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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흥천사 시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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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울 흥천사 시왕도는 1885년 조선 왕실 상궁들의 시주로 제작된 불화로,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0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폭은 시왕과 지옥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19세기 말 서울·경기 지역 시왕도 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뛰어난 묘사, 붉은색과 금의 사용, 왕실 발원 불화로서의 품격을 보여준다. 일부 방제와 내용의 혼동으로 인해 원형 장황 복원이 필요하며, 화계사 시왕도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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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흥천사 시왕도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흥천사 시왕도
국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유형유형문화재
번호423
지정일2018년 2월 8일
주소서울특별시 성북구 흥천사길 29
관리대한불교조계종 흥천사
수량4점

2. 지정 사유

흥천사 시왕도는 조선 왕실의 상궁들이 시주·발원하여 1885년에 제작되었다.[1] 각 인물의 표현, 뛰어난 지옥 묘사, 적색과 풍부한 금의 사용, 각종 기물, 호위신장들의 갑옷에 이르기까지 매우 완성도 높은 왕실발원 불화로서의 품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1]

일부 방제가 누락되거나 그 내용 역시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패널에 오려 붙일 때 그 내용과 순서에 다소 혼동이 있어 후에 재개장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1] 19세기 말 서울·경기지역에서 성행했던 대표적인 시왕도 금이 많이 사용된 당대의 완성도 높은 수준작으로 평가된다.[1]

서울 지역의 시왕도 형식을 대표하는 작품에 속한다는 점에서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1]

3. 규격

흥천사 시왕도는 10폭으로, 각 폭마다 규격이 조금씩 다르다.[1] 1·3왕도는 100×133cm, 99.5×133cm이고, 2·4왕도는 134.5×99.7cm, 134.5×100.5cm이다.[1] 5·7·9왕도는 122.7×70.4cm, 122.7×74.5cm, 122.7×70.8cm이며, 6·8·10왕도는 72.2×122.4cm, 73.2×123.5cm, 72.5×121.5cm이다.[1]

4. 조사 보고서

흥천사 시왕도(1885)는 19세기 말 서울·경기 지역에서 유행했던 대표적인 시왕도의 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보광사 시왕도(1872), 화계사 시왕도(1878), 봉국사 시왕도(1898), 봉원사 시왕도(19세기 말) 등과 유사한 도상을 보여준다.[1]

시왕도는 패널에 오려 붙인 형식으로, 열 명의 왕 중 2~3명을 한 폭에 담은 4폭 형식이다.[1] 지장시왕도를 중심으로 우측(향좌)으로 1왕·3왕도 1폭, 5왕·7왕·9왕도 1폭, 좌측(향우)으로 2왕·4왕도 1폭, 6왕·8왕·10왕도 1폭이 배치되는 것이 원칙이나, 일부 방제가 누락되거나 내용이 일치하지 않아 패널에 오려 붙일 때 순서에 혼동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 즉, 1왕·3왕과 2왕·4왕의 방제가 뒤바뀌고, 5왕인 염라대왕에 제7태산대왕의 방제가 붙어있다.[1] 이는 각 왕의 방제가 각 화면에 쓰인 것이 아니라 두 화면에 걸쳐 쓰여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되며, 원형 장황 복원이 필요하다.[1]

화면 상단에는 시왕을 중심으로 심판 장면이, 하단에는 지옥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1] 시왕이 있는 곳은 성 안쪽, 지옥 형벌을 받는 곳은 성 바깥쪽으로 표현되었으며, 성벽과 구름, 산수, 성문 등으로 장면이 분할되어 조선 후기 시왕도의 특징을 보여준다.[1] 상단에는 병풍을 배경으로 시왕이 의자에 앉아 있고, 주위 난간과 계단 아래에 권속들이 시립하고 있다.[1] 옥졸은 대부분 창과 같은 무기를 들고 있으며, 판관은 복두를 쓰고 傘이나 扇 등을, 동자는 벼루, 두루마리, 책, 천녀는 扇을 들고 있다.[1] 하단은 지옥 형벌 장면으로 채워져 있으며, 각 대왕도 아래 지옥 장면은 다음과 같다.[1]


  • 1왕·3왕도(원래 2왕·4왕): 제1진광대왕의 지옥 내용은 죄인의 온몸에 쇠말뚝을 박는 4왕의 철상지옥(鐵床地獄)이며, 옆에는 방제가 없으나 제2초강대왕의 발설지옥(拔舌地獄)을 묘사했다.[1] 나무에 망자의 머리카락과 손발을 묶고 혀를 길게 뽑아 옥졸이 그 위에서 소에게 쟁기를 매달아 끄는 장면은 입으로 나쁜 업을 지은 중생들이 혀를 뽑히고(발설지옥) 혀 위에서 소가 쟁기질하는 고통(경설지옥, 耕舌地獄)을 받는 제2초강대왕을 묘사한 것이다.[1] 따라서 방제는 각각 2왕·4왕인 초강대왕·오관대왕으로 바꾸어야 한다.[1]
  • 5왕·7왕·9왕도: 제9도시대왕도를 중심으로 좌우에 제7태산대왕도와 제5염라대왕도가 있다.[1] 염라대왕에는 제7태산대왕의 방제가 붙어 있고, 7·9왕도에는 방제가 없다.[1] 제5왕도는 염라대왕의 심판 장면으로, 평소 살생을 일삼는 자의 과보를 업경대(業鏡臺)에 비추어 업보대로 벌을 받는 장면이다.[1] 제7왕도는 망자가 49일째 심판을 받는 태산대왕의 심판 장면과 한빙지옥(寒氷地獄)을 그렸다.[1] 제9왕도는 사후 1년째에 망자를 심판하는 도시대왕의 왕청과 거해지옥(鋸解地獄), 업칭지옥(業秤地獄)을 묘사했다.[1]
  • 2왕·4왕도(원래 1왕·3왕): 향 오른쪽은 제2초강대왕, 향 왼쪽은 제4오관대왕인데, 제2초강대왕에 1왕의 내용인 확탕지옥(鑊湯地獄)을 표현했고, 제4오관대왕에는 3왕의 내용인 검으로 죄인이 죽임을 당하는 장면 등이 그려져 있다.[1] 각 내용으로 미루어 방제는 1왕·3왕인 제1진광대왕·제3송제대왕으로 바꾸어야 한다.[1]
  • 6왕·8왕·10왕도: 제6변성대왕을 중심으로 좌우에 제8평등대왕과 제10오도전륜대왕이 배열되어 있다.[1] 제6변성대왕 아래에는 칼날이 꽂혀 있는 땅인 검수(劍樹)지옥이 묘사되어 있다.[1] 제8평등대왕은 사후 100일째 되는 날 죄복의 업을 심판하며, 철산(鐵山)이라는 큰 바윗덩어리 사이에 죄인을 넣어 압사시키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1] 제10오도전륜대왕 장면은 죽은 후 3년이 되면 마지막으로 심판을 받고 다시 태어날 곳을 결정받는 장면이다.[1] 하단에 육도윤회(六道輪廻)를 상징하는 6줄의 띠가 퍼져나가고, 각 줄에는 축생도, 아귀도, 인간도 등 육도윤회하는 다음 생이 표현되어 있다.[1]


5·7·9왕도와 6·8·10왕도의 화기(畫記)는 배접할 때 일부 잘려졌으나, "삼각산 흥천사 명부전에 봉안되었으며", "상궁이 시주하였다"는 내용은 읽을 수 있다.[1] 특히 "을유(乙酉)"의 "유(酉)"가 남아있어 1885년에 제작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1]

10장면이 담긴 4폭이 모두 남아 있는 시왕도(1885)는 한 군데 찢어진 손상을 제외하면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1] 화계사 시왕도(1878)를 참조하여 원형 장황을 복원할 필요성이 제기된다.[1]

이 시왕도는 상궁들이 참여하여 시주·발원한 작품으로, 금이 많이 사용된 당대 최고 수준의 작품으로 평가된다.[1] 화계사 시왕도는 6·8·10왕도 1폭이 결실되었으나, 흥천사 시왕도는 4폭 모두 남아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1] 각 인물 표현, 뛰어난 지옥 묘사, 붉은색과 풍부한 금의 사용, 각종 기물, 호위신장들의 갑옷 등 매우 정교하고 완성도 높은 왕실 발원 불화의 품격을 보여주며, 조선 말기 서울 지역 시왕도 형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서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1]

4. 1. 구성 및 형식

4. 2. 도상 특징

4. 3. 방제 혼동 및 복원 필요성

시왕도는 패널에 오려 붙인 형식으로, 열 명의 왕 중 2왕 또는 3왕을 한 폭(점)으로 구성한 4폭(점) 형식이다.[1] 지장시왕도를 중심으로 우측(향좌)으로 1왕·3왕도 1폭, 5왕·7왕·9왕도 1폭, 좌측(향우)으로 2왕·4왕도 1폭, 6왕·8왕·10왕도 1폭 등이 배치되는 것이 원칙이나 일부 방제가 누락되거나 그 내용 역시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패널에 오려 붙일 때 그 내용과 순서에 다소 혼동이 있었다고 생각된다.[1]

확인 결과, 1왕·3왕과 2왕·4왕의 방제가 뒤바뀌고 5왕인 염라대왕에는 제7태산대왕의 방제가 붙어있었다.[1] 이는 원래 각 왕의 방제가 각 화면에 쓰여진 것이 아니라 두 화면에 걸쳐있는 것도 있다 보니 판넬에 오려 붙일 때 혼동이 된 것으로 보인다.[1]

  • 1왕·3왕도(원래 2왕·4왕): 제1진광대왕의 지옥 내용은 죄인의 온 몸에 쇠말뚝을 박아 죽이는 4왕의 철상지옥이며, 이 옆은 방제가 없으나 제2초강대왕의 발설지옥을 묘사하였다. 나무에 망자의 머리카락과 손, 발을 묶고 입에서 혀를 길게 뽑아 옥졸이 그 위에서 소에게 쟁기를 매달아 끌고 있다. 이것은 바로 입으로 나쁜 업보를 지은 중생들이 혀를 뽑히고[발설지옥] 혀 위에서 소가 쟁기질하는 고통[경설지옥]을 받는 제2초강대왕을 묘사한 것이다. 따라서 방제는 각기 2왕·4왕인 초강대왕·오관대왕으로 바꾸어 붙여야한다.[1]
  • 5왕·7왕·9왕도: 제9도시대왕도를 중심으로 좌우에 제7태산대왕도와 제5염라대왕도가 나타난바, 염라대왕에는 제7태산대왕의 방제가 붙어있고, 7·9왕도에는 방제가 없다. 제5왕도는 염라대왕의 심판장면으로 평소 살생을 일삼는 자의 과보를 업경대에 비추어, 업보대로 벌을 받는 장면이 표현되어 있다. 제7왕도는 망자가 49일째 심판을 받는 태산대왕의 심판장면과 한빙지옥을 그린 것이다. 긴 칼을 들고 있는 옥졸들이 목에 칼을 쓴 망자들을 데리고 오는 모습과 입에서 찬 기운을 내뿜고 있는 옥졸로 인해 사방이 얼어붙은 곳에서 망자들이 추위에 떠는 장면이 나타나 있다. 제9왕도는 사후 1년째에 망자를 심판하는 도시대왕의 왕청과 거해지옥, 업칭지옥을 묘사하였다. 판관들은 업칭의 양 끝을 잡고 망자의 죄의 무게를 달거나 두루마리를 들고 추를 쳐다 보고 있으며, 그 앞에서 옥졸이 칼을 들고 서있다. 이와 함께 거해지옥에서는 옥졸이 나무판 사이에 망자를 넣고 톱질을 하고 있다.[1]
  • 2·4왕도(원래 1왕·3왕): 향오른쪽은 제2초강대왕, 향왼쪽은 제4오관대왕인데, 제2초강대왕에 1왕의 내용인 확탕지옥을 표현했고, 제4오관대왕에는 3왕의 내용인 검으로 죄인이 죽임을 당하는 장면 등이 그려져 있다. 각 내용으로 미루어 방제는 1왕·3왕인 제1진광대왕·제3송제대왕으로 바꾸어 붙여야한다.[1]
  • 6·8·10왕도: 제6변성대왕을 중심으로 좌우에 제8평등대왕과 제10오도전륜대왕이 배열되어 있다. 제6변성대왕 아래 칼날이 꽂혀있는 땅인 검수지옥이 묘사되어있다. 방제가 없다. 제8평등대왕은 사후 100일째 되는 날 공평하게 죄복의 업을 심판한다. 철산이라는 커다란 바 윗덩어리 사이에 죄인을 넣고서 눌러 압사시키는 장면이 묘사되어있다. 제10오도전륜대왕 장면은 죽은 후 3년이 되면 마지막으로 열 번째의 오도전륜대왕에게 심판을 받은 후 다시 태어날 곳을 결정받는다. 하단에 육도윤회를 상징하는 구름 같은 6줄의 띠가 공중에 퍼져나가고 있는데, 각각의 줄에는 축생도, 아귀도, 인간도 등 육도윤회하는 다음 생이 표현되어있다.[1]


5·7·9왕도와 6·8·10왕도의 화기는 배접할 때 일부 잘려졌으나 “삼각산 흥천사 명부전에 봉안되었으며”, “상궁이 시주하였다”는 내용은 읽을 수 있다.[1] 특히 “을유(乙酉)”의 “유(酉)”가 남아있어 1885년에 제작된 것을 이번 조사에서 새롭게 확인할 수 있었다.[1]

따라서 서울 화계사 시왕도(1878)를 참조하여 원형의 장황을 복원해야할 필요성이 있다.[1]

4. 4. 화기(畵記)

4. 5. 유사 도상

5. 의의 및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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