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맥마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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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윌리엄 맥마흔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정치인으로, 시드니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변호사로 활동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후 정치에 입문하여 1949년 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로버트 멘지스 정부에서 여러 장관직을 역임했으며, 1966년 자유당 부대표, 1971년 총리에 취임했다. 그러나 1972년 총선에서 패배하여 총리직에서 물러났고, 이후 하원 의원으로 활동하다 1982년 정계를 은퇴했다. 그는 종종 오스트레일리아 역사상 최악의 총리 중 한 명으로 평가받지만, 경제 정책에 대한 숙련도와 긍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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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맥마흔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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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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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칭 접두사 | 존경하는 분 |
이름 | 윌리엄 맥마흔 경 |
출생명 | 윌리엄 맥마흔 |
출생지 | 레드펀, 뉴사우스웨일스주, 오스트레일리아 |
사망지 | 포츠 포인트, 오스트레일리아 |
자녀 | 3명, 줄리언 포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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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자유 |
모교 | 시드니 대학교 |
직업 | 변호사 |
군사 경력 | |
복무 | 오스트레일리아 제국군 |
복무 기간 | 1940–1945 |
계급 | 소령 |
부대 | 제6사단 |
참전 전투 | 제2차 세계 대전 |
의회 경력 | |
선거구 | 로 |
의원 | 오스트레일리아 의회 의원 |
임기 시작 | 1949년 12월 10일 |
임기 종료 | 1982년 1월 4일 |
이전 의원 | '선거구 신설' |
다음 의원 | 마이클 마허 |
원로 의원 | 원로 의원 |
임기 시작 | 1980년 9월 20일 |
임기 종료 | 1982년 1월 5일 |
이전 원로 의원 | 클라이드 캐머런 |
다음 원로 의원 | 맬컴 프레이저 |
주요 직책 | |
해군부 장관/공군부 장관 | 해군부 장관 공군부 장관 |
총리 | 로버트 멘지스 |
임기 시작 | 1951년 7월 17일 |
임기 종료 | 1954년 7월 9일 |
이전 장관 | 필립 맥브라이드 |
다음 장관 | 조시아 프랜시스 (해군) 애솔 타운리 (공군) |
사회복지부 장관 | 사회복지부 장관 |
총리 | 로버트 멘지스 |
임기 시작 | 1954년 7월 9일 |
임기 종료 | 1956년 2월 28일 |
이전 장관 | 애솔 타운리 |
다음 장관 | 휴 로버트슨 |
제1차 산업부 장관 | 제1차 산업부 장관 |
총리 | 로버트 멘지스 |
임기 시작 | 1956년 1월 11일 |
임기 종료 | 1958년 12월 10일 |
이전 장관 | 존 맥이웬 |
다음 장관 | 찰스 애더만 |
노동 및 국가 서비스부 장관 | 노동 및 국가 서비스부 장관 |
총리 | 로버트 멘지스 |
임기 시작 | 1958년 12월 10일 |
임기 종료 | 1966년 1월 26일 |
이전 장관 | 애솔 타운리 |
다음 장관 | 휴 로버트슨 |
행정위원회 부통령 | 행정위원회 부통령 |
총리 | 로버트 멘지스 |
임기 시작 | 1964년 6월 10일 |
임기 종료 | 1966년 1월 26일 |
이전 장관 | 빌 스푸너 |
다음 장관 | 앨런 흄 |
재무장관 | 오스트레일리아 재무장관 |
총리 | 해럴드 홀트, 존 맥이웬, 존 고턴 |
임기 시작 | 1966년 1월 26일 |
임기 종료 | 1969년 11월 11일 |
이전 장관 | 해럴드 홀트 |
다음 장관 | 레스 버리 |
외무장관 | 외무장관 |
총리 | 존 고턴, 본인 |
임기 시작 | 1969년 11월 12일 |
임기 종료 | 1971년 3월 22일 |
이전 장관 | 고든 프리드 |
다음 장관 | 레스 버리 |
정당 직책 | |
자유당 부대표 | 자유당 부대표 |
대표 | 해럴드 홀트, 존 고턴 |
임기 시작 | 1966년 1월 20일 |
임기 종료 | 1971년 3월 10일 |
이전 부대표 | 해럴드 홀트 |
다음 부대표 | 존 고턴 |
자유당 대표 | 자유당 대표 |
임기 시작 | 1971년 3월 10일 |
임기 종료 | 1972년 12월 20일 |
이전 대표 | 존 고턴 |
다음 대표 | 빌리 스네든 |
총리 재임 | |
총리 | 오스트레일리아 총리 |
대수 | 20대 |
임기 시작 | 1971년 3월 10일 |
임기 종료 | 1972년 12월 5일 |
군주 | 엘리자베스 2세 |
총독 | 폴 해슬럭 경 |
부총리 | 더그 앤서니 |
이전 총리 | 존 고턴 |
다음 총리 | 고프 휘틀럼 |
2. 초기 생애
윌리엄 맥마흔은 어린 시절을 레드펀에서 보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9살 때인 1917년에 사망했으며, 이후 친척들에게 양육되었다.[6] 그는 가족 구성원들 사이를 오가며 자주 집을 옮겨 다녔고, 켄싱턴, 비크로프트, 고든, 센테니얼 파크 등지에서 잠시 살았다. 맥마흔은 따로 자란 아버지나 형제자매들을 거의 보지 못했다. 그의 형 제임스는 1919년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했다. 삼촌 새뮤얼 월더는 1932년 시드니 시장을 지낸 사업가로, 대리 부모 역할을 했다.
뉴사우스웨일스주 킬라라에 있는 사립학교인 애벗스홀름 칼리지에서 교육을 시작했고, 이후 시드니 그래머 스쿨로 전학했다. 시드니 그래머 스쿨에서 학업적으로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평균 이상의 성적을 거두었다.[8] 그의 동급생 중 한 명은 훗날 총리가 되는 해럴드 홀트였다.
18세 때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상당한 유산을 물려받았다.[6] 입학 시험을 통과하여 1927년 시드니 대학교에 입학, 1930년 법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9] 세인트폴 칼리지에 거주하며 학위보다는 사교 활동에 더 열중했다. 유산을 자유롭게 사용하며 여러 마리의 경주마를 소유했고, 경마에 상당한 금액을 베팅하기도 했다. 앨런 리드는 "그는 칼리지에서 누구보다 실제로 공부를 덜 하고 대학 생활을 마쳤다는 평판을 얻었다"라고 평했다.[10]
성인이 되었을 때 키는 약 1.52m로 작은 체격이었지만, 대학 경량급 복싱 타이틀을 획득하고 시드니 그래머 스쿨 마지막 해에는 헤드 오브 더 리버 경기에 출전하는 등 운동선수로서도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9]
돈 화이팅턴에 따르면, 정치 입문 전 맥마흔의 삶은 "대도시 사교계에서 위치를 차지하고, 긍정적인 야망이나 관심사도 없이, 자신을 즐기는 것 외에는 다른 생각이 없었으며, 타인에 대한 책임감이나 배려심을 느끼게 할 가족 관계도 없는 부유한 젊은이의 무기력하고 게으른 삶"이었다.[11] 대학교 졸업 후 앨런, 앨런 & 헴슬리에서 변호사로 일했고, 1939년에는 주니어 파트너가 되었다.[5] 연방 은행과 뉴사우스웨일스 은행에 배치되면서 경제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10] 변호사로 활동하려 했으나, 부분적인 청력 손실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청력 문제는 평생 동안 지속되었고, 의회 토론을 따라가기 어렵게 만들었지만, 수술과 보청기 사용으로 어느 정도 개선되었다.[12]
1940년 4월 시민군 소위로 임관, 같은 해 10월 제2호주제국군(정규군)으로 전출되었다. 1942년 대위, 1943년 소령으로 진급했다.[13] 청력 손실과 무릎 부상으로 해외 근무는 거부되었다. 전쟁 초기 시드니 해안 방어 부대에 배속되었고,[11] 이후 제2군단 (1942–1943) 및 제2군 (1943–1945) 본부 참모로 복무했다. 1945년 10월 제대했다.[13]
군 복무 후 18개월 동안 유럽과 북미를 여행했다. 전후 유럽 경험은 이후 정치 입문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15] 1947년 시드니 대학교로 돌아가 경제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전 학업 덕분에 2년 일찍 과정을 마쳤으며, 경제학 수업에서 수석을 차지하고 졸업반에서 우수성을 인정받아 두 개의 상을 받았다.[10]
2. 1. 출생 및 가족 배경
윌리엄 맥마흔은 1908년 2월 23일 오스트레일리아 뉴사우스웨일스주 시드니의 레드펀에서 태어났다. 그는 변호사 윌리엄 다니엘 맥마흔과 돛 제조업자의 딸인 메리(결혼 전 성은 월더) 사이에서 태어난 5명의 자녀 중 셋째였다. 그보다 나이 많은 형은 먼저 사망했다.[5] 그의 아버지(가톨릭 신자)는 술을 많이 마시고 상습적인 도박꾼으로 평판이 나빴으며, 그의 어머니(성공회 신자)는 잉글랜드와 아일랜드계였다.[6]맥마흔의 아버지 쪽 할아버지인 제임스 "버티" 맥마흔은 아일랜드 먼스터 주 클레어주에서 태어나 아일랜드 얼스터 주 페르마나 주 출신 메리 코일과 결혼했다. 그는 어린 시절에 오스트레일리아에 도착하여 결국 자신만의 운송 회사를 설립했으며, 이 회사는 시드니에서 가장 큰 회사 중 하나가 되었다. 1914년 그가 사망했을 때 그의 재산은 거의 240000GBP에 달했는데, 당시로서는 엄청난 액수였다.[7]
2. 2. 유년 시절 및 교육
윌리엄 맥마흔은 오스트레일리아 뉴사우스웨일스주 시드니의 레드펀에서 태어났다. 뉴사우스웨일스주 킬라라에 있는 애벗스홀름 칼리지에서 교육을 시작했고, 이후 시드니 그래머 스쿨로 옮겨갔다.[8]시드니 대학교에 입학하여 1930년 법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9] 대학교 졸업 후, 시드니의 대형 로펌인 앨런, 앨런 & 헴슬리에서 변호사로 일했으며, 1939년에는 주니어 파트너가 되었다.[5] 연방 은행과 뉴사우스웨일스 은행에 배치되어 경제학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10] 군 복무 후, 시드니 대학교로 돌아가 경제학 및 공공 행정을 공부했고, 1948년에 경제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경제학 수업에서 수석을 차지했으며, 졸업반에서 우수성을 인정받아 두 개의 상을 받았다.[10]
2. 3. 법조 경력 및 군 복무
시드니 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하고 변호사로 활동했다.[5]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오스트레일리아 육군에 입대하여 소령까지 진급했다.[5]3. 정치 경력
시드니 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된 맥마흔은 제2차 세계 대전에 오스트레일리아 육군에 입대하여 소령까지 승진했다. 전후 경제학 학위를 취득한 그는 1949년 총선에서 하원 의원에 처음 당선되었고, 1951년 로버트 멘지스 정권에서 해군 및 공군 장관을 역임하며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1956년에는 제1차 산업 장관으로 처음 입각했다.
1966년, 맥마흔은 해럴드 홀트 하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자유당 부대표로 선출되었다. 재임 기간 동안 그는 오스트레일리아 재무부 장관이 되었고, 국제 통화 기금 및 아시아 개발 은행에서 임원직을 역임했다.[5]
1967년 12월 홀트가 실종되자 맥마흔이 유력한 후임으로 예상되었으나, 국민당 대표 존 맥이언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맥이언은 맥마흔을 신뢰하지 않았으며, 보호무역주의에 반대하는 맥마흔의 자유 무역 및 규제 완화 정책을 우려했다.
결국 상원의원 존 고튼이 당 대표 선거에서 승리하여 총리가 되었고, 맥마흔은 재무장관으로 남아 재기를 노렸다. 1969년 연방 선거에서 연립 정부는 거의 패배할 뻔했다. 선거 후 맥마흔은 지도부에 대한 도전에 실패했지만 부대표로 재선되었다. 이후 재무장관에서 외무부 장관으로 강등되었다. 존 맥이언은 경선을 앞두고 자신의 당이 맥마흔을 총리로 하는 것에 대한 거부권을 철회하겠다고 발표했다.
1971년 3월, 국방부 장관 맬컴 프레이저가 내각에서 사임하고 고튼을 비난하면서, 고튼은 지도부 경선을 발표했다. 당내 투표는 동률로 끝났고, 고튼은 자발적으로 대표직에서 사임했다. 맥마흔은 이후 대표(그리고 총리)로 선출되었고, 고튼은 부대표로 선출되었다.
총리 취임 당시 63세였던 맥마흔은, 존 매큐언[68]을 제외하고는 최고령 총리였다. 22년간 집권해 온 연합은 점점 지치고 집중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맥마흔은 고프 휘틀럼이 이끄는 노동당을 상대해야 했다. 노동당은 1969년 선거에서 4석 차이로 정부를 이길 뻔했고, 이후 신뢰할 수 있는 차기 정부로 자리매김했다.
맥마흔은 재치 있고 강력한 웅변가인 휘틀럼과의 의회 토론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휘틀럼이 베트남 전쟁을 비판하고 보편적 건강 보험과 같은 급진적인 새 정책을 옹호하면서, 맥마흔은 방어적인 입장에 놓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을 인정해야 한다는 휘틀럼의 주장을 공격했으나,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 발표 후 물러서야 했다. 인플레이션 상승은 건전한 경제 관리자로서의 맥마흔의 평판에 타격을 입혔다. 자유당 내부의 심각한 분열 또한 문제였다.[17]
1971년 6월, 맥마흔은 고튼의 핵 발전 프로그램 계획을 취소했다. 이 프로그램에는 무기급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는 원자로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맥마흔은 이것이 핵무기 비확산 조약의 목표와 모순된다고 생각했다.[18]
1972년, 맥마흔은 법정 총선거를 앞두게 되었다. 노동당은 여론 조사에서 확실한 선두를 달리고 있었고, 맥마흔의 지지율은 28%로 감소했다. 언론은 맥마흔을 심하게 비난했고, 데이비드 버틀러는 맥마흔처럼 "그렇게 철저하게 비판받는" 총리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회상했다. 맥마흔은 "총리처럼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12월 2일 연방 선거에서 연립정부는 8석 차이로 정권에서 밀려났다.[19] 맥마흔은 패배를 인정하며 오스트레일리아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정부의 집권을 끝냈다.
맥마흔은 21년 6개월 동안 끊임없이 장관직을 수행했는데, 이는 오스트레일리아 정부에서 위협받지 않은 기록이다. 조지 피어스 경과 존 맥이웬 경만이 더 오랜 장관 경력을 가졌지만, 그들의 임기는 연속적이지 않았다.
정치 저널리스트 로리 오크스는 맥마흔을 "교활하고, 못되고, 부정직하며, 항상 거짓말을 하고 물건을 훔쳤다"고 묘사하며, 맥마흔이 라디오 방송국에서 녹음기를 훔치려 했던 사건을 언급했다. 오크스는 맥마흔이 "전적으로 가치 없는 인물이었고, 그가 이 나라의 총리였다는 사실은 수치스러운 일이었다"고 결론 내렸다.[20]
맥마흔은 1972년 12월 5일에 총리직을 마쳤다. 그는 즉시 자유당 대표직에서 사임하지 않았지만, 그가 계속 직을 유지할 지지 기반이 없다는 것은 곧 명백해졌다.[21][22] 선거에서 패배한 최초의 총리이자 의석을 유지했음에도 야당 대표로 활동하지 않은 인물이 되었다.
12월 20일, 자유당은 그의 후임으로 빌리 스네든을 선출했다. 과거의 공헌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맥마흔은 스네든의 새로운 섀도 캐비닛에 포함되었다(존 고튼도 마찬가지). 그러나 본인의 요청에 따라 특정 포트폴리오를 배정받지 않았다.[23][24] 1973년 6월 HSV7과의 인터뷰에서 맥마흔은 자유당이 선거에서 패배한 주된 이유가 "우리 당 내의 불충"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징병제를 폐지하지 못한 것, 1971년 예산을 잘못 처리한 것, 그리고 소통 능력이 부족했던 것을 후회한다고 밝혔다.[25]
1974년 선거 이후, 맥마흔은 1951년 이후 처음으로 후위 의석으로 돌아갔다.[26] 1975년 휘틀럼 정부 해산을 앞두고 그는 상원이 예산을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을 강력하게 옹호했다.[27] 그러나 그는 총독 존 커가 총리를 해임한 것은 위헌적인 행동이라고 믿었고, 휘틀럼의 입장이었다면 고등법원에 이의를 제기했을 것이라고 말했다.[28] 맥마흔은 휘틀럼과 여러 장관을 포함한 "대출 사건"의 책임자들이 불법적으로 행동했고 그들의 연루에 대해 기소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대니 샌키(민간인)가 휘틀럼을 상대로 개인 기소를 제기하는 것을 도왔고, 이는 결국 ''샌키 대 휘틀럼''으로 고등법원에 회부되었다. 말콤 프레이저는 커에게 자신의 정부가 전임 정부를 상대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맥마흔의 행동에 좌절했다. 회고록에서 그는 "맥마흔이 속임수를 쓰고 다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하는 일을 막을 수는 없었지만, 내 정부, 즉 내 정부가 개입하지 않도록 확실히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29]
1977년 선거 전에 맥마흔은 선거구 재조정으로 에반스 선거구가 폐지된 존 아벨에게 자유당 후보 경선에서 패했다.[30] 재선된 후 그는 클라이드 캐머런과 함께 하원의 아버지가 되었다.[31] 그는 1980년 선거 이후 단독 하원의 아버지가 되었고, 72세의 나이에 14번째이자 마지막 선거에서 승리했다. 의회에서의 마지막 몇 년 동안 그는 종종 프레이저 정부를 비판했다. 맥마흔은 1982년 1월에 의회를 떠났는데, 이는 1981년 예산에 대한 불만족이 총선 전에 은퇴하기로 결정한 주요 요인이라고 밝혔다.[32] 그는 로우에서 자신의 후임자로 말콤 턴불을 지명했지만,[33] 자유당은 필립 테일러라는 다른 후보를 선택했다. 보궐선거는 9.4%의 지지율 변동으로 노동당이 승리했다.[34]
그는 2010년 케빈 러드가 재선될 때까지 재선된 마지막 전 총리였다.
3. 1. 멘지스 정부 (1949-1966)
1949년 연방 선거에서 자유당 소속으로 신설된 로위 선거구에서 승리하여 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치명적으로 진지하고 끈기 있고 엄청나게 부지런하고 헌신적인 의원"이라는 평판을 얻었다.[15] 1951년 7월, 필립 맥브라이드를 대신하여 해군 장관과 공군 장관을 맡았다. 도널드 하드만의 제안을 승인하고 감독하여 로열 오스트레일리아 공군(RAAF)을 이전의 지역 사령부 시스템이 아닌 기능 사령부 체제로 개편했다.[5]1954년 선거 이후, 애솔 타운리를 대신하여 사회 서비스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56년 1월, 농업 경험이 부족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놀라운 임명으로 여겨진 제1차 산업 장관이 되었다. 국민당 부대표이자 통상 장관인 존 맥이언의 하위 장관이 되었으나, 자신의 부서의 영향력과 독립성을 유지했으며, 맥이언의 뜻에 반하는 여러 각료 회의 제출을 하기도 했다.[16]
1958년 선거 이후 해럴드 홀트를 대신하여 노동 및 국가 서비스 장관으로 승진했다. 20세 남성에 대한 강제 징병을 재도입한 ''국가 봉사법 1964''의 제정과 시행을 감독했다. 오스트레일리아 노동조합 평의회(ACTU) 지도부와 자주 갈등을 겪었지만, 재임 기간 동안 주요 산업 행동은 없었다. 공산당이 통제하는 것으로 알려진 해안 노동자 연맹과 같은 노동조합의 영향력을 줄이려고 시도했다. 1964년, 행정 위원회 부회장이 되었다.[5]
3. 2. 홀트 정부 (1966-1967)
1966년 로버트 멘지스가 은퇴하고 해럴드 홀트가 후임 총리가 되자 자유당 부대표에 취임했다. 홀트 정부에서는 재무 장관을 맡아 3년간 국가 부채를 대폭 감축했다.[69][70][71][72]3. 3. 고튼 정부 (1967-1971)
맥마흔은 존 고튼 정권에서도 재무 장관으로 유임되었으나, 1969년 자유당 당수 선거에서 고튼에게 패배한 후 외무 장관으로 전임했다.[69][70][71][72]3. 4. 총리직 (1971-1972)
맥마흔은 22년간 집권한 후 점점 더 피곤하고 집중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던 연합에 좋지 않은 시기에 총리직을 맡았다. 그의 첫 번째 문제는 존 고턴이었다. 고턴이 자유당 부대표로 선출된 이후, 맥마흔은 그를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 우스꽝스러운 상황은 고턴이 내각에서 정보를 유출하는 장관들과 관련된 문제들을 상세히 기술한 두 개의 기사를 발표했을 때 정점에 이르렀고, 맥마흔은 고턴의 사임을 강요했다.[77] 빌리 스네든이 자유당의 새로운 부대표로 선택되었다. 맥마흔은 고프 휘틀럼이 이끄는 노동당의 부활을 상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노동당은 1969년 정부에서 승리한 4석 이내에 있었고, 그 이후로 신뢰할 수 있는 정부로 자리매김했다. 다음 1년 반 동안 맥마흔은 휘틀럼을 이길 수 없었다. 맥마흔은 재치 있고 강력한 웅변가인 휘틀럼의 의회 토론에서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는 휘틀럼이 점점 인기가 없는 베트남 전쟁을 공격하고 보편적인 건강 보험과 같은 급진적인 새로운 정책을 옹호하면서 자주 방어적인 자신을 발견했다. 전형적인 예로, 맥마흔은 오스트레일리아가 중화인민공화국을 인정해야 한다는 그의 요구에 대해 휘틀럼을 공격했지만,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중국 방문을 발표했을 때 물러서야 했다. 그는 건전한 경제 관리자로서의 그의 명성에 상처를 준 상승하는 인플레이션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 게다가 자유당은 심각한 분열을 보이고 있었는데, 이는 맥마흔이 다음 선거를 기껏해야 2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특히 좋지 않은 시기에 발생했다.[77] 그의 목소리와 외모 또한 텔레비전에서 나쁘게 비춰졌다.1971년 6월, 맥마흔은 고튼의 계획된 원자력 프로그램을 취소했는데, 이 프로그램에는 무기급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는 원자로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그것이 1970년 고튼이 서명하고 1973년 휘틀럼이 비준한 핵확산방지조약의 목표와 모순된다고 생각했다.[78]
맥마흔은 1972년에 법정 총선거를 앞두고 들어갔다. 그때까지, 노동당은 여론 조사에서 확실한 선두를 차지했고 맥마흔의 지지율은 28%로 감소했다. 영국의 심리학자 데이비드 버틀러는 오스트레일리아를 방문했을 때 맥마흔만큼 "포괄적으로 패닉에 빠진" 총리를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언론이 그를 심하게 비난했다. 그때까지, 맥마흔은 단순히 "총리처럼 보이거나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널리 인식되었다. 그는 할 수 있는 한 오래 기다렸지만, 마침내 12월 2일 연방 선거를 소집했다. 선거 운동 동안, 맥마흔은 웨스트민스터 시스템에서 전례가 없는 일부 장관들에 의해 버려졌다. 연립정부는 8석짜리 스윙으로 권력에서 밀려났다.[79] 선거 밤 늦게, 의심할 여지 없이 결과가 나오자, 맥마흔은 패배를 인정하여 오스트레일리아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중단되지 않은 정부 운영을 끝냈다.
맥마흔은 21년 6개월 동안 지속적으로 장관직을 수행했는데, 이는 오스트레일리아 정부에서 위협을 받은 적이 없는 기록이었다. 조지 피어스 경과 존 맥퀸 경만이 전체적으로 더 긴 장관직을 맡았지만, 그들의 임기는 지속되지 않았다.
3. 5. 총리직 이후 (1972-1982)
맥마흔은 1972년 총선에서 패배하여 노동당의 고프 휘틀럼에게 총리직을 넘겨주었지만, 정계에서 바로 은퇴하지 않고 1982년까지 하원의원직을 유지했다.[35] 1975년 휘틀럼 정부 해산에 대해서는 상원의 예산 거부권을 옹호했으며, 총리 해임은 위헌적 행동이라고 주장했다.[35] 프레이저 정부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35]은퇴 후, 맥마흔은 《자유주의적 관점(A Liberal View)》이라는 제목의 회고록 집필을 시도했으나, 6개 출판사에서 거절당했다.[35] 배리 존스와 필립 아담스는 이 회고록이 형편없고 지나치게 상세하다고 평가했다.[35] 1984년, 맥마흔은 연립 정부 대신 밥 호크와 노동당을 지지하며, 연립 정부는 4~5년 동안 정부를 운영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36] 같은 해, 그는 앤드루 피콕의 자유당 지도자 지위가 "매우 취약하다"고 묘사하며, 암묵적으로 존 하워드를 미래의 지도자로 지지했다.[37]
4. 사망
맥마흔은 말년에 피부암과 관련된 수술을 여러 차례 받았다.[81] 1988년 3월 31일 아침, 시드니 파츠포인트에 있는 세인트루크 개인 병원에서 수면 중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노던 교외 화장터에서 화장되었다.[82] 4월 8일에는 시드니 세인트 앤드루 대성당에서 데이비드 페어번의 추도식이 열렸다.[83]
5. 평가
윌리엄 맥마흔은 오스트레일리아 역사상 최악의 총리 중 한 명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2001년 ''오스트레일리아 파이낸셜 리뷰''가 조사한 6명의 역사학자 중 5명이 그를 최악의 총리 5명 안에 포함시켰고,[52] 2004년 ''The Age''가 조사한 8명의 역사학자 중 한 명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맥마흔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트레일리아 최악의 총리로 평가했다.[53]
존 고튼, 더그 앤서니, 맬컴 프레이저, 빌리 스네든 등 동료 정치인들은 맥마흔의 지도력과 성격에 대해 비판적인 평가를 내렸다.[54][55][56] 맥마흔은 언론에 기밀 정보를 유출하는 경향이 있어 "빌리 더 리크(Billy the Leak)"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57]
반면, 고프 휘틀럼은 맥마흔을 "뛰어나게 유능하고 기략이 풍부하며 끈기 있는 정치인"으로 평가하며, 1972년 총선에서 근소한 차이로 패배를 막았던 맥마흔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64]
5. 1. 긍정적 평가
맥마흔은 경제 정책에 대한 숙련도를 인정받았다.[59] 문고 맥컬럼은 그가 지속적인 업적을 남기지 못했지만, 품위 있게 퇴임한 것을 칭찬했다.[62]5. 2. 부정적 평가
Laurie Oakes영어는 맥마흔에 대해 "교활하고, 못되고, 부정직하며, 항상 거짓말을 하고 물건을 훔쳤다"고 묘사했다.[80] 그는 자신의 라디오 방송국 소유권을 주장하며 테이프 녹음기를 훔치려 한 사건을 언급하며, 맥마흔이 "전혀 가치 없는 사람이었고 그가 이 나라의 총리였다는 사실은 수치스러운 일이었다"고 말했다.[80] 존 고튼은 그를 "전적으로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불렀고,[54] 더그 앤서니는 그가 "그 일에 걸맞게 크지 않았다"고 말했다.[55] 말콤 프레이저는 "그는 만족할 줄 모르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고 [...] 부도덕하지는 않았지만, 전혀 비도덕적이었다"고 말했다.[56] 빌리 스네든은 맥마흔을 "음모적이고, 교활하고,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여겼고,[54] 폴 해슬럭은 일기에서 그를 "배신적인 망할 놈"이라고 언급하며 "부정직하고, 교활하고, 정직하지 못하고, 믿을 수 없고, 사소하고, 비겁한" 사람으로 보았다.[57]맥마흔은 언론에 사적이고 기밀 정보를 공개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아 "빌리 더 리크(Billy the Leak)"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많은 언론인과 정치 평론가들에게 호감을 얻지 못했다. 도널드 호른은 그를 "우리가 가졌던 가장 어리석은 총리일지도 모른다"고 불렀고,[55] 피터 라이언은 "맥마흔의 정치 방식은 거짓말과 누설, 공모와 음모, 기만과 배신이었다"고 말했다.[58] 말콤 매커라스는 그가 "실제로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것 외에는 아무런 업적도 없다"고 생각했다.[59] 캔버라 프레스 갤러리에서 50년 이상 근무한 로리 오크스는 맥마흔을 "거짓말쟁이이자 비열한 사람"으로 보고 그가 함께 일했던 최악의 총리로 평가했다.[60] 오크스는 그가 총리가 된 후에도 내각 회의 내용을 계속 누설했고, 한때 녹음기를 훔친 적이 있다고 비난했다.[57]
일부 작가들은 맥마흔이 거의 피할 수 없는 선거 패배에 대해 불공정하게 희생된 유능한 정치인이었다고 주장하며 그의 평판을 옹호하기도 했다.
6. 사생활
1965년, 57세의 맥마흔은 당시 32세였던 소니아 레이첼 홉킨스와 결혼했다. 맥마흔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지 6개월 만에 청혼했다. 결혼식은 3개월 후 세인트 마크 교회에서 열렸으며, 로열 시드니 골프 클럽에서 400명의 하객을 위한 피로연이 이어졌다.[41] 소니아는 남편보다 20년 이상 더 살았으며, 2010년 4월 2일 7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42]
그들은 멜린다, 줄리안, 데보라 세 자녀를 두었다. 줄리안은 배우이자 모델이며, 멜린다와 데보라는 주로 사생활을 유지하며 살고 있다.
그의 생애 동안 그가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자주 돌았다.[43][44][45][46] 맥마흔 부인은 이 의혹을 반복해서 부인했으며,[41] 1970년대의 한 사건으로 "내 빌리는 게이가 아니야 - 소니아가 말하다"라는 타블로이드 신문 헤드라인이 나오기도 했다.[47][48]
맥마흔은 성공회 신자였다. 그는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하지 않았는데, 그의 아버지는 한때 가톨릭 신자였으나 신앙을 잃고 스스로를 "합리주의자"라고 칭했고, 그의 어머니 쪽 가족은 성공회 신자였다.[49] 맥마흔은 10대 시절 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평생 동안 이 분야에 대해 폭넓게 탐독했다. 그는 윌리엄 템플의 저서를 주요한 영향으로 꼽았다.[50] 맥마흔은 자신의 종교적 신념과 정치적 신념의 연관성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한 몇 안 되는 동시대 정치인 중 한 명이었다. 1953년, 그는 오스트레일리아 정치학 연구소에서 강연을 통해 기독교 교리가 의회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를 필요로 한다고 믿는 자신의 신념을 설명했다.[51]
7. 서훈
맥마흔은 1966년 영국 추밀원 의원이 되었고, 1972년 신년 서훈에서 명예 훈위 회원이 되었으며,[65] 1977년 실버 주빌리 및 생일 서훈에서 성 미카엘 및 성 조지 훈장 기사 대십자 훈위를 받았다.[66]
8.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1차 득표율 | 1차 득표수 | 2차 득표율 | 2차 득표수 | 결과 | 당락 |
---|---|---|---|---|---|---|---|---|---|
1949년 선거 | 하원의원 (로우 선거구) | 19대 | 오스트레일리아 자유당 | 52.7% | 20,489표 | colspan="2" style="background-color:lightgrey;" | | 1위 | ![]() | |
1951년 선거 | 하원의원 (로우 선거구) | 20대 | 오스트레일리아 자유당 | 57.8% | 22,276표 | colspan="2" style="background-color:lightgrey;" | | 1위 | ||
1954년 선거 | 하원의원 (로우 선거구) | 21대 | 오스트레일리아 자유당 | 57.8% | 21,380표 | colspan="2" style="background-color:lightgrey;" | | 1위 | ||
1955년 선거 | 하원의원 (로우 선거구) | 22대 | 오스트레일리아 자유당 | 60.3% | 25,080표 | colspan="2" style="background-color:lightgrey;" | | 1위 | ||
1958년 선거 | 하원의원 (로우 선거구) | 23대 | 오스트레일리아 자유당 | 55.6% | 22,239표 | colspan="2" style="background-color:lightgrey;" | | 1위 | ||
1961년 선거 | 하원의원 (로우 선거구) | 24대 | 오스트레일리아 자유당 | 47.8% | 18,472표 | 50.9% | 19,660표 | 1위 | |
1963년 선거 | 하원의원 (로우 선거구) | 25대 | 오스트레일리아 자유당 | 55.6% | 21,714표 | colspan="2" style="background-color:lightgrey;" | | 1위 | ||
1966년 선거 | 하원의원 (로우 선거구) | 26대 | 오스트레일리아 자유당 | 58.5% | 21,595표 | colspan="2" style="background-color:lightgrey;" | | 1위 | ||
1969년 선거 | 하원의원 (로우 선거구) | 27대 | 오스트레일리아 자유당 | 48.2% | 25,317표 | 54.9% | - | 1위 | |
1972년 선거 | 하원의원 (로우 선거구) | 28대 | 오스트레일리아 자유당 | 48.7% | 25,971표 | 53.0% | - | 1위 | |
1974년 선거 | 하원의원 (로우 선거구) | 29대 | 오스트레일리아 자유당 | 51.5% | 29,110표 | colspan="2" style="background-color:lightgrey;" | | 1위 | ||
1975년 선거 | 하원의원 (로우 선거구) | 30대 | 오스트레일리아 자유당 | 57.3% | 32,908표 | colspan="2" style="background-color:lightgrey;" | | 1위 | ||
1977년 선거 | 하원의원 (로우 선거구) | 31대 | 오스트레일리아 자유당 | 52.8% | 35,044표 | colspan="2" style="background-color:lightgrey;" | | 1위 | ||
1980년 선거 | 하원의원 (로우 선거구) | 32대 | 오스트레일리아 자유당 | 48.7% | 31,892표 | 51.1% | 33,416표 | 1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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