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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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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사고는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에 걸쳐 활동한 당나라의 학자이자 관료이다. 랑야 안씨 가문 출신으로, 훈고학에 정통했다. 수 문제 때 관직을 시작하여 당나라에서도 중서 사인, 중서시랑 등을 역임했으며, 오경의 고정을 실시하고 《오경정의》 편찬에 참여했다. 가장 중요한 업적은 《한서》 주석으로, 후대 한서학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645년 고구려 원정 중 사망했다. 안진경, 안고경 등이 그의 후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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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사고
기본 정보
이름안사고
본관죽산 안씨
경현(敬玄)
출생581년
사망645년
국적당나라
경력
주요 관직비서성 정자(秘書省正字)
비서랑(秘書郎)
국자박사(國子博士)
검교홍문관직학사(檢校弘文館直學士)
학문고훈학
가족 관계
아버지안선제(顔宣智)
아들안유례(顔游禮)

2. 생애

안사고는 당나라 초기의 저명한 학자이자 관리였다. 그의 가계와 생애는 여러 시대를 거치며 복잡하게 얽혀 있다.


  • 관직 생활: 안사고는 수나라 문제 때부터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당나라 태종 때까지 여러 요직을 거쳤다. 그는 학문적 능력뿐만 아니라 행정 능력도 인정받아 황실의 중요한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 학문적 업적: 안사고는 오경한서 등 주요 경전에 대한 주석 작업을 통해 학문적으로 큰 업적을 남겼다. 그의 주석은 당대 학자들에게 널리 인정받았으며, 후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 말년: 안사고는 비서감 및 홍문관 학사 직을 유지하며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쓰다가 645년 고구려 원정 도중에 사망했다.


(하위 섹션에서 이미 다루어진 내용(가계와 출생, 초기 생애와 학문, 당나라 시기 활동, 사망)은 간략하게 요약하거나 생략되었다.)

2. 1. 가계와 출생

안사고는 랑야군 린이 출신의 랑야 안씨 가문이다. 그의 할아버지 안지추북제북주에서, 아버지는 수나라당나라에서 관리로 일했다.[1] 안사고는 안씨가훈을 저술한 안지추의 적손이다. 안사고의 9대조인 안함동진의 수도 건강으로 이주했고, 안지추는 서위 군에 끌려가 장안으로 납치되었다가 탈출하여 북제의 수도 으로 갔다. 이후 북제가 북주에 정복되면서 다시 장안으로 옮겨갔고, 북주가 멸망하고 수나라가 건국된 개황 원년(581년)에 안사고가 태어났다.

2. 2. 초기 생애와 학문

안사고는 완녠(萬年, 현대의 시안, 산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원래 랑야 (현대 린이, 산둥) 출신이었다. 안사고의 할아버지인 옌즈퉤이는 북제의 관리였다. 북제가 멸망한 후, 옌즈퉤이는 북주의 관리가 되어 가족을 관중으로 옮겼다. 그의 아들인 얀실루, 즉 안사고의 아버지는 또한 관리였으며, 미래의 당 태종인 이세민의 저택에서 일했다.

안사고는 어릴 때부터 박학다식했고, 어학에 정통했다. 이강의 추천을 받아 수 문제 재위 기간 동안 안양현(현재 샹양, 후베이)에서 관직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의 오랜 친구 중 한 명인 쉐다오헝(薛道衡)은 안사고의 재능에 감탄하여 그의 새로운 작품에 대한 의견을 자주 구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안사고는 나중에 해임되었고, 장안에 거주하게 되었다. 그 후 10년 동안 그는 가난하게 살면서 생계를 위해 가르쳤다.

안사고는 『안씨가훈』의 저자인 안지추의 적손이다. 안씨는 낭야군 임기현을 본관으로 하지만, 안지추의 9대조인 안함 때 강남으로 건너가 동진의 수도 건강에서 살았다. 안지추 때 서위 군에 끌려가 장안으로 납치되었지만, 탈출하여 북제의 수도 으로 옮겨갔다. 그 후, 북제가 북주에 정복되자 다시 장안으로 옮겨갔고, 북주가 멸망하고 가 건국된 개황 원년 (581년)에 안사고는 태어났다. 문제의 인수 연간 (601년 - 604년)에 안양현의 현위가 된 이후, 끊임없이 관료로 재직했다.

2. 3. 당나라 시기 활동

당나라 건국 후 무덕 원년, 안사고는 중서성 사인을 역임했으며, 그가 지은 조칙문은 당대 최고로 칭송받았다. 태종 때 중서시랑에 취임했고, 낭야현남에 봉해졌다. 정관 4년, 태종의 명으로 오경의 정본을 확정하고, 3년 후 정본을 상정했다. 정관 7년, 이 정본은 천하에 반포되었다. 이후 국가 서적 관리를 담당하는 비서성의 차관인 비서소감에 취임하여 여러 판본을 교정했다.

정관 11년, 위징, 방현령 등과 함께 '''오례'''를 편찬하여 『'''대당의례'''』 100권을 완성했다. 정관 12년, 태종은 공영달 등에게 오경 해석을 통일하고 주석을 작성하도록 명했고, 정관 16년에 『'''오경정의'''』 180권이 완성되었다.

이승건의 명으로 『한서』 100권의 주석을 작성, 정관 15년에 완성했다. 안사고는 비서감·홍문관 학사 직을 유지하며 세상을 떠났다.

2. 4. 사망

顏師古중국어는 645년 고구려 원정 도중에 사망했다.

3. 학문적 업적

안사고는 안씨 가문의 학문적 전통을 이어받아 많은 고전에 통달하고 훈고학에 정통했다. 안사고의 단독 저서로는 『광류정속』과 『급취편』 주가 있지만, 가장 유명한 것은 『한서』 주이다.[1]

3. 1. 훈고학

안씨 가문은 대대로 훈고학을 특징으로 삼았으며, 특히 『주례』와 『좌전』을 가학으로 삼았다. 안사고는 안지추와 안사로, 그리고 두 숙부(안민초·안유진)로부터 "서생 문호"로서의 안씨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아, 많은 고전적에 통달하고 훈고에 정통했다.[1]

안사고의 단독 저서로는 『광류정속』과 『급취편』 주가 있지만, 가장 유명한 것은 『한서』 주이다.[1]

3. 2. 《한서》 주석

안사고의 가장 큰 업적은 《한서》 주석이다. 후한 시대부터 내려온 여러 주석들을 집대성하고 자신의 견해를 더하여 《한서》 해석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다. 특히, 사물에 대한 주석보다는 말(단어와 구절)에 대한 주석을 중시하여 훈고학적 방법을 적용했다.[1] 안사고의 《한서》 주석은 후대 한서학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에도 《한서》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자료로 평가받는다.

안사고 시대에는 후한의 복건, 응소, 이를 계승한 서진의 진작, 신찬, 더 나아가 신찬 주석을 계승한 동진채모와 같은 옛 주석가들의 주석과, 이후 남조에서 성행했던 새로운 주석의 두 계통이 있었다. 안사고는 이 중 옛 주석가들의 주석에 공감하며, 북조에 전해진 진작의 텍스트를 존중했다.

안사고는 안씨 가학에 의한 연구 축적을 이용하여 《한서》 주석을 만들었다. 안지추가 저술한 《안씨가훈》의 면학편, 서증편에는 《한서》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이는 안사고의 주석에 반영되어 있다. 안유진은 《한서결의》 12권을 저술했지만, 《구당서》 안사고전에는 안사고의 《한서》 주석이 많은 부분 《한서결의》에 의거하고 있다고 명기되어 있다.

안사고의 《한서》 주석의 특징은 사물에 대한 주석을 배제하고, 말에 대한 주석을 원칙으로 삼았다는 점에 있다. 말에 대한 주석은 훈고의 방법을 사용하여 이루어졌으며, 《한서》 본문의 말을 숙지하고, 본문에 입각한 분석을 보였다. 이는 가학에서 계승되어 온 경서 주석의 방법을 역사서의 해석으로 옮겨온 것이다.

4. 저서

안사고는 여러 중국 고전에 주석을 달았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한서》 주 등이 있다.[1]

5. 후손

안건원의 손자이자 안협(顔協)의 아들인 안지퇴의 후손 중에는 당나라 때 활동한 인물들이 있다. 감로자서의 저자 안원손(顏元孫), 저명한 서예가 안진경, 안진경의 사촌이자 당나라 관료였던 안고경(颜杲卿) 등이 안사고의 후손이다.[1]

6.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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