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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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탈아론은 후쿠자와 유키치가 갑신정변 실패 이후 아시아 국가들을 비판하며 서구 문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 사상이다. 일본은 서구화에 동참하여 '탈아'를 이루어야 하며, 개혁을 거부하는 한국과 중국과는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사상은 일본 내에서 다양한 평가를 받으며, 한국과 중국에서는 침략주의적 시각으로 비판받는다. 탈아론은 일본 제국주의와 연관되어 논쟁의 대상이 되었으며, 오늘날 동아시아 관계에 대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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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아론 | |
---|---|
개요 | |
제목 | 탈아론 |
원제 | 탈아론 (脫亞論) |
발표 연도 | 1885년 |
저자 | 후쿠자와 유키치 |
발표 매체 | 지지신보 |
내용 | |
주요 주장 | 일본은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 열강과 함께해야 한다. |
비판 대상 | 청나라 조선 |
핵심 개념 | 문명개화 아시아 연대 의식 탈피 서구 지향 |
역사적 배경 | |
시대적 상황 |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근대화와 서구 열강의 동아시아 진출 |
관련 사건 | 갑신정변 이후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실망감 |
영향 및 평가 | |
논쟁점 | 일본 제국주의의 사상적 기반 근대화 과정에서의 오리엔탈리즘 극복 문제 동아시아의 연대 가능성 |
긍정적 평가 | 일본 근대화에 기여 |
부정적 평가 | 아시아 침략 정당화 |
기타 정보 | |
관련 인물 | 김옥균 |
관련 사상 | 제국주의 |
2. 주요 내용
〈탈아론〉은 1885년 3월 16일 시사신보에 게재된 사설이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글은, 당시 서구화의 물결 속에서 일본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10]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 서구화의 불가피성: 서구화는 홍역과 같이 피할 수 없는 흐름이며, 문명은 여러 이로운 점을 가져다주므로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 일본의 탈아(脫亞):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하여 정신적으로 아시아를 벗어났다.
- 조선과 청나라에 대한 비판: 조선과 청나라는 근대화를 거부하고 유교 등 구시대적 체제에 머물러 있어, 서구 열강에 의해 분할될 위기에 처해있다.
- 관계 단절의 필요성: 일본은 조선, 청나라와 관계를 단절하고 서구 열강과 같은 방식으로 관계를 맺으며 독자적인 근대화를 추진해야 한다.
글쓴이는 교통 수단의 발달에 따른 서양 문명의 전파를 "문명은 마치 홍역의 유행과 같다"라고 표현하며, 이를 막는 것이 아니라 "그 만연을 돕고, 국민으로 하여금 빨리 그 기풍에 젖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중국과 조선이 근대화를 거부하고 유교 등 구태의연한 체제에 갇혀 "도저히 그 독립을 유지할 길이 없을 것"이라고 비판한다. 갑신정변을 언급하며[6] 양국에서 메이지 유신과 같은 정치 체제 변혁이 일어나길 바라지만, 그렇지 않으면 "지금으로부터 수 년을 넘기지 못하고 망국"이 되어 서양 열강에 분할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서양인들이 중국, 조선과 일본을 동일시하는 것은 "우리 일본국의 일대 불행"이라고 우려하며, 일본은 동아시아의 악우(惡友)인 청국, 조선과 특별한 관계를 맺지 않고, 서구 열강과 같은 방식으로 관계를 맺으며 독자적으로 근대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2. 1. 문명 개화와 서구화
문명 개화는 홍역처럼 퍼져나가 피할 수 없는 흐름으로, 여러 이로운 점을 가져다준다. 따라서 국가는 문명 개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근대화를 이루어야 한다.[1]2. 2. 일본의 탈아(脫亞)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한 국가로 평가받는다. 이 글에서는 일본이 정신적으로 이미 아시아를 벗어났다고 주장한다. 서구화의 바람이 동양으로 불어오는 상황에서, 일본은 문명을 홍역에 비유하며, 이로운 점이 더 많으므로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보았다.일본은 도쿠가와 막부가 문명화를 방해한다고 보고, 막부를 전복하여 메이지 유신을 통해 낡은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얻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이웃 나라인 한국과 중국이 개혁을 하지 못하고 유교적 가르침에 갇혀 위선적이고 뻔뻔하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상황은 일본에게 걸림돌이 되므로, 일본은 이웃의 나쁜 아시아 국가들과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글쓴이는 교통 수단의 발달에 따른 서양 문명의 전파를 "문명은 마치 홍역의 유행과 같다"라고 표현하며, 이를 막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본은 아시아적 가치관에서 벗어나, 즉 '탈아'를 이룬 유일한 국가라고 평가한다.
이웃 나라인 중국과 조선이 근대화를 거부하고 구태의연한 체제에만 급급한 점을 지적하며, 이대로라면 서양 열강에 의해 분할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갑신정변을 언급하며[6], 양국에서 개혁이 일어나 메이지 유신과 같은 정치 체제 변혁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를 우려한다.
서양인들이 중국, 조선과 일본을 동일시하는 상황을 "일본국의 일대 불행"이라고 표현하며, 일본은 독자적으로 근대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즉, 동아시아의 악우(惡友)인 청국, 조선과는 이웃 국가라는 이유로 특별한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서구 열강과 같은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2. 3. 조선과 청나라에 대한 비판
조선과 청나라는 근대화를 거부하고 유교 등 구시대적 체제에 머물러 있다고 비판받는다. 이러한 유교적 가르침은 모두 위선적이고 뻔뻔할 뿐이라고 비난하며,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한다.[6] 이들 국가가 메이지 유신과 같은 정치 체제 변혁을 이루지 못하면, "지금으로부터 수 년을 넘기지 못하고 망국"이 되어 서구 열강에 의해 분할될 것이라고 경고한다.2. 4. 관계 단절의 필요성
일본은 이미 정신적으로 아시아를 벗어났지만, 이웃 나라인 조선과 중국은 개혁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이들 나라의 유교적 가르침은 위선적이며, 서구 열강이 이 세 나라(일본, 조선, 청)를 동일시하는 것은 일본에게 큰 불행이라고 주장한다.[6]나쁜 친구를 사귀면 나쁜 인상을 주듯이, 일본은 이웃의 나쁜 아시아 국가들과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동아시아의 악우(惡友)인 청나라와 조선과는 이웃 국가라는 이유로 특별한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서구 열강과 같은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일본은 독자적으로 근대화를 추진해 나갈 수 있다고 결론짓는다.
3. 탈아론 집필 배경
《탈아론》은 후쿠자와 유키치가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원문은 서명 없는 사설이었다.[61] 1933년 《속후쿠자와 전집〈제2권〉》에 《탈아론》이 수록되면서 후쿠자와가 집필한 사설로 여겨지게 되었다.[61]
1950년 이전에는 《탈아론》에 대한 언급이 발견되지 않았다. 처음 발견된 언급은 1951년 토야마 시게키가 발표한 《청일 전쟁과 후쿠자와 유키치》이다.[62]
"탈아론"은 후쿠자와 유키치가 조선인들이 효과적인 개혁 파벌을 조직하려던 시도가 실패한 것에 대한 반응으로 여겨진다. 후쿠자와는 젊은 조선 귀족들을 자신의 학교에 초대하고, 조선 최초의 유학생인 유길준을 지원했으며, 그의 제자 중 한 명인 김옥균은 갑신정변을 일으켰지만 실패했다. 이러한 실패는 후쿠자와가 "아시아를 떠나다"라는 이념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후쿠자와는 청일 전쟁을 열렬히 지지했는데, 이는 근대화에 대한 그의 생각과 관련이 있었다. 그는 중국이 낡고 변하지 않는 원칙에 얽매여 있다고 믿었다. 또한 일본이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 조약을 견뎌야 하는 상황에서, 군사력을 과시하면 서구의 여론이 조약 개정 쪽으로 기울 것이라고 희망했다.
1885년 3월 16일, 《탈아론》은 신문 『시사신보』에 사설로 게재되었다. 원문은 익명의 사설이었고, 본문은 가타카나 한자 표기였으며, 길이는 400자 원고 용지로 약 6매였다.[10]
3. 1. 후쿠자와 유키치와 조선의 관계
후쿠자와 유키치는 조선의 개화파를 지원하고 조선의 근대화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1881년 6월부터 게이오기주쿠에서 조선 최초의 정식 유학생 유길준을 받아들여 조선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11] 후쿠자와는 유길준을 통해 한글 사용이 조선 근대화와 민중 교화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11]1881년에 조선을 방문한 개화파 김옥균과도 친분을 쌓은 후쿠자와는 『시사소언』을 발표하며 조선의 문화적 변화 필요성을 주장했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조선의 사후 처리를 위해 일본을 방문한 박영효를 정사로 하는 수신사 일행은 후쿠자와를 방문하여 조선 근대화를 위한 인재 알선을 의뢰했다.[12][13]
후쿠자와는 조선 개화의 구체적인 수단 중 하나로 신문 발행에 동의한 수신사에게 게이오기주쿠 출신 인사들을 알선하고, 조선 사정 조사를 위해 이노우에 가쿠고로를 동행시켰다.[14][15] 1883년 조선은 한성순보를 발행했지만, 1884년 갑신정변으로 인해 청의 개입으로 인쇄소가 불타 폐간되었다.[11][16]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후쿠자와가 "아시아를 떠나다"라는 탈아론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지만, 당시 조선의 급진적인 개혁파에 대한 지원은 조선의 완전한 독립보다는 일본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의도였다는 평가도 있다.
3. 2. 갑신정변과 좌절
1884년 김옥균 등이 주도한 갑신정변은 후쿠자와 유키치가 지원하던 조선 개화파의 시도였으나, 청나라의 개입으로 실패했다.[11] 후쿠자와는 이 사건으로 큰 좌절감을 느꼈으며, 이는 "아시아를 떠나다"라는 그의 탈아론 사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갑신정변 이후, 조선에서는 개화파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이루어졌다. 김옥균, 서재필, 서광범 등 개화파 인사들의 삼친 등이 잔혹하게 처형되었다는 소식은 후쿠자와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11] 그는 1885년 2월 23일과 2월 26일 시사신보에 게재된 "조선독립당의 처형(전・후)"이라는 논설을 통해 이러한 현실을 강하게 비판했다.[11]
이러한 후쿠자와의 분노와 좌절감은 탈아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3. 3. 당시의 논설들
후쿠자와 유키치는 김옥균 등 한국 개화파 인사들의 실패를 보면서 "아시아를 떠난다"는 탈아론의 이념을 발전시켰다. 탈아론 게재 전후로 시사신보에는 다음과 같은 논설들이 게재되었다.4. 탈아론에 대한 평가와 논란
《탈아론》은 후쿠자와 유키치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원문은 이름이 없는 사설이었다.[61] 1933년 경응의숙이 펴낸 《속후쿠자와 전집〈제2권〉》에 《탈아론》이 실리면서, 후쿠자와가 집필한 사설로 여겨지게 되었다.[61]
1950년 이전에는 《탈아론》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었다.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1951년 도야마 시게키가 발표한 《청일 전쟁과 후쿠자와 유키치》이다.[62] 2004년, 히라야마 요는 이 논설이 1885년 발표된 이후 1950년대까지 사실상 잊혔다가, 1950년대에 일본 군국주의의 한 예로 인용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2]
"탈아론"은 1885년 발표 당시에는 어떠한 논평도 받지 못했다. 히라야마는 1885년 3월 16일 이후의 ''시지 신보''나, 3월 17일부터 3월 27일 사이의 ''도쿄 요코하마 마이니치 신문'', ''유빈 호치 신문'', ''초야 신문'' 등에서 언급된 내용을 찾지 못했고, 이후 48년간 사실상 잊혔다고 결론지었다. 1933년 7월, 게이오기주쿠는 이 사설을 ''속-후쿠자와 전집'' 제2권에 수록했고, 이후 후쿠자와 유키치가 이 글의 저자로 여겨지게 되었다. 1933년부터 1951년까지는 어떠한 추가적인 논평도 없었다.[2]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이 논설은 여러 책과 논문에서 인용되었다.[2] 1981년 반노 준지는 ''후쿠자와 유키치 선집'' 제7권의 해설에서 "탈아론"이 한국인이 효과적인 정치 개혁 세력을 조직하는 데 실패한 것을 지적하는 내용이라는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다.[2]
1967년 고노 겐지의 ''후쿠자와 유키치—살아있는 사상가''와 가노 마사나오의 ''후쿠자와 유키치''가 출판되면서, "탈아론"은 일본 군국주의의 이론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2]
중국과 한국에서는 "탈아론"이 '''아시아 멸시 및 침략 긍정론'''으로 여겨지며, 후쿠자와 유키치는 '''침략주의자'''로 비판적으로 다루어진다.[25] 이러한 인식은 탈아론이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는 비판으로 이어진다.
4. 1. 일본 내 평가
1951년 도야마 시게키가 "청일 전쟁과 후쿠자와 유키치"에서 "탈아론"에 대한 최초의 언급을 했다.[7][18] "탈아론"이 일반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1960년대이다.[4][19]일본의 초·중등 역사 교과서에서는 "탈아론"을 "일본이 서구 열강에 가까워지기 위해 아시아로부터의 탈피를 주장한 것으로, 일본이 아시아의 1개국임을 부정하고 있다"라고 정의하며, "일본인이 아시아를 멸시하는 근원이 된 탈아입구의 대표적 언설"이라고 가르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갑신정변과 같은 역사적 배경을 가르치지 않아 "탈아론"을 올바르게 해석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견도 있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김옥균 등 조선 개화파의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것에 대한 실망감과 일본·청국 정부·이씨 정권이 각자의 입장에서 갑신정변의 결과를 방관·이용한 것에 대한 초조함에서 "『탈아론』은 후쿠자와의 좌절감과 분노의 폭발로 읽어야 한다"라고 설명한다.[17] 또한, 후쿠자와가 "탈아"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탈아론" 한 편뿐이므로, "탈아"는 후쿠자와의 핵심어가 아니라고 말했다. 나아가 "입구"라는 단어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으므로, "탈아입구"라는 구절도 후쿠자와가 사용하지 않았음을 지적했다. 마루야마는 "탈아입구"라는 구절이 후쿠자와와 연결되어 생각하게 된 것은 1950년대 이후의 일이며, 전전의 후쿠자와 연구에서는 "탈아"나 "탈아입구"라는 어구가 등장하지 않고, "탈아론"도 거의 인용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니시카와 슌사쿠는 "탈아론" 한 편만으로 후쿠자와를 탈아입구주의의 '선구자'로 보는 것은 단견이며, 당시 동아시아 3개국 사이의 상호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견해라고 지적한다.
사카모토 다카오는 갑신정변의 실패와 청국의 강대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탈아론'은 일본이 서양 제국과 동등한 우위에서 아시아 제국에 임하는 상황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조선에 대한 깊은 실망과 강대한 청국에 대한 우려 때문에 쓰인 글이 아닌가"라고 설명한다.
사카노 준지는 후쿠자와의 발언은 당시 국제/국내 경제 상황 인식과 대응하고 있으며, 갑신정변 실패로 상황 인식이 변화하여 "탈아론"이 쓰여졌다고 설명한다. 즉, "탈아론"은 후쿠자와의 조선 개혁파 원조 주장의 패배 선언이며, 아시아 멸시관이나 침략론의 시작이라는 평론은 잘못된 것이라고 해설한다.
기타오카 신이치는 사카노 준지의 "탈아론"을 "후쿠자와의 패배 선언"으로 해석하는 것에 찬동하며, 후쿠자와는 일본이 조선을 독자적으로 문명 개화로 이끌고 특별한 관계를 만들고 싶다는 구상을 단념했다는 것이라고 해설한다.
야스카와 도시노스케는 초기 후쿠자와 사상에도 국권론적 입장이 있기 때문에, "탈아론"이 이전의 후쿠자와 생각과 특별히 다른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또한 헤이트 스피치의 원조라고 하며, 후쿠자와가 메이지 시대 최대 계몽 사상가라는 인식이 퍼진 이유로 마루야마 마사오의 후쿠자와론을 비판한다.
히라야마 히로시는 "탈아론"이 갑신정변과 그 후의 탄압에 대한 영향으로 쓰였다는 것에 주목하여,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언급된 "탈아론" 속 차별적 표현은 일반적인 차별 의식이 아니라 갑신정변의 가혹한 사후 처리에 대한 비판이라고 설명한다.
소설가 시미즈 요시노리는 소설 속에서 "탈아론"을 읽은 문학 탐정의 감상을 통해, 후쿠자와가 일본은 문명국이므로 중국, 조선을 지배해도 된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서양 열강의 야망 속에서 일본의 독립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중국, 조선과 등을 돌려야 한다는 선택이었다고 말한다.
그 외에는 흥아론에 대한 안티테제로 "탈아론"이 발표되었다는 생각도 있다.
4. 2. 중국과 한국의 평가
중국과 한국에서는 「탈아론」이 "'''아시아 멸시 및 침략 긍정론'''"으로 여겨지며, 후쿠자와 유키치는 '''침략주의자'''로 비판적으로 다루어진다.[25] 이러한 인식은 탈아론이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는 비판으로 이어진다.중국의 린스윈은 "[http://toueironsetsu.web.fc2.com/Column/2005/c20050411.htm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을 읽고]"라는 논문에서 탈아론에 대한 중국 내의 이해를 보여준다. 히라야마 히로시는 중국인 연구자들의 후쿠자와 비판이 핫토리 유키시, 토야마 시게키, 야스카와 토시노스케 등 일본 연구자들의 비판을 그대로 반복하는 경향이 있어 다양성이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오가와라 마사미치는 2010년 베이징 대학에서 후쿠자와에 관한 강연을 했을 때, 베이징 대학 교수가 "후쿠자와에게 '탈아론' 외에도 다른 측면이 있군요"라고 놀라움을 표현한 것을 보고 "아연실색했던 일이 있다"고 말했다. 이는 중국 학계에서 탈아론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지배적임을 보여준다.
한국에서는 중앙일보의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가 2005년 11월 25일 칼럼 "일본, 아시아로 돌아가라"[25]에서 탈아론을 비판적으로 다루었다.
4. 3. 탈아론 논쟁의 역사
1933년 경응의숙이 편찬한 《속후쿠자와 전집》에 〈탈아론〉이 수록되면서, 후쿠자와 유키치가 이 글을 쓴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61] 그러나 1950년 이전에는 이 글에 대한 언급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62]1951년 도야마 시게키가 《청일 전쟁과 후쿠자와 유키치》에서 〈탈아론〉을 처음으로 언급하며, 일본 제국주의의 아시아 침략론으로 소개했다.[62][35] 1950년대 이후 〈탈아론〉은 일본 군국주의의 한 예로 인용되기 시작했다.[2]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여러 학자들이 〈탈아론〉을 인용하거나 재수록했다. 주요 연구자와 저작은 다음과 같다.
연도 | 연구자 | 저작 |
---|---|---|
1951년 | 도야마 시게키 | 《일청 전쟁과 후쿠자와 유키치》 |
1952년 | 핫토리 시소 | 《동양에서의 일본의 위치》 |
1953년 | 핫토리 시소 | 《문명 개화》 |
1956년 | 가노 마사나오 | 《일본 근대 사상의 형성》 |
1960년 | 이즈카 고지 | 《아시아 속의 일본》 |
1960년 | 도미타 마사후미, 쓰치하시 슌이치 | 《후쿠자와 유키치 전집》 제10권 |
1961년 | 오카 요시타케 | 《국민적 독립과 국가 이성》 |
1961년 | 다케우치 요시미 | 《일본과 아시아》 |
1963년 | 다케우치 요시미 | 《현대 일본 사상 대계》 제9권 |
1967년에는 고노 겐지의 《후쿠자와 유키치—살아있는 사상가》와 가노 마사나오의 《후쿠자와 유키치》가 출판되어, 〈탈아론〉은 일본 군국주의의 이론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2]
1981년 반노 준지는 《후쿠자와 유키치 선집》 제7권 해설에서 〈탈아론〉이 한국인이 효과적인 정치 개혁 세력을 조직하는 데 실패한 것을 지적하는 내용이라는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다.[2]
1996년 이다 신야는 이다 메서드를 통해 〈탈아론〉의 기고자가 다카하시 요시오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29] 이다는 시사신보의 무명 논설들에 이다 메서드를 적용하여 기고자를 추정하였는데,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논설명 | 추정 기고자 | 평가 | |
---|---|---|---|
1 | "외교론"1" ~ "5" | 자필 초고 있음 | / |
4 | "맥 이미 올랐다" | 다카하시 | C |
5 | "동양의" (제1일) | 다카하시 | E |
(제2일) | 다카하시 | C | |
6 | "지나풍을 배척해야 한다" | 후쿠자와 | A |
7 | "보차순치의 고언은 믿을 수 없다" | 와타나베 | D |
10 | "지나를 멸망시키고 유럽은 평안하다" | 다카하시 | C |
11 | "군비 지출 준비는 너무 성급하다" | 다카하시 | D |
12 | "전쟁이 되면 반드시 이길 계산이 있다" | 와타나베·다카하시 | E |
13 | "어친정의 준비는 어떠한가" | 다카하시 | D |
14 | "국교제의 주의는 수신론과 다르다" | 후쿠자와 | A |
15 | "탈아론" | 다카하시? | A |
히라야마 히로시는 이다의 인정 작업을 받아들였지만, 〈탈아론〉의 논리 전개와 어휘의 명료함으로 보아 후쿠자와의 진필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31]
2000년대 이후 동아시아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후쿠자와를 탈아론의 저자로 칭송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55] 2006년 발견된 후쿠자와의 서간에 따르면, 후쿠자와는 〈탈아론〉을 통해 일본의 잘못을 덮고 중국에 대해 유리한 입장에 서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56]
2000년대 후반, 동아시아 공동체 운동에 반대하는 논자들은 탈아론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러한 주장은 이후에도 계속 증가했다.[59][60]
5. 탈아론의 영향과 현대적 의미
시즈오카 현립 대학 국제관계학부 조교 히라야마 히로시는 '탈아론'에 대한 언급을 개관한다.[32]
5. 1. 일본 제국주의와의 연관성
"탈아론"은 메이지 유신 시기 일본이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는 당시 일본의 대외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이웃 국가인 중국과 대한민국이 개혁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일본은 서구 열강과 함께 아시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논리가 강화되었다.[32]후쿠자와 유키치는 갑신정변 실패 이후 "탈아론"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는 한국의 개혁 실패가 일본의 아시아 이탈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 시기 일본이 한국의 급진적인 개혁 세력에게 제공한 지원은 한반도의 완전한 독립보다는 일본의 영향력 확대를 위한 목적이 더 컸다.[32]
후쿠자와는 근대화가 무력을 통해서라도 달성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중국이 낡은 관습에 얽매여 있으며, 아편 사용과 외세 침략에 대한 무능력함을 비판했다. 일본 역시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 조약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군사력을 강화하여 서구의 인식을 바꾸고 조약 개정을 이루고자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후쿠자와는 일본이 주변 아시아 국가들을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32]
5. 2. 동아시아 인식 문제
서구화의 바람이 동아시아 지역에 불어오고 있으며, 국가들은 이를 수용하여 "문명의 열매를 맛볼" 수 있거나, 스스로의 운명을 선택할 여지 없이 남겨질 수 있다고 선언한다. "문명은 홍역과 같으며",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점에서 홍역보다 낫다"라고 이어진다. 이 글은 보수적인 도쿠가와 막부가 이러한 "문명"과 자결로 가는 길을 방해했다고 보고, 낡은 것을 제거하고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해 막부의 전복이 필요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메이지 유신 시기의 일본이 정신적으로 "아시아를 떠났다"고 본다. 일본의 두 이웃인 중국과 대한민국이 이러한 개혁을 수용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이 국가들을 개혁할 선구자가 없다면, 미국과 다른 서구 열강이 아시아 국가들에게 강요한 불평등 조약과 무력 위협에서 알 수 있듯이, 외부 세력에 의해 정복되고 분할될 것이다.[32]탈아론의 핵심 구절은 다음과 같다.[32]
- 서구 문명의 바람이 동쪽으로 불어오면, 동쪽의 모든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가 서구의 바람이 가져오는 것을 따른다.
- 문명의 확산은 홍역과 같다.
- 내 생각에, 이 두 국가 [중국과 한국]는 서구 문명의 맹공격 속에서 독립 국가로 살아남을 수 없다.
- 그것은 어리석음, 무법함, 잔혹함, 냉혹함으로 알려진 마을의 이웃에 사는 의로운 사람의 경우와 다르지 않다. 그의 행동은 너무 드물어서 항상 그의 이웃의 추악한 활동에 파묻힌다.
- 우리는 아시아의 발전을 위해 함께 일할 수 있도록 이웃의 깨달음을 기다릴 시간이 없다. 우리가 아시아 국가의 대열을 떠나 서구의 문명 국가와 운명을 함께하는 것이 낫다. 나쁜 친구와 친밀한 사람은 또한 나쁘게 여겨지므로, 나는 내 마음속에서 나쁜 아시아 친구를 거부할 것이다.
5. 3. 현대적 교훈과 과제
시즈오카 현립 대학 국제관계학부 조교 히라야마 히로시의 지적에 따른 '탈아론'에 관한 언급을 개관한다.[32]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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