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르 플랑타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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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르나르 플랑타뷜리는 기욤 드 젤론의 손자이자 셉티마니아의 베른하르트와 두오다의 아들로, 841년 또는 840년경에 태어났다. 그는 아우툰 백작, 아키텐의 분봉왕 루도비쿠스 2세 발부스의 조언자, 셉티마니아 후작, 고티아 영주 등을 역임했으며, 876년 안더나흐 전투에 참전했다. 그는 879년 루이 2세에 반란을 일으켰으며, 프로방스의 보소 5세와 전투를 벌여 마콩 백작령을 차지했다. 그는 오베르뉴 백작 부인 에르멩가르드와 결혼하여 아키텐의 기욤 1세 등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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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르나르 플랑타뷜리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베르나르 2세 |
| 다른 이름 | 베르나르 플랑타필로사 |
| 작위 | 오베르뉴 백작 |
| 풀 네임 | 알 수 없음 |
| 출생 | 841년 3월 22일 |
| 출생지 | 프랑크 왕국, 유제스 |
| 사망 | 886년 |
| 사인 | 알 수 없음 |
| 매장지 | 알 수 없음 |
| 배우자 | 에르망가르드 |
| 자녀 | 기욤 1세 아델린다 |
| 가문 | 기욤 가문 |
| 아버지 | 세프티마니아 변경백 베르나르 |
| 어머니 | 두오다 |
| 종교 | 알 수 없음 |
| 통치 | |
| 통치 시작 | 864년/872년 |
| 통치 종료 | 886년 |
| 기타 | |
| 역할 | 알 수 없음 |
2. 생애
베르나르는 루트비히 1세가 죽은 다음 해인 유제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두오다가 쓴 『지침서(Liber Manualis)』에 따르면 그렇다.[2]
868년 이전에 셉티마니아 변경백에 임명되었고, 857년부터 868년까지 브리우드의 재속 수도원장을 지냈다. 그러나 876년 베르나르는 지위를 박탈당했고, 베르나르 드 고티가 세프티마니아 변경백이 되었다. 그 후 베르나르는 다시 카를 3세의 곁으로 돌아가 보소와의 전투에서 마콩 백작령을 손에 넣었다.
2. 1. 가계와 초기 생애
기욤 드 젤론의 손자이자 셉티마니아의 베른하르트와 두오다의 아들로 태어났다. 841년생 설 외에도 Liber Manualis에 의하면 그는 루트비히 경건왕이 죽던 해에 유제스에서 출생했다는 기록이 있다. 별명 플랑타뷜리 혹은 플랑타빌로사(Plantapilosa)는 종종 "털난 발(Hairy feet 또는 Hairypaws)"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으며, 플란타(planta)는 라틴어로 "발바닥"을 의미한다. 다른 설에 의하면 프린켑스 필리투스(princeps pilitus) 또는 가시덤불 통치자(prince fourré)라는 별명의 변형이라고도 한다.[2]그의 증조부는 오툉의 테오도리히로 메로빙거 왕조의 후손이었다. 오툉의 테오도리히 4세는 카를 마르텔의 딸 알다와 결혼했고, 알다는 베르나르의 증조모였다.
아버지 셉티마니아의 베른하르트는 840년~843년의 시민 전쟁 당시 아키텐의 피핀 2세를 지지했고, 그의 편에 서서 싸웠다. 셉티마니아의 베른하르트는 842년 7월 대머리 카를이 보낸 아크프리트를 축출했고, 아키텐의 피핀 2세의 편에 서서 싸우다가 844년 대머리 카를 2세가 군사를 이끌고 툴루즈성을 공략, 성이 함락되자 체포되어 참수당했다. 베르나르의 가족은 피신했고, 대머리 카를은 그의 가족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였다.
그는 오베르뉴 백작 부인인 에르멩가르드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상속녀로서 그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종종 860년대에 활동했던 오베르뉴의 백작 베르나르 1세로 알려져 있지만, 이러한 사례는 에르멩가르드의 남편 플란타필로사(Plantapilosa)를 지칭하는 것이지 백작의 선대 인물을 지칭하는 것은 아닐 수 있다.[2] 더 앞선 베르나르 백작은 840년대에 오베르뉴에서 활동했지만, 에르멩가르드와 알려진 관계는 없다.[2] 대신 그녀는 프로방스의 게린 백작과 그의 아내 아바의 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3]
자녀[2]
- 아키텐의 기욤 1세
- 와린
- 아바
- 아델린다, 카르카손의 아크프레드 1세와 결혼
어머니 두오다가 쓴 『지침서(Liber Manualis)』에 따르면, 베르나르는 루트비히 1세가 죽은 다음 해인 유제스에서 태어났다.
2. 2. 서프랑크 왕국의 가신
셉티마니아의 베른하르트와 두오다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할아버지는 기욤 드 젤론이다. 841년생 설 외에도 Liber Manualis에 의하면 그는 루트비히 경건왕이 죽던 해에 우제즈(Uzès)에서 출생했다는 기록이 있다.아버지 셉티마니아의 베른하르트는 840년~843년의 시민 전쟁 당시 아키텐의 피핀 2세를 지지하여 그의 편에 서서 싸웠다. 842년 7월 셉티마니아의 베른하르트는 대머리 카를이 보낸 아크프리트를 축출했고, 아키텐의 피핀 2세의 편에 서서 싸우다가 844년 대머리 카를 2세가 군사를 이끌고 툴루즈성을 공략, 성이 함락되자 체포되어 참수당했다. 베르나르의 가족은 피신했고, 대머리 카를은 그의 가족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였다.
후일 대머리 카를 2세의 호의로 귀국, 베르나르는 아우툰(오툉) 백작(Count of Autun)에 임명되어 864년부터 869년까지 아우툰(오툉) 백작이었다. 869년 로베르 르 포르, 포아투 백작 라미눌프(Ramnulf I)와 영토 분쟁으로 싸웠다. 그는 곧 그의 아버지의 죽음을 복수할 목적으로, 대머리 카를 2세에 대한 반란을 꾸민 것으로 의심받아 다시 추방되었다. 그해에 그는 곧 사면되었다.
그는 곧 대머리 카를로부터 아키타니아의 분봉왕으로 임명된 루도비쿠스 2세 발부스를 보좌할 목적으로 아키텐에 파견되었다. 베르나르 플랑타뷜리는 분봉왕 루도비쿠스 2세 발부스의 가장 가까운 조언자가 되었다.
868년 이전에 셉티마니아 후작과 고티아 영주에 임명되었다.
870년대 초 영토를 확장, 리무쟁과 퀘시를 공략했다. 그는 이 지역을 자신의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으로 여기고 점령했으나 곧 로베르 르 포르가 반발, 그의 공격을 받았다. 로베르 르 포르와의 전투에서 베리(Berry)와 포르츠(Forez)를 추가로 획득한다. 872년 툴루즈 백작 베르나르 황소백작(Bernard Le Veau)의 암살을 사주하여, 그해 리에주 백작(comtes de Rouergue)직을 차지했으나, 대머리 카를 2세은 이를 문제삼지 않았다.
876년 10월 8일 대머리 카를 2세를 따라 안더나흐 전투 (876년 10월)에 종군했다. 독일인 루트비히 2세가 죽자 대머리 카를은 동부 로타링기아를 합병하려 했고, 876년 가을, 군사를 이끌고 로타링기아로 가는 서프랑크의 대머리 대머리 카를 2세를 종군했다. 동 로트링겐에서 대머리 카를의 군대와 교전하여 물리친 뒤 청년 루트비히와 대머리 카를은 876년 10월 안더나흐에서 맞붙었다. 877년 10월 8일 안더나흐에서 서프랑크 군을 최종적으로 격퇴하였다. 전략과 수적으로 모두 우월했던 동프랑크의 군이었으나 루트비히는 군사들에게 모두 흰 옷을 입혀 망령 군대처럼 보이게 했고, 밤에 이들을 본 서프랑크의 군사들은 귀신으로 보고 놀라서 달아났다. 병사들은 우왕좌왕 도주하거나 실신해서 쓰러졌고 카를 2세는 당황해하며 되돌아갔다.
이때 대머리 카를을 따라 종군한 제롬 백작과 라그니에르가 사망했으며, 베르나르 플랑타빌리는 백작 아달하르드(Adalhard), 파리 주교 고즐린(Gauzlin)과 같이 청년 루트비히에게 포로로 붙잡혔다가[8], 곧 풀려났다. 876년 고티아의 영주직에서 해임되고, 고티아의 베르나르(Bernard of Gothia)로 대체되었다.
877년 10월 6일 대머리 카를 2세가 죽고 그 아들 말더듬이 루이 2세가 즉위하자, 서프랑크 왕국 내에서 실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곧 고티아를 차지한 고티아의 베르나르를 상대로 전쟁, 고티아의 베르나르를 암살, 제거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는 고티아 영주 직을 얻지 못했고, 한참 뒤 비만왕 카를의 배려로 고티아에 복귀한다.
2. 3. 말년
879년 4월 초 베르나르 플랑타뷜리는 루이 2세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루이 2세는 그를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던 중 사망했다.[1]884년 샤를로망 3세를 따라 보소 5세를 치는 전투에 출정하여 마콩의 일부를 얻고 마콩 백작직을 차지했으며, 카를 3세로부터 리요네를 받았다. 같은 해 카를 3세는 그를 다시 고티아의 영주로 임명했다.[1]
그의 가계는 메로빙거 왕조의 혈통이었고, 이를 근거로 그의 외손자 아키텐공 기욤 2세는 923년 서프랑크 왕국의 국왕 라울에게 반기를 들고 왕위를 요구하기도 했다.[1]
3. 가족
베르나르 플랑타뷜리는 오베르뉴 백작 부인인 에르멩가르드와 결혼했다. 에르멩가르드는 상속녀로서 오베르뉴 백작령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2] 에르멩가르드의 아버지는 860년대에 활동했던 오베르뉴의 백작 베르나르 1세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에르멩가르드의 남편인 플랑타뷜리를 지칭하는 것일 수 있다.[2] 에르멩가르드는 프로방스의 게린 백작과 그의 아내 아바의 딸이었을 가능성도 있다.[3]
베르나르 플랑타뷜리와 에르멩가르드 사이의 자녀는 다음과 같다.[2]
- 아키텐의 기욤 1세
- 와린
- 아바
- 카르카손의 아크프레드 1세와 결혼한 아델린다
참조
[1]
기타
[2]
서적
Those of My Blood
[3]
서적
Those of My Blood
[4]
서적
The Inheritance of Rome
[5]
기타
[6]
서적
The Inheritance of Rome
[7]
논문
The Tardy Adoption of the Plantagenet Surname
http://cogprints.org[...]
2007
[8]
서적
Charles the Bald
Longman Publishing Company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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