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대음
1. 개요
손대음은 645년 고구려가 당나라의 침략을 받았을 때 백암성의 성주였다. 그는 당나라에 투항하려 했으나, 당나라 측 기록에는 투항을 철회하여 당 태종이 분노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후 고구려군의 지원을 받아 당나라 군대에 맞서 싸웠지만, 결국 비밀리에 항복을 청했고, 당 태종의 계략에 의해 백암성은 함락되었다. 손대음은 당나라에 투항하여 암주 자사가 되었으나, 이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낙랑군의 중국계 호족의 유민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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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관료 -
진 (고구려)
진은 408년 사망한 고구려 인물로, 덕흥리 고분 묘지명을 통해 건위장군, 요동태수, 유주자사 등 다양한 관직을 역임한 사실이 알려졌으며, 출신에 대해서는 고구려인과 중국인이라는 주장이 대립한다. -
고구려의 관료 -
모두루
모두루는 고구려 광개토왕 시기에 북부여 수사로 파견되었으며, 1935년 발견된 묘지를 통해 고구려 왕실에 대한 충성심과 가문의 내력을 확인할 수 있다. -
당나라의 관료 -
고연수
고연수는 고구려 말기의 북부 욕살로, 안시성 공격 당시 안시성 구원에 나섰으나 당나라 군대에 패배하여 항복 후 사망했다. -
당나라의 관료 -
안사고
안사고는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에 활동한 당나라의 학자이자 관료로, 훈고학에 정통하여 《한서》 주석을 남겼으며, 《오경정의》 편찬에 참여하고 고구려 원정 중 사망했다. -
생몰년 미상 -
유급
유급은 전한 말기에 신양후에 봉해졌으나, 전한 멸망으로 작위를 잃은 유영의 아들이다. -
생몰년 미상 -
야스케
야스케는 16세기 일본에 기록된 최초의 아프리카인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며, 혼노지의 변에서 함께 싸웠으나 이후 행적은 불확실하고,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소재로 활용된다.
2. 생애
645년(보장왕4년) 당은 고구려를 침략하여 개모성, 요동성을 차례로 함락하고 백암성을 공격했다. 백암성 성주 손대음은 당에 사신을 보내 투항을 청했다. 하지만 당나라 사서에는 백암성이 투항을 철회하여 당 태종이 진노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는 오골성(烏骨城)의 군사 1만 명을 보내 백암성을 지원했고, 이들은 백암성을 공격하려던 계필하력의 선발 기병부대를 요격하여 고돌발이 계필하력에게 큰 부상을 입혔다. 고구려 지원군은 백암성에 입성하여 합류하였다.
645년 5월 28일, 당 태종 이세민의 친정 대군이 백암성에 도착했다. 이세적은 백암성 서남쪽을, 당태종은 서북쪽을 공격했다. 당군이 총공세를 펼쳤고, 우위대장군 이사마는 성 앞까지 진격했으나 고구려군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백암성은 험준한 산성이라 신형 포차를 동원한 당군의 공격에도 함락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백암성 성주 손대음(孫代音)이 비밀리에 심복을 보내 다시 항복을 청하며 "저는 항복하기를 원하지만 성 안에 따르지 않는 자가 있다"라고 하였다. 이세민은 당나라 깃발을 주며 항복의 신호로 성 위에 세우라고 지시했고, 손대음이 깃발을 세우자 성 안 사람들은 당나라 군사가 이미 성에 들어온 것으로 오인하여 모두 손대음을 따라 항복했다. 6월 1일, 백암성은 결국 함락되었다.
이세적은 성 안의 남녀 1만여 명의 항복을 받고, 80세 노인에게는 비단을 주었다. 다른 성에서 백암성으로 온 군사들에게는 양식과 군기를 주어 원하는 곳으로 가게 했다. 또한, 요동성에서 피살된 장사의 처자들을 데리고 백암성으로 도망쳐온 성사에게 비단 다섯 필을 주고 장사의 상여를 만들어 평양으로 보냈다. 당은 백암성을 암주(巖州)로 개칭하고 손대음을 자사로 삼았다. 이로써 고구려의 요동 방어선 중심부였던 요동성, 백암성이 당군에 넘어가 고구려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당나라는 백암성을 암주(巖州)로 개칭하고 손대음을 자사로 삼았으나, 이후 그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당군 철수 후 고구려가 백암성을 회복한 것으로 보아, 손대음은 당 태종을 따라 당나라로 귀순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2.1. 고구려 백암성 성주
645년(보장왕4년) 당은 고구려를 침략하여 개모성, 요동성을 함락하고 백암성을 공격했다. 백암성 성주 손대음은 당에 투항을 청했으나, 당나라 기록에는 투항을 철회하여 당태종이 진노했다고 한다. 오골성(烏骨城)의 고구려군 1만 명이 백암성을 구원하기 위해 출동했고, 백암성에 도착한 고구려 지원군은 당의 선발 기병부대를 요격하여 계필하력이 고구려 장수 고돌발에게 부상을 입었다.
645년 5월 28일, 당태종 이세민의 대군이 백암성에 도착했다. 이세적은 백암성 서남쪽, 당태종은 서북쪽에서 공격했다. 당군이 총공세를 펼쳤으나 백암성은 험준한 산성이라 함락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손대음은 비밀리에 심복을 보내 다시 항복을 청하며, "저는 항복하기를 원하지만 성 안에 따르지 않는 자가 있다"라고 하였다. 이세민은 당나라 깃발을 주며 항복의 신호로 성 위에 세우라고 했고, 손대음이 깃발을 세우자 성 안 사람들은 당군이 성에 오른 줄 알고 항복했다. 6월 1일, 백암성은 함락되었다.
이세적은 항복한 백암성 주민들에게 식량을 주고 80세 노인에게는 비단을 주었다. 백암성은 암주(巖州)로 개칭되었고, 손대음은 암주 자사가 되었다. 요동성, 백암성이 함락되면서 고구려는 위기를 맞았다.
2.2. 백암성 전투와 항복
645년(보장왕 4년) 당은 고구려를 침략하여 개모성, 요동성을 차례로 함락하고 백암성을 공격했다. 백암성 성주 손대음은 당에 사신을 보내 투항을 청했다. 하지만 당나라 사서에는 백암성이 투항을 철회하여 당태종이 진노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는 오골성(烏骨城)의 군사 1만 명을 보내 백암성을 지원했고, 이들은 백암성을 공격하려던 계필하력의 선발 기병부대를 요격하여 고돌발이 계필하력에게 큰 부상을 입혔다. 고구려 지원군은 백암성에 입성하여 합류하였다.
645년 5월 28일, 당태종 이세민의 친정 대군이 백암성에 도착했다. 이세적은 백암성 서남쪽을, 당태종은 서북쪽을 공격했다. 당군이 총공세를 펼쳤고, 우위대장군 이사마는 성 앞까지 진격했으나 고구려군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백암성은 험준한 산성이라 신형 포차를 동원한 당군의 공격에도 함락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백암성 성주 손대음(孫代音)이 비밀리에 심복을 보내 다시 항복을 청하며 "저는 항복하기를 원하지만 성 안에 따르지 않는 자가 있다"라고 하였다. 이세민은 당나라 깃발을 주며 항복의 신호로 성 위에 세우라고 지시했고, 손대음이 깃발을 세우자 성 안 사람들은 당나라 군사가 이미 성에 들어온 것으로 오인하여 모두 손대음을 따라 항복했다. 6월 1일, 백암성은 결국 함락되었다.
이세적은 성 안의 남녀 1만여 명의 항복을 받고, 80세 노인에게는 비단을 주었다. 다른 성에서 백암성으로 온 군사들에게는 양식과 군기를 주어 원하는 곳으로 가게 했다. 또한, 요동성에서 피살된 장사의 처자들을 데리고 백암성으로 도망쳐온 성사에게 비단 다섯 필을 주고 장사의 상여를 만들어 평양으로 보냈다. 당은 백암성을 암주(巖州)로 개칭하고 손대음을 자사로 삼았다. 이로써 고구려의 요동 방어선 중심부였던 요동성, 백암성이 당군에 넘어가 고구려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당나라는 백암성을 암주(巖州)로 개칭하고 손대음을 자사로 삼았으나, 이후 그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당군 철수 후 고구려가 백암성을 회복한 것으로 보아, 손대음은 당태종을 따라 당나라로 귀순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2.3. 당나라 투항 이후
645년 당은 고구려를 침략하여 개모성, 요동성을 차례로 함락하고 백암성을 공격했다. 백암성 성주 손대음은 당나라 군대에 사신을 보내 투항하기를 청하였으나, 백암성은 항복을 철회하여 당태종이 진노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는 오골성의 군사 1만 명을 보내 백암성을 지원했고, 이들은 당의 기병부대를 물리치고 백암성에 합류했다.
645년 5월 28일, 당태종 이세민의 대군이 백암성에 도착했고, 이세적은 백암성 서남쪽, 당태종은 서북쪽에서 공격했다. 백암성은 험준한 산성이라 당군의 공격에도 함락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손대음은 비밀리에 심복을 보내 다시 항복 의사를 전하며 "저는 항복하기를 원하지만 성 안에 따르지 않는 자가 있다"라고 하였다. 이세민은 당나라 깃발을 주며 항복의 신호로 성 위에 세우라고 했고, 손대음이 깃발을 세우자 성 안 사람들은 당나라 군사가 이미 성에 들어온 것으로 오인하여 모두 항복했다. 645년 6월 1일, 백암성은 결국 함락되었다.
이세적은 백암성 주민들의 항복을 받고 식량을 제공했으며, 80세 노인에게는 비단을 주었다. 다른 성에서 온 군사들에게는 양식과 군기를 주어 원하는 곳으로 가게 했다. 또한, 이세민은 요동성에서 부하에게 살해된 장사의 의리를 가상히 여겨 비단 다섯 필을 주고 장사의 상여를 만들어 평양으로 보냈다.
당나라는 백암성을 암주(巖州)로 개칭하고 손대음을 자사로 삼았다. 이후 손대음의 행적은 알 수 없으나, 당나라 군대가 철수하고 고구려가 백암성을 회복한 것으로 보아 당태종을 따라 당나라로 귀순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3. 출신 배경
손대음은 한성(성씨)·한자 이름의 중국인 이름이므로 313년 고구려의 공격으로 붕괴된 낙랑군의 중국계 호족·낙랑 손씨의 유민으로 여겨진다. 고구려인의 인명은 기본적으로 고구려 멸망까지 중국화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