이키드 시티 | ||
| 1949 | 탑 오 더 모닝 | ||
| 1949 | 씨비스킷 이야기 | ||
| 1950 | 유니언 스테이션 | 도넬리 관리자 | |
| 1952 | 말 없는 사나이 | ||
| 1956 | 케이터드 어페어 |
3. 1. 애비 극장
연기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킨코라 플레이어스(Kincora Players)와 같은 아마추어 극단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1915년 형인 아서 쉴즈와 함께 애비 극장에 합류했다. 그는 공무원 상사와의 문제를 피하기 위해 예명인 배리 피츠제럴드를 사용했다.[34]피츠제럴드는 애비 극장에서 처음에는 'The Casting Out of Martin Whelan'과 같은 연극에서 단역을 맡았고, 'The Critic'에서는 네 마디 대사를 연기했다.[8][9] 1919년 레이디 그레고리의 'The Dragon'에서 획기적인 공연을 했다.[10] 그러나 1929년까지 낮에는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파트타임으로 연기를 계속했다.[7] 그는 'The Bribe', 'An Imaginary Conversation', 'John Bull's Other Island' 등에 출연했다.[10]
1924년, 피츠제럴드의 애비 극장 급여는 주당 2.5GBP였다.[11] 그 해 그는 유명한 극작가 션 오케이시의 세계 초연작인 ''주노와 공작새''에 잭 보일 선장 역으로 출연했다.[12] 1925년 'Paul Twyning'에서의 공연으로 많은 찬사를 받았다. 이듬해 그는 오케이시의 초연작 ''쟁기와 별''에 플루터 굿(Fluther Good) 역으로 출연했다. 이 연극은 논란을 일으켜 폭동과 시위를 불러일으켰다. 1926년 2월 어느 날 밤, 세 명의 무장 괴한이 그를 납치하여 연극 공연을 막으려고 피츠제럴드의 어머니 집에 나타났지만 그를 찾지 못했다.[13]
1926년, 피츠제럴드는 'The Would-Be Gentleman'에 출연했다.[14] 애비 극장에서의 다른 출연작으로는 'The Far Off Hills', ''총잡이의 그림자'', 'The Playboy' 등이 있었다.[15] 오케이시는 피츠제럴드를 위해 ''은잔''이라는 연극에서 특별히 배역을 썼지만, 애비 극장에서는 이 연극을 거절했다. 이 연극은 1929년 런던에서 제작되었다. 피츠제럴드는 41세의 나이에 공무원직을 그만두고 이 연극에 합류하기로 결심하여 전업 배우가 되었다.[8]
1931년 초, 피츠제럴드는 ''폴 트위닝'' 공연을 위해 잉글랜드를 순회했다. 그는 그 해 6월 아일랜드로 돌아와 애비 극장에서 이 연극을 공연했다.[16] 1931년에서 1936년 사이에 그는 애비 극장 제작 작품인 테레사 디비의 세 편의 연극, ''제자'',[17] ''용기를 찾아서''[18], ''케이티 로치''[19]에 출연했다.
1932년, 피츠제럴드는 애비 플레이어스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카이사르의 것들''과 ''머나먼 언덕''에 출연했다.[20] 1934년 피츠제럴드와 플레이어스는 미국으로 돌아와 ''쟁기와 별'', ''이니시의 드라마'', ''머나먼 언덕'', ''헤퍼난 가족을 보라'', ''서부 세계의 바람둥이'', ''글렌의 그림자'', ''처치 스트리트'', ''성자의 우물'', ''주노와 공작''을 포함한 일련의 연극들을 레퍼토리 형식으로 전국 순회 공연했다.[21]
3. 2. 할리우드 진출
1936년 3월, 피츠제럴드는 존 포드 감독의 영화 별이 빛나는 밤에에 출연하기 위해 애비 극단의 다른 세 멤버와 함께 할리우드에 도착했다.[22] 피츠제럴드는 할리우드에 남기로 결정했고, 곧바로 성격 배우로서 꾸준한 고용 기회를 얻었다.[34] 그는 파라마운트 픽처스의 ''썰물'', RKO 픽처스의 ''아기 키우기'', 20세기 폭스에서 존 포드가 감독한 ''네 사람과 기도'', 워너 브라더스의 ''새벽 비행''에서 조연을 맡았다.피츠제럴드는 RKO에서 빅터 맥라글렌과 함께 한 ''태평양 호'', 존 패로우가 감독한 ''성자 반격''과 ''완전 고백'' 등의 영화를 제작했다. 1939년에는 브로드웨이로 돌아와 ''The White Steed''에 출연하기도 했다.[23]
''완전 고백'' 이후, 피츠제럴드는 1939년부터 1940년까지 105회 공연을 한 ''Juno and the Paycock''의 부활과 함께 브로드웨이로 다시 돌아갔다.[8]
할리우드로 돌아온 후, 피츠제럴드는 ''머나먼 항해''에서 존 포드와 다시 만났다. 그는 유니버설 픽처스의 ''샌프란시스코 부두''와 워너 브라더스의 ''바다의 늑대''에 출연했고, 폭스에서 포드와 함께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를 제작했다. 또한 메트로-골드윈-메이어에서 ''타잔의 비밀 보물''에도 출연했다.
피츠제럴드는 쉴즈가 연출한 브로드웨이의 ''Tanyard Street'' (1941)에 출연했지만 단기간만 상영되었다. ''뉴욕 타임스''는 그를 "코믹 정신의 화신. 사람들이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타나는 순간부터 웃기 시작한다"고 칭찬했다.[24]
이후 피츠제럴드는 유니버설에서 ''놀라운 홀리데이 부인'', ''런던행 티켓 두 장'', ''코르벳 K-225'' 등의 영화에 출연했다.
나의 길을 가다에서 노신부 역을 맡아 제17회 아카데미상에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과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에 동시에 노미네이트되는 진기록을 세웠다. 당시 아카데미상 규정은 조연 배우가 주연상과 조연상 양쪽에 노미네이트될 수 있도록 허용했기 때문이다. 파라마운트는 빙 크로스비를 주연, 피츠제럴드를 조연으로 조정했고, 결국 피츠제럴드는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이후 아카데미상은 규정을 변경하여 주연 배우는 주연상에만 노미네이트될 수 있도록 했다.
피츠제럴드는 골프 연습 중 자택에서 오스카상 트로피를 실수로 파손시키기도 했다. 당시 오스카상은 전시 중이라 석고로 만들어졌다.
3. 3. 전성기: 《나의 길을 가련다》
레오 맥캐리가 1944년 파라마운트에서 개봉한 ''나의 길을 가련다''에 빙 크로스비의 상대역으로 캐스팅하면서 피츠제럴드는 예상치 못하게 주연 배우가 되었다. 이 영화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피츠제럴드는 피츠기번 신부 역을 맡아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결국 수상)과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모두 올랐다.[25] 이 사건 이후, 동일 배역에 대한 중복 후보 지명을 방지하기 위해 투표 규칙이 변경되었다. 골프광이었던 그는 나중에 골프 스윙 연습을 하다가 실수로 오스카상을 떨어뜨려 머리가 잘렸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전쟁 중 금속 부족으로 인해 오스카 조각상이 금도금 청동 대신 석고로 만들어졌다. 아카데미는 피츠제럴드에게 대체 조각상을 제공했다.[26]''나의 길을 가련다'' 이후, 파라마운트는 피츠제럴드와 장기 계약을 체결했다.
제17회 아카데미상에서 ''나의 길을 가련다''의 노신부 역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과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에 동시에 노미네이트되어 화제가 되었다. 이 배역이 주연인지 조연인지에 대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아카데미상의 규약에는 "조연은 조연상과 주연상 양쪽에 노미네이트될 수 있다"라고 명시되어 있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남우주연상에는 같은 영화에 출연한 빙 크로스비도 노미네이트되었기 때문에, 배급권을 가진 파라마운트는 스타로서 격차가 큰 크로스비를 주연, 피츠제럴드는 조연으로 조정했고, 피츠제럴드는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이후 아카데미상은 규약을 "주연 배우는 주연상에만 노미네이트될 수 있다"로 개정했다.
그 후, 골프 연습 중에 자택에서 이 소동으로 얻은 오스카상을 실수로 쳐서 파손시켰다. 당시 오스카상은 전시 중이라 석고로 만들어졌다.
3. 4. 후기 활동
피츠제럴드는 코미디 영화 ''하 다 베니... 돈 칼로제로(Ha da venì... don Calogero)''(1952)에 출연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갔다. 존 포드는 아일랜드에서 촬영된 고전 영화 ''말 없는 사나이''(1952)에서 그를 세 번째로 출연시켰다. 그 후 그는 드 카를로, 데이비드 니븐과 함께 ''해피 에버 애프터''(1954)에 출연했다.피츠제럴드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인 ''럭스 비디오 극장'', ''제너럴 일렉트릭 극장'', ''알프레드 히치콕 presents'' 에피소드에 출연했다.
그는 MGM의 ''뜻밖의 외출''(1956)에서 조연을 맡았고, 영국 코미디 영화 ''루니''(1958)에서 주연을 맡았다.
피츠제럴드는 아일랜드 영화 ''브로스 오브 어 보이''(1959)에서 주연을 맡았다.
4. 사망
피츠제럴드는 1959년 더블린으로 돌아가,[30] 몽크스타운의 시필드 애비뉴 2번지에서 살았다. 그해 10월, 그는 뇌 수술을 받았다.[31] 회복하는 듯 보였지만, 1960년 말에 다시 병원에 입원했다. 1961년 1월 4일 제임스 스트리트의 성 패트릭 병원에서 심장 마비로 윌리엄 조셉 쉴즈라는 이름으로 사망했다.[32][33][34] 72세에 심근 경색으로 사망했으며, 디언스 농장 묘지에 묘소가 있다.
5. 출연 작품
배리 피츠제럴드는 영화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5. 1. 영화
골든 글로브상 남우조연상 - 영화뉴욕 영화 비평가 협회상 남우주연상
후보 -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