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경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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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경의 난은 548년 후경이 동위를 배신하고 양나라에 귀순했으나 동위와 양나라의 관계 악화로 인해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다. 후경은 건강을 포위하고 양 무제를 사로잡아, 다음 해 건강을 함락시키고 무제를 쇠약사하게 했다. 후경은 이후 간문제(소강)를 황제로 옹립하고 찬탈했으나, 각지의 저항에 직면하여 552년 왕승변에게 패배하여 살해당했다. 이 난은 양나라의 쇠퇴를 가속화하고 남조 사회에 큰 혼란을 가져왔으며, 진패선의 등장과 진나라 건국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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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경의 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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侯景の乱 | |
개요 | |
전투 이름 | 후경의 난 |
전역 | 해당 없음 |
시기 | 548년 8월 - 552년 3월 |
장소 | 장강 하류 지역 일대 |
결과 | 남조 양나라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 1 | 후경 (한) |
교전 2 | 남조 양나라 |
지휘관 | |
지휘관 1 | 후경 송자선 임약 후자감 |
지휘관 2 | 소범 소륜 양간 서문성 왕승변 |
병력 규모 | |
병력 1 | 불명 |
병력 2 | 불명 |
사상자 규모 | |
사상자 1 | 불명 |
사상자 2 | 불명 |
2. 배경
후경은 동위의 권신 고환의 유력한 무신 중 한 명으로, 고환 사후 동위를 떠나 남조 양나라에 항복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양나라의 무제가 동위와 결탁하면서 고립될 위기에 처하자 548년에 반란을 일으켰다.
2. 1. 동위의 혼란과 후경의 배신
547년 고환이 죽고 그의 아들 고징이 대승상을 계승하자, 하남 13주의 태수였던 후경은 자신이 가진 군사력 때문에 고징에게 의심받을 것을 알고 동위를 배신하여 하남 영지를 가지고 남조 양나라에 귀순했다.[1]양나라 무제는 후경의 영지를 접수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으나, 동위는 모용소종에게 후경을 공격하게 하고 동위에 남아 있던 후경의 처자식을 죽였다. 그리고 양나라 군과 싸워 격파하고 하남을 되찾았다. 패배한 후경은 양나라에 투항했으나, 고징은 양나라와 수호 관계를 맺어 후경을 고립시켰다.[2]
548년 양나라와 동위의 협상 과정에서 동위로 반환될 상황에 놓이자 후경은 급박함에 자신의 영지에서 난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자신의 정예병 800여 명으로 시작했으나, 강제 모병, 해방 노예, 양나라 귀족제 모순 속에서 생계를 위협받던 농민들을 규합하여 대군을 형성하였다. 후경은 양의 수도 건강으로 진격해 포위했고, 양 무제와 태자는 각지에 분봉된 종실 왕들에게 근왕병을 요청했으나 서로 이득을 보고 견제한 결과 다음 해 건강이 함락되고 무제는 사로잡혀 쇠약해 죽게 된다.
건강을 장악한 후경은 간문제를 옹립했다가 551년 간문제를 살해하고 예장왕 소동을 제위에 올린 뒤 선양을 받아 황제에 올랐다. 각지에 주둔한 여러 왕 중 가장 세력이 강했던 형주자사 소역은 왕승변에게 대군을 주어 건강을 공격했고, 552년 후경은 도망 중 부하에게 살해당한다.[3]
2. 2. 양나라의 상황과 후경의 투항
547년, 동위를 세운 고환이 죽고 그의 아들 고징이 대승상의 지위를 계승하자, 하남 13주의 태수였던 후경은 자신이 가진 군사력 때문에 고징에게 의심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동위를 배신하여 하남의 영지를 가지고 남조 양나라에 귀순하였다.[1]양나라 무제는 후경의 영지를 접수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으나, 동위는 모용소종에게 후경을 공격하게 하고 동위에 남아 있던 후경의 처자식을 죽였다. 그리고 양나라 군과 싸워 그들을 격파하고 하남을 되찾았다.
패배한 후경은 양나라에 투항했으나, 고징은 양나라와 수호 관계를 맺어 후경을 고립 상태로 몰아넣었다.[3]
548년, 양나라와 동위의 협상 과정에서 동위로 반환될 상황에 놓인 후경은 다급한 마음에 자신의 영지에서 난을 일으켰다.
2. 3. 양나라와 동위의 화친, 후경의 고립
547년 고환이 죽고 고징이 대승상 지위를 계승하자, 후경은 고징의 의심을 피해 양나라에 귀순했다. 그러나 무제는 후경의 영지를 접수하려다 동위의 모용소종에게 패했다. 고징은 양나라와 수호관계를 맺어 후경을 고립시켰다.[3]548년 양나라와 동위가 강화하면서 후경은 동위로 반환될 위기에 처하자 반란을 결심했다.[3] 파양왕 소범은 후경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고 주상하려 했으나, 영군 주이가 묵살했다. 무제는 오히려 후경에게 상을 더해 더욱 방자하게 만들었다. 후경은 임하왕 소정덕과 밀약을 맺었다.
3. 전개
547년 고환이 죽고 고징이 대승상 지위를 계승하자, 하남 13주 태수였던 후경은 고징의 의심을 피해 동위를 배신하고 남조 양나라에 귀순했다. 무제는 후경의 영지를 접수하려 했으나, 동위는 모용소종에게 후경을 공격하게 하고 후경의 처자식을 죽였다. 동위는 양나라 군을 격파하고 하남을 되찾았다.
패배한 후경은 양나라에 투항했으나, 고징은 양나라와 수호관계를 맺어 후경을 고립시켰다.
3. 1. 반란의 시작과 건강 포위
548년 8월, 후경은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마두와 목책을 공격하여 태수 유신모와 수주 조규 등을 사로잡았다. 무제는 번양왕 소범을 남도도독, 봉산후 소정표를 북도도독, 유중례를 서도도독, 배지고를 동도독으로 삼아 후경을 토벌하게 했다. 또한 소륜에게 여러 군사를 총독하게 했다.10월, 후경은 왕현귀를 수춘성에 남겨 지키게 하고, 군사를 이끌고 합비로 향하는 척하며 실제로는 초주를 습격했다. 초주 자사 풍성후 소태는 후경에게 사로잡혔다. 무제는 왕질에게 수군을 이끌고 장강을 순찰 경비하게 했다. 후경이 역양으로 진격하자 역양군 태수 장철이 동생 장균에게 후경의 진영을 야습하게 했지만 패배하고 장균은 전사했으며, 장철 또한 항복했다.
소정덕은 대선 수십 척에 갈대를 싣는 척하며 후경의 병사들을 도강시킬 준비를 했다. 후경은 경구에서 장강을 건너려 했으나 왕질의 습격을 경계했다. 그러나 왕질이 철수했다는 소식을 듣고 정찰병을 보내 확인한 후, 채석에서 병사 천 명으로 장강을 건너 건강을 기습했다. 후경은 고숙을 습격하여 문성후 소녕을 사로잡고 자호에 이르렀다. 무제는 소대기를 도독성내제군사, 양간을 군사 장군으로 삼아 방어하게 했다. 남포후 소추는 동부성, 서풍공 소대춘은 석두성, 사희는 백하성을 지켰다.
후경이 주작항에 이르자 소정덕은 부하들을 이끌고 합류했다. 건강 현령 유신은 병사 천 명으로 항북에 주둔했으나, 후경의 병사가 들이닥치자 부교를 철거하려다 도망쳤다. 후경의 유격대가 부교를 복구하여 본대를 건너게 했다. 황태자 소강은 왕질에게 정병 3천 명을 주어 유신을 구원하려 했으나, 왕질은 싸우지도 않고 도망쳤다. 후경은 성 아래로 육박했고, 소대춘은 석두성을 버리고 도주했으며, 후경은 우자열을 보내 석두성을 점령하게 했다. 사희 또한 백하성을 포기하고 도망쳤다. 후경은 건강성을 공격하며 횃불로 대사마문, 동화문, 서화문을 불태웠다. 성내 병사들은 간신히 불을 껐다. 반란군이 동액문을 뚫으려 하자 양간이 수 명을 찔러 죽였다. 반란군은 동궁 성벽을 기어올라 활을 쏘았고, 소강은 동궁을 불태웠다. 후경은 성 서쪽의 마구간, 사림관, 태부시를 불태웠다. 다음 날, 후경은 목려 수백 개로 성을 공격하려 했으나, 성 위에서 돌이 날아와 파괴되었다.
후경은 건강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손실이 커지자 공격을 중단하고 장기간 포위망을 구축했다. 그는 주이, 육험, 서린, 주석진 등의 처형을 요구했다. 건강에 웅거한 관군은 화살에 "후경의 목을 벤 자에게는 후경의 관위와 돈 1억만, 비단 1만 필, 여악 2부를 하사한다"는 내용을 적어 성 밖에 쏘았다.
11월, 후경은 소정덕을 황제로 옹립하고 연호를 정평(正平)으로 고쳤다. 후경은 스스로 상국·천주장군이 되었으며, 소정덕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후경은 동부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노휘략에게 수천 명을 이끌고 성문을 지키게 했다. 동부성 안의 문무 관리 2천여 명이 살해되었고, 남포후 소추도 이때 살해되었다. 후경은 소정덕의 아들 소견리와 노휘략에게 동부성을 지키게 했다.
후경은 건강성 동서쪽에 토산을 쌓았다. 성 안에서도 왕공 이하가 흙을 져서 두 개의 산을 쌓았다. 후경은 민중을 동원하여 토산을 쌓게 하고, 구타와 채찍질을 가하며 밤낮없이 일하게 했다. 범도봉이 관군에게 투항하려다 발각되어 살해되었다.
소륜은 3만 군세로 경구에서 출발하여 종산에 근거지를 두었다. 후경은 1만 명으로 막으려 했으나 격파당했다. 후경은 복주산 북쪽에 포진했고, 소륜도 진을 정렬했으나, 후경은 진격하지 않았다. 소준이 수십 기로 덤벼들었고, 후경은 군대를 돌려 싸워 소준을 물러나게 했다. 조백초가 도주하여 소륜의 군대는 총붕괴되었다. 소륜은 경구로 도주했다. 후경은 소대춘과 장구혜달, 호자약, 곽준 등을 포로로 잡아 건강성 아래에서 "소릉왕은 사로잡혔다"고 말하게 했다. 곽준은 "왕은 패배했지만, 전군은 경구로 귀환하고 있다. 성 안은 견고하게 지키면 원군이 올 것이다"라고 말했고, 후경은 그를 용서했다.
소사와 배지고는 채주에 진영을 쳤다. 후경은 군대를 나누어 남안에 주둔시켰다.
12월, 후경은 공성 도구를 만들어 성벽 앞에 늘어놓았다. 화차로 성의 동남쪽 모퉁이의 대루를 태우려 했으나, 성벽 위에서도 불을 질러 공성 도구를 불태웠다. 토산을 쌓아 성에 접근하려 했으나, 지하도가 만들어져 토산을 무너뜨렸다. 송의가 반란군에게 항복하여 현무호의 물을 끌어내어 대성에 쏟았다. 남안의 민가와 사찰이 불탔다.
유중례, 위찬, 진문철, 이효흠 등이 건강 구원을 위해 왔다. 소사와 배지고도 장강을 건넜다. 유중례는 주작항 남쪽, 배지고는 남원, 위찬은 청당, 진문철과 이효흠은 단양군, 소사는 소항 남쪽에 진영을 두고 진회하 둑에 책을 세웠다. 후경은 위찬의 진영을 공격하여 위찬의 목을 베어 성 아래에 내걸었다. 유중례는 중상을 입었다.
소륜과 임성공 소대련 등이 동도에서 남안에 집결했다. 소역은 소방등, 오엽, 범문교를 보내 건강을 구원하게 하여 상자안 앞에 진영을 두었다. 이천사와 양아인도 병사를 이끌고 도착했다. 소사, 소확, 양아인, 이천사, 범문교가 진회하를 건너 반란군의 동부성 앞 책을 공격하여 격파했다. 소사 등은 청계수 동쪽에 진영을 맺었다. 후경은 송자선을 남평왕의 저택에 주둔시키고, 수변 서쪽에 책을 세워 막았다.
후경의 군대는 식량이 떨어져 굶주렸다. 동성에는 식량이 있었지만, 제후들의 원군에 의해 차단되었다. 건강성 안에도 쌀 40만 곡의 비축이 있었지만, 물고기, 소금, 땔감이 부족했다. 상서성 건물을 부수어 땔감으로 사용하고, 말을 도살하여 먹었다. 반란군이 수원에 독을 넣자 부어오름병이 유행하여 성 안의 병사 사망자는 과반수를 넘었다. 양간이 병사했다.
549년 1월, 후경은 강화 조약을 요청했지만, 무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태자 소강의 간언으로 무제는 이를 받아들였다. 후경은 강우 4주의 할양과 소대기를 인질로 요구하고, 포위를 풀고 장강을 북쪽으로 건너는 조건을 제시했다. 후경은 우자열과 왕위를 인질로 삼는 것을 허락했다. 부기는 소대기가 태자의 적자라는 이유로 거부하고, 석성공 소대관을 보낼 것을 요청했다. 2월, 서화문 밖에 단을 설치하고, 왕극, 소소, 소사가 후경 측의 우자열, 왕위와 함께 맹세했다. 류진이 서화문 밖으로 나오자, 후경이 희생된 소의 피를 마셨다.
남연주 자사 남강사왕 소회리, 소퇴, 소욱이 이끄는 병사 3만 명이 邛州에 도착했다. 후경은 이 군대가 백하성에서 장강으로 가는 길을 끊을 것을 두려워하여 진회하 남안으로 이동할 것을 요구했다. 무제는 후경의 요구를 받아들여 소회리 등을 강담원에 진군시켰다. 그러나 후경은 화약의 조건을 지키지 않고, 건강의 포위를 풀지 않았다.
3. 2. 건강 함락과 무제의 죽음
548년, 동위와의 협상 과정에서 동위로 반환될 위기에 처한 후경은 자신의 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초기에는 800여 명의 정예병으로 시작했으나, 강제 징집, 해방 노예, 양나라 귀족 사회의 모순으로 생계를 위협받던 농민들을 규합하여 대군을 형성했다. 후경은 양나라 수도 건강을 포위했고, 무제와 태자는 각지의 왕들에게 지원군을 요청했으나, 서로 견제한 탓에 이듬해 건강이 함락되고 무제는 사로잡혀 쇠약사했다.후경은 건강 함락에 어려움을 겪자 공격을 중단하고 장기 포위망을 구축, 중령군 주이 등의 처형을 요구했다. 건강의 관군은 "후경의 목을 베는 자에게는 후경의 관직과 돈 1억만, 비단 1만 필, 여자 악사 2부를 하사한다"는 내용의 화살을 성 밖에 쏘았다.
548년 11월, 후경은 소정덕을 황제로 옹립하고 연호를 정평으로 고쳤다. 후경은 상국·천주장군이 되고 소정덕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후경은 동부성을 공격, 백 척 누차를 설치해 성벽을 무너뜨려 함락시켰다. 동부성 관리들은 발가벗겨진 채 살해되었고, 사망자는 2천여 명이었다. 남포후 소추도 이때 살해되었다. 후경은 소정덕의 아들과 노휘략에게 동부성 수비를 맡겼다.
후경은 건강성 동서쪽에 토산을 쌓았고, 성 안에서도 맞대응했다. 초기에 재물을 약탈하지 않던 후경은 포위가 길어지자 병사들에게 약탈을 허용하고, 백성을 동원해 구타와 채찍질을 가하며 토산 작업을 강요했다. 후경의 의동 범도봉은 관군 투항을 요청하다 발각되어 살해되었다.
소릉왕 소륜은 조백초(趙伯超)등과 3만 군세로 종산에 주둔했다. 후경은 1만여 명으로 막았으나 격파당하고 복주산 북쪽으로 물러났다. 소륜은 대기했으나 후경은 공격하지 않았다. 해가 질 무렵 후경이 퇴각하려 하자 남안후 소준이 기병 수십 기로 공격했고, 후경은 반격해 소준을 격퇴했다. 조백초는 소준의 급보에도 지원하지 않고 도주, 소륜의 군대는 붕괴되었다. 소륜은 경구로 도주했고, 반란군은 군수품을 노획하고 수백 명을 참수, 천여 명을 생포했다. 후경은 포로들을 건강성 아래 보내 소릉왕이 사로잡혔다고 거짓말하게 했다. 곽준은 홀로 "왕은 패했지만 경구로 귀환 중이며, 성을 지키면 원군이 올 것"이라 말해 후경의 감탄을 자아냈다.
파양세자 소사(蕭嗣)와 배지고는 채주에 진을 쳤고, 후경은 남안에 주둔했다.
12월, 후경은 각종 공성 도구를 동원했다. 화차로 성의 대루를 태우려 했으나 실패했고, 토산을 쌓아 접근하려 했으나 지하도로 인해 무너졌다. 재관장군 송의는 반란군에 항복, 현무호의 물을 대성에 쏟아붓는 계책을 썼다. 남안의 민가와 사찰이 불탔다.
유중례, 위찬(韋粲)등이 건강 구원을 위해 왔다. 유중례는 주작항 남쪽, 배지고는 남원, 위찬은 청당, 진문철과 이효흠은 단양군, 파양세자 소사는 소항 남쪽에 진을 치고 진회하 둑에 방책을 세웠다. 후경은 위찬의 보루가 허술한 틈을 타 공격, 위찬을 베어 성 아래 내걸었다. 유중례는 갑옷도 못 입고 달려들어 항전, 수백 명을 참수했으나 중상을 입었다.
소릉왕 소륜과 소대련(蕭大連)등은 남안에 집결했다. 상동왕 소익은 소방등(蕭方等)등을 파견, 상자안 앞에 진을 쳤다. 이천사와 양아인도 도착했다. 파양세자 소사 등은 진회하를 건너 반란군을 격파, 청계수 동쪽에 진을 쳤다. 후경은 송자선을 남평왕 저택에 주둔시키고 수변 서쪽에 방책을 세웠다.
후경군은 식량이 부족했고, 동성에는 식량이 있었으나 원군에 의해 차단되었다. 건강성 안에도 쌀 40만 곡이 있었으나 물, 소금, 땔감이 부족했다. 상서성 건물을 부숴 땔감으로 썼고, 말을 도살해 먹었다. 반란군의 수원 독살로 부종병이 유행, 성 안 병사 절반 이상이 사망했다. 양간이 병사했다.
549년 1월, 후경은 강화를 요청했으나 무제는 거부했다. 태자 소강의 간언으로 무제는 수락, 후경은 강우 4주 할양과 선성왕 소대기를 인질로 요구했다. 후경은 우자열과 왕위를 인질로 보냈다. 부기는 소대기가 태자 적자라며 석성공 소대관을 대신 보낼 것을 요청, 합의했다. 2월, 서화문 밖에 단을 설치하고 화약을 맹세했다. 류진이 나오자 후경은 거리를 두고 마주하며 희생된 소의 피를 마셨다.
남강사왕 소회리등 3만 명이 邛州에 도착했다. 후경은 이들이 장강 길을 끊을까 두려워 진회하 남안 이동을 요구, 무제는 수락했다. 후경은 약속을 어기고 건강 포위를 풀지 않았다.
3월 1일, 성 안에서 후경이 맹약을 어겼다며 봉화를 올리고 북을 쳤다. 양아인 등이 동부성 북쪽으로 진군했으나 송자선(宋子仙)에게 패배, 수천 명이 사망했다. 수급은 성 아래 전시되었다.
후경은 다시 강화를 요청했다. 심준(沈浚)은 후경에게 물러설 뜻이 없음을 꾸짖었다. 후경은 격노, 석궐 앞 물을 흘려보내고 밤낮없이 공격, 3월 건강은 함락되었다.
후경은 무제와 회견, 무제의 당당함에 위축되었다. 무제는 후경에게 병력 수를 물었고, 후경은 처음에는 천 명, 포위 시에는 십만, 지금은 천하를 가졌다고 답했다.
후경은 성 안의 물품과 후궁을 약탈하고, 왕후와 조신들을 가두고 무제와 태자의 시위를 해임했다. 왕위에게 무덕전을, 우자열에게 태극동당을 지키게 했다. 무제의 조서를 위조해 대사령을 내리고, 스스로 대도독, 중외제군사, 록상서사가 되었다. 성 안 시체는 매장할 틈 없이 태워져 냄새가 수십 리에 달했다. 포정(鮑正)은 산 채로 불태워졌다. 건강 구원군은 철수했다. 후경은 소정덕을 강등시키고 백관을 복귀시켰다.
후경은 동소선에게 광릉을 공격하게 했고, 소회리가 항복했다. 후경은 동소선을 남연주 자사로 삼았다.
소지(蕭祗)와 소퇴는 동위로 망명했다. 후경은 소롱장을 북연주 자사로 삼았으나 백성이 막았다. 후경은 구자영과 양해를 보냈으나 양해가 구자영을 죽이고 동위에 항복, 동위가 회음을 점령했다.
후경은 우자열과 장대흑을 오군에 보냈고, 원군정(袁君正)이 항복했다. 이들은 백성을 괴롭혔고, 오군 사람들은 저항했다.
후경은 서주성에 주둔했다. 임약(任約)을 남도행대로 삼아 고숙에 주둔시켰다.
5월, 무제가 문덕전에서 사망했다. 무제는 건강 함락 후 식사 제한과 우울함으로 사망했다.
3. 3. 후경의 전횡과 황제 옹립, 폐위
548년 후경은 반란을 일으켜 양나라의 수도 건강을 포위했다. 이듬해 건강을 함락시키고 무제를 쇠약사하게 만들었다.[1] 551년 간문제를 옹립했다가 살해하고 소동을 제위에 올린 뒤 선양을 받아 황제에 올랐다.[2]후경은 건강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손실이 커지자 공격을 중단하고 장기간의 포위망을 구축하여 안팎을 차단했다. 한편 건강에 웅거한 관군은 성 밖에 "후경의 목을 베는 자에게는 후경의 관위를 주고, 돈 1억만과 비단 1만 필, 여악 2부를 하사한다"는 내용이 적힌 화살을 쏘아 보냈다.
548년 11월, 후경은 소정덕을 황제로 옹립하고 의현당에서 즉위시켰다. 연호를 정평으로 고치고, 스스로 상국·천주장군이 되었으며, 소정덕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이후 동부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는데, 이때 성 안의 문무 관리 2천 명 남짓이 살해당했다.
후경은 건강성 동서쪽에 성 안을 내려다볼 수 있는 토산을 쌓았다. 성 안에서도 이에 맞서 왕공 이하가 모두 흙을 져서 두 개의 산을 쌓았다. 처음에는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지 않았으나, 건강 포위가 길어지고 관군의 원군 집결을 두려워하게 되자 병사들에게 마음대로 약탈하게 하고, 자녀와 처첩을 군영으로 끌어들이게 되었다. 토산을 쌓으면서는 귀천을 가리지 않고 백성을 동원하여 구타와 채찍질을 가하며 밤낮없이 일하게 했다.
549년 3월 1일, 성 안에서는 후경이 맹약을 어겼다고 하여 봉화를 올리고 북을 쳐 소란을 피웠다. 후경은 다시 강화 조약을 요청했으나, 어사중승 심준(沈浚)은 후경에게 물러설 뜻이 없음을 강하게 꾸짖었다. 후경은 격노하여 즉시 석궐 앞에서 막고 있던 물을 흘려보내고, 밤낮으로 쉬지 않고 사방에서 성을 공격하여 3월 정묘일에 건강을 함락시켰다.
후경은 입성하여 무제와 회견했으나, 무제의 당당한 태도에 위축되어 말을 더듬었다. 성 안의 수레, 복식, 문물, 후궁의 빈첩들을 모조리 약탈하고, 왕후와 조신들을 수감하고 무제와 황태자의 시위를 해임했다. 무제의 조서를 위조하여 천하에 대사령을 내리고, 스스로 시중(侍中), 사지절, 대승상, 하남왕, 대도독, 중외제군사, 록상서사가 되었다. 성 안의 시체는 매장할 틈도 없이 모아 태워버렸는데, 그 냄새가 수십 리에 달했다. 이후 소정덕을 강등시키고, 양나라 백관들을 모두 복직시켰다.
549년 5월, 무제가 사망했다. 후경은 무제의 죽음을 숨기고 상을 치르지 않다가 20여 일 뒤에 황태자 소강을 황제로 즉위시켰다. (간문제). 같은 해 6월, 소정덕을 살해했다. 8월에는 상동왕 소역이 왕승변에게 병사를 주어 형주로 접근하게 하자, 스스로 지위를 상국으로 높이고 태산군 등 20개 군을 봉하여 한왕이 되었으며, 검여상전, 입조불추, 찬배불명의 특권을 얻었다. 10월에는 간문제의 침실에 출입하며 후경 일당의 통제를 받지 않던 무림후 소자가 살해당했다. 후경은 스스로 우주대장군, 도독육합제군사를 더했는데, 간문제가 "장군에 우주의 호칭이 있느냐"고 놀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551년 1월, 후경은 여러 신하들을 임명했다. 8월에는 간문제를 폐위하여 진안왕으로 강등시키고 영복성에 유폐했다. 황태자 소대기 등 20명을 살해했다.
3. 4. 각지의 저항과 후경의 패배
551년 8월, 후경은 간문제를 폐위하고 예장왕 소동을 황제로 옹립했으나, 실권은 여전히 후경이 쥐고 있었다.[4] 각지에서는 후경에 대한 저항이 계속되었다.- 왕승변의 반격: 소역은 왕승변에게 대군을 주어 건강을 공격하게 했다.
- 동양에서의 귀순: 후경의 사공 유신무 등은 동양에서 소역에게 귀순했다. 소역은 이들을 활용하여 후경에게 저항했다.
- 장표의 봉기: 장표는 영가군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는 등 후경에게 저항했다.
10월, 후경은 팽준 등을 시켜 간문제를 살해했다. 11월에는 소동에게 선양을 강요하여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를 한(漢)으로 변경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칼을 떨어뜨리거나 토끼가 나타나는 등 불길한 징조가 계속되었다고 전해진다.
12월, 사답인 등은 건덕에서 소역에게 귀순했던 원윤 등을 사로잡아 처형했다.
4. 결과 및 영향
후경의 난은 양나라뿐만 아니라 남조 전체에 걸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난의 전개 과정과 진압 이후의 상황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남조 사회의 혼란과 파괴후경의 군대는 건강을 함락하는 과정에서 무자비한 약탈과 살육을 자행했다. 성 안의 수레, 복식, 진귀한 물건들은 물론 후궁의 여인들까지 모조리 약탈당했다. 왕족과 귀족들은 감금되었고, 백성들의 시체는 제대로 수습되지 못한 채 불태워져 그 냄새가 수십 리에 달했다.[3] 건강 함락 이후에도 후경의 군대는 오군 등지에서 약탈과 만행을 일삼아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3]
2. 양나라 황실의 권위 추락과 내분무제는 건강 함락 이후 식사를 제한받는 등 굴욕적인 대우를 받다가 결국 사망했다.[3] 이후 후경은 간문제와 소동을 차례로 옹립했다가 폐위시키고 살해하는 등 황실의 권위를 철저히 짓밟았다.[3] 각지에 주둔하던 양나라 종실 왕들은 서로를 견제하며 적극적으로 후경 진압에 나서지 않았고, 이는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1]
3. 북조의 개입과 남조의 분열 심화후경의 난은 북조 세력에게 남조에 개입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동위는 후경을 공격하여 하남을 되찾았고, 북제는 후경의 난을 틈타 남진을 시도했다.[1] 이러한 북조의 개입은 남조 내부의 분열을 더욱 심화시켰다.
4. 후경의 최후552년 후경이 왕승변과 진패선에게 패배하고 도망 중 부하에게 살해되면서 난은 종결되었다.[3] 왕승변은 후전에게 후경을 추격하게 했다. 후경은 오군, 가흥을 거쳐 송강에 이르렀다. 후전 군대가 오자 후경 병사들은 항복했다. 결국 후경은 복심 수십 명과 배를 몰아 도주하다 양곤에게 살해당했다.[3]
4. 1. 양나라의 쇠퇴와 남조의 몰락
547년 고환이 죽고 아들 고징이 대승상을 계승하자 후경은 하남 13주를 가지고 양나라에 귀순했다. 양나라 무제는 후경의 영지를 접수하려 했으나 동위의 모용소종에게 패배했다. 548년, 후경은 양나라와 동위의 협상 과정에서 자신이 동위로 반환될 위기에 처하자 난을 일으켰다. 강제 모병, 해방 노예, 농민들을 규합하여 대군을 이끌고 양나라 수도 건강을 포위, 함락하고 무제를 사로잡아 죽게 만들었다.[1]건강을 장악한 후경은 간문제를 옹립했다가 551년 살해하고 소동을 즉위시킨 뒤, 선양받아 황제가 되었다.[1] 각지의 왕들 중 가장 강력했던 형주자사 소역은 왕승변에게 대군을 주어 건강을 공격했고, 552년 후경은 도망 중 부하에게 살해당했다.[1]
후경은 장강 하류를 평정하고 중류의 소역과 대결했지만, 552년 왕승변과 진패선에게 패배하여 도망 중 부하에게 살해당했다. 후경의 반란은 종식되었지만, 강남 사회에 큰 혼란을 야기하여 남조의 쇠퇴를 결정지었다.[2]
552년 1월, 후경은 곽원건과 후자감에게 북제에 대한 병력 시위를 하게 했으나, 소익 군대의 접근 소식에 퇴각했다. 동남방에서는 사답인이 유신무를 공격하여 우세를 보였다.[3]
왕승변이 무호로 오자 후경 측 성주는 도주했다. 후경은 사안화 등에게 고숙의 후자감을 돕게 했으나 건강으로 돌아왔다. 3월, 후경은 고숙에서 둔전을 순시했고, 후자감은 왕승변을 얕보고 출격했다가 대패했다.[3]
왕승변이 장공주에 숙영하자, 후경은 석두성과 주작항에 이르는 책을 세웠다. 왕승변은 석두성 서쪽에 진영을 연결하고 낙성돈에 이르렀다. 후경은 석두성 동북쪽에 책을 세워 지켰다. 왕승변은 부친의 묘를 파헤치고 유골을 불태웠다. 왕승변 등은 석두성 북쪽으로 진격했고, 후경은 진을 펴고 싸움을 걸었으나 격파당했다. 후자감 등은 도망쳤고, 노휘략 등은 항복했다.[3]
후경은 건강 궁전을 버리고 동쪽으로 도주했다. 왕위도 대성을 버리고 도주했고, 후자감 등은 광릉으로 도망쳤다.[3]
왕승변은 후전에게 후경을 추격하게 했다. 후경은 오군, 가흥을 거쳐 송강에 이르렀다. 후전 군대가 오자 후경 병사들은 항복했다. 후경은 복심 수십 명과 배를 몰아 도주하다 양곤에게 살해당했다. 후경의 수급은 강릉으로 보내졌고, 목 아래 몸은 건강 시장에 전시되어 훼손되었다. 강릉에 보내진 수급은 소익 명에 따라 전시된 후 끓여 옻칠하여 무고로 보내졌다.[3]
4. 2. 진패선의 등장과 진나라 건국
552년 왕승변과 진패선이 군사를 이끌고 건강을 공격하자, 후경은 도망가던 중 부하에게 살해당했다.[4] 이후 왕승변은 소역의 명에 따라 후경의 수급을 강릉으로 보냈고, 목 아래의 몸은 건강의 시장에 전시했다.[4] 후경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들이 그의 살을 깎아내고, 남은 뼈도 불태워 술과 섞어 마셨다고 한다.[4]소역은 왕승변을 시켜 후경을 토벌한 뒤, 554년 서위에게 옹립된 괴뢰 황제 소찰을 공격하여 죽이고 건강에서 황제로 즉위했다. 소역은 자신의 정통성을 위해 후경의 잔당을 소탕하고, 서위를 공격하는 등 적극적인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소역은 지나치게 학문에 몰두하고 정치를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었다. 또한, 자신의 형제들을 의심하고 견제하여 왕실 내부의 분열을 초래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555년 서위의 침공을 받게 되었고, 결국 소역은 사로잡혀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소역이 죽은 뒤, 왕승변은 북제와 협상하여 북제의 지원을 받는 소연명을 황제로 옹립했다. 그러나 진패선은 이에 반발하여 왕승변을 공격하여 죽이고, 소연명을 폐위시킨 뒤 경제를 옹립했다.
557년, 진패선은 경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황제에 올라 진나라를 건국했다. 진패선은 후경의 난으로 피폐해진 남조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귀족 세력을 억제하고, 농업 생산력을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북제와 화친하여 외교 관계를 안정시켰다.
진패선은 비록 찬탈을 통해 황제가 되었지만, 후경의 난 이후 혼란을 수습하고 남조의 명맥을 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남조는 잠시나마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4. 3. 강남 사회의 변화
후경은 동위의 권신 고환의 유력한 무신 중 한 명이었으나, 고환 사후 동위를 떠나 남조 양에 항복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양나라 무제가 동위와 결탁했기에, 고립을 두려워한 후경은 548년에 반란을 일으켜 양나라의 수도 건강을 포위했다. 이듬해 건강을 함락시키고 무제를 횡사시켰다. 간문제와 예장왕 소동을 연이어 옹립했으며, 마침내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한(漢)으로 했다. 후경은 장강 하류 유역을 평정하고, 중류 유역에 세력을 펼치던 상동왕 소역과 대결했지만, 552년 소역이 파견한 왕승변과 진패선 등에게 패배하여, 도망 중 부하에게 살해당했다. 후경의 죽음으로 그의 반란은 종식되었지만, 강남 사회를 대혼란에 빠뜨린 상처는 깊었고, 이후 남조의 쇠퇴를 결정지었다.5. 평가
가와카츠 요시오는 후경이 건강 공략에 성공한 이유에 대해 다음 세 가지를 꼽았다.[5]
- 그가 수도 및 그 주변의 실업자들을 선동할 수 있었던 것
- 양 제국의 군대 자체가 내부분열에 직면해 있었던 것
- 관료나 귀족 등, 긴급사태에 대처하여 사람 위에 지휘해야 할 입장에 있는 자들이 놀라울 정도로 유약해져 있었던 것
모리 미키사부로는 "후경의 기습 작전, 도강 작전이 성공한 것은, 오로지 임하왕의 획책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최대의 적은 다름 아닌 궁정 내부에 잠복해 있었던 것이다"[6]라고 말하며, "양의 멸망은, 문약함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사실 사람들의 화합을 얻지 못했던 데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었다"[7]라고 설명했다.
아이다 다이스케는 "아무래도 후경은, 관제는 북조(특히 동위), 의례는 남조라는 키메라와 같은 체제 구축을 꾀했던 것 같다"[8]라고 평가했다.
요시카와 타다오는 "후경의 난이 질풍과 같이 휩쓸고 지나갔을 때, 강남의 귀족 사회는 황폐함에서 다시 일어설 기력을 잃어버린 듯하다"[9]라고 평가했다.
참조
[1]
서적
北斉書』巻2 神武紀下
[2]
서적
『魏書』巻12 孝静紀
[3]
서적
『梁書』巻42 傅岐伝
[4]
서적
『梁書』巻4 簡文帝紀
[5]
서적
魏晋南北朝
講談社学術文庫
2003
[6]
서적
仏教王朝の悲劇 梁の武帝
法蔵館文庫
2021
[7]
서적
梁の武帝
[8]
서적
南北朝時代 五胡十六国から隋の統一まで
中公新書
2021
[9]
서적
侯景の乱始末記 南朝貴族社会の命運
中公新書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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