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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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태후는 북위 선무제의 후궁이자 효명제의 어머니로, 북위의 황태후로서 수렴청정을 했다. 호국진의 딸로 불교와 유교 경전에 능통하고 글재주가 뛰어났으며, 아들 효명제가 즉위한 후 섭정을 시작했다. 섭정 기간 동안 부패를 용인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여 정치가 문란해졌으며, 농민 반란과 양나라의 침입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을 맞았다. 효명제를 독살하고 자신의 손자를 옹립했으나, 이주영의 반란으로 사로잡혀 황하에 던져져 죽었다. 사후에는 황후의 예로 장례가 치러지고 '영'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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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8년 사망 - 북위 효명제
북위 효명제는 선무제의 아들로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영태후의 섭정을 받았으나, 영태후의 실정과 독살, 그리고 이주영의 영태후 제거로 북위가 혼란에 빠지는 원인이 되었다. - 528년 사망 - 원조 (북위)
원조는 북위의 황제였으나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영태후에 의해 옹립되었다가 이주영에 의해 폐위되어 호태후와 함께 익사하며, 그의 삶은 당시 북위의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 안정 호씨 - 호분
서진 시대의 무장 호분은 공손연 토벌, 제갈탄의 반란 진압, 오나라 정벌 등 주요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무인 가문 출신임에도 학문을 좋아했으며, 딸이 황후가 된 후에도 권세에 기대지 않는 강직한 성품으로 장후라는 시호를 받았고 거기장군으로 추증되었다. - 안정 호씨 - 호열
호열은 삼국 시대 위나라와 서진 시대의 장수로, 제갈탄의 난, 촉한 정벌, 종회의 난 등에서 활약했으며, 독발수기능의 난을 진압하다 전사했다.
영태후 | |
---|---|
기본 정보 | |
이름 | 호황후 |
아버지 | 호국진 |
어머니 | 황보씨 |
배우자 | 원각, 선무제 |
자녀 | 원후, 효명제 |
사망일 | 528년 5월 17일 |
생애 | |
출생지 | 북위 안정군 임경현 (현재의 감숙성경양시진원현) |
사망지 | 북위 하음 (현재의 낙양시맹진구) |
매장지 | 북위 쌍령사 |
직함 | 황태후 |
가계 | |
가문 | 호씨 |
아버지 직위 | 사도 |
2. 생애
영태후는 권력을 믿고 방탕한 생활을 했으며, 시동생인 문헌왕 원역(元譯)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기도 했다.[1] 호태후의 매부였던 원차는 이를 알고 원역을 죽이고 호태후를 북궁 선광전에 감금시켰지만, 호태후는 아들을 회유해 원차를 축출하고 조정에 복귀했다.[1]
효명제가 후계자 없이 죽자 영태후는 그의 딸 원씨를 아들이라고 속여 황제로 옹립했다.[1] 그러나 다음날에 자신의 손녀가 여자라는 사실이 탄로날까봐 즉위한지 하루만에 폐위하고 세 살에 불과한 효문제의 증손자 원조(元釗)를 황제로 옹립했다.[1] 그러나 호태후와 원조는 대도독 이주영에게 잡혀 황하에 던져져 죽었다.[1]
영태후는 515년 겨울, 부패한 관리 위안미(元謐)를 그의 아내가 조카라는 이유로 다시 등용하는 등 지나치게 관대하고 부패에 너그러운 모습을 보였다.[3] 비판을 용인하고 장려하기도 했지만, 부패를 억제할 제안을 실행하는 데에는 더뎠다.[3]
영태후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으며, 섭정 기간 동안 뤄양에 웅장한 사찰을 세웠고, 아버지 호국진을 위해 세운 사찰은 특히 아름다웠다고 한다.[3] 그녀의 영향으로 효명제도 독실한 불교 신자가 되었다.[3]
519년, 군인들이 문관이 되는 것을 금지하는 규정 변경 제안에 반발한 폭동이 발생했지만, 영태후는 폭동의 지도자들을 처형하고 나머지는 사면하여 불안을 잠재웠다.[3] 그녀는 또한 공무원 규정을 변경하라는 제안을 거부했다.[3] 영태후는 관료들에게 과도한 포상을 하여 국고를 고갈시켰고, 각 지방에 부처에게 헌정하는 탑을 건설하라는 명령으로 백성들의 부담이 더욱 커졌다.[3]
520년, 영태후는 효명제의 숙부 칭허왕(清河王) 위안이(元懌)에게 강제로 관계를 맺었고, 위안이는 정부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되어 부패를 줄이기 위해 행정을 개편하려 했다.[3] 그러나 위안차와 류텅의 모함으로 위안이는 살해되고 영태후는 가택 연금되었다.[3] 원 차는 섭정으로서 무능하고 부패했으며,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농민 반란이 많이 일어났다.[3] 525년, 영태후는 다시 섭정을 선언하고 원 차와 그의 측근들을 제거했다.[3]
영태후는 다시 섭정을 시작한 이후 더욱 독선적이고 음란해졌으며, 자신의 연인 정엄(鄭儼)이 막강한 권력을 갖도록 허락했다.[3] 각지에서 농민 반란과 기타 반란이 끊이지 않았으며, 주요 반란군은 다음과 같았다.
반란 주도자 | 근거지 | 비고 |
---|---|---|
선우수례(鮮于修禮) | 정주(定州, 대략 오늘날의 바오딩, 허베이성) | 선우수례 사후 그의 장군 갈영(葛榮)이 권력을 잡고 제나라 황제 자칭 |
남제 명제의 아들 소보인 | 장안 | 남제 재건 시도 |
형고(邢杲) | 북해 (대략 오늘날의 웨이팡, 산둥성) | |
만사추노(万俟醜奴) | 고평(高平, 대략 오늘날의 구위안, 닝샤성) |
영태후는 이러한 반란군에 맞서 여러 장군을 보냈지만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3]
528년, 영태후는 효명제의 딸을 아들이라고 속여 황제로 옹립했다가 하루 만에 폐위시키고, 원조를 황제로 옹립했다.[3] 이러한 잦은 폐립에 이주영이 반란을 일으켜 낙양을 함락시키고, 영태후와 원조를 황하에 수장시켰다(하음의 변).[3]
2. 1. 초기 생애
영태후 호씨(胡氏)는 북위 선무제의 후궁이자 효명제의 생모이다. 이름은 호선진(胡仙眞)으로 알려져 있다. 안정군 임경현(현재의 감숙성경양시진원현) 출신이다.[1] 아버지는 호국진이며, 호국진의 누이는 북위 황실에서 설법을 하던 비구니였다.[1]호씨는 고모의 추천으로 입궁하여 선무제의 후궁이 되었다.[1] 숭화(充華)라는 품계를 받았으며, 불교와 유교 경전에 능통하고 글재주가 뛰어났다고 전해진다.[1]
북위에는 외척 세력의 발호를 막기 위해 태자의 생모를 자결하게 하는 관습이 있었다.[1] 그러나 호씨는 아들을 낳기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510년 훗날 효명제가 되는 원후를 낳았다.[1] 이후 태자의 생모를 자결하게 하는 관습은 폐지되었다.[1]
2. 2. 섭정
515년 선무제가 사망하고 효명제가 즉위하자 호씨는 황태비가 되었다가 곧 황태후로 격상되어 섭정을 시작했다.[3] 영태후는 총명하고 많은 것을 빨리 이해하는 능력이 있었지만, 지나치게 관대하고 부패에 너그러웠다.[3] 예를 들어, 515년 겨울, 부패한 기주(岐州, 대략 현재의 산시 성 바오지) 태수이자 자오군왕(趙郡王)인 위안미(元謐)는 이유 없이 여러 사람을 살해하여 민중 봉기를 일으켰는데, 그는 직위에서 해임되었지만, 뤄양으로 돌아오자마자 영태후는 그의 아내가 조카라는 이유로 그를 대신으로 임명했다. 이 몇 년 동안 영태후의 권력은 도전받지 않았으며, 위안광(元匡, 동평왕)과 장푸후이(張普惠)와 같은 관리들의 직언을 포상하는 등 비판을 용인하고 때로는 장려하기도 했지만, 부패를 억제할 제안을 실행하는 데에는 더뎠다.[3]영태후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으며, 섭정 기간 동안 뤄양에 웅장한 사찰을 세웠다.[3] 그녀는 518년 사망한 아버지 후궈전(胡國珍)을 위해 세운 사찰은 특히 아름다웠으며, 그는 진공(秦公)으로 추존되었다. 그녀의 영향으로 효명제도 독실한 불교 신자가 되었다.[3]
519년, 관리 장중위(張仲瑀)가 군인들이 문관이 되는 것을 금지하도록 공무원 규정을 변경할 것을 제안한 후 뤄양에서 심각한 폭동이 발생했다. 군인들은 분노하여 문부성과 장중위의 아버지 장이(張彝)의 저택을 습격하여 장이를 살해하고 장중위와 그의 형제 장스쥔(張始均)을 심각하게 부상시켰다. 영태후는 폭동의 지도자 8명을 체포하여 처형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사면하여 불안을 잠재웠다. 그녀는 또한 공무원 규정을 변경하라는 제안을 거부했다. 이 사건은 종종 북위를 분열시킬 혼란의 시작이자 전환점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사건에도 불구하고 영태후는 부패를 계속 용인했으며, 종종 관료들에게 과도한 포상을 하여 국고를 고갈시켰다. 각 지방에 부처에게 헌정하는 탑을 건설하라는 그녀의 명령으로 국고에 대한 압박과 백성들의 부담이 더욱 커졌다.
520년 이전에, 영태후는 민중과 관리들에게 능력과 겸손함으로 인기가 많았던 효명제의 숙부 칭허왕(清河王) 위안이(元懌)에게 강제로 그녀와 관계를 맺도록 했다. 위안이는 그 후 정부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되어 부패를 줄이기 위해 행정을 개편하려 했다. 그는 특히 영태후의 매형인 위안차와 환관 류텅의 권력을 억제하려 했다. 이에 위안차는 그를 반역죄로 허위 고발했지만, 조사 후 무혐의로 풀려났다. 보복을 두려워한 위안차와 류는 효명제를 설득하여 위안이가 그를 독살하려 한다고 믿게 만들고 영태후와 위안이에 대한 쿠데타를 감행하여 위안이를 살해하고 영태후를 가택 연금했다. 위안용이 명목상 섭정이 되었지만, 위안차가 실제 권력을 잡았다.
원 차는 섭정으로서 특별히 유능하지 못했고, 그와 유등은 권력을 잡은 후 부패를 심화시켰다. 원 차 자신은 국정에 전혀 헌신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시간을 연회, 술, 여자에 썼다. 그는 아버지 원 기와 형제들을 권력의 자리에 앉혔고, 그들 또한 부패했다. 원 차의 무능함과 부패는, 선무 태후가 권력을 잡는 동안 관대했던 부패의 수준과 함께 민중의 불만을 초래했고, 많은 농민 반란을 일으켰다. 비록 최초의 반란은 농민이 아닌 — 원 이와 선무 태후 모두와 친분이 있던 — 중산왕 원희(元熙)가 520년 가을에 원 이를 복수하고 선무 태후를 복위시키려 한 것이었지만, 원 차는 즉시 원희의 반란을 진압했다.
521년 봄, 장군 희강생(奚康生)은 선무 태후를 복위시키려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원 차는 그를 죽였다.
523년, 관리 이충(李崇)은 수 세대 동안 유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북방 6개 군사 주둔지에 머물도록 강요받은, 주로 선비족인 백성들이 불만을 품고 있는 것을 보고, 원 차와 효명제에게 그 주둔지를 성으로 전환하고 백성들에게 다른 성의 백성과 동일한 권리를 부여할 것을 제안했다. 원 차는 거절했다. 그해 말, 회황(懷荒, 현재 허베이성 장자커우)과 워예(沃野, 현재 내몽골 자치구 바옌나오얼) 주둔지의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북위군은 이 반란을 신속하게 진압할 수 없었고, 반란은 곧 6개 주둔지뿐만 아니라 사실상 제국 전체로 확산되었다. 525년, 원 차의 측근이었던 서주(徐州, 현재 장쑤성 북부) 자사 원법승(元法僧)은 원 차가 곧 몰락할 것이라고 믿고 황제를 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그에게 파견된 북위군에게 초반에 패배한 후, 그는 펑청의 지위를 북위의 남쪽 경쟁국인 양나라에 항복했다.
이 시점에서, 원 차가 선무 태후에 대해 취했던 경계는 523년 유등이 사망한 후, 더 이상 그녀를 위협으로 간주하지 않게 되면서 크게 완화되었다. 이에 선무 태후, 효명제, 그리고 원용은 원 차에 대항할 기회를 잡았다. 선무 태후는 먼저 원 차가 원법승을 지나치게 신뢰하는 것에 대해 자주 이야기함으로써 그의 경계를 늦추었고, 이로 인해 원 차는 사과하는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그 후, 그의 동의를 얻어, 그녀는 그를 황실 경비대의 지휘에서 해임하고, 그와 가까워진 후 강(侯剛)으로 교체했다. 525년 여름, 그녀는 갑작스러운 행동을 취하여 다시 섭정을 선언하고, 원 차와 유등의 측근들을 대부분 죽이고 원 차를 가택 연금했다. 그러나 그녀는 처음에는 언니와의 관계 때문에 원 차에 대해 더 이상의 조치를 취하는 것을 망설였다. 하지만, 결국 여론이 원 차의 죽음을 지지하게 되자, 그녀는 그와 그의 형제 원과(元瓜)에게 자살을 강요했지만, 사후에 그에게 많은 명예를 수여했다.
효명제가 즉위하자 호충화는 황태비로 존칭되었고, 그 후 다시 황태후로 올라 임조청정(섭정)하게 되었다. 그 집정에는 절도가 보이지 않아, 일시적으로 북궁에 유폐될 정도였다. 그러나 정광 6년 (525년), 환관이 실권을 장악하고 신하들 간에 정권 다툼이 발발하자 집정에 복귀했다.
2. 3. 권력 남용과 몰락
영태후는 효명제가 다시 섭정을 시작한 이후 더욱 독선적이고 음란해졌으며, 자신의 연인 정엄(鄭儼)이 막강한 권력을 갖도록 허락했다.[3] 원용(元顒)과 동평왕(東平王, 원희의 형제) 원략(元略)이 신임을 받고 높은 지위에 있었지만, 정엄과 정엄의 측근인 서흘(徐紇)이 그들보다 더 강력했다. 영태후의 생활 방식과 통치 방식은 모두 관리들과 아들 효명제로부터 광범위한 불만을 샀다. 각지에서 농민 반란과 기타 반란이 끊이지 않았는데, 이 기간 동안 주요 반란군은 다음과 같았다.반란 주도자 | 근거지 | 비고 |
---|---|---|
선우수례(鮮于修禮) | 정주(定州, 대략 오늘날의 바오딩, 허베이성) | 선우수례 사후 그의 장군 갈영(葛榮)이 권력을 잡고 제나라 황제 자칭 |
남제 명제의 아들 소보인 | 장안 | 남제 재건 시도 |
형고(邢杲) | 북해 (대략 오늘날의 웨이팡, 산둥성) | |
만사추노(万俟醜奴) | 고평(高平, 대략 오늘날의 구위안, 닝샤성) |
영태후는 총명하고 결단력이 있었지만, 사치와 향락을 일삼고 권력을 남용하여 북위 쇠퇴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3]
영태후는 여남왕 원열이 자신의 빈(嬪)들을 자주 매질하자, 빈에 대한 매질을 금지하는 영을 내렸다. 또한 여러 왕의 정실 부인 중 백일 이상 앓고 있는 자는 모두 보고하도록 정했으며, 여러 왕들 중에서 더 심하게 매질하는 자는 작위를 삭탈하겠다고 선언했다.[5] 영태후 사후, 고환이 이주씨를 격파한 후 황후의 예로 장례가 치러지고 '영(靈)'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
서적
Book of Wei
528-05-17
영태후는 이러한 반란군에 맞서 여러 장군을 보냈지만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소보인은 부하들에게 패해 만사추노에게 도망쳐야 했으며, 다른 주요 반란군은 북위 장군에게 패하지 않았다. 상황을 악화시킨 것은 영태후가 반군의 성공 소식을 듣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측근들이 종종 좋은 소식을 꾸며내어 영태후가 장군들의 증원 요청을 거절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여러 차례 효명제는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반란군에 맞서 싸우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한편, 이러한 북위의 내부 문제 동안, 양나라는 수양을 포함한 여러 국경 도시를 점령함으로써 이점을 얻었다.[3]
528년, 반비(潘妃)는 효명제에게 딸을 낳았다. 그러나 영태후는 반비의 아이가 아들이라고 거짓으로 선언하고 대사면령을 내렸다.
이 무렵, 18세의 효명제는 어머니가 국정에 대해 갖는 지배력에 지쳐 있었고, 정엄과 서흘을 더욱 경멸했다. 그래서 효명제는 병주 (현재 산시성 중부) 주변 지역을 통제하는 장군 이주영에게 밀사를 보내 영태후에게 정엄과 서흘을 제거하도록 강요하기 위해 낙양으로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이주영이 상당(上黨, 현재 산시성 창즈)으로 진격한 후, 효명제는 갑자기 마음을 바꿔 그를 멈추라고 밀사를 보냈지만, 소식이 새어나갔다. 정엄과 서흘은 영태후에게 효명제를 독살하라고 조언했고, 영태후는 그렇게 했다. 처음에는 반비가 낳은 효명제의 "아들"이 황위를 계승할 것이라고 발표한 후, 그 "아들"이 실제로는 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대신 2세의 임조왕 원보휘(元寶暉)의 아들 원조를 효명제의 계승자로 선택했다.[3]
이러한 잦은 폐립은 천하를 뒤흔들기에 충분했고, 이주영은 그 기만을 의심하여 거병했다. 불과 15일 만에 경사 낙양을 함락시키고, 원조와 영태후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새로 장락왕 원자유(효장제)를 황제로 옹립했다. 이주영은 원조와 영태후를 연행하여 하음으로 보내 황하에 수장시켰다(하음의 변).[3]
3. 평가
그녀는 섭정 기간 동안 뤄양에 웅장한 사찰을 세우는 등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그러나 관료들에게 과도한 포상을 하여 국고를 고갈시켰고, 각 지방에 부처에게 헌정하는 탑을 건설하라는 명령으로 백성들의 부담이 커졌다.[3]
519년, 군인들이 문관이 되는 것을 금지하는 정책에 반발하여 뤄양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영태후는 폭동 주동자들을 처형했지만, 나머지는 사면하고 정책 변경은 거부했다. 이 사건은 북위 혼란의 시작으로 여겨진다.[3]
영태후는 효명제의 숙부 칭허왕 위안이와 강제로 관계를 맺고, 연인 정엄에게 막강한 권력을 허락하는 등 문란한 사생활로 비판받았다. 또한 효명제 독살에 관여했다는 의혹은 그녀의 이미지에 치명적인 오점으로 남아있다.[3]
4. 가족 관계
5. 기타
참조
[2]
서적
The Empire of the Steppes
https://archive.org/[...]
Rutgers University Press
[3]
서적
Book of Wei
[4]
서적
魏書
[5]
서적
魏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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