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야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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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야르는 여러 언어에서 사용된 칭호로, 불가리아, 세르비아, 루스, 루마니아 등 다양한 지역에서 역사적으로 귀족 계급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불가리아에서는 보일라 칭호에서 유래되었으며, 튀르크어 또는 슬라브어에서 어원을 찾기도 한다. 루스에서는 군사적 지원을 통해 상당한 권력을 행사했으며, 키예프 루스, 모스크바 대공국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루마니아에서는 초기 중세 시대부터 농촌 공동체의 지도자를 지칭하며, 토지 소유, 군사, 행정적 기능을 수행했다. 보야르는 각 지역의 정치, 사회적 맥락에 따라 다양한 의미와 역할을 지녔으며, 문화적으로도 영향을 미쳐 음악 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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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스인 - 키예프 루스
키예프 루스는 9세기부터 13세기 동유럽에 존재했던 동슬라브족의 중세 국가로, 키예프를 중심으로 발전하여 블라디미르 1세 시대에 전성기를 맞았으나 몽골 침략으로 멸망, 현재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공통된 역사적 기반으로 여겨진다. - 루스인 - 트베리 대공국
트베리 대공국은 1247년 시작되어 볼가 강 상류의 유리한 위치를 바탕으로 번성하며 모스크바와 경쟁했으나 킵차크 칸국의 영향력과 모스크바의 부상으로 쇠퇴, 1485년 모스크바 대공국에 합병된 루스 공국이다. - 기병 - 에퀴테스
에퀴테스는 고대 로마의 기병 계급으로, 왕정 시대에 창설되어 공화정 시대를 거치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경제 활동에도 참여했으나, 제정 시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개혁 이후 군인 기사 계급의 부상으로 쇠퇴하고 소멸하였다. - 기병 - 중기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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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는 '제1인자'를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칭호로, 중세 유럽에서는 왕의 칭호를 받지 못한 소국 군주를 가리키거나 왕국이나 제국에서 왕위 계승권이 있는 왕족 남성에게 부여되는 칭호이지만, 맥락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 귀족 작위 - 베이
베이는 튀르크어에서 유래하여 다양한 튀르크 및 이슬람 국가에서 사용된 칭호로, 부족 지도자, 군사령관, 지방 통치자 등 다양한 지위를 나타내며, 오스만 제국에서는 고위 관료나 군인의 칭호로 사용되었고 현대 터키어에서는 남성을 존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보야르 | |
---|---|
보야르 정보 | |
![]() | |
개요 | |
유형 | 귀족 |
국가 | 키예프 루시 불가리아 제1제국 불가리아 제2제국 몰다비아 공국 왈라키아 공국 모스크바 대공국 러시아 차르국 러시아 제국 루마니아 왕국 |
역사 | |
기원 | 키예프 루시 |
소멸 | 러시아 차르국 (17세기) |
설명 | |
설명 | 보야르는 슬라브족 국가(키예프 루시, 불가리아, 모스크바, 루마니아)에서 높은 계급의 귀족을 지칭하는 용어다. 보야르의 계급은 군주 바로 아래였으며, 군사적, 자문적 역할을 수행했다. 보야르는 토지를 소유하고 농노를 지배하는 강력한 지주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보야르는 국가 행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고, 때로는 군주의 권력에 도전하기도 했다. 러시아에서 보야르는 표트르 1세의 개혁으로 인해 17세기에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
2. 어원
보야르는 다른 언어에서도 'bolyar'로 알려져 있으며, 불가리아어로는 болярbg 또는 боляринbg, 러시아어로는 боярин|boyarinru, 루마니아어로는 boierro, 그리스어로는 βογιάροςel 등의 변형으로 사용된다.[1][2]
가장 오래된 슬라브어 형태의 "보야르"는—"볼랴린"(불가리아어: болярин, 복수: боляри)으로 10세기에 기원하며, 불가리아에서 발견된다. 또한 불가르 귀족 계급을 나타내는 오래된 불가르 칭호인 "보일라"로도 널리 사용되었다. 이는 튀르크어 "볼"(bol, "많은")과 "야린, 야르키"(yarin, yarki, "밝은, 깨우친")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10세기 비잔틴 황제 콘스탄티누스 7세의 외교 의정서가 있는데, 여기에서 불가리아 귀족들은 "볼리아데스"(boliades)로 불리고,[3] 9세기 불가르 자료에서는 "보일라"(boila)로 불린다.[2]
중세 세르비아에서 보야르(Боjари|bojarisr) 계급은 남작과 동등했으며, "자유 전사"(또는 일반적으로 "자유인")를 의미하며, 비자유 농민 또는 농노 다음의 첫 번째 계급이었다. 이 용어의 어원은 "전투"(бој|bojsr)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세르비아의 보야르는 문자 그대로 "전투를 위한 남자" 또는 전사 계급이었으며, 농민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들은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지만, 이를 방어하고 왕을 위해 싸울 의무가 있었다. 군사 관련 중요 직책을 맡았으며, 두마라고 불리는 국가 회의에서는 공(크냐즈)이나 차르에게 조언을 했다.[1] 13세기, 14세기에는 크냐즈에게 조언을 제공하는 부유한 지주였지만, 다른 토지나 공에게 봉사할 자유도 있었다.[2] 1450년 이후 오스만 제국의 통치와 함께 오스만 제국 및 오스트리아-헝가리 용어가 세르비아 용어를 대체했다. 오늘날, 그것은 귀족(племство|plemstvosr)을 나타내는 고어이다.[1]
9세기부터 13세기까지 보야르는 루스 공국에 군사적으로 지원함으로써 상당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몽골 침략 이후 문화적 연계는 대부분 상실되었다. 보야르는 최고위 국가 직책을 차지했고, 두마를 통해 대공에게 조언했다.
보일라 칭호는 보야르 칭호의 선행 또는 옛 형태로, 보야르는 불가리아어에서 보야르를 뜻하는 단어이다. 보일라는 불가리아 제1제국 (681–1018)의 일부 불가르 귀족 (주로 지역 통치자와 귀족 전사)들이 사용한 칭호였다. 보일라 ("귀족")의 복수형인 'bolyare'는 불가르어 비문에 기록되어 있으며, 비잔틴 제국 문서의 그리스어에서는 'boilades' 또는 'boliades'로 표기되었다.[4][3]
학자들과 언어학자들은 이 단어의 어원에 대해 다양한 가설을 제시했는데, 예를 들어 고대 튀르크어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 ''bai'' ("귀족, 부유한"; ''cf.'' "bay") + 튀르크어 ''är'' ("남자, 사람들")[4], 슬라브조어 "boj" (싸움, 전투) 또는 루마니아어 "boi" (황소, 소)에서 "보이에르"(소의 주인)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5] 이 칭호는 고대 동슬라브어로 ''быля'' (''bylya'', ''이고르 원정기''에서만 확인됨)로 유입되었다.
3. 불가리아
제1차 불가리아 제국 시대의 귀족 구성원은 "보일라"로 불렸으며, 제2차 불가리아 제국에서는 해당 칭호가 "볼랴르" 또는 "볼랴린"이 되었다. "볼랴르"는 이전 칭호인 "보일라"와 마찬가지로 세습되는 칭호였다. 불가리아 볼랴르는 "벨리키"(veliki, "대")와 "말키"(malki, "소")로 나뉘었다.
현재 불가리아에서 "볼랴리"라는 단어는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의 수도였던 벨리코 터르노보의 주민들을 부르는 별칭으로 사용된다.
4. 세르비아
5. 루스
13세기 몽골 침략 이후, 키예프 루스의 서부 및 남부 지역(오늘날의 벨라루스 및 우크라이나)의 보야르는 리투아니아 및 폴란드 귀족(슐라흐타)에 편입되었다. 16세기와 17세기에 귀족의 지위를 얻지 못한 많은 루스 보야르들은 코사크 군대의 형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19]
노브고로드와 프스코프의 보야르는 공화정을 형성했으며, 모스크바에 정복될 때까지 공작(크냐즈)의 권력은 제한되었다. 블라디미르, 트베르 및 모스크바의 러시아 공국에서 보야르는 영향력을 유지했지만, 모스크바에 의한 권력 집중 후에 보야르의 권력은 감소했다.
13세기와 14세기에는 크냐즈에게 조언을 제공하는 부유한 지주였지만, 다른 토지나 공에게 봉사할 자유도 있었다. 15세기부터 17세기의 모스크바에서는 200개 전후의 보야르 가문이 존재했다. 그러나 17세기에는 지위가 하락하기 시작했고, 18세기 초 표트르 1세에 의해 보야르 칭호가 폐지되었다.
5. 1. 키예프 루스
9세기부터 13세기까지 보야르는 루스 공국에 군사적으로 지원함으로써 상당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이들 중 많은 이들의 권력과 명성은 국가에 대한 봉사, 봉사 가문의 역사, 그리고 덜 중요하게는 토지 소유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었다. 키예프 루스의 보야르는 시각적으로 기사와 매우 유사했지만 몽골 침략 이후 문화적 연계는 대부분 상실되었다.[19]
보야르는 최고위 국가 직책을 차지했고, 평의회 (두마)를 통해 대공에게 조언했다. 이들은 광대한 토지 보조금을 받았고, 보야르 두마의 구성원으로서 키예프 루스의 주요 입법자들이었다.[19]
13세기 몽골 침략 이후, 키예프 루스의 서부 및 남부 지역(오늘날의 벨라루스 및 우크라이나)의 보야르는 리투아니아 및 폴란드 귀족(슐라흐타)에 편입되었다. 16세기와 17세기에 귀족의 지위를 얻지 못한 많은 루스 보야르들이 코사크 군대의 형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19]
5. 2. 루스 차르국
14세기와 15세기 동안, 모스크바의 보야르는 모스코비 시대부터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이반 3세의 통치부터 보야르는 모스코비의 권위적인 차르에게 그 영향력을 잃기 시작했다. 이반 3세의 팽창 정책으로 인해, 모스코비를 다스리는 부담을 덜기 위해 행정 변화가 필요했다.[6] 작은 공국들은 충성스러운 신하들의 이름을 알았지만, 이반 치하에서 영토가 통합된 후, 보야르 신하들과의 가족적 충성과 우정은 동일한 신하들을 행정 목록으로 바꾸었다.[6] 지방 통치의 모습은 사라졌다.
16세기까지 보야르가 되기 위해 반드시 러시아인이거나 정교회 신자일 필요는 없었다. 역사가들은 많은 보야르가 리투아니아나 노가이와 같은 곳에서 왔으며, 일부는 몽골인이 축출된 후 한 세대 동안 무슬림으로 남았다고 기록한다.[7] 보야르의 권력과 의무는 대부분 공작들 간에 서명된 협정에서 비롯되었다. 1484년 이반 3세와 미하일 보리소비치의 협정과 같은 협정은 충성이 암묵적으로 강요되기보다는 획득하고 확보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8]
대공은 자신의 영토를 직접 감독하는 대신, 일상적인 운영을 감독하기 위해 자신의 사령관과 가까운 조언자에게 의존해야 했다.[6] 이전의 자문 역할에서 보야르가 가졌던 큰 목소리 대신, 이제 그들은 협상력과 이동성이 줄어들었다.[9] 그들은 대공의 질문에 답했고, 이반 3세는 조에 팔레올로가와의 결혼이나 노브고로드 공격과 같은 특별한 행사에서 그들의 승인을 받도록 했다.[10] 이는 보야르와 그들의 군사력이 차르에게 충성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11]
대공은 또한 1400년대 중반에 농민들이 공작의 영토나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떠나는 것을 막아 농노제를 효과적으로 확립했다.[11] 보야르는 보상과 선물을 얻었다. 일부 보야르는 총독으로 지역에 보내졌고, 이런 식으로 지역 주민들을 "착취"할 수 있었다.[12] 그러나 15세기 말까지 보야르 멤버십은 감소했으며, 가족 배경보다는 능력에 따라 보야르가 되는 사람이 결정되었다.[13] 이반 4세가 차르가 되었을 때, 보야르의 영향력을 제한하기 위해 더욱 급진적인 변화가 시행되었다.
이반 4세는 1533년 세 살의 나이로 모든 모스코비의 대공이 되었지만, 다양한 보야르 파벌들이 섭정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려 했다.[14] 1547년 이반 4세가 권력을 잡았을 때, 보야르의 독립적인 정치 권력은 더 이상 쓸모없게 되었다. 16세기 말까지 이반 4세 치하에서 모스코비 지역 공작들이 누리던 독립성과 자율성은 폐지되어, 그들은 "공작의 아들" 또는 대공을 섬기는 단순한 보야르가 되었다.[15] 이반 4세는 1565년 모스코비를 두 부분으로 나누었고, 사적인 부분에서 공포가 시작되었다.[14]
보야르들은 뭉쳐서 저항하려 했지만, 정부에서 그들의 역할을 헌법적으로 확립하는 대신, 이반 4세는 오프리치니나 공포 숙청을 통해 보야르 반대를 가차 없이 분쇄했다.[16] 또한 군사적 봉사를 제공하는 신하들에게 토지 보조금이 주어졌으며, 곧 이러한 유형의 토지 보조금은 보야르 사이에서 상속 토지보다 더 일반적이 되었다.[16] 이반 4세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왕실의 권력을 중앙 집권화했으며, 공작의 영향력을 억제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이반 4세 이후, 그의 아들 표도르가 상속자 없이 사망하면서 류리크 왕조가 끝나고 혼란의 시대가 시작되었다.[14] 보야르 보리스 고두노프는 스스로 차르를 칭하려 했지만, 여러 보야르 파벌이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14] 최초의 거짓 드미트리가 왕위를 차지한 후 혼란은 계속되었고, 내전이 발발했다.[14] 로마노프 왕조가 집권했을 때, 17세기는 행정 개혁으로 가득 찼다. 포괄적인 법전이 도입되었고, 보야르가 엘리트 관료제로 통합되기 시작했다.[14]
혼란의 시대가 끝날 무렵, 보야르는 거의 모든 독립적인 권력을 잃었다. 보야르는 더 많은 권력을 얻기 위해 모스크바로 가는 대신, 패배감을 느끼고, 통일되고 강력한 러시아를 유지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가야 한다고 느꼈다.[17] 둘째, 보야르는 모든 권력을 유지했던 독립 공국을 잃고, 대신 그 당시 대공의 지휘하에 구역과 지역을 다스렸다. 보야르는 또한 두마와 같은 도구를 사용하여 대공에 대한 자문 영향력을 잃었고, 대신 대공은 더 이상 보야르의 요구에 귀 기울일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차르는 더 이상 그들의 군사 지원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모스코비의 통일이 가장 중요해졌다. 표트르 대제와 함께, 보야르의 권력에 대한 마지막 결정타가 있었고, 그들은 그의 행정 개혁으로부터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1697년 권력을 잡은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를 서구화하고 현대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하려고 했다. 1698년 스트렐치 연대의 반란 이후,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로 돌아와 정부 관리들과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게 깨끗하게 면도하고 서양 옷을 입도록 강요했다.[18] 표트르는 또한 사법 제도를 개혁하고, 차르를 원래 조언했던 보야르의 오래된 의회를 대체하여 그가 임명한 구성원으로 구성된 상원을 만들었다.[18] 그가 취한 이 조치는 보야르가 이전에 소유했던 권력과 지위를 해체한 많은 조치 중 하나였다.[18]
표트르는 보야르의 보수적이고 종교적인 파벌을 궁정에서 몰아내고, 대신 행정 시스템을 채우기 위해 외국과 러시아 관리를 모두 사용했다.
5. 3. 몰락
이반 3세의 통치부터 보야르는 모스코비의 권위적인 차르에게 그 영향력을 잃기 시작했다. 이반 3세의 팽창 정책으로 인해, 모스코비를 다스리는 부담을 덜기 위해 행정 변화가 필요했다.[6] 작은 공국들은 충성스러운 신하들의 이름을 알았지만, 영토가 통합된 후에는 보야르 신하들과의 가족적 충성과 우정은 행정 목록으로 바뀌었다.[6] 지방 통치의 모습은 사라졌다. 대공은 자신의 영토를 직접 감독하는 대신, 일상적인 운영을 감독하기 위해 자신의 사령관과 가까운 조언자에게 의존해야 했다.[6] 이전의 자문 역할에서 보야르가 가졌던 큰 목소리 대신, 그들은 협상력과 이동성이 줄어들었다.[9]
14세기와 15세기 동안, 모스크바의 보야르는 모스코비 시대부터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16세기까지 보야르가 되기 위해 반드시 러시아인이거나 정교회 신자일 필요는 없었다. 역사가들은 많은 보야르가 리투아니아나 노가이와 같은 곳에서 왔으며, 일부는 몽골인이 축출된 후 한 세대 동안 무슬림으로 남았다고 기록한다.[7]
대공은 1400년대 중반에 농민들이 공작의 영토나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떠나는 것을 막아 농노제를 효과적으로 확립했다.[11] 보야르는 보상과 선물을 얻었다. 일부 보야르는 총독으로 지역에 보내졌고, 이런 식으로 지역 주민들을 "착취"할 수 있었다.[12] 그러나 15세기 말까지 보야르 멤버십은 감소했으며, 가족 배경보다는 능력에 따라 보야르가 되는 사람이 결정되었다.[13] 이반 4세가 차르가 되었을 때, 보야르의 영향력을 제한하기 위해 더욱 급진적인 변화가 시행되었다.
이반 4세는 1533년 세 살의 나이로 모든 모스코비의 대공이 되었지만, 다양한 보야르 파벌들이 섭정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했다.[14] 1547년 이반 4세가 권력을 잡았을 때, 보야르의 독립적인 정치 권력은 더 이상 쓸모없게 되었다. 16세기 말까지 이반 4세 치하에서 모스코비 지역 공작들이 누리던 독립성과 자율성은 폐지되어, 그들은 "공작의 아들" 또는 대공을 섬기는 단순한 보야르가 되었다.[15] 이반 4세는 1565년 모스코비를 두 부분으로 나누었고, 사적인 부분에서 공포가 시작되었다.[14]
보야르들은 뭉쳐서 저항하려 했지만, 정부에서 그들의 역할을 헌법적으로 확립하는 대신, 이반 4세는 오프리치니나 공포 숙청을 통해 보야르 반대를 가차 없이 분쇄했다.[16] 군사적 봉사를 제공하는 신하들에게 토지 보조금이 주어졌으며, 곧 이러한 유형의 토지 보조금은 보야르 사이에서 상속 토지보다 더 일반적이 되었다.[16] 이반 4세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왕실의 권력을 중앙 집권화했으며, 공작의 영향력을 억제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이반 4세 이후, 그의 아들 표도르가 상속자 없이 사망하면서 류리크 왕조가 끝나고 혼란의 시대가 시작되었다.[14] 보야르 보리스 고두노프는 스스로 차르를 칭하려 했지만, 여러 보야르 파벌이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14] 최초의 거짓 드미트리가 왕위를 차지한 후 혼란은 계속되었고, 내전이 발발했다.[14] 로마노프 왕조가 집권했을 때, 17세기는 행정 개혁으로 가득 찼다. 포괄적인 법전이 도입되었고, 보야르가 엘리트 관료제로 통합되기 시작했다.[14]
혼란의 시대가 끝날 무렵, 보야르는 거의 모든 독립적인 권력을 잃었다. 그들은 더 많은 권력을 얻기 위해 모스크바로 가는 대신, 패배감을 느끼고, 통일되고 강력한 러시아를 유지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가야 한다고 느꼈다.[17] 또한 보야르는 모든 권력을 유지했던 독립 공국을 잃고, 대신 그 당시 대공의 지휘하에 구역과 지역을 다스렸다. 보야르는 두마와 같은 도구를 사용하여 대공에 대한 자문 영향력을 잃었고, 대공은 더 이상 보야르의 요구에 귀 기울일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차르는 더 이상 그들의 군사 지원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모스코비의 통일이 가장 중요해졌다. 표트르 대제와 함께, 보야르의 권력에 대한 마지막 결정타가 있었고, 그들은 그의 행정 개혁으로부터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1697년 권력을 잡은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를 서구화하고 현대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하려고 했다. 1698년 스트렐치 연대의 반란 이후,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로 돌아와 정부 관리들과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게 깨끗하게 면도하고 서양 옷을 입도록 강요했다.[18] 표트르는 또한 사법 제도를 개혁하고, 차르를 원래 조언했던 보야르의 오래된 의회를 대체하여 그가 임명한 구성원으로 구성된 상원을 만들었다.[18] 이 조치는 보야르가 이전에 소유했던 권력과 지위를 해체한 많은 조치 중 하나였다.[18]
표트르는 보야르의 보수적이고 종교적인 파벌을 궁정에서 몰아내고, 대신 행정 시스템을 채우기 위해 외국과 러시아 관리를 모두 사용했다.
6. 루마니아 (몰다비아와 왈라키아)
오늘날 루마니아인들이 거주하는 카르파티아 산맥 지역에서 보야르(보이에르ro) 계급은 초기 중세 시대의 농촌 공동체의 지도자들(다뉴브강 북쪽 지역에서는 크네아즈ro("지도자") 또는 주데ro("판사"), 강 남쪽 지역에서는 첼니크ro)에게서 등장했으며, 이들은 사법 및 행정적 권한을 세습하고 점차 다른 공동체로 확장했다. 그들은 이 지역을 지배했던 오스만 제국의 ''승인''을 받았다. 이 지역에 더 발전된 정치 구조가 나타난 후, 그들의 특권적 지위는 중앙 권력에 의해 확인되어야 했고, 중앙 권력은 이 특권을 사용하여 군사 또는 민간에서 두각을 나타낸 개인들을 보야르 계급에 포함시키고, 그들에게 왕자령 토지를 할당했다.[20]
루마니아 사회 계층은 보야르, 마질ro (''터키어: 마줄''), 라제쉬ro (''요먼, 자유민'') 및 루먼ro (''농노'')로 구성되었다. 보야르가 된다는 것은 토지 소유자, 농노 소유, 군사 및/또는 행정적 기능을 갖는 것을 의미했다. 보야르는 국가 기능 및/또는 궁정 기능을 가질 수 있었으며, 이러한 기능은 드레가토리에ro 또는 보이에리에ro라고 불렸다. 오직 군주만이 보이에리에를 임명할 권한을 가졌다. 농노를 소유했지만 직책이 없는 토지 소유주는 마질ro로 분류되었지만 여전히 귀족 출신(딘 오스 보이에레스크ro, 문자 그대로 "보야르 뼈에서")으로 여겨졌다.[20]
관직은 공작만이 부여할 수 있었고 세습되지 않았지만, 토지 소유는 세습되었다. 공작은 타인에게 토지를 줄 수 있었지만, 반역과 같은 중대한 이유가 아니고서는 소유자로부터 토지를 빼앗을 수 없었다. 따라서 보야르는 고대 농촌 공동체의 족장으로서 봉건 국가가 형성되기 전에 토지를 소유했고 공작이 단순히 토지 소유자로서의 기존 지위를 확인해 준 가문, 그리고 공작의 기증을 통해 영지를 얻거나 그러한 기증을 통해 영지를 얻은 조상으로부터 영지를 상속받은 자들의 두 종류가 있었다. 파나리오트 시대에는 토지가 전혀 없고 관직만 가진 보야르도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관직을 살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게 관직을 판매하여 보야르의 수를 늘릴 수 있었다.[20]
보야르의 지위와 군사 행정적 기능 간의 긴밀한 연합은 파나리오트들에 의해 악화된 혼란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서구에서처럼 이러한 기능을 귀족 작위로 여기기 시작했지만, 사실 이것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전통적으로 보야르는 제1계급, 제2계급, 제3계급의 세 계급으로 조직되었다. 예를 들어, 제1계급 또는 대포스텔니크, 제2계급 포스텔니크, 제3계급 포스텔니크가 있었으며, 각각 다른 의무와 권리를 가졌다.[20]
지위의 차이는 의복이나 외모에서도 드러났다. 예를 들어, 오직 제1계급의 보야르만이 수염을 기를 권리가 있었고, 나머지는 콧수염만 기를 수 있었다. 제1계급 보야르 계급 내에는 "대 보야르"라는 하위 계급이 있었다. 그들은 또한 위대한 보르니크와 같은 매우 높은 기능을 가진 거대한 토지 소유자였다. 이 대 보야르들보다 위에 있는 사람은 오직 군주뿐이었다.[20]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 특히 파나리오트 정권 시대에는 왕자라는 칭호가 제국 오스만 제국의 위계 내에서 행정적인 기능이 되었고, 따라서 보야르의 궁극적인 형태가 되었다. 왈라키아 또는 몰다비아의 왕자라는 칭호는 두 개의 말꼬리를 가진 파샤와 동등한 지위였다.[20]
7. 문화적 영향
노르웨이 작곡가 요한 할보르센은 "보야르의 입성 행진곡"(보야르의 입성 행진곡)이라는 행진곡을 작곡했는데, 노르웨이에서는 라디오 프로그램 ''외스케콘세르텐''(Ønskekonserten)의 시그널 곡으로 알려져 있다.[1] 에드바르 그리그는 이 곡을 피아노 독주용으로 편곡했다.[1]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는 자신의 희곡 ''죽음의 춤, 1부''에서 이 곡을 연주해 줄 것을 요청했다.[1]
참조
[1]
서적
Bulgarian Etymological Dictionary, Volume I
Bulgarian Academy of Sciences publishing house
1971
[2]
웹사이트
PB Language - the Preslav Inscription
https://groznijat.tr[...]
2023-01-12
[3]
웹사이트
Constantine Porphyrogenitus, de Cerimoniis aulae Byzantinae, II, 46–47
http://homepage.mac.[...]
2006-11-13
[4]
웹사이트
Vasmer's Etymological Dictionary : Query result
https://starling.rin[...]
2023-01-12
[5]
Citation
boier
https://ro.wiktionar[...]
2017-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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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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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oluția lui Djuvara: „Românii erau numiți cumanii negr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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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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