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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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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대심은 남조 양나라의 황족으로, 간문제 소강의 아들이다. 532년 당양현공에 봉해졌으며, 영주자사, 강주자사 등을 역임했다. 후경의 난 당시 건강을 구원하려 했으나, 후경의 공격으로 강주에서 임약과 강화했다. 이후 간문제가 폐위된 뒤 551년 살해당했으며, 향년 29세였다.

2. 생애

간문제 소강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진숙용(陳淑容)이다.

소대심은 532년 당양현공(當陽縣公)으로 봉해졌고, 535년 영주자사(郢州刺史)를 맡았다.[1] 541년에는 시중(侍中)과 석두수군사(石頭戍軍事)로 임명되었고,[1] 547년 운휘장군(雲麾將軍)과 강주자사(江州刺史)로 바뀌어 임명되었다.[1] 후경의 난이 일어나자 건강을 구원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으나, 550년 임약에게 항복하였다.[1] 551년 후경에게 살해당했다.[1]

2. 1. 초기 생애와 관직

531년 아버지 간문제가 황태자가 되자 이듬해인 532년 당양현공(當陽縣公)으로 봉해졌고 식읍 1,500호를 받았다.[1] 어릴 적부터 현명하고 밝은 성격이었으며, 문장을 잘 지었다.

535년 사지절도독영남사북사정신오주제군사(使持節都督郢南司北司定新五州諸軍事), 경거장군(輕車將軍), 영주자사(郢州刺史)를 맡았다.[1] 13세의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아버지 소강은 "일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대리 관료에게 맡기고, 조금도 얽매여서는 안 된다"라고 훈계했다. 소대심은 주무(州務)를 스스로 결재하지는 않았지만, 발언은 항상 이치에 맞았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놀라 복종했다.

541년 시중(侍中)과 석두수군사(石頭戍軍事)로 임명되었다.[1]

547년 운휘장군(雲麾將軍)과 강주자사(江州刺史)로 바뀌어 임명되었다.[1]

2. 2. 후경의 난과 최후

후경의 난이 일어나자 소대심은 수만 명의 사졸을 모아 수도인 건강을 구원하러 갔다.[1]

549년 무제가 죽자 간문제가 즉위했고, 밀조를 내려 소대심을 산기상시(散騎常侍)와 평남장군(平南將軍)으로 삼았다.[1] 그해 7월 18일 심양군왕(尋陽郡王)으로 봉해졌고 식읍 2천 호를 받았다.[1]

550년 8월 18일 후경의 신하인 임약(任約)이 소대심이 있는 강주(江州)를 공격하자, 버티지 못한 소대심은 항복했다.[1]

551년 후경이 간문제를 폐위한 뒤, 그해 10월 2일 소대심을 살해하니 향년 29세였다.[1] 황태자 소대기, 소대균, 소대위, 소대구, 소대흔도 함께 살해당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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