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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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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키텐은 오늘날 프랑스 남서부에 위치했던 역사적 지역으로, 로마 시대에는 갈리아 아퀴타니아로 불렸다. 로마 제국 멸망 이후 서고트족, 프랑크족의 지배를 받았으며, 1137년 아키텐 여공작 엘레오노르가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결혼하면서 프랑스에 귀속되었지만, 잉글랜드 왕 헨리 2세와의 재혼으로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1453년 백년 전쟁 이후 프랑스에 완전히 병합되었으며, 포도주 양조업, 항공 우주 산업 등이 발달했다. 주요 도시로는 보르도, 포, 바욘 등이 있으며, 프랑스어 외 바스크어, 오크어 등 다양한 언어가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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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텐 - [지명]에 관한 문서
개요
아키텐과 기옌의 문장
아키텐과 기옌의 문장
공식 명칭아키텐
토착어 명칭오크어: Aquitània
바스크어: Akitania
소멸2016년 1월 1일
수도보르도
면적41,308 km²
인구 (2012년)3,285,970명
인구 밀도자동 계산
GDP총액: 1,147억 4300만 유로
1인당: 33,400 유로
NUTS 지역FR61
웹사이트아키텐 지역 공식 웹사이트
행정 구역
구성 데파르트망도르도뉴 (24)
지롱드 (33)
랑드 (40)
로트에가론 (47)
피레네자틀랑티크 (64)
정치
의회 의장알랭 루세
소속 정당사회당
기타 정보
ISO 3166-2FR-B

2. 역사

고대 로마 시대 갈리아 아퀴타니아에서 유래한 아키텐 지역은,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기 루아르강 유역까지 확장되며 로마화되었다. 4세기에는 아퀴타니아 프리마, 아퀴타니아 세쿤다, 아퀴타니아 테르티아로 분할되었다가, 5세기 서고트족의 침입과 507년 프랑크족의 지배를 겪었다. 프랑크족의 초기 지배는 불안정했으나, 다고베르트 1세 시기 잠시 왕국이 세워지기도 했다. 8세기 사라센 침입 시기에는 소극적인 저항을 보였고, 카를 마르텔에 의해 카롤링거 왕조에 편입되었다. 샤를마뉴 사후 서프랑크 왕국에 속했다가, 아키텐 공국으로 준독립 상태를 유지하다 1453년 프랑스에 완전히 통합되었다.

1058년, 가스코뉴와 아키텐은 아키텐 공작 기욤 8세의 통치하에 병합되었다. 이후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와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의 결혼, 그리고 엘레오노르와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의 재혼으로 잉글랜드 앙주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백년 전쟁 종전까지 300년간 잉글랜드 지배하에 있으면서 잉글랜드와 경제적 유대가 강화되었고, 특히 포도주 무역이 활발했다.[5] 16-17세기에는 위그노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13세기부터 프랑스 혁명까지는 기옌으로 불렸다.

2. 1. 고대

고대 로마 시대 갈리아 아퀴타니아는 본래 피레네산맥가론강 사이의 갈리아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아우구스투스는 가론 강과 루아르강 사이의 땅까지 아퀴타니아에 포함시켰다. 이 시기에 아퀴타니아 속주는 현대 프랑스 영토의 1/3 정도까지 확장되었으며, 갈리아 북부와 달리 문화적으로 로마화되었다. 기원후 4세기에 아퀴타니아는 아퀴타니아 프리마(북동부), 아퀴타니아 세쿤다(북서쪽), 아퀴타니아 테르티아(남쪽 끝)의 3개 주로 분할되었다.

페리고르 지역에는 선사 시대 인류의 흔적이 남아 있지만, 남서부 지역의 가장 초기 거주자는 켈트족이 아닌 이베리아인과 더 유사한 아퀴타니족이었다(갈리아 아퀴타니아 참조). 고대 시대에 이 지역에서는 여러 언어와 방언이 사용되었지만, 선사 시대 후기부터 로마 시대까지 아키텐의 주된 언어는 바스크어의 초기 형태였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는 로마인들이 기록한 다양한 아키타니 이름과 단어들이 현재 바스크어로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점으로 입증된다. 이 아키타니 언어(원시 바스크어)가 한때 훨씬 더 넓게 확장되었던 바스코닉 언어 그룹의 잔재인지, 아니면 일반적으로 아키텐/바스크 지역에 국한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아키텐 언어가 중요한 이유는 바스크어가 서유럽에서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비인도유럽어이며, 스페인어와 프랑스어(비교적 덜하지만)를 포함한 주변 언어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1]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정복했을 당시 원래 아퀴타니아는 가론 강, 피레네 산맥, 대서양으로 둘러싸인 지역이었다. 이 이름은 라틴어 'aqua'(물)에서 유래되었을 수 있으며, "Aquae Augustae", "Aquae Tarbellicae", "Aquis"(현대 바스크어로 Akize) 등의 도시나 지리적 특징에서 파생되었을 수 있다.[1]

도르도뉴의 풍경, 아키텐


아우구스투스고대 로마 통치 하인 기원전 27년부터 아퀴타니아 속주는 북쪽으로 루아르 강까지 확장되어, 가론 강 남쪽의 아퀴타니족(노벰포풀라니아, 가스코뉴 참조)과 갈리아 부족을 같은 지역에 포함시켰다.[1]

392년, 로마 제국 속주는 아퀴타니아 프리마(북동부), 아퀴타니아 세쿤다(중부), 아퀴타니아 테르티아(남서부, 노벰포풀라니아로 더 잘 알려짐)로 재편되었다.[1]

2. 2. 중세

5세기에 로마 제국이 쇠약해지면서 서고트족이 침입해 왔고, 507년 프랑크족에게 쫓겨나기 전까지 이 지역을 지배했다. 프랑크족의 이 지역 지배는 불안정했는데, 이는 그들이 당시 도시 생활 및 국가 운영에 미숙했기 때문이다. 다고베르트 1세는 자신의 이복동생 하리베르트 2세와 조카 힐페리히를 연이어 아키텐의 왕으로 임명했으나 이들은 모두 바스크족에게 암살당했다.

8세기 사라센의 침입에 대한 아키텐의 저항은 미온적이었으며, 아키텐의 군주 에우도는 사라센족과 손을 잡고 프랑크 왕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카를 마르텔이 사라센인을 몰아낸 뒤 아키텐은 카롤링거 왕조의 일부가 되었다.

샤를마뉴의 자손들은 그의 사후 제국을 분할했는데, 아키텐은 서프랑크 왕국에 배속되었다. 아키텐은 1453년 프랑스에 완전히 배속되기 전까지 아키텐 공국으로 준독립 상태를 유지했다.

초기 중세 시대 아키텐에 대한 기록은 정확하지 않지만, 혼란이 많았다. 서고트족은 제국 내에서의 지위를 합법화하며 갈리아에 ''foederati''로 불려 들어왔다. 결국 그들은 로마 중앙 정부가 붕괴되면서 남서부 갈리아에서 ''사실상'' 지배자로 자리 잡았다. 서고트족은 툴루즈에 수도를 세웠지만, 아키텐에 대한 그들의 지배는 미약했다. 507년 부예 전투에서 프랑크족에게 패배한 후 히스파니아 남쪽으로 추방되었고, 프랑크족은 루아르강 남쪽 지역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다.

로마의 아키타니아 테르티아는 노벰포풀라니아로 유지되었고, 그곳에는 바스크족(바스코네스/와스코네스, 영어로는 ''가스코네스''로 표기)을 통제하기 위해 공작이 임명되었다. 이 공작들은 프랑크 중앙 정부와 매우 거리가 멀었고, 때로는 피레네 산맥 남쪽에 있는 친족들과 강한 유대감을 가지고 독립적인 통치자로 통치하기도 했다. 660년, 툴루즈 출신의 유력자, 아마도 갈로-로마 혈통인 아키텐의 펠릭스 공작에 의해 독립적인 아키텐/바스코니아 정치체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새로운 아키타니아 왕국의 민족 구성은 메로빙거 왕조에 형식적으로 복종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크족이 아닌, 가론 강 북쪽과 주요 도시에서는 갈로-로마인, 가론 강 남쪽에서는 특히 바스크족이었다.

760년경 바스코니아와 아키텐 공국의 상황


통일된 바스크-아키타니아 왕국은 오도 대왕의 통치하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721년, 아키타니아 공작은 우마이야 왕조 군대(''사라센'')를 툴루즈에서 격퇴했지만, 732년(또는 로저 콜린스에 따르면 733년)에는 압드 알 라흐만 알 가피키가 지휘하는 우마이야 왕조 원정대가 보르도 근처에서 오도를 격파하고 푸아티에까지 약탈했다. 오도는 아랍 군대의 진격에 맞서기 위해 프랑크족의 샤를 마르텔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했다. 바스크-아키타니아의 자치는 일시적으로 중단되었고, 768년 아키텐의 와이퍼가 암살된 후에는 완전히 종식되었다.

781년, 샤를마뉴는 그의 아들 경건왕 루이를 아키텐의 왕으로 선포하여 카롤링거 제국 내에서 아키텐 공국과 바스코니아 공국을 다스리게 했다.[3] 그는 다양한 바스크족(''가스코네'') 반란을 진압했으며, 가스코뉴를 약탈한 후 피레네 산맥 너머 팜플로나의 땅까지 진출하여 피레네 산맥 남쪽의 바스코니아에도 자신의 권위를 부과하려 했다. 그의 전기에 따르면, 그는 자신이 원했던 모든 것을 성취했고 팜플로나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귀환하던 중 812년에 그의 군대는 론세스바예스에서 공격을 받았지만, 피레네 산맥의 고개에서 간신히 교전을 피했다.

보르도 백작이자 바스코니아 공작인 세귄 1세 (시히미누스)는 샤를마뉴 사후 프랑크 중앙 정부로부터의 분리를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황제 경건왕 루이는 그를 해임하는 것으로 대응했고, 이는 바스크족의 반란을 촉발했다. 이에 왕은 군대를 파견하여 두 차례의 원정을 통해 그들의 복종을 얻고 공작을 살해했으며, 그의 가족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크 세력에 대항하는 반란을 계속 일으켰다. 824년, 두 번째 론세스바예스 전투가 벌어졌고, 새로운 아키텐 왕 페팽이 보낸 바스코니아 공국의 프랑크족 봉신 아에블루스와 가스코뉴의 아스나르 산체스 백작이 이니고 아리스타와 바누 카시의 연합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페팽이 죽기 전, 황제 루이는 832년에 그의 아들 대머리 샤를을 새로운 왕으로 임명했고, 아키타니아 영주들은 아키텐의 페팽 2세를 왕으로 선출했다. 이 왕국 지배를 위한 투쟁은 아버지와 카롤링거 세력에 충성하는 샤를과 바스크 및 아키타니아 영주들의 지원에 더 의존하는 페팽 2세 사이의 끊임없는 전쟁 시대를 초래했다.

507년 부예 전투 이후 프랑크족이 남부 갈리아를 초기에 정복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크족의 세력은 고딕법과 갈로-로마법이 우세하고 프랑크족의 정착이 적었던 루아르강 이남에서는 미미했다. 비록 희소했지만, 프랑크족의 일부 인구와 귀족들은 알비주아, 카르카손(셉티마니아의 변두리), 툴루즈, 프로방스, 론강 하류(마지막 두 지역은 아키텐에 속하지 않음)와 같은 지역에 정착했다. 다고베르트 1세 왕의 죽음 이후, 루아르강 이남의 메로빙거 왕조의 지배는 대체로 명목상으로 변했고, 실제 권력은 자치적인 지역 지도자들과 백작들의 손에 넘어갔다. 프랑크족은 8세기까지 지배적인 갈로-로마 문화에 크게 동화되었을 수 있지만, 그들의 이름은 오도와 같이 지배 계급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툴루즈 전투에서 아키텐 공작 오도는 아키텐인과 프랑크족의 군대를 이끌었다고 한다.[4]

반면에 프랑크족은 바스크족과 섞이지 않고 별개의 길을 걸었다. 이슬람 세력의 진출 전후 시기에 바스크족은 아키텐(툴루즈까지 뻗어 있음)과 바스코니아를 정복하려는 프랑크족의 시도에 대항하여 여러 기록에서 언급되며, 전자에 바스크족의 세력이 압도적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기록된 증거는 그들이 아키텐 전역에 공작의 군대의 주력으로서 군사적 역량으로 배치되었음을 가리킨다. '로마인'은 프랑크족과 반대로 아키텐의 도시에 거주하는 것으로 언급된다(8세기 중반).

2. 3. 근세-근대

1058년, 바스코니아 공국(가스코뉴)과 아키텐은 아키텐 공작 기욤 8세의 통치하에 병합되었다. "아키텐 공작" 칭호는 10세기부터 12세기까지 푸아티에 백작들이 소유했다.

엘레오노르 다키텐과 프랑스의 루이의 결혼을 묘사한 14세기 그림


아키텐은 1137년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여공작이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와 결혼하면서 프랑스로 넘어갔지만, 1152년 결혼이 무효화되었다. 엘레오노르의 새 남편이 1154년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가 되면서 이 지역은 잉글랜드의 소유가 되었고, 앙주 제국의 초석이 되었다. 아키텐은 1453년 백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잉글랜드 영토로 남아있다가 프랑스에 병합되었다.

이 지역이 잉글랜드 국왕의 통치를 받던 300년 동안, 아키텐과 잉글랜드 간의 관계는 강화되었고, 프랑스 남서부에서 생산된 대량의 포도주가 런던, 사우샘프턴 및 기타 잉글랜드 항구로 수출되었다. 런던으로 수출되어 판매되는 포도주 및 기타 생산물이 너무 많아서 백년 전쟁이 시작될 무렵 아키텐에서 얻는 수익이 잉글랜드 국왕의 연간 주요 수입원이 되었다.[5]

이 지역은 16세기와 17세기 동안 개신교 위그노의 거점 역할을 했으며, 위그노들은 프랑스 가톨릭교도들의 박해를 받았다. 위그노들은 리슐리외 추기경이 이끄는 군대에 대항하기 위해 잉글랜드 국왕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13세기부터 프랑스 혁명까지 아키텐은 일반적으로 기옌으로 알려졌다.

2. 4. 현대

아우구스투스가 가론 강과 루아르강 사이의 땅까지 아퀴타니아에 포함시킨 이후, 아퀴타니아 속주는 현대 프랑스 영토의 1/3정도까지 확장되었으며, 북부 갈리아와 달리 문화적으로 로마화되었다. 기원후 4세기에 아퀴타니아는 아퀴타니아 프리마, 아퀴타니아 세쿤다, 아퀴타니아 테르티아의 3개 주로 나뉘었다.

5세기에 로마 제국이 쇠약해짐에 따라 서고트족이 침입해 들어왔고, 507년에 프랑크족에 의해 쫓겨나기 전까지 이 지역을 지배했다. 프랑크족은 당시 도시생활 및 국가 운영에 대해 미숙했기 때문에 이 지역에 대한 지배는 불안정했다. 다고베르트 1세는 자신의 이복동생 하리베르트 2세와 조카 힐페리히를 연이어 아키텐의 왕으로 임명했으나 이들은 모두 바스크족에게 암살당했다.

8세기 사라센의 침입에 대한 아키텐의 저항은 미온적이었으며, 아키텐의 군주 에우도는 사라센족과 손을 잡고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독립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카를 마르텔이 사라센인을 몰아낸 뒤 아퀴타니아는 카롤링거 왕조의 일부가 되었다.

샤를마뉴의 자손들은 그의 사후 제국을 분할했는데, 아키텐은 서프랑크 왕국에 배속되었다. 아키텐은 1453년 프랑스에 완전히 배속되기 전까지 아키텐 공국으로 준독립 상태를 유지했다.

3. 지리

아키텐은 프랑스 전체 면적의 7.6%를 차지한다. 아키텐의 주요 도시로는 보르도, , 바욘, 몽드마르상, 페리괴가 있다. 면적은 41309km2로, 프랑스의 레지옹 중 3번째로 넓으며, 프랑스 영토의 약 8%를 차지한다. 남부의 피레네 산맥에 둘러싸인 지역은 파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4. 행정 구역

주(Département) 이름프랑스어 이름인구주도(Préfecture)주도 프랑스어 이름
지롱드Gironde|지롱드프랑스어1,360,000보르도Bordeaux|보르도프랑스어
도르도뉴Dordogne|도르도뉴프랑스어398,000페리괴Périgueux|페리괴프랑스어
랑드Landes|랑드프랑스어347,000몽드마르상Mont-de-Marsan|몽드마르상프랑스어
로트에가론Lot-et-Garonne|로트에가론프랑스어315,000아쟁Agen|아쟁프랑스어
피레네-아틀랑티크Pyrénées-Atlantiques|피레네-아틀랑티크프랑스어625,000Pau|포프랑스어


5. 경제

아키텐 지역은 포도 생산과 포도주 양조업이 매우 발달한 곳이다. 천연 가스와 석유도 채굴되며, 토탈 같은 기업들이 개발에 참여하고 있다.[1] 주도인 보르도는 와인의 중심지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농업, 식품 공업, 화학 공업 등이 주요 산업이며, 남부 가스코뉴 지방은 소설 삼총사의 주인공 달타냥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다.[1]

5. 1. 주요 산업

포도 생산량이 높아 포도주 양조업이 발달했다. 천연 가스와 석유가 채굴되고 있으며 토탈 등의 기업이 개발에 나서고 있다.[1] 와인의 집산지인 보르도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며, 주요 산업은 농업, 식품 공업, 화학 공업 등이다.[1] 남부 가스코뉴 지방은 알렉상드르 뒤마 페르의 소설 삼총사의 주인공 달타냥의 고향으로 모델이 된 지역이다.[1]

  • 포도는 이 지역에서 압도적으로 생산량이 높다.[1]
  • 북부에서는 임업이 활발하며, 유럽 최대의 소나무 숲인 랑드 숲이 있다.[1]
  • 의 생산이 증가하고 있다.[1]
  • 천연 가스와 원유가 발견되어, 토탈 등의 기업이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1]
  • 와인 양조가 활발하며, 와인과 부산물이 이 지역의 산업과 문화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미국 정부의 통계에 따르면, 7억L의 와인이 보르도에서 생산된다.[1]
  • 주로 다쏘 그룹에 의한 항공 우주 산업이 발달하였다.[1]
  • 보르도에는 대학교가 있어 8만 명 이상이 통학하고 있다.[1]
  • 관광 산업도 번성하여 특히 코트다르장|Côte d'Argent영어 주변에 서퍼나 일광욕을 위해 방문하는 사람이 많다.[1]

6. 문화

역사적으로 아키텐은 로마 제국의 속주 갈리아 아퀴타니아(라틴어: Gallia Aquitania)였던 지역이며, 아퀴타니아(Aquitania)가 변형되어 현재의 이름이 되었다. 주도인 보르도는 와인의 집산지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주요 산업은 농업, 식품 공업, 화학 공업 등이다. 남부의 가스코뉴 지방은 알렉상드르 뒤마 페르의 소설 『삼총사』의 주인공 달타냥의 고향 모델이 된 지역이다.[3]

와인 양조가 활발하며, 와인과 그 부산물은 이 지역의 산업과 문화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미국 정부의 통계에 따르면, 7억 리터의 와인이 보르도에서 생산된다. 다쏘 그룹에 의한 항공 우주 산업도 주요 산업 중 하나이다.

포(Pau) 성 서쪽 산책로

6. 1. 언어

고대 시대에 이 지역에서는 여러 언어와 방언이 사용되었지만, 선사 시대 후기부터 로마 시대까지 아키텐의 주된 언어는 바스크어의 초기 형태였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는 로마인들이 기록한 다양한 아키타니 이름과 단어들로 입증되었으며, 현재 바스크어로 쉽게 읽을 수 있다. 이 아키타니 언어(원시 바스크어)가 한때 훨씬 더 넓게 확장되었던 바스코닉 언어 그룹의 잔재인지, 아니면 일반적으로 아키텐/바스크 지역에 국한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아키텐 언어가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바스크어가 서유럽에서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비-인도유럽어이며, 스페인어프랑스어(비교적 덜하지만)를 포함한 주변 언어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3]

프랑스어는 이 지역의 공식 언어이다. 많은 주민들은 또한 바스크어, 다양한 오크어 (가스코뉴어, 리무쟁, 또는 랑그도크), 또는 프랑스어의 푸아투-상통 방언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2005년에는 78,000명의 어린이가 공립학교에서 오크어를 제2외국어로 배우고 있었고, 2,000명이 오크어 사용 사립학교에 등록되어 있었다.

바스크어 사용자는 약 73,000명으로, 이 지역 최남단에 집중되어 있다.

지역이중 언어 구사자읽고 이해 가능 인구
라부르38,600명 (37%)24,000명
바스나바르 및 28,000명 (76%)7,000명


6. 2. 스포츠

이 지역에는 축구, 럭비 유니온, 농구, 투우 등 다양한 스포츠 팀과 경기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 축구:
  • FC 지롱댕 드 보르도: 프랑스에서 가장 성공적인 축구팀 중 하나이다.
  • 포 FC
  • FC 리부른-생-세린

  • 럭비 유니온: 이 지역에서 특히 인기가 많다.
  • SU 아쟁
  • 아비롱 바요네
  • 비아리츠 올랭피크: 2005–6년 하이네켄 컵 준우승팀이다.
  • Union Bordeaux-Bègles
  • 섹시옹 팔루아즈
  • 스타드 몽투아
  • US 닥스

  • 농구:
  • 엘랑 베르네 포-오르테즈: 프랑스에서 가장 성공적인 농구 클럽 중 하나이다.


투우 또한 이 지역에서 인기가 있으며, 아키텐 해안에서는 주요 서핑 선수권 대회가 정기적으로 열린다.

참조

[1] 웹사이트 EU regions by GDP, Eurostat https://ec.europa.eu[...] 2023-09-18
[2] French law http://www.legifranc[...]
[3] 문서 Et 3 Calend Augusti habuit concilium magnum in Aquis, et constituit duos filius sans reges Pippinum et Clotarium, Pippinum super Aquitaniam et Wasconiam).
[4] 서적 The Development of Southern French and Catalan Society, 718–1050 http://libro.uca.edu[...] University of Texas Press 2012-06-15
[5] 웹사이트 The Plantagenets http://www.bbc.co.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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