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 (남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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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나라는 502년 소연(양 무제)이 건국한 남조의 왕조이다. 무제는 48년간의 통치 기간 동안 내정을 정비하고 불교를 장려하여 태평성대를 이루었으나, 후반기에는 불교에 지나치게 심취하여 국고를 낭비했다. 548년 후경의 난으로 수도 건강이 함락되고 무제가 사망하면서 양나라는 분열되었고, 여러 황제가 옹립되는 혼란을 겪었다. 결국 557년 경제가 진패선에게 선양하면서 멸망하고 진나라가 건국되었다. 양나라는 문학, 예술 분야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였으며, 외교적으로는 페르시아 등과 교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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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량은 6세기 중엽 소찰이 세운 국가로, 강릉 주변을 통치하며 북방 왕조의 제후국 역할을 수행했지만 양나라 문화를 계승하여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 양 (남조) - 후경의 난
후경의 난은 548년에서 552년 사이 후경이 양 무제를 배반하고 일으킨 반란으로, 건강 함락과 양 무제 사망 등 양나라에 큰 혼란을 야기하며 강남 사회를 황폐화시키고 남조의 쇠퇴를 가속화했다. - 남조 (중국) - 남제
남제는 소도성이 유송으로부터 선양받아 건국한 남조 시대의 왕조로, 고제와 무제 시대에는 안정적인 통치를 보였으나 황족 간의 권력 다툼과 폭정으로 혼란해져 소연에 의해 멸망했다. - 남조 (중국) - 후량 (남조)
후량은 6세기 중엽 소찰이 세운 국가로, 강릉 주변을 통치하며 북방 왕조의 제후국 역할을 수행했지만 양나라 문화를 계승하여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양 (남조)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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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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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칭 | 남량 |
공식 명칭 | 양 (梁) |
존속 기간 | 502년 4월 30일 ~ 557년 11월 16일 |
정치 체제 | 군주제 |
수도 | 건강 (502년–552년, 555년–557년) 강릉 (552년–555년) |
통화 | 중국 엽전 (태청 풍락전) |
현재 국가 | 중국 베트남 |
역사 | |
주요 사건 | 후경에 의해 건강 함락 (549년 4월 24일) 강릉이 서위에 함락 (555년 1월 7일) 경제가 진패선에게 선양 (557년 11월 16일) |
이전 | 남제 |
이후 | 진 북제 서위 후량 (555년–587년) |
역대 황제 | |
황제 | 무제 (502년–549년) 간문제 (549년–551년) 원제 (552년–555년) 경제 (555년–557년) |
2. 역사
남제 말기, 동혼후의 폭정으로 많은 대신들이 살해되었고, 옹주자사 소의의 동생 소연은 군사를 일으켜 건강을 함락하고 동혼후를 살해한 뒤 화제를 옹립했다. 502년, 소연은 화제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아 양나라를 건국하니, 이가 곧 무제이다.
무제는 48년간 통치하며 내정을 정비하고 불교를 장려하여 국내를 안정시켰으며, 문화를 번성케 했다. 대외 관계도 평온하여 약 50년간 태평성대를 유지, 남조 역사상 최전성기를 이끌었다. 그러나 치세 후반, 불교에 지나치게 심취하여 국고를 탕진하고, 548년 후경의 난이 일어나 수도 건강이 함락되고 무제는 사로잡혀 사망했다.
후경은 간문제를 허수아비 황제로 세웠다가 551년에 살해하고, 소동을 황제로 세운 뒤 선양받아 황제가 되었다. 형주자사 소역이 왕승변을 보내 후경을 죽였지만, 이 혼란을 틈타 서위가 익주를 점령하고 양양을 차지했다. 554년에는 강릉을 함락하고 원제를 죽인 뒤 주민들을 관중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555년, 왕승변은 북제의 압력으로 소연명을 황제로 옹립했지만(민제), 진패선이 반대하여 왕승변을 죽이고 민제를 폐위시킨 뒤 원제의 아들 소방지를 황제로 세웠다(경제). 557년, 경제는 진패선에게 선양하여 양나라는 멸망하고 진나라가 건국되었다.
547년, 페르시아 사절단이 양(梁)에 조공을 바쳤고, ''양서''에는 페르시아에서 기원한 호박이 기록되었다.[4]
2. 1. 건국
남제 말기 황제였던 동혼후는 폭정을 해 많은 대신들을 살해했고, 먼 친척인 소의를 살해했다. 옹주자사로 양양에 있던 소의의 동생 소연은 폭군을 처단한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켜 건강을 함락한 뒤 동혼후를 살해하고 화제를 옹립했다. 502년에 소연은 화제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아 양나라를 건국하니 그가 바로 무제이다.[1]
남조 제 건국자 소도성의 종형제 소순지의 아들 소연은 남조 제의 황제 동혼후의 폭정으로 형 소의가 살해된 것에 분노하여 501년에 형주상양군에서 번진, 호족, 토호들을 규합하여 거병하고, 건강으로 진격하여 동혼후와 측근들을 숙청했다. 소연은 신제로서 동혼후의 동생 화제를 옹립하고, 502년에 화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양'''을 건국했다.
2. 2. 무제의 치세와 번영
남제 말기, 동혼후는 폭정을 일삼아 많은 대신들을 살해했고, 먼 친척인 소의마저 제거하려 했다. 이에 옹주자사로 양양에 있던 소의의 동생 소연은 군사를 일으켜 건강을 함락하고 동혼후를 살해한 뒤 화제를 옹립했다. 502년, 소연은 화제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아 양나라를 건국하니, 이가 곧 무제이다.무제는 48년이라는 긴 통치 기간 동안 내정을 정비하고 불교를 장려하여 국내를 안정시켰으며, 문화를 번성케 했다. 대외 관계도 비교적 평온하여 약 50년간 태평성대를 유지, 남조 역사상 최전성기를 이끌었다. 무제의 맏아들 소명태자가 편찬한 《문선》은 후대에까지 전해지는 훌륭한 문헌으로 평가받는다.
무제는 남조 송이나 제나라 시대에 쇠퇴한 민생을 회복하고자 적극적인 정치 개혁을 단행했다. 창업 초기 천감 연간에는 구품관인법 개정, 양률 반포, 조세 경감 등의 정책으로 치세를 안정시켜 남조의 전성기를 열었다. 또한 뛰어난 문인이기도 했던 무제는 기존 귀족 자제들이 들어가는 국자학 외에 한문 자제들을 위한 교육 시설로 오관을 새롭게 설치하는 등 학문을 장려하여 문화적 번영을 이끌었다. 무제의 장남 황태자 소통(소명태자)의 『문선』, 소통 사후 황태자가 된 소강(후의 간문제) 등이 편찬한 궁체시를 수록한 『옥대신영』은 이 시기에 편찬되었다.
군사적으로는 대통 원년(527년)에 조중종, 위방, 진경지 등에게 북벌을 명하여 북위의 대군을 격파했다. 대통 3년(529년), 북위의 북해왕 원호가 망명해오자 진경지에게 그를 북위에 보내도록 명했고, 진경지는 7천 명의 적은 병력으로 낙양을 함락시켰다. 비록 곧 북위의 이주영에게 낙양을 빼앗겼지만, 이는 남조의 마지막 북벌 성공 사례(낙양, 장안 두 도읍 중 하나를 탈환)로 기록된다. 대동 11년(545년) 6월에는 진패선, 양표, 소발 등에게 명하여 만춘을 건국한 리본을 토벌하는 등 일정한 군사적 공적을 남겼다.
그러나 50년에 가까운 치세 후반, 무제는 불교에 지나치게 심취하여 동태사(同太寺)에 여러 차례 사신하는 무모한 행동을 반복했다. 그때마다 신하들은 막대한 돈을 들여 무제를 திரும்ப 데려와야 했기에 국고는 크게 궁핍해졌다.
이러한 과도한 불교 보호와 경제 정책 실패는 재정 상황을 악화시켰고, 귀족층의 실무 기피와 부상한 한문 측근의 전횡은 관리 기강 해이를 초래하는 등, 번영의 그늘 아래 사회 불안을 심화시켰다.
2. 3. 무제의 실책과 쇠퇴
무제는 50년 가까이 재위하면서 나라를 안정시키고 문화를 발전시키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치세 후반에는 여러 실책을 저질러 나라가 쇠퇴하는 원인을 제공했다.무제는 불교에 지나치게 심취하여 동태사(同太寺)에 여러 번 사신(捨身)하는 무모한 행동을 반복했다.[3] 신하들은 막대한 돈을 들여 무제를 다시 데려와야 했기 때문에 국고가 크게 탕진되었다.[3]
548년에는 동위에서 투항해 온 후경이 반란을 일으켜 수도 건강을 함락시키고 무제를 사로잡았다(후경의 난).[4] 무제는 결국 굶어 죽었고, 각지에 있던 왕들은 서로 견제하느라 황제를 구출하지 않았다.[4]
후경은 간문제를 허수아비 황제로 세웠다가 551년에 살해하고, 예장왕 소동을 황제로 세운 뒤 선양받아 황제가 되었다.[4] 형주자사 소역이 왕승변을 보내 후경을 죽였지만, 이 혼란을 틈타 서위가 익주를 점령하고 양양을 차지했다.[5] 554년에는 강릉을 함락하고 원제를 죽인 뒤 주민들을 관중으로 강제 이주시켰다.[5]
555년, 왕승변은 북제의 압력으로 소연명을 황제로 옹립했지만(민제), 진패선이 반대하여 왕승변을 죽이고 민제를 폐위시킨 뒤 원제의 아들 소방지를 황제로 세웠다(경제).[6] 557년, 경제는 진패선에게 선양하여 양나라는 멸망하고 진나라가 건국되었다.[6]
이처럼 무제의 실책과 후경의 난, 그리고 이어진 혼란으로 남조는 급격히 쇠퇴하였다.
2. 4. 후경의 난과 멸망
548년 동위의 항장 후경이 양나라에 귀순을 신청했지만, 양나라가 동위에 패하면서 궁지에 몰렸다. 후경은 반란을 일으켜 549년 건강을 함락시키고 무제를 사로잡아 유폐시켰다. 무제는 유폐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4] 무제의 장기간에 걸친 치세로 인해 양나라의 종실들은 내분에 휩싸여 적극적으로 황제 구출에 나서지 않았다.후경은 간문제를 허수아비 황제로 옹립했지만, 각지의 번진은 이에 따르지 않았다. 무제의 일곱째 아들 소역은 형주에서 세력을 확대하여 후경과 대치했다. 551년 후경은 간문제를 살해하고 소동을 황제로 옹립한 뒤 선양받아 국호를 '''한'''으로 정하고 황제에 즉위했다.
그러나 양의 황족들은 후경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552년 소역은 왕승변과 진패선에게 군사를 주어 후경을 토벌하고 양나라 황제로 즉위했다(원제). 소역은 황폐화된 건강을 버리고 강릉으로 수도를 옮겼다. 이 혼란을 틈타 서위가 양나라를 침공하여 익주를 점령하고, 554년에는 강릉을 함락시켜 원제를 죽였다.
건강에 주둔하던 왕승변은 555년 북제의 압력으로 소연명을 황제로 옹립했으나, 진패선이 반대하여 왕승변을 죽이고 원제의 아들 소방지를 옹립했다. 557년 경제는 진패선에게 선양하여 양나라는 멸망하고 진나라가 건국되었다.
2. 5. 양나라의 분열과 멸망
548년 동위의 무장이었던 후경이 반란을 일으켜 수도인 건강으로 진격했다(후경의 난).[4] 다음 해 건강이 함락되었고, 무제는 사로잡힌 뒤 쇠약해져 죽었다. 각지에 분봉되었던 종실의 여러 왕들은 서로 견제한 결과, 모두 황제의 구출에 나서지 않았다. 후경은 간문제를 옹립했다가 551년에 간문제를 살해하고 예장왕 소동을 제위에 올린 뒤 선양을 받아 황제에 올라 건강에서 즉위했다. 형주자사 소역은 왕승변에게 대군을 주어 건강을 공격해 후경을 죽였다.소역은 즉위한 뒤 황폐화된 건강을 버리고 강릉으로 수도를 옮겼다. 그가 바로 원제이다. 그러나 이 혼란을 틈타 남정에 나선 서위는 익주자사 무릉왕 소기와 원제의 대립을 틈타 익주를 점령했다. 또한 양양을 바치고 투항해온 소찰을 이용하여 554년 강릉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뒤 원제를 죽였고 그곳의 주민들을 관중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건강의 파괴와 강릉의 함락은 남조의 귀족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한편, 후경의 난을 평정한 이후 건강에 주둔하던 왕승변은 555년 북제의 압력에 정양후 소연명을 맞이하여 옹립하였으나(민제), 진패선이 이에 반대하여 군사를 일으켜 왕승변을 죽이고 민제를 퇴위하게 한 뒤, 원제의 아들 진안왕 소방지를 옹립하니 그가 바로 경제이다. 557년에 경제는 진패선에게 제위를 선양하니, 양나라는 멸망하였고 진패선의 진나라가 건국되었다.
2. 6. 잔존 세력
양나라의 유력 장군이었던 왕림은 진나라 건국과 진패선의 황제 즉위를 인정하지 않고, 북제에 인질로 잡혀 있던 영가왕 소장 (원제의 장남인 소방등의 아들)을 영주에서 양나라 황제로 즉위시켰다. 왕림과 소장에 의해 부흥된 양나라는 장강 중·상류 유역을 세력 범위로 하여 진나라와 대립했다. 그러나 560년 진나라에 패배하여, 소장과 왕림은 북제로 망명했다. 북제는 소장에게 양왕을 칭하게 했으나, 곧 북제 자체가 멸망하면서 양나라 부흥은 이루어지지 않았다.[4]
진나라 건국 단계에서도 강릉 부근을 통치하는 후량은 존속하고 있었다. 후량은 서위와 이를 대체한 북주·수나라의 괴뢰 정권이었지만, 후주 소종까지 3대나 이어져 587년 수나라 문제에 의해 폐지되었다.
수말당초의 전란 시기에 후량 선제 소찰의 증손인 소선이 자립하여, 618년 양나라 황제를 칭했다. 그러나 이 정권도 621년 당나라에 의해 멸망했다.[4]
양나라 무제는 귀족 자제들이 입학하는 국자학과 오경에 정통한 박사 관리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오관이라는 학교를 설립했다.[1] 오관은 단순한 교육 기관이 아니라 시험을 통해 관리를 등용하는 관리 양성소의 성격을 띠었다.[2] 이는 훗날 수나라에서 시작되는 과거의 기원이 되었으며, 무제는 신분에 관계없이 재능에 따라 관리를 등용했다.[3]
3. 정치
3. 1. 중앙 정치
남조 송(南朝宋)과 제(齊) 시대에는 많은 황족들이 왕조 내의 내분과 찬탈 과정에서 숙청되었지만, 양(梁)은 건국자인 무제(武帝)가 장수했기 때문에 후경의 난까지 그런 사태가 발생하지 않았다. 무제는 후계자인 소명태자(昭明太子)와 사건을 일으켜 처분된 경위가 있는 여섯째 아들 소릉왕(邵陵王) 소륜을 제외하고 거의 평등하게 대우했다. 그러나 이러한 대우는 결과적으로 태자 이외의 황자들 사이에 대등 의식을 낳았고, 태자 사후 종실 내 불화의 한 원인이 되었다.[1]
무제의 치세가 장기화되면서 황족과 관료는 사재를 축적하고 부정 행위를 저질렀다. 무제의 동생인 임천왕(臨川王) 소굉은 탐욕스러운 인물로, 무제의 치세에서 3억위안에 달하는 부정 축재를 했다.[2] 또한, 무제의 치세 후반에는 기강이 이완되었고, 유능하고 인망도 있던 소명태자가 531년에 요절하고 동모제인 소강(蕭綱)이 옹립된 것도 황족 간의 불화를 낳았다.[3]
관료도 밤낮으로 술과 여자에 빠져 실무를 돌보지 않게 되었고, 풍속이 문란해지고 사치가 횡행했으며,[4] 민중으로부터는 가혹한 조세가 수탈되었다.[5] 또한, 만년의 무제는 젊은 시절의 총명함을 잃고 스스로는 인정을 행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6] 치안도 문란해져, 중앙에서는 뇌물이 횡행하는 것이 당연해졌고, 억울한 죄로 처벌받는 자도 증가했으며, 황족과 그에 연루된 자들의 교만함도 있어, 백주 대낮에 살인과 강도가 일어나는 것도 드물지 않게 되었고, 그것을 체포해야 할 관리가 금전 수수 여부에 따라 눈감아주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7] 이러한 황족·관료의 부패는 결과적으로, 후경의 난에서 구원에 나타난 제왕들이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심할 때는 스스로 수탈에 나서는 등 통제가 되지 않는 상황에까지 빠지는 결과를 초래한다.[8]
3. 2. 지방 제도
무제는 귀족 자제들이 들어가는 국자학과 오경에 통달한 박사 관리가 학생들을 교육하는 오관이라는 학교를 세웠다.[1] 오관은 단순한 교육 기관이 아니라 시험을 실시하여 관리들을 등용하는 관리 양성소의 성격을 띠었다.[2] 이는 후에 수나라에서 시작되는 과거의 기원이 되었으며, 무제는 신분에 관계없이 재능에 따라 관리를 등용했다.[3]
4. 군사
무제의 50년에 걸친 치세는 양나라에 태평과 번영을 가져왔지만, 그 때문에 군대는 약화되었다. 양나라 건국 초에는 북위의 침공이 잦았고 양나라 군대는 여러 차례 이를 격퇴했다. 양나라의 국정이 안정된 것은 북위가 육진의 난으로 인해 양나라를 침공할 여유가 없어지면서부터였다.[1] 무제는 스스로 무인이었기에, 새로운 한문 무인의 등장을 막기 위해 구품관인법과 장군 제도를 개혁했다. 무인의 외호 장군위를 세분화하여 22반(원래의 6품) 이하에 집중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승진을 어렵게 하는 제도를 도입했다.[2] 무제의 정책으로 인해 건국 초기에 공이 있던 장군은 숙청을 면했지만 정치에서 배제되었고, 대신 종실과 유교적 교양에 기반한 "현재주의"에 의해 등용된 문관이 군 요직에 진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건국 중신이 은퇴한 대통 연간 이후 발생한 북위의 혼란 심화와 분열에 양나라도 휘말렸음에도 이 기본 방침을 바꾸지 않은 것이 치명적인 실책을 초래하게 된다.[3] 후경의 난 자체는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고 병력 면에서는 양나라 군대가 압도적으로 우세했음에도, 수도가 공격받아 결국 함락된 것은 군제의 약점 때문이었다. 군병은 말에 탄 경험조차 없었고, 말이 울고 뛰어오르는 것을 보기만 해도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경악하는 모습이었다고 전해진다.[4]
5. 경제
남조에서는 송·제 시대부터 화폐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기축 통화였던 동전의 구리 부족과 사주(私鋳)에 의한 악질 화폐의 만연으로 정상적인 경제 발전이 저해되었다.[1] 무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양질의 화폐 발행에 힘썼고, 통화 불안을 해소한 결과, 강남에서는 활발한 상품 거래와 장강(양쯔강)의 편리성을 이용한 유통 경제가 발전하게 되었다.[1]
그러나 무제는 523년부터 동전을 대신하는 새로운 기축 통화로 철전을 주조하라는 정책을 폈다.[1] 이로 인해 화폐 부족 자체는 해결되었지만, 위조 지폐가 대량으로 유통되는 결과를 초래하여 화폐의 신용이 사라지고 530년대에 화폐의 가치가 급속도로 하락하면서 양나라의 쇠퇴로 이어졌다.[2]
6. 문화
무제는 귀족 자제들이 들어가는 국자학과 오관이라는 학교를 세웠다. 오관은 오경에 통달한 박사 관리가 학생들을 교육하는 학교였지만, 시험을 통해 관리를 등용하는 양성소의 성격을 띠었다. 이는 수나라의 과거 제도의 기원이 되었으며, 무제는 신분에 관계없이 재능에 따라 관리를 등용했다. 무제의 학술 장려는 양나라 학문 발전의 계기가 되었고, 소명태자를 비롯한 많은 문화인·지식인을 배출했으며, 《문선》 등 여러 작품이 일본의 아스카 시대·나라 시대 및 헤이안 시대 문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무제는 불교에 심취하여 양나라 멸망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무제는 재위 중 4번이나 사신을 행했으며, 중국 황제는 유교에 기반하여 국가 의례를 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무제는 불교에 기반하여 대사와 개원을 동반하는 등 상식을 벗어나는 열성을 보였다. 불교가 무제와 양나라 백성들에게 수용된 것은 후한 멸망 후 위진남북조 시대의 혼란기에 유교 가치관이 쇠퇴하고 사람들이 불교에서 구원을 찾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불교 신앙은 양나라 불교 융성을 가져왔지만, 황제와 황족의 방종, 측근의 권력 남용, 귀족층의 실무 기피, 사원 건립에 따른 재정 악화로 백성들의 궁핍과 사회 불안을 야기하여 국력 쇠퇴를 초래했다.
난징 인근에는 소(蕭)씨 일족의 무덤들이 다양한 보존 상태로 남아있다. 가장 잘 보존된 양나라 시대의 기념 조각상은 소수의 무덤의 조각상이다.
6. 1. 문학
양(梁)은 현존하는 문헌 자료 측면에서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를 가장 잘 대표한다. 이 시대는 눈부신 문학적 성과를 거두었으며, 유송(劉宋) 왕조와 남제(南齊) 왕조의 공식 역사, 문학 선집인 《문선》, 시 선집인 《옥대신영》, 문학 비평 작품인 《문심조룡》과 《시품》, 그리고 황간(皇侃)의 《논어》 주석 등 중요한 텍스트를 낳았다.무제는 귀족 자제들이 들어가는 국자학과 오관이라는 학교를 세웠다. 오관은 유교 경전 오경에 통달한 박사 관리가 학생들을 교육하는 학교였지만, 단순한 교육 기관이 아니라 시험을 실시하여 관리들을 등용하는 관리 양성소의 성격을 띠었다. 이는 후에 수나라에서 시작되는 과거의 기원이 되었으며, 무제는 신분에 관계없이 재능에 따라 관리를 등용했다(무제 자신은 한미한 가문 등 낮은 신분의 인재를 특히 원했다고 한다). 이 무제의 학술 장려는 양나라의 학문이 크게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고, 소명태자를 비롯한 많은 문화인·지식인을 배출했으며, 《문선》 등 많은 작품이 나타나 일본에서도 아스카 시대·나라 시대 및 헤이안 시대의 일본 문학에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6. 2. 불교
무제는 특이할 정도로 불교에 심취하여, 후세에는 이 때문에 양나라가 멸망했다는 비난을 받는 원인이 되었다.[1] 무제는 재위 중에 4번이나 사신을 행하는 이례적인 모습을 보였다. 중국 황제는 국가 의례를 유교에 기반하여 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무제는 불교에 기반하여 의례를 행했으며, 대사와 개원을 동반하는 등 상식을 벗어나는 열성을 보였다.[1] 다만, 불교가 무제나 양나라 백성들에게 이 정도로 수용된 것은 후한이라는 장기 집권 왕조가 붕괴한 후 위진남북조 시대라는 혼란기에 유교의 가치관이 쇠퇴하면서, 사람들이 자기 구원을 불교에서 찾았기 때문이라는 측면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2] 그렇다고는 해도, 이러한 극단적인 불교 신앙은 양나라의 불교 융성을 가져왔지만, 황제나 황족의 방종, 측근의 권력 남용, 귀족층의 실무 기피, 사원 건립에 따른 재정 악화로 인한 백성들의 궁핍과 사회 불안 증대 등 국력 쇠퇴를 초래했다.[3][4]6. 3. 예술
난징 인근에는 조각상들과 함께 통치 가문인 소(蕭)씨 일족의 여러 무덤들이 다양한 보존 상태로 위치해 있다.[10] 가장 잘 보존된 양(梁)나라 시대의 기념 조각상은 아마도 소수의 무덤 (475–518)의 조각상일 것이다. 이 무덤은 난징 동쪽에 있는 치샤 구에 위치해 있으며, 무제의 형제였다.[11][12]7. 외교
6세기에 제작된 양 원제 소역의 《직공도》는 현존하는 이와 같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 그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그림들은 특히 516년부터 520년 사이에 세 명의 월지(화) 사절과 관련하여 이루어진 외교 사절단을 반영한다.[5][6] 이 작품의 원본은 소실되었으며, 현존하는 유일한 판본은 11세기의 송나라 시대의 사본으로, 현재 중국 국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원본은 각 국가의 사절들의 초상화를 최소 25점 이상 포함하고 있었다. 송나라 시대의 사본에는 12점의 초상화와 13명의 사절에 대한 설명이 있으며, 당창에서 온 사절의 초상화는 빠져 있다.[8]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사절은 다음과 같다. 월지(화), 페르시아, 백제, 구자, 일본, 랑카수카, 강, 야르칸드, 쿠바디안, 쿠메드, 발흐, 말갈.[5][7][8]
8. 역대 황제
보통(普通) 520년 ~ 527년
대통(大通) 527년 ~ 529년
중대통(中大通) 529년 ~ 534년
대동(大同) 535년 ~ 546년
중대동(中大同) 546년 ~ 547년
태청(太淸) 547년 ~ 549년
태평(太平) 556년 ~ 55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