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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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자루는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누각으로, 원래 임천 관아의 정문이었던 배산루를 1919년에 옮겨 지으면서 사자루로 이름이 바뀌었다.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로, 팔작지붕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의친왕 이강이 쓴 '사자루' 현판과 '백마장강' 현판이 걸려 있다. 사자루를 옮겨 짓는 과정에서 백제 시대 금동 석가여래 입상이 발견되어 역사적 가치를 더한다. 사자루는 주변 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장소로 활용되며 문화재적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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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루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사자루 정보 | |
이름 | 사자루 (泗泚樓) |
한자 표기 | 泗泚樓 |
국가 | 대한민국 |
위치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부소로 31 (쌍북리) |
google_map | 부여 사자루 |
문화재 정보 | |
유형 | 문화재자료 |
지정 번호 | 99 |
지정일 | 1984년 5월 17일 |
시대 | 조선 시대 |
소유 | 알려지지 않음 |
면적 | 114.9m2 |
수량 | 1동 |
전승지 | 알려지지 않음 |
전승자 | 알려지지 않음 |
문화재청 ID | 31,00990000,34 |
2. 역사
부여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 옛 송월대가 있던 자리에 위치한 누각이다. 원래는 조선 순조 24년(1824) 당시 임천군 군수였던 심노승이 임천 군사리에 세운 관아 정문 '배산루'였다. 1919년, 이 건물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짓고 '''사자루'''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건물을 옮기기 위해 터를 닦는 과정에서 '정지원'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백제 시대의 금동 석가여래 입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2. 1. 건립 배경
조선 순조 24년(1824)에 당시 군수였던 심노승이 임천 군사리에 세운 건물이다. 원래는 조선시대 임천의 관아 정문으로 사용되었으며, 이름은 '배산루'였다. 이후 1919년에 현재 위치인 부여 부소산성 내 송월대 터로 옮겨 지으면서 '''사자루'''라는 새 이름을 얻게 되었다.2. 2. 이전 및 개칭
원래 임천군 군사리에 있던 건물로, 조선 순조 24년(1824) 군수 심노승이 세운 임천 관아의 정문 '배산루'였다. 1919년 현재 위치인 부여 부소산성 내 송월대가 있던 자리로 옮겨 지으면서 '''사자루'''로 이름을 바꾸었다.2. 3. 백제 유물 발견
사자루를 현재 위치로 옮겨 짓기 위해 땅을 고르던 중, '정지원(鄭智遠)'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백제 시대 유물인 금동 석가여래 입상이 발견되었다. 이 발견으로 사자루는 단순한 누각을 넘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장소로 더욱 주목받게 되었다.3. 건축
사자루는 부여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 예전에 달구경을 했다는 송월대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누각이다. 원래 이 건물은 조선 순조 24년(1824)에 당시 임천군 군수였던 심노승이 임천의 군사리에 세운 관아 정문인 배산루였다. 1919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지으면서 '사자루'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이며 팔작지붕 형태를 하고 있다. 건물 앞면에는 의친왕 이강이 쓴 '사자루' 현판이 걸려 있다. 사방이 트여있는 높은 곳에 위치하여 부여의 주변 풍경을 즐기기에 좋은 장소이다. 건물을 옮겨 세우기 위해 땅을 고르는 과정에서 '정지원'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백제 시대의 금동 석가여래 입상이 발견되어 역사적으로도 주목받는 곳이다.
3. 1. 구조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이다. 사방이 개방되어 있으며, 오른편 북쪽 칸에는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3. 2. 지붕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3. 3. 현판
건물 앞면에는 조선 후기 의친왕 이강이 쓴 '사자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백마강 쪽으로는 '백마장강'이라는 현판이 함께 걸려 있다.4. 활용 및 의의
사자루는 부여 부소산성 내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여 주변 경관을 조망하기 좋은 누각으로 활용된다. 본래 조선 시대 임천의 관아 정문이었던 배산루를 1919년 현재 위치로 옮겨 지은 것으로,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문화재적 가치를 지닌다. 또한 건물을 옮기는 과정에서 백제 시대의 금동 석가여래 입상이 발견되어 역사적 의미가 더해진 장소이기도 하다.
4. 1. 경관 조망
부여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사방이 트여 있어 부여의 주변 풍경을 즐길 수 있는 좋은 누각이다. 특히 백마강의 아름다운 경관을 감상하기에 좋다.4. 2. 문화재적 가치
사자루는 본래 조선 순조 24년(1824) 임천군수 심노승이 임천 군사리에 세운 관아 정문인 배산루였다. 1919년, 이 건물을 부여 부소산성 내 가장 높은 곳이자 과거 달맞이를 하던 송월대 터로 옮겨 짓고 '사자루'라는 새 이름을 붙였다. 이로써 사자루는 조선 후기 관아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으로, 사방이 개방되어 있으며 오른편 북쪽 칸에는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설치되었다. 지붕은 팔작지붕 형태이다. 누각 정면에는 조선 후기 왕족인 의친왕 이강이 쓴 '사자루' 현판이 걸려 있고, 백마강 쪽으로는 '백마장강'이라는 현판이 함께 걸려 있다.사자루의 문화재적 가치는 건물 이전 과정에서 발견된 유물로 인해 더욱 높아졌다. 건물을 현재 위치로 옮기기 위해 터를 고르던 중, '정지원'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백제 시대의 금동 석가여래 입상이 출토되었다. 이 발견은 사자루가 자리한 곳이 단순한 경관 조망 지점을 넘어 백제 시대부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장소였음을 시사하며, 건물 자체의 건축사적 가치와 더불어 역사적 중요성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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