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저민 올콕
1. 개요
벤저민 올콕은 1801년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해부학자이다.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해부학을 공부하고 에이브러햄 콜리스 밑에서 경력을 쌓았다. 아일랜드 왕립외과대학의 회원이 되었으며, 아일랜드 코크대학교와 퀸스 칼리지에서 해부학 교수를 역임했다. 시신 조달을 위해 부정한 방법을 제안하여 해고된 후, 1859년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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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의 해부학자 -
존스 콰인
존스 콰인은 아일랜드 출신의 해부학자이자 의학자로, "해부학의 원리"를 통해 영어권 국가 해부학 교과서의 표준을 세웠고 유니버시티 칼리지의 일반 해부학 교수를 역임하며 의학 연구 및 교육 발전에 기여했다. -
킬케니주 출신 -
조지 버클리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라는 명제로 유명한 아일랜드 철학자이자 성공회 주교인 조지 버클리는 극단적인 경험주의와 관념론을 주장하며 물질의 존재를 부정하고 정신, 관념, 신만이 실재한다고 보았다. -
킬케니주 출신 -
존 케이시
아일랜드의 수학자이자 교육자인 존 케이시는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학위를 받고 킹스턴 학교의 수학 교사와 아일랜드 가톨릭 대학교의 교수를 역임했으며, 유클리드 기하학 원론 번역 및 수학 저술 활동을 했다. -
1801년 출생 -
윌리엄 H. 수어드
윌리엄 H. 수어드는 뉴욕 주지사, 연방 상원의원, 국무장관을 역임하며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고 알래스카 매입에 기여한 미국의 정치인이다. -
1801년 출생 -
존 헨리 뉴먼
존 헨리 뉴먼은 19세기에 활동하며 옥스퍼드 운동을 이끌고 가톨릭교회로 개종하여 추기경이 되었으며, 종교, 교육, 철학 분야에 기여하고 1991년 존경받는 인물로, 2019년 시성되었다.
2. 일생
벤저민 올콕은 1801년 5월 아일랜드 킬케니에서 저명한 의사인 너새니얼 올콕(Nathaniel Alcock)의 다섯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킬케니 칼리지에서 공부한 이후, 더블린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해부학을 공부하고 1821년 졸업했다.
이후 당대 아일랜드의 저명한 외과의사였던 에이브러햄 콜리스(Abraham Colles) 밑에서 일하며 해부학자로서 경력을 쌓았다. 1825년 올콕은 아일랜드 왕립외과대학(Royal College of Surgeons in Ireland)의 면허 소지자가 되었고 1827년 더블린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그해 말에 왕립외과대학의 회원이 되었다.
아일랜드 왕립외과대학의 회원이 된 올콕은 해부학 시연자(demonstrator)를 거쳐 해부학 교수로 근무했다. 1837년 아일랜드 코크대학교의 해부학, 생리학, 병리학 초대 교수가 되었고, 1849년 퀸스 칼리지에 의과대학이 개교했을 때 해부학 교수로 취직했다.
1832년 해부법 통과 이후 시체 조달이 어려워지자, 올콕은 구빈원에서 사망한 사람들과 관계있는 사람인 척하여 시신을 넘겨받자고 학교에 제안했다. 이러한 부정직한 행위로 인해 1854년 사임을 요구받았고, 항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1855년에 해고되었다.
아일랜드에서 고용되기 어려워진 벤저민 올콕은 1859년 미국으로 떠났고, 그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2.1. 초기 생애 및 교육
벤저민 올콕은 1801년 5월 아일랜드 킬케니에서 저명한 의사인 너새니얼 올콕(Nathaniel Alcock)의 다섯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킬케니 칼리지에서 공부한 이후, 더블린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해부학을 공부하고 1821년 졸업했다.
이후 당대 아일랜드의 저명한 외과의사였던 에이브러햄 콜리스(Abraham Colles) 밑에서 일하며 해부학자로서 경력을 쌓았다. 1825년 올콕은 아일랜드 왕립외과대학(Royal College of Surgeons in Ireland)의 면허 소지자가 되었고 1827년 더블린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그해 말에 왕립외과대학의 회원이 되었다.
2.2. 교수 경력 및 갈등
아일랜드 왕립외과대학의 회원이 된 올콕은 해부학 시연자(demonstrator)를 거쳐 해부학 교수로 근무했다. 1837년 아일랜드 코크대학교의 해부학, 생리학, 병리학 초대 교수가 되었고, 1849년 퀸스 칼리지에 의과대학이 개교했을 때 해부학 교수로 취직했다.
1832년 해부법 통과 이후 시체 조달이 어려워지자, 올콕은 구빈원에서 사망한 사람들과 관계있는 사람인 척하여 시신을 넘겨받자고 학교에 제안했다. 이러한 부정직한 행위로 인해 1854년 사임을 요구받았고, 항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1855년에 해고되었다.
2.3. 미국 이주와 이후 행적
아일랜드에서 고용되기 어려워진 벤저민 올콕은 1859년 미국으로 떠났고, 그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