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위 효명제의 딸
1. 개요
북위 효명제의 딸은 528년 효명제와 후궁 반외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효명제가 사망한 후 섭정 호태후에 의해 황제로 옹립되었으나 다음 날 폐위되었다. 호태후는 정권 유지를 위해 딸을 황자로 위장하여 즉위시켰지만, 이 사실이 발각되어 폐위되었고 이후 그녀의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다. 그녀의 황제 지위는 논란의 대상이며, 일부 학자들은 중국 최초의 여황제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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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여제 -
측천무후
측천무후는 당나라 황후에서 스스로 황제가 되어 무주를 세운 중국 유일의 여황제로, 수렴청정과 과거제 확대 등으로 평가가 엇갈린다. -
6세기 여자 통치자 -
스이코 천황
스이코 천황은 일본 최초의 여성 천황으로 쇼토쿠 태자, 소가 우마코와 협력하여 수나라와의 국교를 시작하고 관위십이계와 십칠조헌법을 제정하는 등 아스카 시대의 기틀을 다졌다. -
6세기 여자 통치자 -
영태후
영태후 호선진은 북위 선무제의 후궁으로 효명제를 낳아 섭정을 시작, 불교 장려 등 문화적 업적을 남겼으나 권력 남용과 부패로 북위 쇠퇴를 가속화했고 효명제 독살 후 원조를 옹립했다가 이주영에 의해 폐위되어 황하에 익사했다. -
528년 출생 -
진 선제
진 선제는 남조 진나라의 황제였으며, 후경의 난 이후 북주와의 협상을 통해 진나라로 돌아와 황제에 즉위하여 내정에 힘쓰고 북제를 공격했으나 북주의 침략으로 영토를 상실하다 582년에 사망했다. -
528년 출생 -
소방등
소방등은 남조 양나라 원제 소역의 맏아들로, 어려서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후경의 난과 하동왕 소예 토벌에 참여했다가 22세에 익사했으며 사후 무열세자로 추시되었다.
2. 생애
528년 3월 31일(무태 원년 2월 25일), 효명제는 이주영과 손을 잡고 횡포를 부리는 생모 호태후를 제거하려 했지만 발각되어 독살당했다. 효명제가 19세로 붕어하여 제위를 계승할 황자가 없었으므로, 호태후는 갓 태어난 효명제의 딸을 황자로 위장하여 4월 1일(무태 원년 2월 26일)에 황제로 즉위시켰으나, 하루 만에 이 사실이 발각되어 폐위되었다.
2.1. 출생과 즉위
528년 2월 12일에 효명제와 후궁 반외련(潘外憐) 사이에서 태어났다.
호태후는 효명제를 독살한 뒤, 계속해서 권력을 잡기 위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효명제의 딸을 황자라고 속여 황제로 옹립하고, 연호를 무태(武泰)로 고쳤다.
그러나 다음 날, 호태후는 황제가 남자가 아니고 여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혼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여 즉위한 지 하루 만에 폐위시키고, 임조왕(臨洮王) 원보휘(元寶暉)의 세자인 원조를 황제로 옹립했다.
이후 그녀의 행적은 역사서에 기록되지 않아 알 수 없다.
2.2. 폐위와 이후 행적
영태후는 528년 효명제를 독살한 뒤, 자신이 권력을 계속 쥐기 위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효명제의 딸을 황자라고 속여 옹립하고 연호를 무태(武泰)로 고쳤다.
그러나 다음 날, 영태후는 그녀가 여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혼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여 즉위 하루 만에 폐위시키고, 임조왕(臨洮王) 원보휘의 세자인 원조를 옹립했다.
이후 그녀의 행적은 어느 역사서에도 기록되지 않아 알 수 없다.
3. 논란과 평가
호태후는 섭정 기간 동안 저지른 행위로 인해 불신을 받았고, 왕조 멸망을 초래한 역사 속의 악녀로 평가받는다. 이주영은 호태후가 어린 여자아이를 황위에 앉혀 하늘과 조정을 속였다고 주장하며 군대를 일으켜 호태후 정권을 전복시켰다. 이후 원자유를 황제로 옹립하고, 군대를 보내 수도 낙양을 점령하여 호태후와 효명제의 딸을 포로로 잡았다. 호태후는 자비를 구했지만, 황하에 빠져 죽는 처형을 당했다.
3.1. 정통성 논란
그녀를 정통 황제로 다루는 역사서는 전근대에 없었으며, 현대 학계에서도 딸을 아들이라고 속여서 황제로 즉위한 점과 재위 기간이 하루에 불과한 점 등을 근거로 해당 사건은 해프닝일 뿐이므로 효명제의 딸을 측천무후 같은 황제로 인정하지 않는 의견이 많다.
단, 최근 중국 학자들 일각에서는 기존의 시각이 사회주의 신중국에 어울리지 않는 전근대의 역사관이라며 이에 탈피하여 일단 즉위를 한 것은 기록상 사실이므로 중국 첫 번째 여황제로 받아들이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효명제의 유일한 자녀로, 정사에서는 정당한 황제로 인정받지 못했으며, 시호나 묘호도 존재하지 않는다. 황제 지위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는다. 공식적인 역사 기록에서는 그녀를 적법한 군주로 등재한 적이 없는데, 그 이유는 그녀가 호태후의 꼭두각시였고 하루도 채 통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는 남자아이로 위장하여 황위에 올랐다. 따라서 측천무후는 중국 역사에서 최초이자 유일하게 인정받는 여성 황제(huangdi)로 남아있다.
연구자 청양(成扬)은 원(오태)이 호태후의 계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상 최초의 여성 황제 등극"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고 믿는다. 청양에 따르면, 측천무후가 유일한 여성 황제(huangdi)는 아니었지만, 제국을 통치한 유일한 여성이었다. 무측천에 대한 또 다른 연구자인 뤄위안전(罗元贞)은 고대 중국의 역사가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듯이 현대 역사가들도 오태의 황제(Huangdi) 칭호를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3.2. 중국 최초 여황제 논쟁
효명제의 딸은 정통 황제로 다루어지지 않았으며, 현대 학계에서도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황제로 인정하지 않는 의견이 많다.
* 딸을 아들이라고 속여서 황제로 즉위한 점
* 재위기간이 하루에 불과한 점
하지만 최근 중화인민공화국 학자들 일각에서는 기존의 시각에 탈피하여, 일단 즉위를 한 것은 기록상 사실이므로 중국 첫 번째 여황제로 받아들이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오태의 황제 지위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는다. 공식적인 역사 기록에서는 그녀를 적법한 군주로 등재한 적이 없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호태후의 꼭두각시였고 하루도 채 통치하지 못했다.
* 남자아이로 위장하여 황위에 올랐다.
따라서 측천무후는 중국 역사에서 최초이자 유일하게 인정받는 여성 황제로 남아있다. 연구자 청양(成扬)은 원(오태)이 호태후의 계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상 최초의 여성 황제 등극"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고 믿는다. 청양에 따르면, 측천무후가 유일한 여성 황제는 아니었지만, 제국을 통치한 유일한 여성이었다. 무측천에 대한 또 다른 연구자인 뤄위안전(罗元贞)은 고대 중국의 역사가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듯이 현대 역사가들도 오태의 황제 칭호를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정식으로 인정받지는 않았지만, 무주의 측천무후(당의 제3대 황제 고종의 두 번째 황후) 이전에도 중국에 여제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세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