셸론강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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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셸론강 전투는 1471년 7월 14일, 모스크바 대공국 군대와 노브고로드 공화국 군대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이 전투는 모스크바 대공국과 노브고로드 공화국 간의 오랜 갈등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했으며, 노브고로드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과의 관계, 종교적 갈등 등이 배경이 되었다. 셸론강 전투에서 모스크바 군대가 승리하면서 노브고로드 공화국은 쇠퇴하고, 결국 모스크바 대공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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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셸론강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 전투 개요 | |
| 분쟁 | 모스크바-노브고로드 전쟁 |
| 날짜 | 1471년 7월 14일 |
| 장소 | 셸론강, 러시아 |
| 결과 | 모스크바 대공국의 승리 |
| 전투 후 상황 |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사실상 무조건 항복 |
| 교전 세력 | |
| 교전국 1 | 노브고로드 공화국 |
| 교전국 2 | 모스크바 대공국 |
| 지휘관 및 지도자 | |
| 노브고로드 공화국 | 드미트리 이사케비치 보레츠키 |
| 모스크바 대공국 | 다닐 홀름스키 |
| 병력 규모 | |
| 노브고로드 공화국 | 약 30,000명 |
| 모스크바 대공국 | 5,000명 |
| 피해 규모 | |
| 노브고로드 공화국 | 약 15,000명 전사, 2,000명 포로 |
| 모스크바 대공국 | 미상 |
2. 역사적 배경
모스크바 대공국과 노브고로드 공화국 간의 갈등은 14세기 후반부터 지속되었다. 이 전투는 야젤비치 조약 (1456년)을 노브고로드가 위반하면서 발생했다. 이 조약은 노브고로드의 외교 활동을 제한하고 모스크바 대공에게 도시 통제권을 더 부여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1] 노브고로드인들이 모스크바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에 도움을 요청하자, 이반 3세는 이를 정치적 배신이자 동방 정교회를 버리고 가톨릭 교회로 넘어가려는 시도로 비난했다. 셸론 전투 이후 발견된 카지미에시 4세 (재위 1440–1492)와 노브고로드 간의 조약 초안에는 리투아니아 대공이 노브고로드 대주교 선거 또는 도시의 정교 신앙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었다.[1][6]
2. 1. 모스크바-노브고로드 갈등의 심화
모스크바 대공국과 노브고로드 공화국 간의 충돌은 14세기 후반부터 지속되어 온 갈등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이 사건은 바실리 2세 대공과 예브피미 2세가 이끄는 노브고로드 대표단 사이에 체결된 야젤비치 조약 (1456년)에 대한 노브고로드의 위반으로 인해 발생했다.[1] 특히, 조약은 노브고르드의 독자적인 외교 활동 능력을 제한하고 모스크바 대공에게 도시를 더 많이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모스크바 대공은 도시의 인장을 관리하고 노브고로드 법원의 상급 법원이 되었다).[1] 노브고로드인들이 모스크바의 증가하는 권력을 제한하기 위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에 도움을 요청했을 때, 이반 3세와 대주교는 그들을 정치적 배신뿐만 아니라 동방 정교회를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하려 했다고 비난했다.[1] 셸론 전투 이후 문서 보관소에서 발견된 것으로 알려진 노브고로드와 리투아니아 대공이자 폴란드 국왕인 카지미에시 4세 (재위 1440–1492) 간의 조약 초안은 리투아니아 대공이 노브고로드 대주교 선거 또는 도시의 정교 신앙에 간섭하지 않을 것임을 명시했다(예: 도시에 가톨릭 교회를 짓는 것).[1]2. 2. 종교적 갈등
모스크바 대공국과 노브고로드 공화국 간의 갈등은 14세기 후반부터 계속되었다. 이 전투는 야젤비치 조약 (1456년)을 노브고로드가 위반하면서 발생했다. 이 조약은 노브고로드의 외교 활동을 제한하고 모스크바 대공에게 도시 통제권을 더 부여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모스크바 대공은 도시의 인장을 관리하고 노브고로드 법원의 상급 법원이 되었다).[1]노브고로드인들이 모스크바의 커지는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에 도움을 요청하자, 이반 3세와 대주교는 이를 정치적 배신이자 동방 정교회를 버리고 가톨릭 교회로 넘어가려는 시도로 비난했다. 셸론 전투 이후 발견된 카지미에시 4세 야기에우워 (재위 1440–1492)와 노브고로드 간의 조약 초안에는 리투아니아 대공이 노브고로드 대주교 선거 또는 도시의 정교 신앙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었다.[1]
3. 전투 과정
1471년 7월 14일, 셸론강에서 벌어진 전투는 다니일 홀름스키가 이끄는 모스크바 대공국 군대가 노브고로드 군대를 상대로 승리하며 끝났다.[2]
''노브고로드 제4 연대기''에 따르면, 노브고로드 대주교 선출자 테오필은 자신의 기병대에게 모스크바 군대가 아닌 프스코프 군대만 공격하도록 명령하여 기동 범위를 제한했다고 한다.[3]
모스크바 측 기록에는 12,000명 이상의 노브고로드인이 사망하고 2,000명이 포로로 잡혔다고 전해지지만,[4] 당시 노브고로드 시 인구가 4만 명 정도였던 점을 고려하면 이 수치는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3. 1. 셸론강 전투의 발발
1471년 7월 14일 아침, 노브고로드 남서쪽 일멘 호수로 흘러드는 셸론강의 왼쪽 강둑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강어귀에서 약 30km 떨어진 지점, 솔치 마을 동쪽, 스키리노 마을 근처에서 벌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위치는 모스크바 대공국 군대가 호수의 서쪽 해안을 따라 노브고로드를 향해 진격하여 도시를 남서쪽에서 공격하려 했음을 나타낸다.[2] 다니일 홀름스키 공이 지휘하는 모스크바 군대(약 5,000명)는 노브고로드 군대(20,000~40,000명)와 우연히 마주쳤다. 그러나 제대로 조직되지 않은 노브고로드 군대는 모스크바 군대의 압박을 견디지 못했다.[7] ''노브고로드 제4 연대기''에 따르면, 노브고로드 대주교 선출자 테오필은 자신의 기병대에게 모스크바 군대가 아닌 프스코프 군대만 공격하도록 명령하여 기동 범위를 제한했다고 한다.[3][8] 셸론강 전투는 두 시간 동안 지속되었고 노브고로드의 패배로 끝났다. 모스크바 측 기록에 따르면, 전투와 그 뒤의 추격전에서 12,000명 이상의 노브고로드인이 사망했고, 약 2,000명이 포로로 잡혔다.[4][9] 그러나 당시 노브고로드 군대의 규모를 파악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고, 노브고로드 시 자체의 인구가 약 40,000명에 불과했을 가능성을 고려할 때 이 숫자는 매우 높게 보인다. 물론 군대가 농촌 인구에서 차출되었을 수도 있지만, 이 숫자는 대공의 위신을 높이고 노브고로드를 더욱 나쁜 모습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부풀려졌을 수도 있다.3. 2. 모스크바군의 승리
다니일 홀름스키 공이 지휘하는 약 5,000명의 모스크바 군대는 노브고로드 군대(20,000~40,000명)와 우연히 마주쳤다. 제대로 조직되지 않은 노브고로드 군대는 모스크바 군대의 압박을 견디지 못했다.[2] ''노브고로드 제4 연대기''에 따르면, 노브고로드 대주교 선출자 테오필은 자신의 기병대에게 모스크바 군대가 아닌 프스코프 군대만 공격하도록 명령하여 기동 범위를 제한했다.[3] 셸론강 전투는 두 시간 동안 지속되었고 노브고로드의 패배로 끝났다. 모스크바 측 기록에 따르면, 전투와 그 뒤의 추격전에서 12,000명 이상의 노브고로드인이 사망했고, 약 2,000명이 포로로 잡혔다.[4] 그러나 이 수치는 당시 노브고로드 군대의 규모를 파악하기 어렵고, 노브고로드 시 자체의 인구가 약 40,000명에 불과했을 가능성을 고려할 때 매우 높게 보인다. 물론 군대가 농촌 인구에서 차출되었을 수도 있지만, 이 숫자는 모스크바 대공의 위신을 높이고 노브고로드를 더욱 나쁜 모습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부풀려졌을 수도 있다.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셸론 강 전투에서의 패배는 노브고로드 공화국을 크게 약화시켰다.[1] 이반 3세는 전투 직후 대주교 행정부와 일부 대규모 수도원에서 상당한 양의 토지를 몰수하여 노브고로드 교회의 독립성을 약화시켰다고 알려져 있으나, 대부분의 자료에는 이러한 몰수가 1478년에 이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4. 1.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몰락
7월 24일, 이반 3세는 노브고로드 군 지휘관 드미트리 이사코비치 보레츠키를 처형했다.[1] 그는 마르파 보레츠카야가 이끌던 보레츠키 가문 출신으로, 모스크바에 반대하는 도시의 반대파를 옹호했다. 셸론 강 전투에서의 패배는 장기적으로 노브고로드 공화국을 심각하게 약화시켰다.[1] 일부 자료에 따르면, 이반 3세는 전투 직후 대주교 행정부와 몇몇 대규모 수도원으로부터 상당한 양의 토지를 몰수하여 노브고로드 교회의 독립성을 약화시켰다 (대부분의 자료는 이러한 몰수를 1478년으로 기록하고 있다).[1] 그는 또한 1470년대에 여러 차례 도시에 돌아와 주요 보야르 또는 보야르 가문 전체를 체포했다.[1] 1477년-1478년 겨울, 대주교 테오필과 노브고로드 보야르들과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자 이반 3세는 군대를 도시에 파견했고, 1478년 1월에야 도시 국가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를 시작했다.[1]4. 2. 모스크바 대공국의 중앙 집권화
마르파 보레츠카야를 필두로 한 보레츠키 가문 출신이자 모스크바 반대파였던 노브고로드 사령관 드미트리 이사코비치 보레츠키는 1471년 7월 24일 이반 3세에 의해 처형되었다.[1] 셸론 강 전투의 패배는 장기적으로 노브고로드 공화국을 심각하게 약화시켰다.[1] 일부 자료에 따르면, 이반 3세는 전투 직후 대주교 행정부와 몇몇 대규모 수도원으로부터 상당한 양의 토지를 몰수하여 노브고로드 교회의 독립성을 약화시켰다. (다만, 대부분의 자료는 이러한 몰수를 1478년으로 기록하고 있다.)[1] 그는 또한 1470년대에 여러 차례 도시에 돌아와 주요 보야르 또는 보야르 가문 전체를 체포했다.[1] 1477년-1478년 겨울, 대주교 테오필과 노브고로드 보야르들과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자 이반 3세는 군대를 도시에 파견했고, 1478년 1월에야 도시 국가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를 시작했다.[1]참조
[1]
논문
Secular Power and the Archbishops of Novgorod Before the Muscovite Conquest
2007
[2]
서적
Istoriia boennogo iskusstva
St. Petersburg
1994
[3]
문서
Secular Power
[4]
서적
Shelonskaia operatsiia Ioanna III Vasilevich i Shelonskaia bitva v 1471 godu 14 iuliia
Petrograd
1915
[4]
서적
Istoriia Rossii s drevneishikh vremeni
Moscow
1960
[5]
문서
Secular Power
[6]
논문
Secular Power and the Archbishops of Novgorod Before the Muscovite Conquest
2007
[7]
서적
Istoriia boennogo iskusstva
St. Petersburg
1994
[8]
문서
Secular Power
[9]
서적
Shelonskaia operatsiia Ioanna III Vasilevich i Shelonskaia bitva v 1471 godu 14 iuliia
Petrograd
1915
[9]
서적
Istoriia Rossii s drevneishikh vremeni
Moscow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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