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헤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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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빌 헤이든(1933–2023)은 호주의 정치인으로, 사회보장부 장관, 재무부 장관, 야당 대표, 외교통상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1989년부터 1996년까지 호주 총독을 지냈다. 그는 1961년 연방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정계에 입문했으며, 휘틀람 정부에서 사회보장부 장관과 재무부 장관을 지냈다. 1977년 노동당 대표가 되었고, 1983년 호크 정부에서 외교통상부 장관을 역임하며 아시아 국가와의 관계 증진에 힘썼다. 호주 총독 퇴임 후에도 사회 문제에 대한 논평을 이어갔으며, 2023년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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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 왓슨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정치인으로, 노동당 정부의 초대 총리를 역임했으며, 노동당 지도자로서 당의 지위를 향상시키고 캔버라를 수도로 정하는 데 기여했다. - 오스트레일리아의 재무장관 - 윌리엄 맥마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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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헤이든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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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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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윌리엄 조지 헤이든 |
출생일 | 1933년 1월 23일 |
출생지 | 스프링힐, 퀸즐랜드주 |
사망일 | 2023년 10월 21일 |
사망지 | 퀸즐랜드주 |
자녀 | 4명 |
소속 정당 | 노동당 |
학력 | 브리즈번 주립 고등학교 |
모교 | 퀸즐랜드 대학교 |
직업 | 경찰관 (퀸즐랜드 경찰) |
직함 | 정치인 |
경력 | |
제21대 오스트레일리아 총독 | 시작: 1989년 2월 16일 종료: 1996년 2월 16일 |
군주 | 엘리자베스 2세 |
총리 | |
이전 총독 | 경 니니안 스티븐 |
다음 총독 | 경 윌리엄 딘 |
오스트레일리아 야당 대표 | 시작: 1977년 12월 22일 종료: 1983년 2월 8일 |
총리 | 맬컴 프레이저 |
부대표 | 라이오넬 보웬 |
이전 대표 | 고프 휘틀럼 |
다음 대표 | 밥 호크 |
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당 대표 | 시작: 1977년 12월 22일 종료: 1983년 2월 8일 |
부대표 | 라이오넬 보웬 |
이전 대표 | 고프 휘틀럼 |
다음 대표 | 밥 호크 |
오스트레일리아 외무부 장관 | 시작: 1983년 3월 11일 종료: 1988년 8월 17일 |
총리 | 밥 호크 |
이전 장관 | 토니 스트리트 |
다음 장관 | 개러스 에반스 |
오스트레일리아 재무장관 | 시작: 1975년 6월 6일 종료: 1975년 11월 11일 |
총리 | 고프 휘틀럼 |
이전 장관 | 짐 케언스 |
다음 장관 | 필립 린치 |
오스트레일리아 사회 보장부 장관 | 시작: 1972년 12월 19일 종료: 1975년 6월 6일 |
총리 | 고프 휘틀럼 |
이전 장관 | 랜스 버나드 |
다음 장관 | 존 휠던 |
옥슬리 선거구 의원 | 시작: 1961년 12월 9일 종료: 1988년 8월 17일 |
이전 의원 | 도널드 캐머런 |
다음 의원 | 레스 스콧 |
서훈 | |
외부 링크 | |
웹사이트 | AustralianPolitics.com |
2. 초기 생애 및 교육
빌 헤이든은 1933년 1월 23일 퀸즐랜드주 브리즈번의 레이디 보웬 출산 병원에서 미국인 선원 아버지와 아일랜드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그가 태어난 지 몇 주 후에 결혼했다. 그는 남동생 한 명과 여동생 두 명, 그리고 그의 어머니의 첫 결혼에서 태어난 이복 형이 있었는데, 이복 형은 이모가 키웠다. 그의 부모는 모두 전에 결혼했었고, 그 결혼은 사별로 끝났다.
헤이든은 아버지의 사망 이후 1953년 퀸즐랜드 경찰에 입대했다. 브리즈번에서 훈련을 마친 후 이듬해 노스 퀸즐랜드의 매케이로 전출되었으며, 잠시 캘런과 사리나와 같은 작은 시골 마을에 배치되었다. 그는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부양하기 위해 우유 트럭 운전과 농촌 지역의 다양한 계절별 일자리를 포함해 두 번째 풀타임 직업을 가졌다. 1956년, 브리즈번으로 다시 전출되어 형사수사대(CIB)에서 사복 경찰로 일했다. 나중에 로마 스트리트의 경찰 본부로 이동하여 퀸즐랜드 주지사를 경호하는 정부 청사에 배치되었다. 1957년 입스위치 외곽에 있는 레드뱅크의 2인 경찰서로 다시 전출되었다.
헤이든의 아버지는 미국인 선원이었다. 그는 아마도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났으며, 제1차 세계 대전 몇 년 전에 시드니에서 배에서 탈출했다. 그는 피아노 조율사 겸 악기 판매원으로 일했고, 1920년대 초에 퀸즐랜드주 록햄프턴으로 이사했다. 그는 급진적인 정치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세계산업노동자연맹의 회원이었다. 헤이든의 어머니는 아일랜드계 노동자 계급 가정에서 퀸즐랜드주 브랜든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첫 남편인 양털 깎이가 사망한 후 록햄프턴에서 바텐더로 일했다. 그 부부는 호주 대공황 동안 브리즈번으로 이사했다.
헤이든은 가족이 퀸즐랜드주 하이게이트 힐의 노동자 계급 지역에 있는 임대용 별장으로 이사하기 전, 퀸즐랜드주 포티튜드 밸리의 하숙집에서 첫 해를 보냈다. 그의 아버지가 1941년에 군대에 입대하면서 가족은 재정적으로 더 안정되었다. 그는 퀸즐랜드주 사우스 브리즈번에 있는 세인트 이타스 가톨릭 초등학교에서 교육을 시작했지만, 학교에서 그의 아버지의 학교 피아노 조율 계약을 철회했을 때 학교에서 나왔다. 그는 더튼 파크 주립학교로 전학했고, 나중에 자신이 받은 교육의 질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헤이든은 사우스 브리즈번 중학교에 진학하여 1947년에 주 장학금 시험에 합격했다. 이를 통해 그는 1948년과 1949년에 브리즈번 주립 고등학교에서 중등 교육을 마칠 수 있었다. 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주 정부 상점에서 주니어 사무원으로 일자리를 얻었고, 경찰에 입대할 때까지 그곳에서 일했다. 그는 18세 때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공군에 입대하려다 실패한 후, ''1951년 국가 봉사법''이 통과된 후 6개월 동안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해군에 징집되었다.
20세에 퀸즐랜드 경찰에 입문하여 근무하면서 독학으로 퀸즐랜드 대학교에서 경제학 학위를 취득했다.
3. 경찰관 경력 (1953-1961)
4. 정치 경력 (1961-1988)
젊은 시절 헤이든은 극좌적 견해를 가졌으며 호주 공산당에 가입하려 했지만 경찰과의 연줄 때문에 거부당했다. 그는 1953년 사우스 브리즈번에서 처음으로 호주 노동당에 가입하려 했지만, 1950년대 중반의 호주 노동당 분열과 관련하여 의심을 받기도 했다. 그는 결국 1957년 노동당 레드뱅크 지부에 가입했다. 헤이든은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당원이 되었으며, 퀸즐랜드 노동당을 장악한 좌파 트레이드 홀 파벌과 긴밀히 연대했다". 그는 브레머 주의 선거 집행 위원회 서기가 되었고, 옥슬리 연방 선거구의 분과 집행 위원회 회장이 되었다. 1960년, 그는 대학 진학을 목표로 성인 입학 자격 시험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그는 또한 브리즈번 트레이드 홀에서 맥스 폴터가 진행하는 정치학 강의에 참석했다.
1960년 10월, 헤이든은 트레이드 홀 후보로 호주 노동자 연합(AWU) 후보 버트 워렌을 상대로 옥슬리 연방 선거구의 노동당 사전 선출에서 승리했다. 1961년 연방 선거에서 그는 현직 호주 자유당 하원의원이자 내각 장관인 도널드 캐머런을 예상외로 꺾고, 11% 포인트의 변동으로 53%의 득표율을 얻었다. 헤이든의 승리는 노동당으로 15석이 이동하는 현상의 일부였으며, 이는 멘지스 정부를 붕괴 직전까지 몰고 갔다.
노동당 가입에 대한 초기 반대를 극복하고, 헤이든은 곧 연방 의회 최연소 의원 중 한 명으로 대중적인 선출을 받았다(당시 28세). 그는 성실하고 말을 잘하는 국회의원으로 드러났다.[2] 1969년, 그는 야당 전열에 합류했다.[3]
=== 휘틀람 정부 (1972-1975) ===
1972년 고프 휘틀람 정부에서 사회보장부 장관으로 임명된 빌 헤이든은 미혼모 연금과 오스트레일리아 최초의 보편적 건강 보험 시스템인 메디뱅크 도입을 주도했다.[4] 1975년 6월 6일, 짐 케언스의 뒤를 이어 재무부 장관이 되었으나,[4] 같은 해 11월 11일, 휘틀람 정부가 총독 존 커 경에 의해 해임되면서 물러났다.[4] 이후 치러진 선거에서 노동당은 최악의 패배를 겪었고, 헤이든은 퀸즐랜드 출신의 유일한 노동당 국회의원으로 남게 되었다.[4]
=== 야당 대표 (1977-1983) ===
1977년 오스트레일리아 연방 선거에서 노동당이 재차 패배한 후, 고프 휘틀람은 당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1977년 12월 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당 대표 선거에서 빌 헤이든은 라이오넬 보웬을 꺾고 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당시 45세가 채 되지 않았던 헤이든은 1901년 크리스 왓슨 이후 노동당 대표로 선출된 최연소 인물이었다.
1980년 오스트레일리아 연방 선거에서 노동당은 양당 지지율에서 프레이저 정부에 0.8% 뒤졌지만, 전국적으로 4% 이상의 득표율을 올렸다. 그러나 지역별 득표율 불균형으로 인해, 노동당은 집권에 필요한 의석 확보에는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이든은 1975년과 1977년의 참패로 잃었던 의석을 상당 부분 회복하며 프레이저의 과반수를 줄이는 성과를 거두었다.
1982년, 밥 호크가 헤이든의 리더십에 도전하면서 당내 갈등이 심화되었다. 1982년 7월 당내 투표에서 헤이든은 간신히 호크를 물리쳤지만, 호크는 계속해서 헤이든의 입지를 약화시켰다.[5] 결국 1983년 2월 3일, 헤이든은 주요 당 인사들의 압력으로 사임을 결정했고,[5][7] 호크가 새로운 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같은 날, 맬컴 프레이저 총리는 1983년 오스트레일리아 연방 선거 실시를 발표했다. 헤이든은 기자 회견에서 "나라가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목동의 개라도 노동당을 승리로 이끌 수 있을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8]
=== 외교통상부 장관 (1983-1988) ===
노동당은 1983년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고, 헤이든은 외교통상부 장관이 되었다.[10][11] 그는 호주와 아시아 인접 국가 간의 더 긴밀한 통합을 옹호했다. 1983년 인터뷰에서 그는 "호주는 변화하고 있습니다. ... 제 생각에는 호주는 다음 세기나 두 세기 안에 유라시아 국가가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10][11]
외무부 장관으로서 헤이든은 호주 대외 원조 프로그램을 감독했다.[12] 그는 동맹국과 주요 이해 관계자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참여시키기 위한 노력을 추구했다. 1983년, 헤이든은 호주 대외 원조 프로그램에 대한 검토(의장인 고든 잭슨 경의 이름을 따서 "잭슨 검토"로 알려짐)를 발표했고, 1984년 3월에 보고되었다.[12] 호주 원조 프로그램의 전문적인 질을 개선하는 데 중점을 둔 이 보고서의 주요 권고 사항은 정부에 의해 수용되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헤이든은 여러 연설에서 정부의 대외 원조 우선 순위를 제시했다.[13] 198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수교훈장 광화장을 받았다.
4. 1. 휘틀람 정부 (1972-1975)
1972년 고프 휘틀람 정부에서 사회보장부 장관으로 임명된 빌 헤이든은 미혼모 연금과 오스트레일리아 최초의 보편적 건강 보험 시스템인 메디뱅크 도입을 주도했다.[4] 1975년 6월 6일, 짐 케언스의 뒤를 이어 재무부 장관이 되었으나,[4] 같은 해 11월 11일, 휘틀람 정부가 총독 존 커 경에 의해 해임되면서 물러났다.[4] 이후 치러진 선거에서 노동당은 최악의 패배를 겪었고, 헤이든은 퀸즐랜드 출신의 유일한 노동당 국회의원으로 남게 되었다.[4]
4. 2. 야당 대표 (1977-1983)
1977년 오스트레일리아 연방 선거에서 노동당이 재차 패배한 후, 고프 휘틀람은 당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1977년 12월 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당 대표 선거에서 빌 헤이든은 라이오넬 보웬을 꺾고 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당시 45세가 채 되지 않았던 헤이든은 1901년 크리스 왓슨 이후 노동당 대표로 선출된 최연소 인물이었다.
1980년 오스트레일리아 연방 선거에서 노동당은 양당 지지율에서 프레이저 정부에 0.8% 뒤졌지만, 전국적으로 4% 이상의 득표율을 올렸다. 그러나 지역별 득표율 불균형으로 인해, 노동당은 집권에 필요한 의석 확보에는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이든은 1975년과 1977년의 참패로 잃었던 의석을 상당 부분 회복하며 프레이저의 과반수를 줄이는 성과를 거두었다.
1982년, 밥 호크가 헤이든의 리더십에 도전하면서 당내 갈등이 심화되었다. 1982년 7월 당내 투표에서 헤이든은 간신히 호크를 물리쳤지만, 호크는 계속해서 헤이든의 입지를 약화시켰다.[5] 결국 1983년 2월 3일, 헤이든은 주요 당 인사들의 압력으로 사임을 결정했고,[5][7] 호크가 새로운 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같은 날, 맬컴 프레이저 총리는 1983년 오스트레일리아 연방 선거 실시를 발표했다. 헤이든은 기자 회견에서 "나라가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목동의 개라도 노동당을 승리로 이끌 수 있을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8]
4. 3. 외교통상부 장관 (1983-1988)
노동당은 1983년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고, 헤이든은 외교통상부 장관이 되었다.[10][11] 그는 호주와 아시아 인접 국가 간의 더 긴밀한 통합을 옹호했다. 1983년 인터뷰에서 그는 "호주는 변화하고 있습니다. ... 제 생각에는 호주는 다음 세기나 두 세기 안에 유라시아 국가가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10][11]
외무부 장관으로서 헤이든은 호주 대외 원조 프로그램을 감독했다.[12] 그는 동맹국과 주요 이해 관계자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참여시키기 위한 노력을 추구했다. 1983년, 헤이든은 호주 대외 원조 프로그램에 대한 검토(의장인 고든 잭슨 경의 이름을 따서 "잭슨 검토"로 알려짐)를 발표했고, 1984년 3월에 보고되었다.[12] 호주 원조 프로그램의 전문적인 질을 개선하는 데 중점을 둔 이 보고서의 주요 권고 사항은 정부에 의해 수용되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헤이든은 여러 연설에서 정부의 대외 원조 우선 순위를 제시했다.[13] 1987년 한국 정부로부터 수교훈장 광화장을 받았다.
5. 오스트레일리아 총독 (1989-1996)
1987년 오스트레일리아 연방 선거에서 승리한 후, 총리 밥 호크는 오스트레일리아 여왕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헤이든을 오스트레일리아 총독으로 임명하는 것을 승인했다고 발표했다.[14] 여왕은 나이니아 스티븐 경의 후임으로 헤이든을 총독으로 임명했는데, 이는 1988년 중반에 발표되었다.[14] 이후 몇 달 동안 헤이든은 의회에서 사임하고 노동당과의 정치적 관계를 끊었다. 그는 1989년 초에 총독직을 맡았으며, 1991년 12월 호크 정부에서 폴 키팅 정부로의 전환기에 봉사했다.[15][16] 일반적인 총독 임기는 5년이었지만, 그의 임기는 정부와 헤이든 간의 합의에 따라 1996년 초까지 2년 더 연장되었다.[15][16]
총독으로 임명되면서 그는 당연직으로 오스트레일리아 훈장의 총장 및 수석 동반자가 되었다.[17]
다른 총독들은 오스트레일리아 스카우트 연맹에 의해 오스트레일리아의 최고 스카우트로 임명되었지만,[18] 헤이든은 무신론자였기 때문에 스카우트 맹세와 양립할 수 없어 이를 거절했다.[19] 대신, 오스트레일리아 스카우트 연맹은 그를 전국 후원자로 임명했다.
6. 총독 퇴임 이후 및 사망
빌 헤이든은 총독 퇴임 후에도 오스트레일리아의 공공 정책 논의에 지속적으로 참여했다.[23] ''쿼드런트'' 이사회에 재직하면서 개인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2008년 편집장 P.P. 맥기니스의 사망에 대한 추모 글을 썼다.[22] 또한 외교 문제를 포함한 현재의 사회, 경제 및 정치 문제에 관해 오스트레일리아의 다른 잡지와 신문에 기고 및 논평을 계속했다.[23] 1999년 공화국 국민투표를 앞두고 대통령 직접 선거를 지지했다.[21]
90세의 나이로, 오랜 투병 끝에 2023년 10월 21일 퀸즐랜드에서 사망했다.[26][27] 이는 고프 휘틀람의 사망 9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의 죽음에 대해 앤서니 앨버니지 총리는 헤이든을 국장으로 기릴 것이라고 발표하며 애도했다.[28][29][30]
7. 개인사
빌 헤이든은 1960년 5월 아이ps위치 출신 광부의 딸인 댈러스 브로드풋과 결혼했다.[24] 부부는 세 딸과 아들 한 명을 두었다. 이들은 처음에 딘모어의 임대 코티지에서 살다가 아이ps위치 서부 교외에 집을 지었다. 장녀 미카엘라는 1966년 다섯 살의 나이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24]
8. 서훈
빌 헤이든은 총독직을 수행하면서 오스트레일리아 훈장 컴패니언(AC)을 역임했다.[15] 1990년 퀸즐랜드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성 요한 기사단 호주 지부 훈장과 대한민국 수교훈장 광화장을 수여받았다.[33] 1999년에는 라트비아로부터 세 별 훈장 3등급을 수여받았다.[32]
9. 기타
빌 헤이든은 총독직을 수행하면서 호주 훈장의 총장 및 수석 동반자(AC)를 역임했다.[15] 1999년에는 라트비아로부터 세 별 훈장 3등급을 수여받았다.[32]
1990년 퀸즐랜드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성 요한 기사단 호주 지부 훈장과 한국 수교훈장 광화장을 수여받았다.[33]
1996년 호주 인본주의자 협의회로부터 올해의 호주 인본주의자로 선정되었다.[34] 2007년 호주 노동당 퀸즐랜드 지부 제45차 주 대회에서 당의 종신 회원이 되었다.
2017년 9월, 전 호주 총리 폴 키팅은 남퀸즐랜드 대학교에서 열린 두 번째 헤이든 연설에서 헤이든의 노동당 기여에 대해 연설했다. 키팅은 1980년대 호크 노동당 정부의 개혁이 헤이든이 야당 대표를 맡았던 시기에 마련되었다고 언급하며 "그 위대한 개혁은 빌 헤이든이 노동당 대표가 된 날, 전선에 내놓았던 틀에서 시작되었다."라고 말했다.[35]
10. 헤이든 기념 강연 (Hayden Oration)
퀸즐랜드주 노동당 정치인 제니퍼 하워드가 후원하는 연례 빌 헤이든 기념 강연인 헤이든 강연(Hayden Oration)은 빌 헤이든을 기리기 위해 2016년에 제정되었다. 2017년 제2회 강연에서는 폴 키팅 전 총리가 헤이든의 노동당 기여에 대해 연설했다.
헤이든 강연 시리즈에서 열린 강연은 다음과 같다.
- '''2016''' [https://www.brisbanetimes.com.au/national/queensland/beattie-treasurer-slams-celebrity-politicians-culture-in-bill-hayden-oration-20160815-gqspli.html 제1회 연설], 데이비드 해밀, 8월 14일
- '''2017''' [http://www.keating.org.au/shop/item/the-hayden-oration 제2회 연설], 폴 키팅, 9월 29일
- '''2018''' [http://johnmenadue.com/wp-content/uploads/2018/08/Hayden-Oration-copy-4.pdf 제3회 연설], 닐 블루엣, 8월 15일
- '''2019''' [https://ipswichnewstoday.com.au/news/2023/10/25/federal-treasurer-set-to-speak-in-ipswich/ 제4회 연설], 수잔 라이언, 9월 6일
- 2020–2022 미개최
- '''2023''' 제5회 연설, 짐 찰머스, 11월 10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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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Living Former Members Of The House Of Representatives (1949–1972)
https://australianpo[...]
[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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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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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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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australia[...]
Pymble N.S.W.: Angus & Robertson
2010-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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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inders fallout
The Australian Financial Review
1982-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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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ittle General' who had to drop a friend
The Age
1983-02-0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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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tements from Hayden Bowen, Hawke
http://nla.gov.au/nl[...]
2018-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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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Drover's dog couldn't win this time: Hayden
https://www.qt.com.a[...]
2013-08-26
[10]
간행물
Asiaweek
1983-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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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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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간행물
Report of the Committee to Review the Australian Overseas Aid Pro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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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cy and Economics of Foreign Aid
198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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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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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Governor-General's Role
http://www.gg.gov.au[...]
2018-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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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vernor-General's Ro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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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ef Sc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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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ef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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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stralian League of Righ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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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Anti-republican cause recruits Bill Hay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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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Republicans call for the real Bill Hayden to stand up in the No referendum c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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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stralian Republican Movement
1999-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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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kingman's friend
http://www.theaustra[...]
The Australian
2008-01-2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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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ll Hayden Wife How Did Dallas Hayden Shape His Jour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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