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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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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고구려)은 408년에 사망한 고구려인으로, 1976년 평안남도 남포시에서 발견된 덕흥리 고분 묘지명에 의해 알려졌다. 묘지명에는 진의 성이 복성이고 이름이 진(鎭)이며, 건위장군, 요동태수, 유주자사 등 다양한 관직을 역임했음이 기록되어 있다. 묘지명에는 진이 석가모니불의 제자였다는 기록도 있다. 진의 출신지에 대해서는 평안북도 길주로 비정하는 설과, 중국 허베이성 안평군으로 보는 설이 대립하며, 현재까지 논쟁이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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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고구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진
국가고구려
직책유주자사
군주고구려 광개토대왕
출생일332년
출생지○○군 신도현 도향 ○감리
사망일408년
국적고구려(?)
경력건위장군 국소대형 좌장군 용양장군 요동태수 사지절 동이교위 유주자사
성별남성

2. 묘지명

1976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남도 남포특별시에서 발견된 덕흥리 고분 앞방 북벽 천장부에는 묘지명(14행 154자)이 있다. 이 묘지명에는 이 고분이 408년에 사망한 "건위장군, 국소대형, 좌장군, 용양장군, 요동태수, 사지절, 동이교위, 유주자사"라는 관직을 가진 고구려인 진(鎭)의 묘임이 밝혀져 있다.[3] 묘지명에 따르면 진은 "석가문불제자(釈迦文仏弟子) □□씨 진"으로 기록되어 있어, 열성적이고 경건한 불교 신자였다.[3] 釈迦文仏|석가문불중국어은 석가모니불의 다른 번역이며, 다무라 엔초는 『미륵하생경』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3]

2. 1. 성명과 출신

1976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남도 남포특별시에서 발견된 덕흥리 고분 묘지명에 따르면, 묘주의 성은 불명이나 복성이며 이름은 진(鎭)이다. 복성인 점으로 보아 한족이 아님을 알 수 있다.[5] 묘지명에는 "건위장군(建位將軍), 국소대형(國小大兄), 좌장군(左將軍), 용양장군(龍讓將軍), 요동태수(遼東太守), 사지절(使持節), 동이교위(東夷校尉), 유주자사(幽州刺史)"를 역임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408년 12월 25일에 덕흥리 고분에 매장되었다.[5]

연구자에 따라 표기상의 차이가 있는데, 몬다 세이이치는 "진(鎭)"으로[6], 이성시는 "모진(某鎭)"으로 표기하고 있다.[2]

덕흥리 고분 앞방 북벽 천장부 묘지명(14행 154자)에는 이 고분이 408년에 사망한 "건위장군(建位將軍), 국소대형(國小大兄), 좌장군(左將軍), 용양장군(龍讓將軍), 요동태수(遼東太守), 사지절(使持節), 동이교위(東夷校尉), 유주자사(幽州刺史)"라는 관직과 복성을 가진 고구려인 진(鎭)의 묘임이 밝혀졌다.[3]고구려인이 "석가문불제자(釈迦文仏弟子) □□씨 진"으로 기록되어 있어, 열성적이고 경건한 불교 신자였다는 점이 주목할만하다.[3] "釈迦文仏|석가문불중국어"은 석가모니불의 다른 번역이며, 다무라 엔초는 『미륵하생경』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한다.[3] 묘제는 한족식이 아닌 고구려식이며, 고구려인의 매장품이 발견되었다.

2. 1. 1. 출신지 비정 논란

1976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남도 남포특별시에서 발견된 덕흥리 고분의 묘지명에 따르면, 묘주의 이름은 진(鎭)이며 복성으로 한족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묘지명에는 "□□군 신도현 도향 □감리" 출신이며, "건위장군(建位將軍), 국소대형(國小大兄), 좌장군(左將軍), 용양장군(龍讓將軍), 요동태수(遼東太守), 사지절(使持節), 동이교위(東夷校尉), 유주자사(幽州刺史)"를 역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5]

□□군 신도현 도향 중감리의 위치는 고려사 지리지 3의 가주(嘉州) 본 고려신도군(本高麗信都郡) 기사에 근거하여 평안북도 길주로 비정하기도 한다.[5]

2. 2. 역임 관직

408년 사망 당시 진(鎭)이 역임한 관직은 다음과 같다.[3]

관직명
건위장군(建位將軍)
국소대형(國小大兄)
좌장군(左將軍)
용양장군(龍讓將軍)
요동태수(遼東太守)
사지절(使持節)
동이교위(東夷校尉)
유주자사(幽州刺史)



진은 "석가문불제자(釈迦文仏弟子)"로 기록되어 있어, 열성적인 불교 신자였다.[3]

3. 출신 논쟁

진(고구려)의 성씨와 출신 군현명이 불분명하여 진의 출신에 대해 오랫동안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진의 출신이 논쟁이 되는 이유는 진이 "유주 자사" 등의 관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진이 고구려인이라면 고구려가 4세기 말부터 5세기 초에 걸쳐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중국유주를 점령했다고 해석할 수 있으며, 또한 고구려가 4세기 말부터 5세기 초에 걸쳐 전국적으로 군현제를 시행했다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4] 이 때문에 "고구려 국가의 위대성"과 고구려에 대한 중국의 영향을 과소평가하는 북한은 진은 고구려인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북한 학계에서는 진을 고구려인으로 보고 있으나, 한국 학계에서는 이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5]

몬다 세이이치는 "원래 고구려 사회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되는 각배라는 외래 기물이 처음으로 그려진 덕흥리 고분에 의해, 덕흥리 고분의 묘주인 '진' 등에 의해 외래 기물과 문화가 전래되었다"고 언급했다.[6]

3. 1. 북한 학계의 주장 (고구려인설)

진(고구려)의 성씨와 출신 군현명이 불분명하여 진의 출신에 대해 오랫동안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진의 출신이 논쟁이 되는 이유는 진이 "유주 자사" 등의 관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진이 고구려인이라면 고구려가 4세기 말부터 5세기 초에 걸쳐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중국유주를 점령했다고 해석할 수 있으며, 또한 고구려가 4세기 말부터 5세기 초에 걸쳐 전국적으로 군현제를 시행했다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4] 이 때문에 "고구려 국가의 위대성", 그리고 고구려에 대한 중국의 영향을 과소평가하는 북한은 진은 고구려인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북한의 연구자인 주영헌, 박진욱 등은 진이 고구려인이라고 주장하며,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5]

# 진의 출신지인 신도현평안북도박천군운전군에 비정된다.

# 고구려에 의한 중국 점령 시 군현제로 편성된 중국의 행정 체계를 이식했고, 고구려도 4세기 말부터 5세기 초에 걸쳐 전국적으로 군현제가 시행되었다.

# 덕흥리 고분의 구조·벽화는 한족이나 선비족의 묘제와는 다른 전형적인 고구려 고분이다.

# 진이 통치한 유주 13군 75현은 중국의 유주와는 구성이 다르지만, 이는 전연 멸망 후 중국 동북부 혼란 시 고구려가 중국의 유주를 점령하고 370년부터 376년에 걸쳐 고구려의 유주로서 일시적으로 통치한 결과이다.

# 진이 역임한 관직은 모두 고구려의 관직이다.

3. 2. 대한민국 학계의 반론 (중국인설)

다케다 사치오, 김원룡(서울대학교), 공석구(한밭대학교), 임기환(서울대학교), 류영지(길림성 사회과학원)는 진이 고구려인이라는 주장에 대해 비판하며, 진은 중국인이라고 반론한다.[5]

  • 진의 출신지인 신도현은 중국허베이 安平郡 (东汉)|안평군 (동한)중국어의 속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복성이기 때문에 한족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4. 덕흥리 고분

덕흥리 고분고구려의 불교 신앙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이 고분은 408년에 사망한 고구려인 진(鎭)의 무덤으로, 묘지명에 "석가문불제자(釈迦文仏弟子) □□씨 진"이라는 기록이 있어 진이 열성적인 불교 신자였음을 알 수 있다.[3]

4. 1. 불교 신앙

408년에 사망한 고구려인 진(鎭)의 무덤인 덕흥리 고분 묘지명에는 "석가문불제자(釈迦文仏弟子) □□씨 진"이라는 기록이 있다[3]。 이를 통해 진이 열성적인 불교 신자였음을 알 수 있다[3]。 「석가문불(釈迦文仏)」은 석가모니불의 다른 번역이며, 다무라 엔초는 『미륵하생경』에 의한 것일 가능성을 제기하였다[3]

참조

[1] 서적 百済内朝制度試論 학습원대학사학회 2003-03-20
[2] 서적 古代東アジアの民族と国家 岩波書店 1998-03-25
[3] 뉴스 東アジアにおける仏教の伝来と受容 関西大学東西学術研究所 1989-03
[4] 서적 고구려 金石文의 개황과 硏究史的 검토 http://db.history.go[...] 국사편찬위원회 2022-04-23
[5] 뉴스 진(鎭) http://encykorea.aks[...]
[6] 뉴스 中国壁画墓との図像学的比較による高句麗古墳壁画の研究 https://kaken.nii.ac[...] KAKEN 2004-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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